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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제4장-인연과 악연
“큼큼, 고맙습니다. 신세를 지게 됐습니다.”
강권은 차에 타면서 공연스레 겸연쩍어 헛기침을 한바탕 하고는 아가씨들에게 말을 건넸다. 일단 말은 건넸지만 강권은 차 안의 향기에 취해 얼굴이 벌게졌다. 향수라고는 싸구려 *오데 코롱[오데 코롱:향수는 퍼퓸(향수 원액이 약 15∼20%), 오데 퍼퓸(10∼15%), 오드 뚜왈렛(5∼10%), 오데 코롱(3∼8%), 샤워 코롱(1∼5%) 등으로 분류된다. 당연히 향수 원액의 농도가 가장 짙은 퍼퓸이 향기가 가장 오래 지속되고(약 12시간), 농도가 가장 옅은 샤워 코롱이 금방 향기가 날라간다.]만을 써 본 강권으로서는 고급 향수 냄새에 가벼운 거부감이 들어 인상을 약간 찡그렸다. 그런 강권의 모습을 본 아가씨들도 그제야 생면부지의 사내를 자신들의 차에 태웠다는 생각이 든 듯 떨리는 목소리로 대꾸를 했다.
“호호, 별말씀을요. 옆에서 보니까 저희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도 거뜬히 헤쳐 나갔을 것 같은데요 뭘.”
“하하하, 그렇기야 하지만, 쓸데없는 싸움으로 모양새를 구기는 것보다 이렇게라도 싸움을 피하는 게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그야 그렇지만요.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싸움을 잘하죠? 운동을 많이 하셨나 봐요?”
“하하, 운동이랄 것도 없습니다. 어디서 얻어맞고 다니지 않을 정도는 됩니다.”
세나는 룸미러를 통해서 뒷좌석에 앉은 강권을 훔쳐보았다.
일장의 박투를 보니 고미술상에서 볼 때와는 다르게 남자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염만 덥수룩 할뿐 야리야리하게 봤는데 그게 아니네. 이래서 진인(眞人)은 저잣거리에 있다는 말이 나왔나? 완전 죽이는데.’
판타지 작가인 세나는 꽃미남보다는 사내답게 생긴 타입을 선호하여서 강권이 마음에 쏙 들었다. 아까 싸우는 모습은 판타지나 무협지에서 나오는 기사들이나 무사들에 못지않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서 대뜸 강권의 이름부터 물었다. 남자 알기를 우습게 아는 세나로서는 정말 뜻밖이었다.
“저,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예에?”
“이름말이에요. 이름.”
“아! 저는 최강권이라고 합니다.”
“호호, 그러시군요. 저는 이세나고요. 이 지지배는 노경옥이에요. 참, 아까 그 도자기 진품이 맞지요?”
강권은 무슨 의도로 그런 질문을 하는지 몰라 대답을 하지 못하자 세나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거 진품이 맞으면 제가 팔아 드리려고요.”
강권은 뜻밖의 제안에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아가씨들이 운전하는 차가 고급 외제차라는 것이 떠오르자 어쩌면 이 아가씨들의 말이 농담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에? 제가 알기로는 10억이 넘어갈 텐데 그래도 가능하겠습니까?”
“호호호, 진품이라면 당연히 10억이 넘어가겠지요. 저희들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답니다.”
“큼큼, 그러시다면야. 예, 진품이 맞습니다.”
이렇게 대화를 하는 사이에 차는 한성대입구역 교차로를 지나고 있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경옥이 세나에게 물었다.
“세나야, 명희에게 말하게?”
“으응, 명희나 아니면 민지한테 사라고 그러지 뭐. 경옥아, 너는 명희 걔 집에 있나 전화나 해 봐라. 없으면 민지보고 우리 집으로 오라고 그래.”
돈 많은 사람들은 희귀한 골동품이나 그림이라면 돈이 얼마가 들던지 거리낌이 없다는 것을 모를 세나나 경옥이가 아니었다. 세나나 경옥이도 나름 그 돈 많은 사람들 축에 낄 수 있었고 또 골동품에도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0억이 넘어간다면 그녀들로서는 약간 무리여서 딴 친구에게 양보하려는 것이다.
“알았어.”
세나의 말에 경옥이가 명희와 민지에게 전화를 걸어 집에 있는지 알아보고는 말했다.
“세나야, 명희는 집에 있더라. 근데 민지는 회사에서 일 좀 보고 온다고 조금 늦겠다고 하던데.”
“민지는 구멍가게 하나 차려 놓고서 뭐가 그리 바쁜지 모르겠어? 만날 회사에 일이 있대. 경옥아, 그렇지 않아?”
“얘 세나야,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내가 알기로는 미림(美林)의 매출이 꽤 되는 것 같던데?”
“매출이 많아야 얼마나 되겠어? 우리나라 IT기업은 아직 구멍가게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안 그래?”
“그래도 그게 어디냐? 차린 지가 불과 4∼5년밖에 안 됐지만 기술로는 세계적으로 알아준다고 하던데.”
“그거야 민지 그 계집애가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고…… 그 정도 돈이야 나도 벌고 있다고.”
세나의 말은 과장이 약간 섞여 있기는 했지만 전혀 없는 말은 아니었다. 그녀가 쓴 판타지가 연달아 히트를 쳤고 특히 일본에서 100만 권이 넘게 팔려 나간 덕분에 수십억이 넘는 돈을 벌었다. 또 그녀의 작사, 작곡 실력이 엄청 좋아서 20여 곡이 넘는 히트곡을 만들어 저작권료도 짭짤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세나와 경옥이가 둘이 민지를 놓고 서로 티격태격하고 있을 때 차는 어마어마한 저택으로 들어갔다. 아마도 명희네 집에 다 온 모양이었다.
하지만 강권은 그녀들의 이야기는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말 이 아가씨들 사람들이 맞아?’
그녀들의 미모는 정말이지 TV에서나 보는 그런 것이고 풍기는 냄새 또한 처음 맡아 보는 것이어서 꼭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물론 강권은 전생에 경국지색들을 많이 보았었지만 지금 화장술이 워낙 발달했기 때문에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렇게 어리벙벙한 상태에서 본 저택의 규모는 강권의 상상을 완전 벗어나는 것이었다.
대지가 3,000평은 족히 될 것 같았고 건평이 100평이 훨씬 넘을 것 같은 주택이 2채가 있었다. 한 채는 대문에 붙어 있고, 다른 한 채는 잘 꾸며진 정원 너머 중앙에 있었다.
심산유곡에서나 볼 수 있는 기이한 모습을 한 소나무하며, 온갖 형상의 수석들이 조화를 이루어 악산(嶽山)의 면모를 자랑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그 악산의 중앙에는 호수를 연상케 하는 연못이 자리하고 있었고 연못의 주위에는 온갖 종류의 과실수들이 잘 익은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와! 이게 집이야, 대궐이야? 이런 곳에서 산다면 무슨 근심이 있겠어? 그나저나 내가 지금 여우들에게 홀린 건가?’
강권은 이 아가씨들과 저택의 아름다움에 놀라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세나와 경옥은 이곳에 여러 번 온 듯 거침이 없었다. 강권은 정원을 좀 더 구경하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녀들이 향하는 곳은 대문 옆에 있는 집, 사랑채였다.
사랑채 2층에 있는 응접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을 때 아름다운 아가씨가 올라왔다. 강권은 순간 이 아가씨가 이 저택의 주인임을 직감했다. 그녀에게서 풍겨지는 아우라와 포스가 장난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강권에게 자신의 신분을 알려 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녀는 세나와 경옥에게 농담을 했다.
“세나야, 경옥아, 니들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예까지 다 온 거냐?”
“명희야, 우리가 니네 집에 한 번도 오지 않은 것처럼 말하네. 얼마 전에도 왔었잖아.”
“호호, 그래. 이 지지배야 농담이다. 농담.”
세 여자가 한바탕 시시덕거리는 것을 듣고 있던 강권은 양해를 구하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명희는 강권이 화장실 가기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그나저나 저치는 누구냐? 니들하고 어떻게 된 사이고?”
이 물음의 답에 향후 최강권에 대한 대우가 결정이 될 것이다. 세나는 그걸 인식한 듯 진지하게 대답했다.
“최강권이라고 마이 달링이다.”
전혀 뜻하지 못한 세나의 말에 명희와 경옥이가 벙 져 있자 세나는 급급히 말을 바꿨다.
“얘들 좀 봐. 뭘 그렇게 심각해져? 나는 농담도 못하니?”
“이 지지배야, 농담도 할 게 있고 하지 못할 게 있는 거야. 어떻게 그런 농담을 할 수 있냐?”
“그게 어때서? 나는 저분이 마이 달링이면 소원이 없겠는데.”
“뭐야?”
세나의 말이 결코 장난만은 아님을 느낀 명희는 강권이란 사내가 나오면 다시 자세히 훑어보려는 생각을 가졌다.
그걸 알지 못하는 강권은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꼴이 말이 아님을 느꼈다. 간간이 개울물에 빨기는 했지만 근 1년 동안 입어서 후줄근해진 옷하며 덥수룩한 수염, 허리께까지 늘어진 머리가 걸개신공의 경지가 상당함을 증명하는 듯했다.
‘이거 거지도 완전 상거지군. 덥수룩한 수염이야 사내니 그렇다 치더라도 이 헝클어진 머리는 또 뭐고.’
강권은 전생에 상당히 수양을 했었고, 그 영향으로 현생에서도 나름 침착한 편이었다.
하지만 완전 미스코리아 뺨치는 아가씨들에, 대궐 같은 저택에 절로 작아지는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당장 머리부터 정리해야겠어.’
강권은 이런 생각을 하며 겉옷을 벗어 들고 지난 2년간 길러서 치렁치렁해진 머리를 가지런히 묶었다. 머리를 묶고서 다시 거울을 보니 조금 나아 보인다.
강권이 밖으로 나가자 세 여자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시시덕거리면서 수다를 늘어놓고 있었다.
강권은 막상 도자기를 팔아 돈을 만들겠다는 일념에 이곳으로 따라오기는 했지만 이곳 분위기가 묘함을 느꼈다. 10억이 넘어가는 고가의 물건을 사려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마치 재미있는 장난감을 사려고 구경하려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무엇보다 세 여자들이 자기를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여자들에게 한 번도 주목을 받지 못했던 강권으로서는 세 명의 선녀 같은 아가씨들에게 둘러싸여 있자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명철로 살 때나, 정성기로 살 때 아름다운 여자들과 관계를 했었던 적은 있었지만 지금 강권은 완전 숫총각이어서 그 당시의 경험은 크게 도움이 못되었다.
강권은 더 이상 시간을 끄는 게 부담스러워서 배낭에서 도자기를 꺼내려다 경악성을 토해 냈다.
“앗!”
강권의 비명에 세 여자들의 시선이 강권의 얼굴로 향했다.
강권의 얼굴이 창백해진 것을 본 세나가 그 연유를 물었다.
“강권 씨, 왜 그러세요?”
“아! 아닙니다. 잠깐 일이 있어서 그만…….”
강권은 잠깐 가방을 맡아 달라는 말을 남기고 무언가에 쫓기는 듯 대답도 듣지 않고 허둥지둥 밖으로 나가 버렸다.
세 아가씨들은 강권의 느닷없는 행동에 벙 져 있다가 왜 그런지 궁금해졌다.
“저치, 배낭 안을 본 후에 안색이 흙빛이 되어서 나가는 것 맞지?”
“으응, 그런 것 같아.”
“도대체 배낭 안에 뭐가 들었기에 그런 쪼잔한 행동을 했을까?”
명희가 이렇게 중얼거리며 배낭 안을 슬쩍 엿보았다.
배낭 안에는 주둥이가 깨진 도자기와 십여 개의 보석처럼 반짝이는 돌들이 들어 있었다.
“쯧쯧, 저치가 이래서 그랬구나. 그렇지만 자고로 사내대장부는 하늘이 무너져도 진중해야 하거늘, 겨우 도자기가 깨졌다고 천하의 사내대장부가 되어서 저렇게 사색이 저렇게 허둥대서야 어디다 쓸꼬?”
명희가 혀를 끌끌 차면서 한 소리를 했다.
최소한 10억이 넘어가는 도자기가 깨진 것을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하는 당치않은 소리였다. 100억이 넘는 로또 용지를 강탈당했고 이번에는 돈이 될 거라 생각했던 강권의 입장을 모르니 하는 소리였다. 하기야 몇 조의 재산을 갖고 있는 명희로서는 10억이 우스울 수도 있을 것이지만 세나나 경옥이로서는 그런 명희가 은근 반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얘, 어떻게 된 거야?”
명희는 이번에는 세나에게 짜증이 물씬 풍기는 어투로 물었다.
자칫했으면 몇 백도 받을 수 없는 것을 십 몇 억을 주고 살 뻔했으니 명희의 물음은 추궁이나 마찬가지였다.
돈이야 그녀들 사이에서는 그다지 큰 문제는 아니었지만 명희의 물음에 세나나 경옥이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골동품 상점에서 도자기가 멀쩡했었다는 것을 목격했었던 그녀들로서도 귀신이 곡할 노릇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세나와 경옥이는 할 말을 잃고 한참이나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명희의 집요한 추궁이 이어지자 세나가 한숨을 쉬며 대답을 했다.
“휴우, 믿을지 모르겠는데 우리가 인사동 고미술상에서 볼 때만 해도 그 도자기는 멀쩡했어. 그런데 고미술상 주인이 그 도자기를 탐내서 강 사장이란 사람에게 큰 것 한 장을 준다고 도자기를 뺏으라고 했어. 그리고 조폭들이 그 도자기가 담긴 배낭을 뺏으려고 했고. 그 사람이 그 조폭들을 혼내 줬어, 그러고 나서 도자기가 이 모양이 된 거야.”
“세나 말이 맞아. 고미술상 사장이 강 사장이란 사람에게 전화하는 것을 들었걸랑. 참, 동영상을 찍어 둔 게 있으니까 확인을 해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동영상을 찍어 놓은 게 있다고?”
“그래, 컴퓨터 좀 가져 오라고 해 봐.”
명희가 비서들에게 지시하자 금방 노트북을 가져왔다. 경옥은 자신이 찍은 동영상을 컴퓨터 모니터에 연결해 인사동에서 벌어졌던 한판의 드잡이를 재생했다.
그렇지만 동영상 속의 강권의 움직임이 너무나 빨라서 순식간에 덩치들의 뒤에 착지한 것만 보였고 그 다음에 이어지는 장면들은 싸구려 액션 영화의 한 장면일 뿐이었다.
이 동영상으로 봐서는 도자기가 깨진 원인이 짐작만 갈 뿐, 자세한 것은 알 수가 없었다. 아마 강권의 동작이 너무 빨라서 그럴 것이다. 명희가 그 점을 지적했다.
“얘, 동영상으로는 너무 빨라서 전혀 모르겠는데?”
“경옥아, 좀 천천히 돌려 봐.”
“세나야, 알았어.”
경옥이가 컴퓨터를 조작해서 동영상을 천천히 돌아가게 만들었다. 그러자 그냥 뛰어넘은 것으로 보였던 강권의 움직임은 선 자세에서 뒤로 점프를 해서 부딪혀 오는 덩치들의 몸을 감싸는 듯 돌면서 한 바퀴를 타고 넘는 것이었다. 도저히 인간의 몸으로 할 수 있는 동작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다음 동작들은 그보다 더 경이로움을 주었다. 내려찍듯 배낭끈을 잡고 있는 덩치의 정강이를 발로 차고 걷어찬 탄력으로 허공에 몸을 띄워 360도를 회전하면서 세 덩치의 턱을 걷어차고 있었다. 완전 일 타 삼피가 아닐 수 없었다.
더 놀라운 것은 10배 감속해서 슬로우 비디오로 보고 있었지만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빠른 것 같다는 거다.
“앗! 어떻게 저런 동작이 정말 가능할까?”
“그러게…….”
“와! 너무 아름답다. 체조 선수라도 저렇게 하는 것은 힘들 것 같은데, 어떻게 인간이 저렇게 할 수가 있지?”
“그것뿐이면 말도 안 해. 저 발차기는 완전 무림의 고수야. 고수.”
판타지 작가인 세나는 직업성 발언을 했다.
이렇듯 세 아가씨들은 도자기가 어떻게 깨졌는가 하는 것보다 강권이 어떻게 저런 동작을 할 수 있는 것에 더 관심을 가졌다.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이 자라온 아가씨들다운 호기심이었다.
한참 감탄을 하던 명희가 세나에게 물었다.
“세나야, 저 사람 연락처를 알고 있어?”
“연락처?”
“으응.”
“모르는데…….”
“뭐야? 이 지지배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어떻게 우리 집으로 데리고 올 수 있어?”
“그러니까 그것이…….”
궁지에 몰린 세나와 경옥이를 궁지에서 꺼내 준 사람은 명희네 집에서 집안일을 보는 비서였다.
“아가씨, 감정인들이 도착했는데, 이리로 모실까요?”
“예, 어서 모셔 오세요.”
잠시 후에 세 사람의 감정인들이 안으로 들어오면서 명희에게 인사를 했다. 본래 도자기 감정인과 서화 감정인 이렇게 두 사람만 불렀는데 한 사람은 태한 그룹 오너 집에 간다니까 곁다리로 따라온 모양이었다. 그 역시 오명희를 아는지 명희에게 인사를 했다.
“명희 아가씨, 오늘은 무슨 물건을 입수하셨는데 저를 그렇게 급하게 부르셨습니까?”
“저도 명희 아가씨가 오라고 해서 선약을 뒤로 물리고 급하게 달려왔습니다.”
“하하, 명희 아가씨, 요새는 왜 저를 불러 주시지 않습니까? 저도 먹고 살게 불러 주십시오.”
“호호. 선생님들, 고맙습니다. 어서들 오세요.”
태한 그룹의 오너 집인 만큼 감정인들은 TV에도 출연하는 이름 있는 사람들이었다.
“선생님들, 그런데 감정하려는 도자기가 이 모양인데 어쩌죠?”
감정인들은 오명희의 말에 도자기를 조심스럽게 살피더니 연신 찬탄을 금치 못했다.
“아! 조선 전기에 관요에서 나온 청화백자는 매우 드문데, 이렇게 깨끗하게 보존되었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하기야 여기나 오니까 이런 물건을 볼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명희 아가씨, 이보다 약간 후대의 도자기가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동양 도자기로는 최고가에 거래되었던 것은 익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도자기는 그보다 더 상품으로 칠 수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용의 발톱 또한 다섯 개이니 깨지지만 않았으면 최소한 30억 이상은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크리스티 경매장에 보냈다면 경매가가 천만 불도 넘게 책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깝게 깨져서 본래 가치의 1/5∼1/10이라고 보시면 될 것입니다.”
“선생님, 이 도자기가 그렇게나 좋은 것이에요?”
“예. 명희 아가씨, 두말하면 잔소리죠.”
이요상 감정위원은 목이 마른지 잠깐 목을 축인 후에 이 도자기에 대한 여담을 곁들였다.
“조선시대의 도자기에 용이 그려진 것을 보면 대부분 발톱이 세 개입니다. 그 이유는 발톱이 다섯 개인 용은 황제를 상징하기 때문이지요. 사대주의(事大主義)가 국가의 근본 정책인 조선에서는 황제에 대한 것은 금기나 다름없었지요. 그런데 조선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치 않았습니다. 또 그들에 동조하는 화공들이 그려진 용의 발톱은 당연 다섯 개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발톱이 세 개인 것보다 그 수효가 훨씬 적어서 그 결과 당연히 가격이 더 비쌀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