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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령의 주인 1권 (12화)
4. 죽음과 바름 (2)


국가에서 채용되어 활동하는 국가 공인 엘리트들인 국정원 현직 직원들조차 2클래스가 평균이었다.
게다가 4클래스, 내지는 5클래스만 되면 세계가 인정하는 대석학이라 불렸다.
5클래스는 칼롯 코즈너의 세상에서도 재능 있는 자들 중 특별한 이들에게만 열리는 길인 만큼, 마법적 지식이 충분치 못하여 3클래스 이상의 지식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이 세상에서 그 길을 개척해낸 그들은 충분히 그런 칭호를 받을 만했다.
그런 상황에서 현우가 가진 지금의 2클래스에 근접한 힘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물론 말했다시피 현우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
‘어쨌든 마나 지배력이 2클래스 정도란 것뿐… 마법 지식이나 기존 마법 운용 실력이 있으니 3클래스 중급 마법 한 번 정도는 가능하겠군.’
언령사의 마법 사용 방식과 일반 마법사의 마법 사용 방식에는 꽤나 차이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반 마법사가 본인 클래스를 넘어서는 마법을 사용 못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마나가 쌓이는 심장에 무리를 주기 때문에 대게 그런 무리한 운용은 하지 않는 게 상식이었다.
그에 비해 언령사는 몸에 마나를 쌓아두는 방식이 아니라 외부의 마나를 일정 영역 지배하에 둬서 그 자리에서 즉시 마법으로 만드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본인 실력만 충분하다면 상대적으로 부담 없이 더 높은 수준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만약의 경우, 편법도 있긴 하지만…….’
현우가 떠올린 편법은 굳이 본인이 다룰 수 있는 마나 총량과 관계없이 몇 단계 높은 수준의 마법을 다룰 수 있게 하는 마법이었다.
물론 말 그대로 편법이니 만큼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어 뛰어난 마법 실력을 가진 현우조차도 손대기 꺼려지는 힘이기도 했다.
“……뭐, 지금은 그런 걸 고민할 필욘 없겠지.”
현우의 말 그대로였다.
상대적으로 타 클래스에 비해 높은 효율을 내는 3클래스의 마법들이었다.
그만큼 효용성도 높고 써먹을 곳도 많았다.
확신할 순 없지만 단 한 번으로 어쩌면 현우의 꿈(?)을 도울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미 신체는 극단적으로 쇠약해진 상태…. 마법이 아니라 당장에 자전거에 치여 죽는 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뒤처리가 문제로군.’
땅을 파고 들어가 마법으로 머리 위에 흙을 덮어 버릴까?
몸에 신분을 알 수 있을 만한 걸 모두 은폐하고 눈 딱 감고 파이어볼을 수직으로 떨어뜨려 볼까?
그도 아니면 은폐 상태로 유지되는 마법진을 그려놓고 그 자리에서 죽어야 할까?
마법이란 선택지가 생기니 꽤 여러 가지 방법이 떠올랐지만 전부 마음에 걸리는 것들이었다.
사실 저만하면 흔적을 안 남기고 죽는 방법으로는 부족함이 없었지만 계속 현우를 망설이게 하는 것은 바로 3클래스의 마법이 가진 한계점 때문이었다.
여전히 이 세상의 마법 수준을 알 리가 없는 현우는 3클래스 마법이 갖는 마법 자체의 고유한 마나의 흔적이라면 4클래스… 아니, 동일한 3클래스 수준의 마법사라도 단숨에 알아볼 수 있다는 점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었다.
“음… 곤란하군.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 첫 번째나 세 번째 방법을 택하고 싶지만… 이런 몸이라 가다가 객사할 것 같은데…….”
사실 단순히 객사가 문제라기보다도 요즘 같은 시대에 길을 찾기 어려운 깊은 산중을 찾는다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그렇게 현우가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방법에 대해 구상하고 있을 때였다.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저층의 주택가가 죽 늘어선 주거지에 들어선 현우의 눈앞에 이곳 주택단지에 어울리는 작은 슈퍼 앞에서 무언가 용을 쓰고 있는 건장한 남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일하는 건가?”
하지만 지금 시간은 어림잡아 늦은 저녁을 지나 새벽을 향해 가는 시간. 그들이 슈퍼의 주인이라고 해도 일을 하는 중이라고 보기엔 어려웠다.
게다가 그들이 만지고 있는 건 슈퍼의 문이 아니라 그 앞의 자판기였고, 자판기의 열쇠 구멍 부분을 열쇠와는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물건으로 바쁘게 들쑤시고 있다면 더더욱 그랬다.
‘도둑…인가?’
최근은 아니지만 예전부터 자판기 도둑에 대한 이야기는 꽤 들어본 바 있었다.
길거리에 나와 있는 자판기는 상대적으로 보안이 허술한 만큼 늦은 새벽 도둑들의 먹잇감이 되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경우에 따라선 간단한 위장만으로도 직원으로 보이기도 하니, 상대적으로 위험도도 덜해 도둑질에 안성맞춤인 소재였다.
그렇게 먹잇감이 되기 쉬운 자판기들은 외부 충격에 강한 소재를 사용한다고 했지만 작정하고 털어가는 데야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속수무책인 자판기 도둑을 현우는 지금 직접 목격하는 중이었다.
‘어떻게 할까?’
처음부터 모르고 그냥 지나갔으면 모를까 보고 나니 마음에 걸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예전의 현우였다면 앞뒤 안 가리고 저들을 막았을 것이다.
그게 현우의 정의였고 자신이 생각해온 바름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런 ‘바름’의 속박 같은 건 없어진 지 오래고 지금의 현우에게 남은 바름은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바름밖엔 남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의 현우는 다른 곳엔 신경 쓸 겨를이 없지 않은가?
그 순간.
“웁-!”
우웨엑!
그들의 행동을 못 본 척 지나가겠다는 마음을 먹은 순간, 현우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역겨움에 든 것도 없는 속을 게워내야만 했다.
허억… 허억…….
‘뭐, 뭐지? 몸이 약해진 탓인가?’
원인을 알 수 없는 현상에 당황한 현우였지만 당황한 건 현우뿐만이 아니었다.
“뭐, 뭐야! 사람인가?”
“술 취한 거 같은데?”
벽을 부여잡고 토악질을 하는 모습과 비척거리는 걸음걸이를 본 도둑들에게 현우는 만취한 취객으로 보였다.
“어, 어떡하지?”
“……글쎄, 우리를 기억하려나?”
도둑들이 현우의 모습을 보고 갈팡질팡하는 사이, 현우는 현우대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우우욱……!”
아무리 게워내도 가시지 않는 역겨움에 숨도 쉬기 어려운 지금, 현우는 갑작스러운 역겨움의 정체를 찾아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딱히 먹은 게 없으니 역겨움의 요인이 외적 요인이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근처 공기 중에 약 같은 게 살포되어 있나?’
그렇다고 하기엔 몸의 반응이 너무 즉각적이었다.
물론 현우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닌 만큼 만약의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비록 새벽이라곤 하나 이렇게 불특정 다수가 지나다니는 곳에 그런 걸 살포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이곳을 지나던 게 현우뿐이고 현우 본인에게만 증상이 나타난 이상, 현우를 노린 것인지 다른 누군가를 노린 것인지도 불명확했다.
‘……일단 몸을 확인해봐야겠군.’
신맛이 느껴지는 입을 다물고 토악질이 계속되는 것을 참은 채 현우는 마나로 몸을 수색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몸에서 검출되는 외부 인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단순히 몸이 약해진 탓에 생긴 변화인가?’
하지만 그렇게 단정하기엔 역시 전조가 없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오래도록 연구되어온 인간의 몸이었지만 이곳 세상에서도, 칼롯 코즈너의 세상에서도 아직까지 완벽하게 분석되지 못한 것이 인간의 몸이었다.
이토록 극단적으로 쇠약해진 몸이라면 이런 변화도, 저런 변화도 있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건 보통 사람의 이야기였다.
현우의 몸이 말 그대로 극단적으로 쇠약한 모습이긴 했지만 마나를 다루는 마법사의 몸이었다.
집중하여 관리하는 것은 아니지만 무의식중에 마나로 자신을 검사하고 주요 장기를 보호하는 행위는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현우 본인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질병 따위가 발병했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정신적인… 문제인가?’
당장에 외부에, 신체에 문제가 없다면 떠오르는 것은 정신적인 문제뿐이었다.
신체만큼이나 쇠약해진 정신은 이런저런 질병을 불러오기에 충분한 상태였고 마나가 아무리 많고 그 운용능력이 뛰어나다고 한들, 외부로부터의 충격이 아닌 이상 정신을 보호할 수는 없었다.
‘역시 정신적인 문제 같은데… 스스로의 죽음을 상상한 탓일까?’
어떤 사람이든 자신의 죽음을 고민한다면 몸이 안 좋을 수밖에 없으리라.
그것도 세세하게 그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본인 손으로 자신의 시체를 유기하고자 한다면 더욱더 그랬다.
하지만.
현우는 직감적으로 그런 이유는 아닐 거라 생각했다.
여기까지 오며 계속 죽음에 대해 고민한 탓도 있지만 현우가 자신의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닌 탓도 있었다.
칼롯 코즈너 시절, 수백 년을 살아온 만큼 언제나 자신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었고 비정상적으로 살아온 만큼 비정상적으로 죽을 수 있다는 생각에 시간이 날 때마다 유언장을 고치곤 했던 그였다.
그렇게 죽음에 대해 항상 생각해 왔기에 죽음으로서 다른 세상으로 넘어간다는 황당무계한 발상에 상대적으로 거부감이 덜했는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아까 죽는 것 외에 생각하던 게…….’
“저기요, 아저씨!”
현우가 또 다른 상념에 빠지려는 찰나, 가까이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 술 많이 취하신거 같은데… 이거라도…….”
번뜩!
휘청-.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반사적으로 몸을 크게 트는 바람에 약해진 몸뚱이가 관성을 버티지 못해 휘청거렸지만 그 우연이 현우를 도왔다.
“어럽쇼? 피해?”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손엔 시퍼런 빛을 내뿜는 칼이 들려 있었고 그건 조금 전까지 현우가 서있던 곳에 정확히 멈춰서 있었다.
‘젠장…. 이 녀석들, 목격자를 처리할 속셈인가?’
이로써 확실했다.
아니, 원래도 확실히 그럴 거라 예상은 했지만. 스스로 합리화하기 위해 믿으려 하지 않았다.
지금의 현우는 저들을 피할 구실이 필요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일개 좀도둑들이 굳이 사람을 죽여가면서 목격자를 처리하려는 게 정상일까?’
물론 도둑들이 주인에게 들켜 도망가지 못하고 강도로 돌변한다는 이야기는 꽤나 많은 만큼 지금 상황은 있을 법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현우를 인사불성의 취객으로 인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곳은 주변이 텅 빈 길거리 한복판.
그들이 평범한 도둑들이라면 목격자가 자신들을 확인하기 전에 냅다 달아났을 것이다.
아니, 혹여 자판기를 포기하지 못해서 그렇다 하더라도 취객의 상태를 확인할지언정, 일단 칼부터 쑤셔 넣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