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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최강권 씨, 강권 씨, 사정은 알겠는데 우리도 땅 파서 장사하는 것이 아니고 비싼 임대료를 내야 해서 이만 나가 주어야겠어.”
그동안 마음속에서 가져 왔었던 불안감이 현실화된 것이다.
일가친척 하나 없으니 당장에 갈 곳이 없었다. 그렇지만 마음을 졸이던 불안이 이런 형태로라도 표출되고 나니까 억누르던 중압감이 사라져서인지 도리어 안도감마저 느껴졌다.
더욱 다행한 것은 지금은 여름철이어서 추위에 떨지 않아도 된다는 거였다. 강권은 고시원 근처 지하철역에 자리를 잡았다.
지하철역에도 먼저 자리를 잡은 사람들이 텃세를 부려 가장 후미진 곳에 자리를 잡아야 했다.
지하철역에 자리를 잡아서 좋은 것은 지하철은 마음대로 탈 수 있다는 거다. 그리고 화장실에서 마음껏 씻을 수 있다는 것도 나름 좋은 점이라면 좋은 점이었다.
강권이 기브스를 한 상태에서 돌아다니면 더러는 자리도 양보하고 더러는 강권의 손에 돈을 쥐어 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강권을 마치 벌레를 보는 것처럼 호들갑스럽게 피했다.
‘이런 네미랄 년 놈들, 내가 부모를 잘 만났으면 니들 같이 빼입고 다녔을 거라고.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지 말란 말이야.’
강권의 속에서는 열불이 났지만 달리 표현할 방법은 없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엿 같은 세상에게 화풀이를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해야 자기만 더 비참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저들과 싸워 봐야 잡혀 가는 것은 집도 절도 없는 자신들이라는 걸 목격한 것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얻어맞아도 도리어 자신들이 폭행죄로 잡혀 가고 때리기라도 하면 마치 살인죄라도 저지른 흉악범 취급을 당했다.
거꾸로 매달아 놓아도 시간은 흘러간다고 고시원에서 쫓겨난 지도 벌써 6개월이 지났다.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하는 노숙 생활을 한 지 어언 6개월이나 흐른 것이다.
6개월 노숙 생활은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발목이 낫지 않아 일을 할 수 없고, 일을 할 수 없으니 돈이 생기지 않는다. 돈이 생기지 않으니 당연하게 노숙 생활을 청산할 수 없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다 낫지도 않은 인대에 염증이 심해졌다. 기브스의 붕대를 풀어 보면 고름이 줄줄 흘러내린다.
강권의 몸도 더 이상 이런 생활을 하기 싫다고 파업을 하는 것 같았다. 이대로 두면 다리를 자를 수도 있는데, 돈은 먹고 죽고 싶어도 먹을 돈조차도 없으니 병원에 갈 수 없었다.
재수 없는 꿈을 꿔서 100억이 넘는 돈을 날리고 노숙자 생활을 하는 신세를 생각하니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어차피 살아도 더 나을 것이라는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강권을 보면서 괴물을 보는 것 같은 질시의 눈빛을 더 이상은 견디기 힘들었다.
‘죽어도 다리를 자르지는 않을 거야. 네미랄 놈의 세상, 더 살아야…… 그래, 죽자. 차라리 죽는 게 낫겠어. 날씨도 추워지면 버티기도 더 힘들 것이고…….’
막상 죽으려고 하니 죽는다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그렇다고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은 한 오라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로또를 가져 간 한상수에 대한 증오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강권은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죽을 수 없어 어렵게 소주 한 병을 구했다. 더 남은 돈이 없어 무작정 약국으로 가서 수면제를 달라고 떼를 썼다. 약사는 강권이 더 있으면 손해일 것 같아 수면제를 몇 알 건네주었다.
강권은 약사에게서 건네받은 수면제를 보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하하하, 마지막 가는 길마저 이렇게 추한 꼴을 보여야 했는가?’
강권은 절룩거리며 자기만의 공간으로 왔지만 씁쓸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스물두 해의 아무런 흔적조차 남지 않은 가벼운 삶. 자신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울어 줄 사람이 하나도 없기에 강권은 스스로의 죽음에 가슴이 뻥뻥 뚫어질 정도로 미리 눈물을 흘려 두었다.
가슴속에선 주체할 수 없는 서러운 눈물이 줄줄 흐르는데 정작 눈가에는 메마른 헛웃음이 함박눈처럼 펄펄 내리고 있었다.
강권은 그렇듯 비릿한 눈송이가 날리는 서러운 가슴에 지하철 선로의 연속성을 새기고 있었다. 자신의 육신을 두 동강이로 갈라놓을 철길은 마치 날카로운 작두날처럼 반질거리고 있었다.
강권은 지하철이 끊기기를 기다려 선로로 내려섰다.
자신을 발견했다 해도 전동차를 멈출 수 없는 완만하게 휘어진 철길에 누워 수면제를 입에 털어 넣고 소주병을 나발 불었다.
몸에 감각이 없어지기 시작하자 강권은 드디어 자기가 죽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강권의 착각이었다. 죽어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꿈을 꾸고 있을 뿐이었다.
꿈속에 할아버지가 나타났다. 이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진 모습이었다.
“할아버지 어떻게 된 거예요? 이전보다 훨씬 보기 좋은데요.”
“고맙다. 아이야, 네 덕에 이제 복권(復權)이 되어서 예전 위치를 찾을 수가 있었다. 그러니 보답으로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전부 해 주고 싶구나. 빈말 같지만 다시 한 번 고맙다는 말을 하마.”
“예에? 내 덕이라고요?”
“그래, 네가 대신 100억 원을 갚아 주지 않았느냐?”
“예에? 내 수중에 단돈 100만 원도 없는데, 어떻게 내가 100억 원을 대신 갚아 주어요?”
“하하, 일이 그렇게 됐단다.”
할아버지는 이렇게 얼버무리더니 어색함을 감추려는 듯 빠르게 말을 이어 나가는 것이었다.
“너의 전생을 읽다 보면 그것이 100억보다 훨씬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아니 너무나 중대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너의 영혼을 정화시키기 위해서 시련을 주었던 거야. 왜? 그런 말 있잖니? 신이 중하게 쓰려는 사람에게는 일부러 시련을 준다는 말, 말이야.”
강권은 할아버지의 말에 어이가 없어 재차 확인까지 해야 했다.
“뭐라고요? 전생을 읽는 것이 너무나 중대한 가치가 있어서 나에게 일부러 그런 고통을 주어야 했던 거라고요?”
“아이야, 그렇단다. 어떤 지식들은 잊혀져야만 좋을 것들이 있단다. 만약 후세의 다른 가치들과 결합을 하면 엄청난 가치 혼돈을 불러올 수 있는 그런 것들 말이다. 과거에는 도(道)와 분수(分數)라는 것으로 일정한 금기가 만들어져 있었다. 어느 정도 잘 돌아갔다고 본다. 반면에 지금 세상에서는 법으로 금기를 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 법이란 금기가 과연 제 구실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느냐? 만약 네가 전생에 익혔던 그런 가공할 기공과 보법을 익힌 무인(武人)이 UFC에 나가면 그 누가 상대가 되겠느냐? 검강(劍|)기가발하는 무인에게 현대적인 청부살인의 지식들을 가르친다면 그를 막아 낼 수 있는 경호 체계가 존재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비단 그것이 아니더라도 예지능력을 사용해서 하루, 이틀 정도만 앞을 볼 수 있다면 이 세상 전반의 질서들이 어떻게 될 것 같으냐?”
“…….”
강권은 자기가 한 번도 들어 본 적고 없고 생각해 보지도 못한 것들을 서슴없이 말하는 할아버지에게 경외를 느껴서 할 말을 잃었다. 아니 지난 6개월 동안 자신에게 주어졌었던 그 엄청난 고통에 분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제기랄, 그래서 어떻다고요?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데요? 나는 내 한 몸 배부르고 등 따시면 그걸로 만족이라고요.’
강권은 이 말이 입안에서 뱅뱅 돌았지만 차마 말하지 못했다.
이런 강권의 기분을 알았는지 할아버지는 부자연스럽게 너스레를 떨었다.
“하하하, 사람이란 끊임없이 공부해야 뒤처지지 않는 법이란다. 이 저승사자란 직업도 다를 바 없지.”
“…….”
강권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심 자신이 죽으려 할 때까지 세상은 자신에게 무엇을 해 주었느냐는 반감이 확 치밀어 올랐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이런 강권의 더러운 기분을 모르는지 시치미를 뚝 떼고 전생을 보는 법에 대해서 얘기했다.
“인간의 DNA를 해석하면 그 사람의 생김새와 자라온 환경 등을 추론할 수 있다. 그렇듯 인간의 정신 속에는 그 사람이 살아온 전생과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가 모두 기록되어 있다. ……중략…… 전생을 읽는 법은 미래를 보는 것처럼 일단 정신을 한 곳에 모으고 전생을 알겠다는 절실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일체유심조(一體唯心造)라! 그처럼 모든 것을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일체 부정하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 너의 전생에 예지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어렵지는 않을 것이라고 본다.”
마지막으로 이해 못할 주의까지 준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전생을 읽을 때는 그 존재가 반드시 이 세상에 있어야 된다는 걸 명심해라. 그 존재가 이 세상에 있으면 아무리 멀리 있어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세상에 있으면 바로 옆에 있어도 읽을 수 없다. 나머지 생은 재미있게 살도록 해라. 참, 네가 다른 사람의 전생을 읽고 있을 때 그 사람의 능력이 뛰어나다면 자신의 전생이 읽히고 있음을 아는 수도 있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그리고 그럴 정도로 뛰어난 상대라면 도리어 위험에 빠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럼 이 할아비는 그만 가도록 하겠다.”
“내 전생을 읽는다는 것은 그렇다고 쳐요. 그런데 다른 사람의 전생은 무슨 재주로 읽는다는 겁니까? 그리고 바로 옆의 다른 세상이라니 어떻게 바로 옆에 다른 세상이 있을 수 있다는 거지요? 거 무슨 귀신이 씨나락을 까먹는 소리냐고요? 또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했으면 어떤 위험인지는 알려 줘야 하는 것 아니에요?”
강권의 물음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할아버지는 한동안 강권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다.
강권은 사라져 가는 할아버지의 뒤통수에 대고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내 100억을 가져가고 전생을 읽게 해 준다고요? 누구 맘대로요. 누구 맘대로 그렇게 하셨냐고요?”
하지만 이미 사라져 버린 할아버지는 아무런 대답도 없다.
강권은 할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또 위험할 수 있으면 최소한 어떻게 위험하다는 것인지는 말해 줬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무슨 할아버지란 사람이 저래?”
아무리 생각해도 노인네 꿈만 꾸면 불길해지는 것 같았다.
강권은 비록 꿈속이지만 이런 생각이 들자 연신 구시렁거렸다.
“젠장, 이번에는 아예 죽어야 된다는 거야, 뭐야?”
보통 때라면 할아버지가 사라지고 나면 그대로 꿈을 깬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니었다. 또 다시 꾸는 꿈속에는 허허벌판에 울고 있는 아이가 있었다.
‘웬 아이가 이런 데서 울고 있지?’
강권은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은 깨닫지 못하고 아이를 달래 주려고 아이에게 가려 했지만 마음뿐이었다.
한참을 안타까워하는데 길을 지나던 신선풍의 노인이 그 아이를 품에 안고 깊은 산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이가 노인의 품에 안기면서 안타까워하던 강권의 마음이 절로 안심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설마 저 아이가 나야?’
강권은 그 아이가 꼭 자기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부터 강권이 자기로 여기던 아이는 노인에게서 여러 가지 학문은 물론이고 무술도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그 가르침들은 강권의 뇌리에 새겨지고 있었다.
‘정말 전생을 읽고 있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하, 네 녀석의 마음은 대해처럼 넓게 보이니 네게는 무진신공(戊辰神功)이 제격이겠구나.”
노인의 사문은 원시불교의 맥을 잇는 천살문(天殺門)이었다.
천살문은 특이하게도 살인으로 중생을 제도한다는 상리에 맞지 않는 계율을 근간으로 삼았다. 죽일 사람을 죽여서 더 많은 중생을 살린다는 것이다.
불교와는 달리 주색(酒色)에 대한 금기(禁忌)도 없었다.
굳이 금기를 말한다면 금기가 없는 것이 금기였다.
부처는 마음에 있는데 거리낌을 만든다면 그것이 온전한 부처가 될 수 있겠느냐 하는 희한한 논리였다.
이 천살문에는 오행에 해당하는 무공이 각각 있는데 무진신공은 오행 중, 토(土)에 해당했다.
무(戊)는 천간(天干)의 다섯 번째로 토를 의미한다.
큰 산, 대륙, 웅장한 제방 등은 모두 무토(戊土)라고 보면 된다. 다섯 번째 지지(地支)인 진(辰) 역시 토다.
이 진토(辰土)에는 만물을 조화롭게 하고 보호하면서 제 격(格)에 맞게 자라게 하는 특질이 있다.
이처럼 앞에도 토(土), 뒤에도 토(土)니 무진신공은 한마디로 말해서 땅의 기운을 받아들여 내공으로 승화시키는 무공이었다.
그런데 토의 특성은 모든 기운을 받아들여 중화시키는 중재자의 역할도 한다는 것이다. 독도 중화시키고 충격도 완화시킨다.
전생의 강권은 노인에게서 배운 무진신공을 열심히 연마했다.
천살문에는 무진신공 외에도 무극십팔기(無極十八技)라는 독자적인 투로(套路)가 있었다. 아니 무극십팔기는 투로라기보다는 인체의 잠재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열여덟 가지의 품세였다.
인체의 모든 근육을 강화시키고 몸의 유연성을 강화시키며, 신경 전달 체계를 원활하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무극십팔기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강권은 죽어라 이 무극십팔기를 익혔다.
어느 순간, 강권은 깨어났는데 꿈이 너무나도 생생했다.
무진신공의 법문이나 무극십팔기가 또렷하게 기억나는 것이 익히려고만 든다면 당장이라도 익힐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뿐이 아니라 머리도 엄청 영리해진 것 같았다.
원래 강권은 중학교 중퇴가 학력의 전부여서 한자(漢字)라고는 한 글자도 모르는 일자무식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기분으로는 어떤 한자들이라도 전부 다 읽고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슨 꿈이 이렇게 생생할까? 정말 무진신공이나 무극십팔기라는 무공이 있고 내가 그것들을 익힐 수 있는 것일까?”
강권은 혼잣말을 하다가 이내 부정을 하고 현실로 돌아오자 문득 이곳이 지하철 선로가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분명 죽으려고 소주를 먹으면서 수면제를 입에 털어 넣었는데…….’
나름 안락한 침대 위에 누워 있고, 자기 팔뚝에 링거가 꽂혀 있는 것으로 보아 병원인 것 같았다. 어딘가 궁금해졌지만 강권은 쏟아지는 수마에 이기지 못하고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제2장- 최강권, 전생을 읽을 수 있게 되다
강권은 다시 꿈을 꾸었다. 꿈은 하나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파노라마처럼 돌아가며 여러 전생의 삶들을 보여 주고 있었다.
노인에게 거두어져 무공을 닦는 꿈을 제외하고 가장 인상에 남는 꿈은 관상감 첨정(僉正:종4품)으로 살았던 전생(前生)이었다.
정성기란 이름으로 산 그 전생은 꽤나 잘나가던(?) 삶이었다.
정성기는 격암의 사숙조(師叔祖)뻘이 되는 인물로 명리학과 역수(易數)에 정통했다. 격암유록과 같은 희대의 예언서를 남기지는 않았지만 나름 일가를 이루었다고 자타가 공인할 정도였다.
다른 예언가들이 거시적인 안목으로 나라의 국운이 어쩌고 민족의 장래가 어떠니 할 때 정성기는 소심하게 자신의 신변에 관해서 알아보았다.
그러다 자신이 후세에 환생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내가 저렇게 보잘 것 없는 인물로 태어나다니?’
보잘 것 없이 태어난 정도가 아니라 비렁뱅이로 비참하게 죽어 가고 있었다.
‘안 돼. 그렇게 비참하게 살다가 죽게 둘 수는 없어.’
후생이 있으니 그 다음의 후생도 있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은 바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정성기는 죽음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나 그것부터 알아보았다.
모든 게 하늘이 정한 운명에 달려 있다고 믿는 당시의 세계관에 비추어 보면 엄청난 파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정성기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 파격이 도리어 제대로 된 순리였다. 운명이란 탄생과 죽음의 사이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종의 가능성들을 연결한 궤적이었다. 말하자면 운명은 확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만들어 나간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 죽음만 피할 수 있다면 그 이후의 삶은 부와 명예 등, 모든 것이 원하는 대로 주어지는 삶을 사는 것을 보게 되었다. 마음먹은 대로 모든 일을 이룰 수 있는 꿈같은 삶이었다.
미래의 일에 개입하는 것은 천리를 거스르는 일이다.
하지만 몰랐다면 모르지만 자신이 안 이상 그렇게 죽어 가게 둘 수 없었다. 천리를 지키느냐, 자신의 생명을 지키느냐를 놓고서 나름 엄청 고뇌했다. 그 결과, 정성기는 후자를 선택했다.
아전인수(我田引水)격의 해석인지 몰라도 자신의 죽음을 자신에게 알게 한 것은 뭔가 대비책을 세워 두라는 계시로만 여겨졌다. 그래서 자신의 환생에 나름 철저하게 준비를 해 두었다.
후손들에게 모년, 모월, 모시 경에 어느 곳에 가면 죽어 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니 살리라고 유훈을 남겼다.
진인사대천명이라고 일을 꾸민다고 모든 게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겠지만 강권이 죽지 않을 수 있는 것도 어쩌면 그 준비 때문일지도 몰랐다.
“아하! 그렇다면 나를 살린 사람이 내 후손이었단 말인가?”
강권이 이렇게 외치면서 벌떡 일어나자 병실에 있던 노인이 깜짝 놀라면서 반긴다.
“젊은이, 열흘 만에 깨어났구먼. 앞길이 구만리 같은 젊은 사람이 망측하게 어째 죽을 생각을 했단 말인가?”
순간 강권의 뇌리가 번쩍이며 돌았다.
‘이 노인은 분명 내 후손일 것이고 이름은 당시 내 이름과 같을 것이다.’
전생에서 본 것은 그랬다. 맞을지 그렇지 않을지는 모르겠지만 전생에서 본 것이 맞는다면 분명 그럴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이 노인은 자기에게 십 몇 대라는 까마득한 후손이다. 그래서 그런지 노인에게서 남 같지 않은 친밀함이 느껴졌다. 그렇지만 현실은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남남이었다.
그러니 그렇게 대해야 한다.
강권의 뇌리에서는 전생에 읽었던 일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이 노인의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그대로 벌여 두면 정씨 가문에 큰 변고가 생길 것이다.
비록 지금은 남남이지만 후손이라면 후손이 아니겠는가? 강권은 기회를 보아 그 사실을 말해 주기로 했다.
하지만 시치미를 뚝 떼고 의뭉을 떨었다.
“예에? 그럼 저를 구해 주신 분이, 어르신이시군요.”
죽으려 하기 전에는 이렇듯 의뭉을 떨지 않고 무조건 고맙다고 하거나 노인의 질책에 자신의 행동을 부끄러워했을 것이다.
그런데 전생을 읽고 난 후에는 능글맞게 모든 것을 알면서 모르는 척 행동했다. 전생을 읽는 능력이 생기면서 전생의 성품까지도 어느 정도 몸에 배인 모양이었다. 그걸 모르는 노인은 자신이 강권을 구해 준 티를 내는 듯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그렇다네. 나는 진천에서 땅 파먹고 사는 무지렁이 노인이라네. 믿기지 않는 얘기겠지만 자네를 구한 것은 나와 같은 함자를 쓰시던 선조의 유훈 때문이라네.”
강권은 자신이 전생에서 본 그대로이자 회심의 미소를 띠며 은근한 어조로 슬며시 떠보았다.
“아! 그러시군요. 그러시다면 혹시 어르신의 성함이 정씨 성에 밝을 성(晟)자 훌륭할 기(琦) 자를 쓰시는 모양이지요?”
“허걱, 그걸 자네가 어떻게?”
깜짝 놀라는 노인 못지않게 강권 역시 의기양양한 가운데 은근 놀라고 있었다.
‘세상에 전생을 읽을 수 있단 할아버지 말씀이 정말이었어. 그럼 그 무공들도…….’
한참의 정적이 흐른 후에 강권은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제 꿈속에 정씨 성에 성 자 기 자를 함자로 쓰시는 노인이 나타나셔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더군요. 그리고 그분께서는 저를 위해 남겨 놓으신 게 있다고 하시던데…….”
“그럼…… 정말?”
“그렇습니다. 전생에 제가 그분을 도와드린 적이 있었지요. 뭐, 그리 큰 도움은 아니지만 미력하나마 제 도움 덕분에 그분께서 목숨을 구하실 수가 있었지요. 그분께서는 은혜를 갚으러 금방 오시겠다고 하셨는데…… 그렇지만 똥간에 들어갈 때와 나갈 때 사람의 마음이 어디 같은가요? 그 이후로 한 번도 만나 뵌 적이 없었지요. 그런데 꿈속에 나타나셔서 저승에서도 은혜를 저버린 것이 무척이나 괴로웠다고 지금 생에서라도 은혜를 꼭 갚겠다고 하시더군요.”
“저, 그것이…….”
“그분께서는 도자기라고 하시는 것 같던데 노인장께선 지금 가지고 계시는지요?”
강권의 묻는 품이 모든 사실을 다 알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자 정 노인은 한숨을 내쉬며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2화
“최강권 씨, 강권 씨, 사정은 알겠는데 우리도 땅 파서 장사하는 것이 아니고 비싼 임대료를 내야 해서 이만 나가 주어야겠어.”
그동안 마음속에서 가져 왔었던 불안감이 현실화된 것이다.
일가친척 하나 없으니 당장에 갈 곳이 없었다. 그렇지만 마음을 졸이던 불안이 이런 형태로라도 표출되고 나니까 억누르던 중압감이 사라져서인지 도리어 안도감마저 느껴졌다.
더욱 다행한 것은 지금은 여름철이어서 추위에 떨지 않아도 된다는 거였다. 강권은 고시원 근처 지하철역에 자리를 잡았다.
지하철역에도 먼저 자리를 잡은 사람들이 텃세를 부려 가장 후미진 곳에 자리를 잡아야 했다.
지하철역에 자리를 잡아서 좋은 것은 지하철은 마음대로 탈 수 있다는 거다. 그리고 화장실에서 마음껏 씻을 수 있다는 것도 나름 좋은 점이라면 좋은 점이었다.
강권이 기브스를 한 상태에서 돌아다니면 더러는 자리도 양보하고 더러는 강권의 손에 돈을 쥐어 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강권을 마치 벌레를 보는 것처럼 호들갑스럽게 피했다.
‘이런 네미랄 년 놈들, 내가 부모를 잘 만났으면 니들 같이 빼입고 다녔을 거라고.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지 말란 말이야.’
강권의 속에서는 열불이 났지만 달리 표현할 방법은 없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엿 같은 세상에게 화풀이를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해야 자기만 더 비참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저들과 싸워 봐야 잡혀 가는 것은 집도 절도 없는 자신들이라는 걸 목격한 것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얻어맞아도 도리어 자신들이 폭행죄로 잡혀 가고 때리기라도 하면 마치 살인죄라도 저지른 흉악범 취급을 당했다.
거꾸로 매달아 놓아도 시간은 흘러간다고 고시원에서 쫓겨난 지도 벌써 6개월이 지났다.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하는 노숙 생활을 한 지 어언 6개월이나 흐른 것이다.
6개월 노숙 생활은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발목이 낫지 않아 일을 할 수 없고, 일을 할 수 없으니 돈이 생기지 않는다. 돈이 생기지 않으니 당연하게 노숙 생활을 청산할 수 없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다 낫지도 않은 인대에 염증이 심해졌다. 기브스의 붕대를 풀어 보면 고름이 줄줄 흘러내린다.
강권의 몸도 더 이상 이런 생활을 하기 싫다고 파업을 하는 것 같았다. 이대로 두면 다리를 자를 수도 있는데, 돈은 먹고 죽고 싶어도 먹을 돈조차도 없으니 병원에 갈 수 없었다.
재수 없는 꿈을 꿔서 100억이 넘는 돈을 날리고 노숙자 생활을 하는 신세를 생각하니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어차피 살아도 더 나을 것이라는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강권을 보면서 괴물을 보는 것 같은 질시의 눈빛을 더 이상은 견디기 힘들었다.
‘죽어도 다리를 자르지는 않을 거야. 네미랄 놈의 세상, 더 살아야…… 그래, 죽자. 차라리 죽는 게 낫겠어. 날씨도 추워지면 버티기도 더 힘들 것이고…….’
막상 죽으려고 하니 죽는다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그렇다고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은 한 오라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로또를 가져 간 한상수에 대한 증오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강권은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죽을 수 없어 어렵게 소주 한 병을 구했다. 더 남은 돈이 없어 무작정 약국으로 가서 수면제를 달라고 떼를 썼다. 약사는 강권이 더 있으면 손해일 것 같아 수면제를 몇 알 건네주었다.
강권은 약사에게서 건네받은 수면제를 보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하하하, 마지막 가는 길마저 이렇게 추한 꼴을 보여야 했는가?’
강권은 절룩거리며 자기만의 공간으로 왔지만 씁쓸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스물두 해의 아무런 흔적조차 남지 않은 가벼운 삶. 자신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울어 줄 사람이 하나도 없기에 강권은 스스로의 죽음에 가슴이 뻥뻥 뚫어질 정도로 미리 눈물을 흘려 두었다.
가슴속에선 주체할 수 없는 서러운 눈물이 줄줄 흐르는데 정작 눈가에는 메마른 헛웃음이 함박눈처럼 펄펄 내리고 있었다.
강권은 그렇듯 비릿한 눈송이가 날리는 서러운 가슴에 지하철 선로의 연속성을 새기고 있었다. 자신의 육신을 두 동강이로 갈라놓을 철길은 마치 날카로운 작두날처럼 반질거리고 있었다.
강권은 지하철이 끊기기를 기다려 선로로 내려섰다.
자신을 발견했다 해도 전동차를 멈출 수 없는 완만하게 휘어진 철길에 누워 수면제를 입에 털어 넣고 소주병을 나발 불었다.
몸에 감각이 없어지기 시작하자 강권은 드디어 자기가 죽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강권의 착각이었다. 죽어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꿈을 꾸고 있을 뿐이었다.
꿈속에 할아버지가 나타났다. 이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진 모습이었다.
“할아버지 어떻게 된 거예요? 이전보다 훨씬 보기 좋은데요.”
“고맙다. 아이야, 네 덕에 이제 복권(復權)이 되어서 예전 위치를 찾을 수가 있었다. 그러니 보답으로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전부 해 주고 싶구나. 빈말 같지만 다시 한 번 고맙다는 말을 하마.”
“예에? 내 덕이라고요?”
“그래, 네가 대신 100억 원을 갚아 주지 않았느냐?”
“예에? 내 수중에 단돈 100만 원도 없는데, 어떻게 내가 100억 원을 대신 갚아 주어요?”
“하하, 일이 그렇게 됐단다.”
할아버지는 이렇게 얼버무리더니 어색함을 감추려는 듯 빠르게 말을 이어 나가는 것이었다.
“너의 전생을 읽다 보면 그것이 100억보다 훨씬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아니 너무나 중대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너의 영혼을 정화시키기 위해서 시련을 주었던 거야. 왜? 그런 말 있잖니? 신이 중하게 쓰려는 사람에게는 일부러 시련을 준다는 말, 말이야.”
강권은 할아버지의 말에 어이가 없어 재차 확인까지 해야 했다.
“뭐라고요? 전생을 읽는 것이 너무나 중대한 가치가 있어서 나에게 일부러 그런 고통을 주어야 했던 거라고요?”
“아이야, 그렇단다. 어떤 지식들은 잊혀져야만 좋을 것들이 있단다. 만약 후세의 다른 가치들과 결합을 하면 엄청난 가치 혼돈을 불러올 수 있는 그런 것들 말이다. 과거에는 도(道)와 분수(分數)라는 것으로 일정한 금기가 만들어져 있었다. 어느 정도 잘 돌아갔다고 본다. 반면에 지금 세상에서는 법으로 금기를 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 법이란 금기가 과연 제 구실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느냐? 만약 네가 전생에 익혔던 그런 가공할 기공과 보법을 익힌 무인(武人)이 UFC에 나가면 그 누가 상대가 되겠느냐? 검강(劍|)기가발하는 무인에게 현대적인 청부살인의 지식들을 가르친다면 그를 막아 낼 수 있는 경호 체계가 존재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비단 그것이 아니더라도 예지능력을 사용해서 하루, 이틀 정도만 앞을 볼 수 있다면 이 세상 전반의 질서들이 어떻게 될 것 같으냐?”
“…….”
강권은 자기가 한 번도 들어 본 적고 없고 생각해 보지도 못한 것들을 서슴없이 말하는 할아버지에게 경외를 느껴서 할 말을 잃었다. 아니 지난 6개월 동안 자신에게 주어졌었던 그 엄청난 고통에 분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제기랄, 그래서 어떻다고요?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데요? 나는 내 한 몸 배부르고 등 따시면 그걸로 만족이라고요.’
강권은 이 말이 입안에서 뱅뱅 돌았지만 차마 말하지 못했다.
이런 강권의 기분을 알았는지 할아버지는 부자연스럽게 너스레를 떨었다.
“하하하, 사람이란 끊임없이 공부해야 뒤처지지 않는 법이란다. 이 저승사자란 직업도 다를 바 없지.”
“…….”
강권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심 자신이 죽으려 할 때까지 세상은 자신에게 무엇을 해 주었느냐는 반감이 확 치밀어 올랐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이런 강권의 더러운 기분을 모르는지 시치미를 뚝 떼고 전생을 보는 법에 대해서 얘기했다.
“인간의 DNA를 해석하면 그 사람의 생김새와 자라온 환경 등을 추론할 수 있다. 그렇듯 인간의 정신 속에는 그 사람이 살아온 전생과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가 모두 기록되어 있다. ……중략…… 전생을 읽는 법은 미래를 보는 것처럼 일단 정신을 한 곳에 모으고 전생을 알겠다는 절실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일체유심조(一體唯心造)라! 그처럼 모든 것을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일체 부정하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 너의 전생에 예지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어렵지는 않을 것이라고 본다.”
마지막으로 이해 못할 주의까지 준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전생을 읽을 때는 그 존재가 반드시 이 세상에 있어야 된다는 걸 명심해라. 그 존재가 이 세상에 있으면 아무리 멀리 있어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세상에 있으면 바로 옆에 있어도 읽을 수 없다. 나머지 생은 재미있게 살도록 해라. 참, 네가 다른 사람의 전생을 읽고 있을 때 그 사람의 능력이 뛰어나다면 자신의 전생이 읽히고 있음을 아는 수도 있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그리고 그럴 정도로 뛰어난 상대라면 도리어 위험에 빠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럼 이 할아비는 그만 가도록 하겠다.”
“내 전생을 읽는다는 것은 그렇다고 쳐요. 그런데 다른 사람의 전생은 무슨 재주로 읽는다는 겁니까? 그리고 바로 옆의 다른 세상이라니 어떻게 바로 옆에 다른 세상이 있을 수 있다는 거지요? 거 무슨 귀신이 씨나락을 까먹는 소리냐고요? 또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했으면 어떤 위험인지는 알려 줘야 하는 것 아니에요?”
강권의 물음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할아버지는 한동안 강권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다.
강권은 사라져 가는 할아버지의 뒤통수에 대고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내 100억을 가져가고 전생을 읽게 해 준다고요? 누구 맘대로요. 누구 맘대로 그렇게 하셨냐고요?”
하지만 이미 사라져 버린 할아버지는 아무런 대답도 없다.
강권은 할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또 위험할 수 있으면 최소한 어떻게 위험하다는 것인지는 말해 줬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무슨 할아버지란 사람이 저래?”
아무리 생각해도 노인네 꿈만 꾸면 불길해지는 것 같았다.
강권은 비록 꿈속이지만 이런 생각이 들자 연신 구시렁거렸다.
“젠장, 이번에는 아예 죽어야 된다는 거야, 뭐야?”
보통 때라면 할아버지가 사라지고 나면 그대로 꿈을 깬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니었다. 또 다시 꾸는 꿈속에는 허허벌판에 울고 있는 아이가 있었다.
‘웬 아이가 이런 데서 울고 있지?’
강권은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은 깨닫지 못하고 아이를 달래 주려고 아이에게 가려 했지만 마음뿐이었다.
한참을 안타까워하는데 길을 지나던 신선풍의 노인이 그 아이를 품에 안고 깊은 산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이가 노인의 품에 안기면서 안타까워하던 강권의 마음이 절로 안심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설마 저 아이가 나야?’
강권은 그 아이가 꼭 자기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부터 강권이 자기로 여기던 아이는 노인에게서 여러 가지 학문은 물론이고 무술도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그 가르침들은 강권의 뇌리에 새겨지고 있었다.
‘정말 전생을 읽고 있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하, 네 녀석의 마음은 대해처럼 넓게 보이니 네게는 무진신공(戊辰神功)이 제격이겠구나.”
노인의 사문은 원시불교의 맥을 잇는 천살문(天殺門)이었다.
천살문은 특이하게도 살인으로 중생을 제도한다는 상리에 맞지 않는 계율을 근간으로 삼았다. 죽일 사람을 죽여서 더 많은 중생을 살린다는 것이다.
불교와는 달리 주색(酒色)에 대한 금기(禁忌)도 없었다.
굳이 금기를 말한다면 금기가 없는 것이 금기였다.
부처는 마음에 있는데 거리낌을 만든다면 그것이 온전한 부처가 될 수 있겠느냐 하는 희한한 논리였다.
이 천살문에는 오행에 해당하는 무공이 각각 있는데 무진신공은 오행 중, 토(土)에 해당했다.
무(戊)는 천간(天干)의 다섯 번째로 토를 의미한다.
큰 산, 대륙, 웅장한 제방 등은 모두 무토(戊土)라고 보면 된다. 다섯 번째 지지(地支)인 진(辰) 역시 토다.
이 진토(辰土)에는 만물을 조화롭게 하고 보호하면서 제 격(格)에 맞게 자라게 하는 특질이 있다.
이처럼 앞에도 토(土), 뒤에도 토(土)니 무진신공은 한마디로 말해서 땅의 기운을 받아들여 내공으로 승화시키는 무공이었다.
그런데 토의 특성은 모든 기운을 받아들여 중화시키는 중재자의 역할도 한다는 것이다. 독도 중화시키고 충격도 완화시킨다.
전생의 강권은 노인에게서 배운 무진신공을 열심히 연마했다.
천살문에는 무진신공 외에도 무극십팔기(無極十八技)라는 독자적인 투로(套路)가 있었다. 아니 무극십팔기는 투로라기보다는 인체의 잠재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열여덟 가지의 품세였다.
인체의 모든 근육을 강화시키고 몸의 유연성을 강화시키며, 신경 전달 체계를 원활하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무극십팔기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강권은 죽어라 이 무극십팔기를 익혔다.
어느 순간, 강권은 깨어났는데 꿈이 너무나도 생생했다.
무진신공의 법문이나 무극십팔기가 또렷하게 기억나는 것이 익히려고만 든다면 당장이라도 익힐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뿐이 아니라 머리도 엄청 영리해진 것 같았다.
원래 강권은 중학교 중퇴가 학력의 전부여서 한자(漢字)라고는 한 글자도 모르는 일자무식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기분으로는 어떤 한자들이라도 전부 다 읽고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슨 꿈이 이렇게 생생할까? 정말 무진신공이나 무극십팔기라는 무공이 있고 내가 그것들을 익힐 수 있는 것일까?”
강권은 혼잣말을 하다가 이내 부정을 하고 현실로 돌아오자 문득 이곳이 지하철 선로가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분명 죽으려고 소주를 먹으면서 수면제를 입에 털어 넣었는데…….’
나름 안락한 침대 위에 누워 있고, 자기 팔뚝에 링거가 꽂혀 있는 것으로 보아 병원인 것 같았다. 어딘가 궁금해졌지만 강권은 쏟아지는 수마에 이기지 못하고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제2장- 최강권, 전생을 읽을 수 있게 되다
강권은 다시 꿈을 꾸었다. 꿈은 하나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파노라마처럼 돌아가며 여러 전생의 삶들을 보여 주고 있었다.
노인에게 거두어져 무공을 닦는 꿈을 제외하고 가장 인상에 남는 꿈은 관상감 첨정(僉正:종4품)으로 살았던 전생(前生)이었다.
정성기란 이름으로 산 그 전생은 꽤나 잘나가던(?) 삶이었다.
정성기는 격암의 사숙조(師叔祖)뻘이 되는 인물로 명리학과 역수(易數)에 정통했다. 격암유록과 같은 희대의 예언서를 남기지는 않았지만 나름 일가를 이루었다고 자타가 공인할 정도였다.
다른 예언가들이 거시적인 안목으로 나라의 국운이 어쩌고 민족의 장래가 어떠니 할 때 정성기는 소심하게 자신의 신변에 관해서 알아보았다.
그러다 자신이 후세에 환생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내가 저렇게 보잘 것 없는 인물로 태어나다니?’
보잘 것 없이 태어난 정도가 아니라 비렁뱅이로 비참하게 죽어 가고 있었다.
‘안 돼. 그렇게 비참하게 살다가 죽게 둘 수는 없어.’
후생이 있으니 그 다음의 후생도 있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은 바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정성기는 죽음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나 그것부터 알아보았다.
모든 게 하늘이 정한 운명에 달려 있다고 믿는 당시의 세계관에 비추어 보면 엄청난 파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정성기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 파격이 도리어 제대로 된 순리였다. 운명이란 탄생과 죽음의 사이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종의 가능성들을 연결한 궤적이었다. 말하자면 운명은 확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만들어 나간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 죽음만 피할 수 있다면 그 이후의 삶은 부와 명예 등, 모든 것이 원하는 대로 주어지는 삶을 사는 것을 보게 되었다. 마음먹은 대로 모든 일을 이룰 수 있는 꿈같은 삶이었다.
미래의 일에 개입하는 것은 천리를 거스르는 일이다.
하지만 몰랐다면 모르지만 자신이 안 이상 그렇게 죽어 가게 둘 수 없었다. 천리를 지키느냐, 자신의 생명을 지키느냐를 놓고서 나름 엄청 고뇌했다. 그 결과, 정성기는 후자를 선택했다.
아전인수(我田引水)격의 해석인지 몰라도 자신의 죽음을 자신에게 알게 한 것은 뭔가 대비책을 세워 두라는 계시로만 여겨졌다. 그래서 자신의 환생에 나름 철저하게 준비를 해 두었다.
후손들에게 모년, 모월, 모시 경에 어느 곳에 가면 죽어 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니 살리라고 유훈을 남겼다.
진인사대천명이라고 일을 꾸민다고 모든 게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겠지만 강권이 죽지 않을 수 있는 것도 어쩌면 그 준비 때문일지도 몰랐다.
“아하! 그렇다면 나를 살린 사람이 내 후손이었단 말인가?”
강권이 이렇게 외치면서 벌떡 일어나자 병실에 있던 노인이 깜짝 놀라면서 반긴다.
“젊은이, 열흘 만에 깨어났구먼. 앞길이 구만리 같은 젊은 사람이 망측하게 어째 죽을 생각을 했단 말인가?”
순간 강권의 뇌리가 번쩍이며 돌았다.
‘이 노인은 분명 내 후손일 것이고 이름은 당시 내 이름과 같을 것이다.’
전생에서 본 것은 그랬다. 맞을지 그렇지 않을지는 모르겠지만 전생에서 본 것이 맞는다면 분명 그럴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이 노인은 자기에게 십 몇 대라는 까마득한 후손이다. 그래서 그런지 노인에게서 남 같지 않은 친밀함이 느껴졌다. 그렇지만 현실은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남남이었다.
그러니 그렇게 대해야 한다.
강권의 뇌리에서는 전생에 읽었던 일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이 노인의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그대로 벌여 두면 정씨 가문에 큰 변고가 생길 것이다.
비록 지금은 남남이지만 후손이라면 후손이 아니겠는가? 강권은 기회를 보아 그 사실을 말해 주기로 했다.
하지만 시치미를 뚝 떼고 의뭉을 떨었다.
“예에? 그럼 저를 구해 주신 분이, 어르신이시군요.”
죽으려 하기 전에는 이렇듯 의뭉을 떨지 않고 무조건 고맙다고 하거나 노인의 질책에 자신의 행동을 부끄러워했을 것이다.
그런데 전생을 읽고 난 후에는 능글맞게 모든 것을 알면서 모르는 척 행동했다. 전생을 읽는 능력이 생기면서 전생의 성품까지도 어느 정도 몸에 배인 모양이었다. 그걸 모르는 노인은 자신이 강권을 구해 준 티를 내는 듯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그렇다네. 나는 진천에서 땅 파먹고 사는 무지렁이 노인이라네. 믿기지 않는 얘기겠지만 자네를 구한 것은 나와 같은 함자를 쓰시던 선조의 유훈 때문이라네.”
강권은 자신이 전생에서 본 그대로이자 회심의 미소를 띠며 은근한 어조로 슬며시 떠보았다.
“아! 그러시군요. 그러시다면 혹시 어르신의 성함이 정씨 성에 밝을 성(晟)자 훌륭할 기(琦) 자를 쓰시는 모양이지요?”
“허걱, 그걸 자네가 어떻게?”
깜짝 놀라는 노인 못지않게 강권 역시 의기양양한 가운데 은근 놀라고 있었다.
‘세상에 전생을 읽을 수 있단 할아버지 말씀이 정말이었어. 그럼 그 무공들도…….’
한참의 정적이 흐른 후에 강권은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제 꿈속에 정씨 성에 성 자 기 자를 함자로 쓰시는 노인이 나타나셔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더군요. 그리고 그분께서는 저를 위해 남겨 놓으신 게 있다고 하시던데…….”
“그럼…… 정말?”
“그렇습니다. 전생에 제가 그분을 도와드린 적이 있었지요. 뭐, 그리 큰 도움은 아니지만 미력하나마 제 도움 덕분에 그분께서 목숨을 구하실 수가 있었지요. 그분께서는 은혜를 갚으러 금방 오시겠다고 하셨는데…… 그렇지만 똥간에 들어갈 때와 나갈 때 사람의 마음이 어디 같은가요? 그 이후로 한 번도 만나 뵌 적이 없었지요. 그런데 꿈속에 나타나셔서 저승에서도 은혜를 저버린 것이 무척이나 괴로웠다고 지금 생에서라도 은혜를 꼭 갚겠다고 하시더군요.”
“저, 그것이…….”
“그분께서는 도자기라고 하시는 것 같던데 노인장께선 지금 가지고 계시는지요?”
강권의 묻는 품이 모든 사실을 다 알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자 정 노인은 한숨을 내쉬며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