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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그런 안도감이 들자 이번에는 엄청난 고통이 밀려와 강권은 그만 의식을 잃어버렸다. 강권이 비록 정신을 잃었지만 지둔요상공은 먹이를 발견한 맹수처럼 몸속에 들어온 독을 신나게 먹어치우고 있었다. 지둔요상공의 요체는 땅의 기운을 몸속으로 끌어들여 그 기운으로 몸속의 나쁜 기운을 제어하는 것이었다.
나쁜 기운을 몸 밖으로 배출하지 않고 제어만 하는 것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나쁜 기운이라고 해서 항상 몸에 해로운 것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독의 대부분은 고단위의 에너지원이다. 그런데도 독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런 고단위의 에너지원을 인간이 소화시킬 수 없다는데 있었다. 인간이 소화를 시킬 수 없으니 독이 에너지원이 되지 않고 혈관을 막아서 피가 굳고 신경을 차단해서 몸이 마비된다.
그렇다면 독을 소화시키게 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정답은 소화를 시킬 수만 있다면 독은 더할 수 없는 영약이 된다는 것이다.
지둔요상공은 놀라울 정도의 위력을 발휘했다. 뼈와 살을 태울 정도로 지독한 독이 기로 바뀌면서 환골탈태를 하고도 아직 몸속에 남아 있는 불순물을 태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강권이 경험한 환골탈태는 완전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였고 이제야 완전한 환골탈태라는 말이 된다.
강권으로서는 전화위복이었다.
그렇지만 지둔요상공으로 독을 해독하는 과정은 사람의 몸으로는 견디기 어려운 인내를 요구했다. 강권은 이미 정신을 잃어 그런 고통에 시달리지 않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행운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이 정신을 잃지 않고 편공까지 운기를 했더라면 그만큼 고통은 더했겠지만 무공과 마법에서 더 높은 경지에 올랐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강권은 운기를 해서 몸의 상태를 알아보자 무진신공이 4성에 올랐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강권은 자신이 무려 3일 동안이나 기절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지만 한참 시간이 흘렀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았다.
그러자 명희라는 아가씨 집에 놓고 온 배낭이 생각났다.
“이거 아가씨들이 많이 기다리겠는데…….”
아가씨들의 면면을 떠올리다 문득 경옥이라는 아가씨가 엄청 친숙하게 다가왔다.
“혹시 그 아가씨가 전생에 나와 인연이 있었나?”
전생에 인연이 없다면 이처럼 가깝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경옥의 전생을 읽으려 했다.
그러자 뇌리에 처음 보는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돌아가고 있는 것에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아! 경옥이라 했던가? 그 애가 전생에 내 딸 미리내였어.”
미리내는 명철의 생을 살 당시에 구리(고구려의 다른 이름)의 공주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강권의 딸이었다. 스님이 어떻게 딸을 하면서 놀랄 수도 있겠지만 천살문은 본래 색계가 없으니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다. 강권은 경옥과 전생에서 부녀지간임을 알게 되자 경옥의 생에 대해서 관조를 했다.
자신 외에도 세 사람의 전생을 읽을 수 있다고 했는데 한 명은 명학이었고 이번이 두 번째인 셈이다. 그녀에 대한 전생을 읽자 현생에서 그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고 싶었다. 물론 이런 것은 강권의 할아버지가 복권이 되며 전생을 읽고 있는 자의 생각까지 읽을 수 있게 만들어 준 것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그녀가 살아온 현생까지도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이런 개자식이 감히…… 내 딸 미리내야. 이후부터는 내가 지켜 주기로 하마.”
정 노인 또한 자신의 후손이라면 후손이었지만 노경옥은 그와는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강권은 문득 무진신공이 4성에 올랐으니 가슴에 서클이 하나 더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심법을 운용했다.
얼마 후 서클이 4개나 되자 강권은 심법의 운용을 멈췄다.
편공까지 운기를 했었더라면 혹여 5서클에 올랐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것은 운명의 장난이요 강권의 복일 따름인 것이다.
“이제 4서클에 올랐는가?”
4서클에 오른 것은 무엇보다도 인비저빌리티 마법을 쓸 수 있어서 반가웠다. 투명인간이 되면 들키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이 그만큼 더 많아지기 때문이었다. 당장에 들키지 않고 고옥당을 털 수 있을 것이다. 사일런스 마법과 인비저빌리티 마법을 동시에 펼치면 어느 누가 강권의 존재를 눈치챌 수 있겠는가?
물론 강권이 아무 집이나 터는 도둑은 아니었지만 고옥당 사장은 아무나가 아니었다. 한마디로 나쁜 놈이었다. 그런 놈은 좀 괴로움을 당해도 된다는 것이 강권의 생각이었다.
일단 털고 나서 자신의 도자기가 깨진 것과 관련이 없다면 돌려주면 그뿐이었다. 물론 자기를 수고시킨 대가인 수수료조로 다소간 챙기고 난 나머지를 돌려주겠다는 말이었다.



제6장-청담동 칠 공주와 인연을 맺다


강권은 몸이 정상이 되자마자 문득 전생의 딸이었던 노경옥이 보고 싶어졌다. 물론 고옥당 사장 녀석과 되놈들에 대한 응징을 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군자의 복수는 10년 후라도 늦지 않다고 했으니 복수에 급급해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지금 노경옥에게 전화를 하지 않으면 왠지 후회를 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이미 정성기의 전생을 읽은 강권은 이런 예감이 예사로운 것은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경옥이의 연락처를 어떻게 하면 알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리자 머릿속에 스쳐 가는 전화번호가 있었다.
경옥의 전생을 읽으면서 자기도 모르게 알게 된 것이었다. 강권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전화를 걸었다.
“실례하겠습니다. 노경옥 씨 핸드폰이죠?”
―예, 맞기는 하지만 누구신데 저에게 전화를 하신 거죠?
“아! 다행히 전화번호가 맞는군요. 저는 노경옥 씨를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기억하고 계실지 모르겠는데 며칠 전에 고옥당에 도자기를 팔러 갔다가…….”
―아! 최강권 씨군요. 그런데 어떻게 제 전화번호를 알고…….
“저 그것이…….”
강권은 말문이 막혀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내가 네 전생을 읽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다행히 경옥이 더 이상 추궁을 하지 않아서 난처함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래요? 그렇지 않아도 아저씨에게 어떻게 연락하나 걱정했는데, 마침 잘 됐네요. 그런데 그날은 어떻게 된 일이예요?
“미안합니다. 갑자기 볼일이 생각나서 그만…….”
―그럼 명희네 집에 가서 돈과 다이아몬드 원석들을 받으셨어요?
“예에? 다이아몬드 원석들이라니요?”
강권이 깜짝 놀란 듯 반문하자 경옥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되물었다.
―갖고 오셨던 등산 배낭에 들어 있던 분홍색 보석들이요? 그게 다이아몬드 원석들이라던데 그걸 모르셨어요?
강권은 경옥의 말에 노옴이 했던 단단하고 비싸다는 말이 생각났다. 보석이라는 생각은 했었지만 그것이 다이아몬드 원석들일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해 보지 않았다. 우리나라에는 다이아몬드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 상식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명학이 소환했던 살라만다에 비교하다 마음에 들지 않아 노옴의 말을 허투루 들은 감도 없지 않아 있었다. 게다가 강권의 뇌리에는 무공을 높이려는 생각이 워낙 커서 재산에 대해 큰 욕심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강권은 그저 차 한 대 뽑아서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기가 충만한 곳에서 무공과 마법을 연마할 작정이었다. 산이나 들에는 먹을 게 천지이니 무슨 돈이 얼마나 들 것인가?
그래서 도자기를 팔아 10억 정도만 받으면 평생 사는 데 지장이 없다는 생각을 가져 그 이상은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아! 그 보석들 말이군요. 그게 다이아몬드 원석들이었군요.”
경옥은 강권의 대수롭지 않은 대답에 어이가 없었지만 강권이 가고 난 후에 벌어졌던 일을 말해 주었다.
경옥의 얘기로는 강권이 일언반구도 없이 뛰쳐나가고 얼마 후에 감정인이 와서 깨진 도자기의 감정가로 6억을 책정했다고 했다. 그래서 친구가 도자기를 사려고 6억 원을 준비해 두었다는 것이다. 강권으로서는 도자기가 깨져 완전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6억이라니 뜻밖에 횡재를 한 기분이 들었다.
“예에? 6억이라고요?”
―예. 강권 씨와 함께 갔던 곳에 사는 친구 명희가 그 도자기를 사기로 했거든요. 자세한 얘기는 만나서 하기로 하죠.
“그래요. 저도 아가씨에게 드릴 말씀도 있으니, 일단 만나기로 하죠. 어디서 볼까요?”
경옥은 강권이 만나자는 말에 본능적으로 잠시 머뭇거렸다.
강권과는 이상한 인연으로 만나기는 했지만 따지고 보면 전혀 낯선 사람인 까닭이었다. 그렇지만 만나서 수백억에 달하는 다이아몬드 원석들을 찾아주어야 했다. 또 자기 전화번호를 어떻게 아는지도 궁금해서 역시 만나는 게 좋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상한 것은 경옥도 그 사람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거다. 이때까지만 해도 경옥은 강권이란 그물에서 벗어날 수 없는 물고기 신세가 될지는 전연 알지 못했다.
―지금 어디 계시는데요?
“동대문에 있습니다.”
―음, 그럼 4호선을 타셔서 혜화역으로 오세요. 제가 3번 출구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예, 그럼 조금 있다 뵙죠.”
강권은 얼른 대답을 하고 4호선을 타고 혜화역으로 갔다.
혜화역에 도착해서 3번 출구로 나오니 경옥이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서울대 의대를 다니고 있으니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강권이 얼른 경옥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경옥도 반갑게 맞는다.
“그날 왜 아무 말씀도 없이 가 버리신 거예요?”
“하하, 그날은 일이 그렇게 됐습니다. 그런데 돈을 받으려면 그 아가씨 집으로 가야 하는가요?”
“아니요? 오늘 마치 청담동에서 정기적으로 모이는 날이거든요. 그래서 겸사겸사 청담동에 오면 주겠대요. 그리고 다이아몬드 원석들도 함께 가지고 나오겠대요.”
“그럼 함께 청담동으로 가야 하는가요?”
“예, 여기에서 301번을 타면 약속 장소에 갈 수 있어요.”
경옥이 말하는 걸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던 강권의 입에서 전혀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미리내가 이리 예쁘게 컸다니 미리내를 키워 준 부모님들에게 감사드리고 싶군.”
경옥의 말하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무심결에 튀어나온 말이었다.
“미리내요? 미리내가 누구예요?”
“하하, 내가 괜한 말을 꺼냈군.”
강권은 겸연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면서 말을 이었다.
“사실 믿어지지 않겠지만 그대가 미리내야. 그리고 미리내는 전생에 내 딸이었어.”
“예에?”
‘이런 말 같은 소리를 해야지?’
강권의 억지스런 말에 경옥은 이렇게 생각하며 정색을 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경옥의 원래 성격 같으면 자신을 희롱했다고 길길이 날뛰어야 함에도 입만 삐쭉거렸을 뿐 크게 반발하지 않았다는 거다.
“예에?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나이도 나와 비슷한 것 같은데.”
강권은 키가 크고 머리를 길러서 그런지 겉으로 보기에는 제 나이보다 더 들어 보였다. 반면에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경옥은 제 나이로 보였다. 이렇게 겉보기에는 비슷한 또래로 보였지만 사실은 경옥이 강권보다 2살이 많았다. 그런데도 강권은 손아래 사람 대하듯이 말했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는 것은 어인 일인가. 강권은 자연스럽게 반말을 하면서 대화를 이어 갔다.
“하하, 전생이 그렇단 얘기지요.”
강권은 이렇게 운을 떼고는 지난날을 회상하는 듯 몽롱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러니까 대략 1,400여 년 전에 내가 백두산에서 도를 닦고 있었는데 어느 날 네 엄마가 빈도가 수도하는 곳으로 피신을 왔었더랬지. 네 엄마는 구리의 공주였었지. 미리내는 구리하면 어느 나라인지 잘 모르겠지? 구리는 우리가 고구려로 알고 있는 나라야.”
“피이, 말도 안 돼요.”
경옥은 강권이 진지하게 말을 이어 나가자 일단 부정했지만 자신이 공주의 딸이었다는데 은근히 흥미가 동하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강권이 말하는 너무 얼토당토않다는 것이 경옥에게는 도리어 흥미를 끄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어지는 강권의 이야기는 생생하게 묘사하는 것이 나름 사실 같게 느껴지기도 했다.
산중도인과 망국의 공주와의 로맨스. 그 흔치 않는 로맨스에서 경옥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았으면 꼴에 개지랄 떤다고 무시해 버리면 그만이겠지만 마음에 쏙 드니 같잖은 말인데도 부정을 하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강권의 얘기가 그럴듯하게 들린 것은 어인 일인가. 심지어 이런 생각까지 했다.
‘그래서 그랬나? 몇 년 전에 부모님과 백두산 관광을 갔을 때 백두산이 언젠가 살았던 것 같았다고 느껴졌었지. 하지만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어?’
강권은 경옥의 마음속에 있는 한 오라기의 부정이라도 깡그리 없애기라도 하려는 듯 자기 주장을 굽히려 들지 않았다.
“말이 되고, 안 되고는 미리내의 마음에 달렸겠지.”
강권은 도사 같은 말을 내뱉고는 한참 동안 경옥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이 치가 왜 이래? 그렇게 안 봤는데…….’
뭘 어떻게 봤다는 말인가? 경옥은 보면 볼수록 강권이 키도 훤칠하고 무척 잘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수백억이 넘는 재산을 가진 엄청난 부자가 아닌가? 특히 경옥의 마음을 사정없이 잡아끄는 것은 보석처럼 반짝이는 눈동자였다.
‘무슨 사람의 눈이 이렇게 맑고 반짝거리지?’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눈이 이처럼 맑고 반짝이는 사람은 성품 담백할 것이라는 생각이 경옥의 뇌리를 스쳤다.
사실 경옥은 몇 년 전에 외모만 보고 혹했다 당한 실연의 상처가 있었다. 하지만 눈을 보니 강권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강권이 쳐다보는 것이 싫지만은 않았고 괜히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콩콩 뛰었다. 자신을 걷어찬 장병호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을 때 딱 이런 기분을 느꼈었다.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하기라도 한다는 걸까?’
경옥은 이런 자기의 내심을 들키지 않으려는 듯 앙칼지게 소리쳤다.
“뭘 그리 엉큼하게 쳐다보는 거예요?”
“하하, 딸 얼굴 오랜만에 보는 거라서. 아마 족히 천사, 오백 년은 되지.”
“뭐예요? 이이가 정말…….”
경옥은 강권이 실없는 말로 자신을 희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화를 벌컥 내려고 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강권의 한마디에 도저히 화를 낼 수 없었다.
“내 말을 듣고 나서 정 아니다 싶으면 화를 내도 그때 내라고.”
강권은 이렇게 운을 떼고는 말을 이었다.
“미리내는 다섯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지?”
“예에? 그걸 어떻게…….”
놀라운 일이었다. 경옥이 다섯 살에 학교에 들어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경옥의 아버지는 충남 예산에서 초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하고 계셨다. 그래서 관사에 사는 어린 경옥은 학교를 놀이터 삼아 놀다가 그녀의 재능을 알아본 선생들의 권유로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약간의 편법이 동원된 까닭에 교육자인 그녀의 아버지는 함구령을 내렸고 경옥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강권이 그녀를 놀라게 하는 것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미리내를 걷어찬 장병호라는 녀석은 제 복을 제 발로 걷어찬 거야.”
“예에?”
“몇 년 전에 헤어졌잖아? 뭐, 사랑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한다면서 녀석은 약사에게 장가갔고. 지금 녀석은 셔터맨 생활을 하고 있을 걸? 그래서 미리내는 잘 다니던 법대를 때려 치고 의대에 들어간 거잖아. 아직까지 그 녀석을 못 잊어서 말이지. 그런데 이제 그만 녀석을 놓아 버려,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돼. 아암, 그리고 말이야…… 조건에 넘어가는 놈 따위는 생각해 줄 가치가 조금도 없어.”
“…….”
지금은 경옥이네가 100억대의 재산을 가진 거부가 되었지만 녀석과 헤어질 당시만 해도 그렇게까지 잘 살지는 못했다.
그런데 그런 것까지 알 정도라면 경옥의 어린 시절부터 옆에서 지켜봤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강권이 자신보다 나이가 그리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
경옥은 내심 이런 생각이 뇌리에 스치자 강권이 달리 보였다.
이런 경옥의 내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강권의 말은 일정한 톤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자고로 젊은 사람은 눈앞의 이익보다는 미래의 가능성을 택해야 하는 거야. 현찰을 챙기려는 짓은 자기 가능성을 포기하는 행위나 다름없어. 뭐랄까 인간임을 포기하고 배부른 돼지가 되기를 원한다고나 할까?”
그런데 경옥만 놀란 게 아니라 내심 강권의 놀라움도 극에 달해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경옥의 신변잡기에 대해서 술술 나오니 기함할 지경이었는데, 경옥의 표정을 살피니 그 말들이 다 들어맞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단지 경옥의 전생을 읽을 수 있기를 바랐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알 수 있으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강권은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고 너무나 놀란 나머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경옥에게 이번에는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그나저나 앞으로 몇 년 안에 미리내 집안에 큰 우환이 있겠어.”
“큰 우환이라고요?”
경옥이 깜짝 놀라서 반문했지만 강권은 거기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일언반구도 없이 자기 말만 이어 갔다. 그도 그럴 것이 네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는 반신불수가 된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미리내의 집안에 호적으로는 동생이지만 따지고 보면 조카가 되는 아이가 있을 거야. 미리내는 집안에 분란만 일으키는 언니가, 언니가 아니라 원수 같지? 미리내도 생각을 해 봐. 아무리 재물이 좋다고 버린 자식이지만 자기 배가 아파서 나은 자식이야. 아들을 보고도 아들이라 부르지 못하는 언니의 심정을 이해해야 할 거야. 모정(母情)이라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거든.”
경옥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강권의 말대로 경옥에게는 두 살이 많은 미옥이라는 언니가 있는데 그 언니가 CC였던 남자와 불장난을 해서 덜컥 아이를 낳았다. 그것도 바로 얼마 전 일이다.
그런데 언니가 애인의 아이까지 낳았으면서도 애인이 ROTC 입영 훈련을 가 있는 사이에 미팅을 해서 준재벌을 만났다. 문제는 준재벌이 언니를 좋아한다고 쫓아다니자 언니는 그와 결혼을 하려고 자기가 낳은 아이를 업둥이로 속여 아버지의 호적에 올렸다. 부모님들은 아버지 근무지인 충남 예산에 있었고 자매들만 서울에 있는 집에 있었기에 그게 가능했다.
그런데 그 사실은 두 자매들만 알고 부모님들에게도 쉬쉬하는 비밀이었는데 생전 처음 보는 강권이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경옥의 놀라는 얼굴을 흘끔 보면서 강권의 말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언니와 부모님이 전생에서 맺은 업보를 해결하는 과정이야. 그러니 업장을 해소하는 것이라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 하지만 어디 범인(凡人)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게 쉬운 일인가? 그리고 미안한 얘기지만 미리내 부모도 사실은 정당하게 맺어진 부부는 아닐 거야.”
“어떻게 그 사실을…….”
경옥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하는 강권의 말에 뭐라 대꾸할 정신도 없었다. 사실 경옥의 아버지에게는 안면도에 부모님들이 정해 준 미혼처가 있었다. 같이 살지는 않았지만 이미 쌀이 밥이 되었고 호적에도 올라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임지가 예산인 까닭에 예산에서 자취를 하다 같은 학교에서 근무를 했던 선생과 눈이 맞았다. 경옥의 엄마가 아버지의 훤칠한 모습에 반하고 경옥의 아버지 또한 젊은 혈기에서 그만 사고를 치게 되었다. 아이가 생기자 둘은 결혼을 하게 되었고 아이가 없는 본 부인과는 헤어지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