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더 리더
3화
정씨 가문에는 조상께서 꼭 지키라고 말씀하신 몇 가지의 유훈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유훈 중에 모년 모월 모일 어디에 가면 젊은이가 철마가 다니는 길에 누워 있으니 그 젊은이를 구하라는 것도 그중 하나였단다. 그리고 그 젊은이가 하는 말을 무조건 따르라고도 했다는 것이었다. 만약 그 젊은이를 구하지 못하면 집안이 절손된다면서.
자식들은 미신이니까 지킬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정 노인은 달랐다. 나이를 먹고 죽을 날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가문을 지키는 것이 선조에 대한 효도이고 도리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젊은이 그 도자기를 팔아 버렸다네. 그래서…….”
“으음, 그러셨군요. 그런데 꿈속의 노인장께선 후손들이 자기의 유훈만 충실하게 지켰으면 대대손손 갑부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텐데, 겨우 한 가지 정도만 지킬 것이라고 하시더니…… 그것이 사실인 모양이군요. 40여 년 전에 진천 땅을 팔아서 장자울[지금 압구정동]에 있는 배 밭을 사 두라고 하셨는데 영감님께선 ‘생거진천(生居鎭川) 사거용인(死居龍仁)[살아서는 진천이 좋고 죽어서는 용인이 좋다는 의미 임.]’이라고 우기면서 듣지 않으셨을 테고. 나중에 금싸라기 땅이 되자 후회가 막급해서 저에게 전해 주라는 도자기를 팔아서 연기에 땅 좀 사두었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허걱, 정말로 우리 조상님께서 자네의 꿈에 나타나셨는가? 정말로 자네가 우리 조상님의 목숨을 구해 주었는가?”
“하하, 그렇지 않으면 제가 어찌 그 내막을 알겠습니까? 꿈속의 노인장께선 도자기 판 돈을 모두 달라고 하라더군요. 한 10억쯤 된다고 하시던 것 같던데. 그렇지만 제 목숨도 구해 주셨는데 어떻게 전부를 바라겠습니까? 한 5백만 원 정도만 주십시오. 뭐, 주시기가 정 아까우면 안 주셔도 상관은 없고요.”
말은 이렇게 했다. 그렇지만 눈앞의 이 노인은 자기 혈족에게는 얼마를 써도 아까워하지 않는데 남에게는 단 한 푼 쓰는 것도 아까워한다는 게 떠올랐다. 노인이 믿는 것은 오로지 피 내림뿐이다. 극히 이기적인 삶을 살았던 정성기의 후손다운 태도였다. 이런 생각이 떠오르자 강권은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무진신공을 어느 정도 이루려면 전생에 안배해 둔 곳으로 가야 하는데…….’
정성기가 안배해 둔 곳은 가평에 있는 화악산이었다.
강권이 말한 5백만 원은 나름 계산한 여비와 1년 정도 수련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경비였다.
옛날 생각을 하고서 화악산까지 걸어갈 수도 있지만, 편하게 갈 수 있는 길을 굳이 어렵게 가고 싶지 않았다.
‘이 노인네가 믿는 것은 오로지 혈족뿐인데…….’
강권은 이런 생각을 하다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라 슬쩍 지나가는 말로 노인의 의중을 떠보았다.
“잘못하면 절손된다는 것 같던데…….”
강권은 지나는 말처럼 슬쩍 말했지만 정 노인에게는 마치 주술처럼 들렸다. 절손이 될 것이라는 조상의 유훈이 있었으니 전혀 근거 없는 말도 아니었다.
주자니 아깝고 그렇다고 안 줄 수도 없었다.
정 노인은 한참 고민을 하는가 싶더니 슬그머니 밖으로 나갔다 들어와 강권의 손에 백만 원짜리 수표 다섯 장을 놓아 주었다.
강권은 생전 보지도 못했던 빳빳한 백만 원짜리 수표를 처음으로 만져 보자 기분이 묘했다. 강권은 자신의 손에 거금을 쥐어 주고 떫은 표정으로 있는 노인에게 말을 건넸다.
“하하하. 노인장, 복 받으실 겁니다. 그런데 저도 한 가지 해 드릴 말씀이 있는데 그 말에 따르려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말인데 그러나? 큼큼, 그런다고 해서 더 줄 돈은 없네.”
노인은 귀신에 홀린 듯 5백만 원을 주었지만 속이 쓰린 모양인지 말투가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허! 돈이 없긴? 기 백억을 가지고 있으면서.’
강권은 돈을 더 요구하나 싶어 벌벌 떠는 노인의 행동에 내심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렇다고 웃을 수는 없어,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 당치 않다는 듯 정색을 하며 말했다.
“하하하. 노인장, 돈을 받자고 하는 일은 아닙니다. 그럼 복채를 미리 받았다고 치고 말씀을 드리지요.”
강권은 이렇게 운을 떼고 노인에게 말했다.
“노인장은 을유생(乙酉生)이시죠?”
“아니, 그걸 어떻게?”
“그것뿐이 아니고 년, 월, 일, 시, 네 개의 기둥이 모두 을유니 이른바 을유 일기생성격(一氣生成格)의 상당히 좋은 사주를 타고 나셨군요. 노인장의 사주로는 몸이 좀 약하시다는 것을 빼고는 평생을 무탈하게 보내셨을 것 같습니다만.”
“…….”
노인은 강권이 자신의 사주를 맞추자 경악해서 입을 딱 벌리고 말을 잃어버렸다. 사실 자신이 을유생임을 아는 것이야 자신이 보증인으로 자처했으니 병원서류를 봤으면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백일을 세고 호적에 올렸으니 병원서류를 봐서는 실제 사주를 절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생전 초면인 자신의 사주를 어떻게 알 수 있냔 말이다. 강권은 경악한 나머지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 있는 노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또 골골백년이라고 앞으로도 40여 년은 거뜬하니 고손자 볼 때까지 사실 수 있을 것 같네요. 다만 요즈음 들어 아이들이 속을 부쩍 썩여서 제명에 못 살 것 같은 생각이 문득문득 드시지요?”
“아니 그걸 어떻게?”
뜬금없는 말이지만 틀린 말은 없었다. 아니, 너무 딱 들어맞았다. 너무 놀란 나머지 자기 자식들보다 나이가 훨씬 어린 강권이 그들에게 아이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좀 어폐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도 못했다.
“장남은 임자생(壬子生)인데 병오일(丙午日)에 태어났으니 아직은 때를 만나지 못해 당분간은 돈 좀 깨먹어야 할 겁니다. 거기에다 삼재까지 끼여 있어서 손재수를 면할 수 없을 겁니다.”
이제 노인은 너무 경악한 나머지 실성이라도 한 듯 입을 딱 벌렸다. 그도 그럴 것이 알려 준 적도 없는데 어떻게 자기 사주며, 장남의 사주를 알 수 있단 말인가? 강권의 경이로운 능력에 놀란 정 노인은 당장 말투부터 달라졌다. 말투만 달라진 것이 아니고 강권의 어떤 말에도 따를 기세였다.
“그, 그럼 어떻게 액땜을 할 방법이라도 없겠습니까?”
그런데 웃긴 것은 대답하는 강권의 말투까지 달라졌다는 것이다. 마치 웃어른이 아랫사람에게 대하듯 ‘하게’ 투였다.
“하하, 액땜을 하기 위해서는 돈을 깨나 써야 할 거야. 기왕지사 그렇게 될 바에는 차라리 유학을 보내도록 하는 것이 어떨까? 큰 아들놈은 2014년부터 30년 대운이 시작될 것이야. 바라던 장손자도 그때 가서야 태어날 것이고, 그 장손자 녀석은 재복을 타고난 인물이어서 그 녀석 덕분에 이후의 일은 슬슬 풀려 나갈 것이야. 그러니 큰 녀석이 하고 싶다는 사업은 그때 시작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어.”
정 노인은 강권의 말이 허리가 자끈동 부러져서 반 토막이 된 것을 깨닫지 못하고 물음을 계속 이어 갔다. 하기야 알았다고 하더라도 점사(占事)를 보는 사람들 말투가 대부분 그러니 크게 개의치 않았을지도 모른다.
“둘째는 어떻겠습니까?”
“둘째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놓아두는 것이 좋을 것이고, 또 셋째에게는 조만간 경사가 있을 것이야. 딸이라고 섭섭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체조를 시키면 세상을 그놈 발아래 두겠어. 김연아 알지? 그 김연아처럼 돈과 명예가 함께할 것이라는 말이지. 막내딸은 지금 오가는 혼담은 아예 없는 걸로 하고, 지금 사귀고 있는 사람과 혼인시키는 것이 좋을 것이야.”
정 노인은 자신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강권이 자신의 가려운 곳을 차례로 긁어 주자 당장 마음이 달라졌다.
하지만 지금 막내딸과 혼담이 오가는 상대는 사법 고시 합격자로 지금 연수원 2년차였다. 게다가 연수원 성적까지 좋아서 검사건 판사건 자기가 가고 싶은 대로 진로를 결정할 수 있다고 했다.
돈이 좀 있으면 권력을 잡고 싶다고 신도시 건설 덕에 수백억 원을 만지게 되자 딸이 싫다는 걸 억지로 붙이고 있던 차였다.
정 노인은 내심 지금껏 투자한 것이 아까운 생각이 들어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정말 그래야 되겠습니까?”
“영감, 무슨 얘기가 듣고 싶은데? 아깝겠지? 못해도 지검장까지는 해먹을 녀석인데 여북하겠어?”
“지, 지검장까지요?”
“허허, 관살이 있다고 다 좋은 것만은 아니야. 그 칼이 내 목을 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지. 처가 재산을 가로채려고 법의 칼을 서슴없이 휘두를 녀석이라고. 우선 먹기가 달다고 자기의 체질은 생각지도 않고 곶감을 잔뜩 주워 먹으면 똥구멍이 막히는 법이야. 딱 그런 격이지. 억지로 결혼을 시키면 X 주고 뺨 맞는다는 말처럼, 득은 없고 실만 가득할 것이야.”
“그, 그렇지만…….”
정 노인은 못해도 지검장까지 해 먹을 수 있다는 말에 미련이 남는 모양이었다.
강권은 그런 정 노인에게 구미가 당기는 미끼를 던져 주었다.
“지금 막내와 사귀고 있는 아이는 앞으로 큰 아이에게 큰 도움을 줄 상대이니, 이 기회에 몽땅 유학을 보내 버려. 한 3년 투자한다고 생각하고 유학을 보내면 그 천 곱, 만 곱이 되어서 돌아올 거야.”
“하면……?”
“하면은 개뿔이나 뭐가 하면이야? 장남 부부와 막내와 막내의 짝이 될 녀석을 한 2∼3년간 멀리 서쪽으로 유학 보내 버리라고. 유럽도 좋고 미국도 좋아. 그 검사 녀석 욕심내면 절대 안 돼, 꿈 깨. 영감, 나이가 한두 개야? 액땜이라고 생각하고 기왕 준 것은 잊어버려. 끌끌, 벌써 이것 100배 정도는 들였겠구먼. 그렇지만 본전 생각이 난다고 뭉그적거리다가는 필경 재물은 재물대로 깨지고 사람은 사람대로 병신이 되고 말지. 아암, 기껏 죽 쒀서 개 아가리에 몽땅 털어 넣지 않으려면 때로는 포기할 필요도 있는 것이야.”
정 노인은 봉투를 들어 보이며 ‘이것 100배 정도는 들였겠구먼.’ 하는 말에 예비 사위에게 외제 승용차와 원룸을 사 준 것까지 아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서늘해졌다.
‘어, 어떻게 그 사실까지 알 수가 있지?’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물건을 주고받은 당사자들뿐이었다. 마누라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딸도 이 사실을 모른다. 예비 사위에게는 중매쟁이에게조차 비밀로 하자고 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어떻게 안단 말인가?
정 노인은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완전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이 인간, 도대체 모르는 것이 무어야?’
아무리 생각을 하고 또 해 봐도 맞춰도 너무 잘 맞혔다.
죽겠다고 소주에다 수면제를 먹고 지하철 선로에 누워 있을 때는 비렁뱅이에 불과했는데, 이제 보니까 완전 도사다.
정 노인은 후손을 생각해서 이렇게 뛰어난 인물과 연계시켜 주신 조상님의 혜안에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 *
강권의 신통함에 완전 매료된 노인은 병실에서 살 기세로 짐을 한 보따리 싸 들고 아예 진천에서 올라왔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처와 자식들까지 데려와서 강권에게 인사를 시켰다.
그리고 누가 보건 말건 강권을 대하기를 마치 다시 살아 돌아온 조상을 모시는 듯했다. 처와 자식들에게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국물도 없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것을 보는 의사와 간호사들은 혀를 내두른다.
“이 선생, 저 노인과 최강권 환자와는 어떻게 되는 사이야? 친척이라도 되나?”
간호사인 이강미는 담당 의사인 손필도의 물음에 금시초문이라는 듯 대답했다.
“선생님, 제가 알기로는 아닌 것 같던데요? 119 구급대원의 말도 두 사람이 전혀 인척 관계가 아니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죽은 조상이 살아 돌아오기라도 한 듯 끔찍하게 섬긴다는 거야? 나이나 많으면 그런다고나 하지만 새파랗게 어린애한테 저러니, 도무지 헷갈려서 영문을 모르겠단 말이야.”
“그나저나 선생님, 최강권 환자의 발목을 자르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제가 볼 때는 괴사가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는 것 같던데…… 조금 더 머뭇거리다가는 발목만 자를 것을 무릎까지 자르게 되는 것 아니에요?”
“그러게…… 나도 자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보호자로 자칭하는 노인네에게 말해 보았는데,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자르지 말고 치료를 하라고 한사코 우기니,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의사가 모르면 어쩌겠다는 말인가?
그런데 거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강권의 발목은 완전하게 염증을 가라앉히지 않고 치료를 그만둔 통에 서서히 악화되다 급기야 괴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 괴사라는 것은 썩은 부위를 도려내지 않으면 다른 부위로 전이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환부를 도려내는 것이 근원적인 치료책이 되는 것이다. 이강미가 걱정하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의사인 손필도가 보는 관점은 간호사인 이강미와는 조금 달랐다.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전혀 차도가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지만 괴사된 부분이 조금씩 살아나는 것 같았던 것이다.
희한한 일이었다. 의사인 손필도가 그 원인을 알면 희한하다는 말을 쓰지 않는다. 강권의 상세가 조금씩 호전의 기미를 보인 것은 환자가 제정신을 차리면서부터였다.
그것은 무진신공의 공능 때문이었지만 손필도로서는 도무지 그 원인을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괴사된 세포가 다시 살아나는 기미는 너무나 미약해서 어떻게 보면 차도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손필도도 쓰다 달다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말은 저렇게 잠시 호전되는 것처럼 보이다 갑작스럽게 괴사가 진행될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되면 발목을 자를 것을 대퇴부까지 절단해야 하거나 심지어는 목숨까지 잃게 되는 불행한 사태에 직면하게 될 수도 있다. 실제로도 그럴 확률이 컸다.
주치의 손필도는 환자에게 현재 상태를 정확히 얘기해서 환자가 직접 가부간 결정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정 노인이 없는 틈에 조용히 강권을 불러 현재 상태에 대해서 말하고는 결정을 내리라고 했다. 강권에게 결정을 내리라고는 했지만 사실상 자르겠다는 통보였다.
전생을 읽기 전이었다면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겠지만 지금은 머리가 깨어 담당 의사가 말하는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내 발을 자르겠다고?’
강권은 완전 어이가 없었다. 더 어이가 없는 것은 대부분의 의사들이 그렇듯이 마치 개나 돼지의 발목을 자르는 듯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는 거다. 자신의 발을 자르자는 말을 듣자 기분이 엄청 더러워서 강권은 따지듯 말했다.
“그러니까 의사 선생은 내 발을 자르겠다는 겁니까?”
“흠흠, 꼭 자르겠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자칫 잘못되면 환자분의 목숨까지 위태로울 수 있다는 것이지요. 또한 재활의학이 발달해서 발 하나가 없어도 일상생활에는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의사 선생,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고 없고는 당사자의 주관적인 판단 아닙니까? 또 원인은 알 수 없지만 더 이상 악화되지 않고 있다면서요?”
“예,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더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괴사에 대한 여러 임상 서적을 보더라도 이런 경우가 가장 위험하다고 했습니다. 제 경험에 비추어 봐도 그렇고요.”
손필도의 사무적인 말투에 강권은 화를 벌컥 냈다. 그의 말이 기어이 자기의 발을 자르겠다는 의미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이런 돌팔이 같으니라고. 그러니까 괴사가 진행되고 있는 원인을 알지 못하니까 내 발을 자르시겠다. 웃기지 말라고. 장담을 하지만 내 수명은 당신 손자의 손자가 또 손자를 볼 때까지 살 수 있으니까 내 목숨은 걱정하지 말라고. 당장 퇴원을 하겠으니 그렇게 알아.”
“허, 지금 퇴원하시면 생명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꼭 그러시겠다면 할 수 없지만…….”
“내가 죽든 살든, 발목을 자르건 말건 그것은 전적으로 내 자유니까 의사 선생은 간섭하지 마시오. 아시겠소?”
강권은 병원 측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퇴원을 강행했다.
‘100억 원이나 들이고도 발을 절단한다면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는 게 낫지 않겠어?’
강권이 믿고 있는 것은 무진신공의 묘리 중에 인체의 자정 기능을 최적화시키는 법문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과거 정성기였을 때 오늘날을 대비해서 만들어 놓은 안배였다.
그 두 가지 중에서 한 가지만이라도 효과가 있다면 적어도 병신은 되지 않을 것이란 믿음도 있었다.
3화
정씨 가문에는 조상께서 꼭 지키라고 말씀하신 몇 가지의 유훈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유훈 중에 모년 모월 모일 어디에 가면 젊은이가 철마가 다니는 길에 누워 있으니 그 젊은이를 구하라는 것도 그중 하나였단다. 그리고 그 젊은이가 하는 말을 무조건 따르라고도 했다는 것이었다. 만약 그 젊은이를 구하지 못하면 집안이 절손된다면서.
자식들은 미신이니까 지킬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정 노인은 달랐다. 나이를 먹고 죽을 날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가문을 지키는 것이 선조에 대한 효도이고 도리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젊은이 그 도자기를 팔아 버렸다네. 그래서…….”
“으음, 그러셨군요. 그런데 꿈속의 노인장께선 후손들이 자기의 유훈만 충실하게 지켰으면 대대손손 갑부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텐데, 겨우 한 가지 정도만 지킬 것이라고 하시더니…… 그것이 사실인 모양이군요. 40여 년 전에 진천 땅을 팔아서 장자울[지금 압구정동]에 있는 배 밭을 사 두라고 하셨는데 영감님께선 ‘생거진천(生居鎭川) 사거용인(死居龍仁)[살아서는 진천이 좋고 죽어서는 용인이 좋다는 의미 임.]’이라고 우기면서 듣지 않으셨을 테고. 나중에 금싸라기 땅이 되자 후회가 막급해서 저에게 전해 주라는 도자기를 팔아서 연기에 땅 좀 사두었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허걱, 정말로 우리 조상님께서 자네의 꿈에 나타나셨는가? 정말로 자네가 우리 조상님의 목숨을 구해 주었는가?”
“하하, 그렇지 않으면 제가 어찌 그 내막을 알겠습니까? 꿈속의 노인장께선 도자기 판 돈을 모두 달라고 하라더군요. 한 10억쯤 된다고 하시던 것 같던데. 그렇지만 제 목숨도 구해 주셨는데 어떻게 전부를 바라겠습니까? 한 5백만 원 정도만 주십시오. 뭐, 주시기가 정 아까우면 안 주셔도 상관은 없고요.”
말은 이렇게 했다. 그렇지만 눈앞의 이 노인은 자기 혈족에게는 얼마를 써도 아까워하지 않는데 남에게는 단 한 푼 쓰는 것도 아까워한다는 게 떠올랐다. 노인이 믿는 것은 오로지 피 내림뿐이다. 극히 이기적인 삶을 살았던 정성기의 후손다운 태도였다. 이런 생각이 떠오르자 강권은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무진신공을 어느 정도 이루려면 전생에 안배해 둔 곳으로 가야 하는데…….’
정성기가 안배해 둔 곳은 가평에 있는 화악산이었다.
강권이 말한 5백만 원은 나름 계산한 여비와 1년 정도 수련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경비였다.
옛날 생각을 하고서 화악산까지 걸어갈 수도 있지만, 편하게 갈 수 있는 길을 굳이 어렵게 가고 싶지 않았다.
‘이 노인네가 믿는 것은 오로지 혈족뿐인데…….’
강권은 이런 생각을 하다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라 슬쩍 지나가는 말로 노인의 의중을 떠보았다.
“잘못하면 절손된다는 것 같던데…….”
강권은 지나는 말처럼 슬쩍 말했지만 정 노인에게는 마치 주술처럼 들렸다. 절손이 될 것이라는 조상의 유훈이 있었으니 전혀 근거 없는 말도 아니었다.
주자니 아깝고 그렇다고 안 줄 수도 없었다.
정 노인은 한참 고민을 하는가 싶더니 슬그머니 밖으로 나갔다 들어와 강권의 손에 백만 원짜리 수표 다섯 장을 놓아 주었다.
강권은 생전 보지도 못했던 빳빳한 백만 원짜리 수표를 처음으로 만져 보자 기분이 묘했다. 강권은 자신의 손에 거금을 쥐어 주고 떫은 표정으로 있는 노인에게 말을 건넸다.
“하하하. 노인장, 복 받으실 겁니다. 그런데 저도 한 가지 해 드릴 말씀이 있는데 그 말에 따르려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말인데 그러나? 큼큼, 그런다고 해서 더 줄 돈은 없네.”
노인은 귀신에 홀린 듯 5백만 원을 주었지만 속이 쓰린 모양인지 말투가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허! 돈이 없긴? 기 백억을 가지고 있으면서.’
강권은 돈을 더 요구하나 싶어 벌벌 떠는 노인의 행동에 내심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렇다고 웃을 수는 없어,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 당치 않다는 듯 정색을 하며 말했다.
“하하하. 노인장, 돈을 받자고 하는 일은 아닙니다. 그럼 복채를 미리 받았다고 치고 말씀을 드리지요.”
강권은 이렇게 운을 떼고 노인에게 말했다.
“노인장은 을유생(乙酉生)이시죠?”
“아니, 그걸 어떻게?”
“그것뿐이 아니고 년, 월, 일, 시, 네 개의 기둥이 모두 을유니 이른바 을유 일기생성격(一氣生成格)의 상당히 좋은 사주를 타고 나셨군요. 노인장의 사주로는 몸이 좀 약하시다는 것을 빼고는 평생을 무탈하게 보내셨을 것 같습니다만.”
“…….”
노인은 강권이 자신의 사주를 맞추자 경악해서 입을 딱 벌리고 말을 잃어버렸다. 사실 자신이 을유생임을 아는 것이야 자신이 보증인으로 자처했으니 병원서류를 봤으면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백일을 세고 호적에 올렸으니 병원서류를 봐서는 실제 사주를 절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생전 초면인 자신의 사주를 어떻게 알 수 있냔 말이다. 강권은 경악한 나머지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 있는 노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또 골골백년이라고 앞으로도 40여 년은 거뜬하니 고손자 볼 때까지 사실 수 있을 것 같네요. 다만 요즈음 들어 아이들이 속을 부쩍 썩여서 제명에 못 살 것 같은 생각이 문득문득 드시지요?”
“아니 그걸 어떻게?”
뜬금없는 말이지만 틀린 말은 없었다. 아니, 너무 딱 들어맞았다. 너무 놀란 나머지 자기 자식들보다 나이가 훨씬 어린 강권이 그들에게 아이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좀 어폐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도 못했다.
“장남은 임자생(壬子生)인데 병오일(丙午日)에 태어났으니 아직은 때를 만나지 못해 당분간은 돈 좀 깨먹어야 할 겁니다. 거기에다 삼재까지 끼여 있어서 손재수를 면할 수 없을 겁니다.”
이제 노인은 너무 경악한 나머지 실성이라도 한 듯 입을 딱 벌렸다. 그도 그럴 것이 알려 준 적도 없는데 어떻게 자기 사주며, 장남의 사주를 알 수 있단 말인가? 강권의 경이로운 능력에 놀란 정 노인은 당장 말투부터 달라졌다. 말투만 달라진 것이 아니고 강권의 어떤 말에도 따를 기세였다.
“그, 그럼 어떻게 액땜을 할 방법이라도 없겠습니까?”
그런데 웃긴 것은 대답하는 강권의 말투까지 달라졌다는 것이다. 마치 웃어른이 아랫사람에게 대하듯 ‘하게’ 투였다.
“하하, 액땜을 하기 위해서는 돈을 깨나 써야 할 거야. 기왕지사 그렇게 될 바에는 차라리 유학을 보내도록 하는 것이 어떨까? 큰 아들놈은 2014년부터 30년 대운이 시작될 것이야. 바라던 장손자도 그때 가서야 태어날 것이고, 그 장손자 녀석은 재복을 타고난 인물이어서 그 녀석 덕분에 이후의 일은 슬슬 풀려 나갈 것이야. 그러니 큰 녀석이 하고 싶다는 사업은 그때 시작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어.”
정 노인은 강권의 말이 허리가 자끈동 부러져서 반 토막이 된 것을 깨닫지 못하고 물음을 계속 이어 갔다. 하기야 알았다고 하더라도 점사(占事)를 보는 사람들 말투가 대부분 그러니 크게 개의치 않았을지도 모른다.
“둘째는 어떻겠습니까?”
“둘째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놓아두는 것이 좋을 것이고, 또 셋째에게는 조만간 경사가 있을 것이야. 딸이라고 섭섭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체조를 시키면 세상을 그놈 발아래 두겠어. 김연아 알지? 그 김연아처럼 돈과 명예가 함께할 것이라는 말이지. 막내딸은 지금 오가는 혼담은 아예 없는 걸로 하고, 지금 사귀고 있는 사람과 혼인시키는 것이 좋을 것이야.”
정 노인은 자신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강권이 자신의 가려운 곳을 차례로 긁어 주자 당장 마음이 달라졌다.
하지만 지금 막내딸과 혼담이 오가는 상대는 사법 고시 합격자로 지금 연수원 2년차였다. 게다가 연수원 성적까지 좋아서 검사건 판사건 자기가 가고 싶은 대로 진로를 결정할 수 있다고 했다.
돈이 좀 있으면 권력을 잡고 싶다고 신도시 건설 덕에 수백억 원을 만지게 되자 딸이 싫다는 걸 억지로 붙이고 있던 차였다.
정 노인은 내심 지금껏 투자한 것이 아까운 생각이 들어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정말 그래야 되겠습니까?”
“영감, 무슨 얘기가 듣고 싶은데? 아깝겠지? 못해도 지검장까지는 해먹을 녀석인데 여북하겠어?”
“지, 지검장까지요?”
“허허, 관살이 있다고 다 좋은 것만은 아니야. 그 칼이 내 목을 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지. 처가 재산을 가로채려고 법의 칼을 서슴없이 휘두를 녀석이라고. 우선 먹기가 달다고 자기의 체질은 생각지도 않고 곶감을 잔뜩 주워 먹으면 똥구멍이 막히는 법이야. 딱 그런 격이지. 억지로 결혼을 시키면 X 주고 뺨 맞는다는 말처럼, 득은 없고 실만 가득할 것이야.”
“그, 그렇지만…….”
정 노인은 못해도 지검장까지 해 먹을 수 있다는 말에 미련이 남는 모양이었다.
강권은 그런 정 노인에게 구미가 당기는 미끼를 던져 주었다.
“지금 막내와 사귀고 있는 아이는 앞으로 큰 아이에게 큰 도움을 줄 상대이니, 이 기회에 몽땅 유학을 보내 버려. 한 3년 투자한다고 생각하고 유학을 보내면 그 천 곱, 만 곱이 되어서 돌아올 거야.”
“하면……?”
“하면은 개뿔이나 뭐가 하면이야? 장남 부부와 막내와 막내의 짝이 될 녀석을 한 2∼3년간 멀리 서쪽으로 유학 보내 버리라고. 유럽도 좋고 미국도 좋아. 그 검사 녀석 욕심내면 절대 안 돼, 꿈 깨. 영감, 나이가 한두 개야? 액땜이라고 생각하고 기왕 준 것은 잊어버려. 끌끌, 벌써 이것 100배 정도는 들였겠구먼. 그렇지만 본전 생각이 난다고 뭉그적거리다가는 필경 재물은 재물대로 깨지고 사람은 사람대로 병신이 되고 말지. 아암, 기껏 죽 쒀서 개 아가리에 몽땅 털어 넣지 않으려면 때로는 포기할 필요도 있는 것이야.”
정 노인은 봉투를 들어 보이며 ‘이것 100배 정도는 들였겠구먼.’ 하는 말에 예비 사위에게 외제 승용차와 원룸을 사 준 것까지 아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서늘해졌다.
‘어, 어떻게 그 사실까지 알 수가 있지?’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물건을 주고받은 당사자들뿐이었다. 마누라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딸도 이 사실을 모른다. 예비 사위에게는 중매쟁이에게조차 비밀로 하자고 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어떻게 안단 말인가?
정 노인은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완전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이 인간, 도대체 모르는 것이 무어야?’
아무리 생각을 하고 또 해 봐도 맞춰도 너무 잘 맞혔다.
죽겠다고 소주에다 수면제를 먹고 지하철 선로에 누워 있을 때는 비렁뱅이에 불과했는데, 이제 보니까 완전 도사다.
정 노인은 후손을 생각해서 이렇게 뛰어난 인물과 연계시켜 주신 조상님의 혜안에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 *
강권의 신통함에 완전 매료된 노인은 병실에서 살 기세로 짐을 한 보따리 싸 들고 아예 진천에서 올라왔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처와 자식들까지 데려와서 강권에게 인사를 시켰다.
그리고 누가 보건 말건 강권을 대하기를 마치 다시 살아 돌아온 조상을 모시는 듯했다. 처와 자식들에게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국물도 없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것을 보는 의사와 간호사들은 혀를 내두른다.
“이 선생, 저 노인과 최강권 환자와는 어떻게 되는 사이야? 친척이라도 되나?”
간호사인 이강미는 담당 의사인 손필도의 물음에 금시초문이라는 듯 대답했다.
“선생님, 제가 알기로는 아닌 것 같던데요? 119 구급대원의 말도 두 사람이 전혀 인척 관계가 아니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죽은 조상이 살아 돌아오기라도 한 듯 끔찍하게 섬긴다는 거야? 나이나 많으면 그런다고나 하지만 새파랗게 어린애한테 저러니, 도무지 헷갈려서 영문을 모르겠단 말이야.”
“그나저나 선생님, 최강권 환자의 발목을 자르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제가 볼 때는 괴사가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는 것 같던데…… 조금 더 머뭇거리다가는 발목만 자를 것을 무릎까지 자르게 되는 것 아니에요?”
“그러게…… 나도 자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보호자로 자칭하는 노인네에게 말해 보았는데,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자르지 말고 치료를 하라고 한사코 우기니,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의사가 모르면 어쩌겠다는 말인가?
그런데 거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강권의 발목은 완전하게 염증을 가라앉히지 않고 치료를 그만둔 통에 서서히 악화되다 급기야 괴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 괴사라는 것은 썩은 부위를 도려내지 않으면 다른 부위로 전이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환부를 도려내는 것이 근원적인 치료책이 되는 것이다. 이강미가 걱정하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의사인 손필도가 보는 관점은 간호사인 이강미와는 조금 달랐다.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전혀 차도가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지만 괴사된 부분이 조금씩 살아나는 것 같았던 것이다.
희한한 일이었다. 의사인 손필도가 그 원인을 알면 희한하다는 말을 쓰지 않는다. 강권의 상세가 조금씩 호전의 기미를 보인 것은 환자가 제정신을 차리면서부터였다.
그것은 무진신공의 공능 때문이었지만 손필도로서는 도무지 그 원인을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괴사된 세포가 다시 살아나는 기미는 너무나 미약해서 어떻게 보면 차도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손필도도 쓰다 달다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말은 저렇게 잠시 호전되는 것처럼 보이다 갑작스럽게 괴사가 진행될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되면 발목을 자를 것을 대퇴부까지 절단해야 하거나 심지어는 목숨까지 잃게 되는 불행한 사태에 직면하게 될 수도 있다. 실제로도 그럴 확률이 컸다.
주치의 손필도는 환자에게 현재 상태를 정확히 얘기해서 환자가 직접 가부간 결정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정 노인이 없는 틈에 조용히 강권을 불러 현재 상태에 대해서 말하고는 결정을 내리라고 했다. 강권에게 결정을 내리라고는 했지만 사실상 자르겠다는 통보였다.
전생을 읽기 전이었다면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겠지만 지금은 머리가 깨어 담당 의사가 말하는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내 발을 자르겠다고?’
강권은 완전 어이가 없었다. 더 어이가 없는 것은 대부분의 의사들이 그렇듯이 마치 개나 돼지의 발목을 자르는 듯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는 거다. 자신의 발을 자르자는 말을 듣자 기분이 엄청 더러워서 강권은 따지듯 말했다.
“그러니까 의사 선생은 내 발을 자르겠다는 겁니까?”
“흠흠, 꼭 자르겠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자칫 잘못되면 환자분의 목숨까지 위태로울 수 있다는 것이지요. 또한 재활의학이 발달해서 발 하나가 없어도 일상생활에는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의사 선생,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고 없고는 당사자의 주관적인 판단 아닙니까? 또 원인은 알 수 없지만 더 이상 악화되지 않고 있다면서요?”
“예,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더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괴사에 대한 여러 임상 서적을 보더라도 이런 경우가 가장 위험하다고 했습니다. 제 경험에 비추어 봐도 그렇고요.”
손필도의 사무적인 말투에 강권은 화를 벌컥 냈다. 그의 말이 기어이 자기의 발을 자르겠다는 의미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이런 돌팔이 같으니라고. 그러니까 괴사가 진행되고 있는 원인을 알지 못하니까 내 발을 자르시겠다. 웃기지 말라고. 장담을 하지만 내 수명은 당신 손자의 손자가 또 손자를 볼 때까지 살 수 있으니까 내 목숨은 걱정하지 말라고. 당장 퇴원을 하겠으니 그렇게 알아.”
“허, 지금 퇴원하시면 생명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꼭 그러시겠다면 할 수 없지만…….”
“내가 죽든 살든, 발목을 자르건 말건 그것은 전적으로 내 자유니까 의사 선생은 간섭하지 마시오. 아시겠소?”
강권은 병원 측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퇴원을 강행했다.
‘100억 원이나 들이고도 발을 절단한다면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는 게 낫지 않겠어?’
강권이 믿고 있는 것은 무진신공의 묘리 중에 인체의 자정 기능을 최적화시키는 법문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과거 정성기였을 때 오늘날을 대비해서 만들어 놓은 안배였다.
그 두 가지 중에서 한 가지만이라도 효과가 있다면 적어도 병신은 되지 않을 것이란 믿음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