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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령의 주인 1권 (15화)
4. 죽음과 바름 (5)


그 모습을 본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헉!’ 하고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아니, 큰 소리라기보다는 평소라면 그 누구도 쉽게 못 들었을 법한 작은 소리였지만, 바로 코앞의 자판기에서 무언가 작업에 열중하던 남자에게는 충분히 들릴 법한 소리였다.
그녀의 짧은 경호성이 울리자, 남자는 작업하던 막대기에서 손을 떼고 슈퍼의 문을 힐끗 쳐다봤다.
그녀의 소리를 들었다는 것인지 못 들었다는 것인지, 그것만으로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남자가 자신이 낸 소리를 들었음을 확신했다.
남자가 작게 고개 돌린 그 행동 너머, 번뜩이는 안광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후 남자는 마치 그녀가 낸 소리를 못 들었다는 듯 다시 자판기 작업에 열중했지만, 그녀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들의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 문에 밀착한 그녀가 몸을 움직인다면, 분명 그녀의 발소리가 천둥처럼 울려 퍼질 테니 말이다.
그래서 그녀는 기도했다.
너무도 염치없는 생각이지만, 지금 저들과 대치하고 있는 행인이 이대로 여길 벗어나서 경찰에 대신 신고해주기를.
지금 당장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그가 이곳을 벗어나 자신을 돕기를 바라며, 이기적인 생각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고 이때.
두려움에 눈조차 돌리지 못한 채, 멈춰 선 자세로 있던 그녀의 기도에 하늘이 응답이라도 한 듯.
그녀 앞에 기적이 일어났다.
순간적으로 골목을 환하게 바꾸는 새빨간 불길은 발화점이 어디인지도 알 수 없을 만큼 순식간에 번져 나왔다.
그리고 눈 깜짝한 사이에… 그녀의 눈앞에 보이던 도둑들을 ‘지워버렸다’.
만약 그게 불꽃이 아니라, 환한 빛무리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었다면 그녀는 그들이 외계인에게 납치되었다고 믿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찰나의 순간 똑똑히 보고야 말았다.
순식간에 불타 없어져 가는 사람과.
형체만 간신히 남은 새빨간 인간 형상이 고개를 돌려 문 너머에 있는 그녀와 눈을 맞추려 하던 모습을 말이다.
그 기괴하고도 공포스러운 모습에 그녀는 다시 한 번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니, 그런 것보다도 혹여나 자신이 여기 있다는 게 알려진다면, 똑같은 꼴을 당할까 봐 그녀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비록 불꽃의 정체조차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주저앉아 있는 저 사람이 무엇인가 했음을… 그녀는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런 힘이 있다면 그녀도 똑같은 꼴을 당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기에.
그녀는 처음과 같은 모습으로 그 자리에 엉거주춤 서서 멍하니 행인의 모습을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행인의 모습이 꽤나 낯익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확히 누구라곤 떠올릴 수 없었지만… 저 비쩍 마른 몰골과 덥수룩한 머리, 그리고 멀대처럼 기다란 체격은 누군가를 떠올릴 수 있게 했다.
마침내 그녀가 행인의 정체를 확신하고 확대된 동공으로 행인의 정체를 뒤쫓을 때.
행인은 ‘지이익’ 하는 소리를 내며 슈퍼에서 멀어져갔다.
그 뒷모습에 문 뒤에 선 그녀의 입이 달싹였다.
하지만 끝끝내 그녀의 입에서 목소리가 나오는 일은 없었다.
그런 그녀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한 건 행인의 모습이 골목에서 완전히 사라진 다음의 일이었다.

* * *

같은 시각, 현우가 사라진 골목의 반대쪽 모퉁이.
그곳엔 숨죽여 울고 있는 소녀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김예린.
현우가 집을 나서기 얼마 전 친구를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섰던 현우의 여동생이었다.
현우 앞에서를 제외하곤 언제나, 누구에게나 밝은 모습으로 미소 짓던 그녀가 벽에 몸을 바짝 기댄 채 팔다리를 가슴께로 모아 잔뜩 웅크리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안쓰러움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이곳엔 그런 그녀를 위로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녀 역시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누군가에게 이해를 바라며 사연을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장면을 기억에서 잊고자 눈물에 담아 최대한 덜어낼 뿐.
“흐으윽……! 끄으윽.”
하지만 정신없이 울면 흘려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그것은 눈물을 팔뚝에 문질러 닦는 그 짧은 방심을 틈타, 다시 그녀의 머릿속을 지배하며 몸을 떨게 만들었다.
그런 그녀의 머릿속엔 현우의 뒷모습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그녀가 현우를 따라온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친구들과의 약속을 마치고 헤어질 때쯤 우연히 발견한 현우의 뒷모습을 보고 그저 아주 약간의 호기심이 생겼을 뿐이었다.
거리가 꽤 떨어져 있던 탓에 처음엔 긴가민가했던 그녀였지만 당장에 걷는 것도 힘겨워 보이는 몸 하며, 현우의 정면으로 걸어오던 사람들이 조금씩 그를 피해 걷는 것을 보며 현우임을 확신했다.
그리고 그간 그토록 윽박지르고 때려도 방 밖으로 잘 나오지도 않던 현우가 느닷없이 길거리에 나타난 것에 신기해하며 별생각 없이 미행 아닌 미행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곤… 그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처음 현우가 강도들과 마주했을 땐 그들이 강도일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별생각 없이 걸음을 옮겼고, 마침 그녀가 어둠에서 벗어나 가로등의 불빛 밑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일은 시작되었다.
갑자기 튀어나온 칼날이 현우의 주변을 스쳐 지나가기 시작하자 그녀는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칼의 종착역은 현우의 주변이었지만 새하얗게 빛나는 칼날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그녀는 그 자리에 자신이 있는 것처럼 몸을 움찔움찔 떨어야만 했다.
살의를 가진 칼날이란 것은 사람의 원초적 공포심을 자극하는 힘이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현우에게도, 강도들에게도 들키지 않도록 어둠에 몸을 감추고 옆으로 난 다른 골목 모퉁이로 몸을 숨겼다.
당장에라도 경찰에 전화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는 손에 쥔 핸드폰의 화면을 밝힐 용기가 없었다.
혹시라도 강도들이 그 불빛을 보기라도 할까 봐, 혹은 전화를 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그들에게 들리기라도 할까 봐 너무나도 겁이 났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행동을 당연한 행동으로 합리화하기로 했다.
비록 신고하는 것뿐이라곤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 있어선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라며, 그녀에게 있어서 김현우는 그녀의 소중한 목숨을 걸어야 할 만한 가치가 없는 인물이라며, 그녀 자신을 위한 자신의 이기적 바름에 의지하여 필사의 변명을 해댔다.
벌벌 떨리는 다리론 도망친대도 잡혀버릴 테니까, 현우가 죽는다고 해도 슬퍼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이런 위험한 상황에서 뛰어가며 신고 같은 걸 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수많은 변명거리가 순식간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때였다.
“야! 적당히 빨리 끝내고 여기 좀 도와줘!”
악당의 목소리라곤 생각하기 힘든, 평범한 목소리가 조금 크게 골목에 울려 퍼졌다.
김예린, 그녀는 그 목소리를 통해 아직 현우가 죽지 않았으며, 어떻게든 버티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에게 신고를 할 만한 용기는 생겨나지 않았다.
그저 울 것 같은 얼굴로, 걱정인지 격정인지 모를 감정이 어린 눈빛으로 골목에 빠끔 고개를 내밀어 현우의 마지막 모습을 확인하고자 한 게 그녀의 전력을 다한 최후의 용기였다.
그 순간.
파화화화확!
그녀가 바라본 골목이 한순간 밝게 달아올랐다.
너무도 밝은 빛에 어둠에 적응해 있던 그녀의 눈가가 확 찌푸려졌지만 목숨과 직결된 상황은 골목의 상황을 확인하는 데 필사적이게 만들었다.
그녀의 본능 덕분에 그녀는 의도치 않게 두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골목을 가득 메운 넘실거리는 불꽃과 그 안쪽에서 타들어가는 새카만 무언가를.
그리고 그 무언가가 본래의 형태를 잃고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며 자리에서 사라져버리는 것을.
그녀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녀의 고개가 단숨에 젖혀지며 순식간에 골목의 어둠 속으로 다시 녹아들었고 그녀는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더듬더듬 핸드폰의 액정을 만지작거렸다.
파앗.
밝은 핸드폰의 액정 불빛이 골목을 비췄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조금 전 본 너무도 충격적인 장면에 이성이 마비되어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어렵게, 어렵게 112를 눌러가는 그녀의 이성을 찾아준 것은 핸드폰 액정 탓에 평소의 하얀색보다 훨씬 창백하게 보이는 그녀의 손이었다.
밝은 핸드폰 액정 화면 위로 잔상이 남을 만큼 바들바들 떠는 그녀의 손가락은 그녀 스스로 자신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님을 알게 하는 척도가 되어주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이익-.
“헉!”
그녀의 등 뒤, 골목 너머로 들리는 신발 끄는 소리는 단숨에 핸드폰 화면을 슬립 모드로 바꾸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신발 끄는 소리가 가까워 오기 시작했다. 혹여나 그녀의 흰자위가 어둠 속에서 눈에 띄지는 않을까, 그녀는 눈조차 꼭 감아버렸다.
곧 이어 그녀의 창백한 손이 조금 전 소리를 냈던 그녀의 입을 강하게 틀어막았다.
한 줌 숨소리조차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그녀는 입을 틀어막곤 숨조차 참고 있었다. 그러길 몇 분여, 어느 순간부턴가 더 이상 소리가 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자리, 그 자세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벽에 기대어서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숨이 다했을 무렵, 입을 틀어막은 그녀의 손이 조심스럽게 얼굴에서 떨어져 나왔다. 긴장에 바싹 마른 입술 사이로 조그만 숨소리가 가늘고 길게 이어졌다.
숨소리는 점차 물기에 녹아들어 울음이 되었다.
“흑……! 흐윽 흑흑…….”
짧은 시간이었지만 너무도 무서운 일들을 목격한 그녀의 몸과 마음은 그녀가 수용할 수 있는 공포의 한계를 넘어선 지 오래였다.
여태 울음을 참고 있던 것만도 용하다면 용한 일이었다.
울음소리가 어느 정도 울려 퍼졌음에도 주변에 아무런 인기척이 없자, 온몸을 감싸 안는 크나큰 안도감에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은 커졌다.
“흐아앙……! 흐어어엉! 끄윽 끄윽!”
물론… 혹시 돌아간 그가 듣고 찾아오지 않을 정도로만 말이다.
그렇게 그녀는 그렇게 자리에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다.
다리 사이의 축축함이 불편하지 않을 때까지.
그녀는 숨죽여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