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12화
하지만 국내 최연소 공학박사라는 타이들을 갖고 있는 자부심이 강한 세린이 미진의 말에 그대로 수긍할 리 없다.
“이 지지배야, 그게 말이나 돼? IT기업인 미림이 언제부터 첨단 소재로 방탄복을 만들었는데?”
“앞으로 만들 거다. 왜 떫어?”
“너네 미림은 IT기업 아니었어?”
미진은 어안이 벙벙해진 육 공주들을 바라보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것은 우리 미림의 극비지만 니들이니까 말해 줄게. 비밀은 꼭 지켜야 해.”
미진은 큰 선심을 쓰듯 다짐을 받고 말을 이어 나갔다.
“명희 이 기집애는 이미 아는 얘기지만 작년 가을에 태한 그룹 산하의 연구소를 어디선가 해킹을 한 적이 있었어. 우리 미림의 방법[신어로 인터넷상에서, 호되게 꾸지람을 주거나 벌을 주는 일을 가리킴.]이 정평이 나 있잖아. 그것을 모를 리 없는 태한에서는 당연히도 우리 미림에 해킹을 막아 달라는 요청을 해 왔어. 우리 역시 당연히 응했지. 그리고 지구를 아홉 바퀴나 돌고서 겨우 해킹한 자들을 찾을 수 있었어. 우리 미림에서는 그곳에 역으로 해킹해서 그곳 컴퓨터에 있던 것들을 죄다 가져와 버리고 은밀하게 치우천황이라는 일종의 백 오리피스(Back Orifice)를 심어 두었었어. 그런데 그곳에서 빼내 온 자료를 분석하던 중에 앰비패러카본이라는 신물질의 제조법이 있는 것을 발견했어. 이상한 것은 그 앰비패러카본이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른 몇 개로 쪼개져서 있었다는 것이야. 심지어는 이름까지 다른 것도 있었어. 아마도 여러 곳에서 자료를 수집한 것이 아닌가 싶어.”
“앰비패러카본?”
“너희들도 생각해 봐. 앰비는 둘을 나타내는 접두어 Ambi를, 패러는 이상향을 패러다이스를, 카본은 탄소를 의미한다는 것을 척 보면 알겠지? 그래서 그게 이상적인 탄소섬유의 제조법이라는 것을 짐작하고 임원진 회의를 열어서 비밀리에 앰비패러카본을 제조하기로 결의를 했고, 실제로 제조를 해 보았지.”
“그래서?”
“앰비패러카본은 예상했던 대로 일종의 탄소섬유였어. 강도는 강철의 100배 이상, 원래 길이가 두 배는 늘어날 수 있는 정도로 유연성이 있고 무게도 엄청 가벼워. 게다가 경이로운 것은 본래는 부도체인데 특정한 성분을 첨가하면 구리의 수십 배에서 수백 배나 성능이 뛰어난 전도체가 된다는 거야.”
“…….”
“이 앰비패러카본은 항공기, 군함, 장갑차, 자동차 등의 외장에 쓰면 내구성은 물론이고 연료 효율이 엄청 좋아져. 그리고 방전복(放電服)이라든가 헬멧, 방탄복 등의 특수 용도의 옷은 물론이고 평상복을 만드는 것도 충분히 가능해. 생각해 봐, 옷을 만들면 두 배가 늘어날 수 있으니까 아들 옷을 아버지가 입어도 되고 아버지 옷을 아들이 입어도 될 것 아니겠어? 아마 생활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올 거야.”
“와! 엄청난 거네?”
세린이 감탄을 했다. 세린이 무기화학을 전공해서 박사 학위를 받은 만큼 탄소섬유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탄소섬유는 알루미늄보다 가볍고 강철에 비해서 탄성과 강도가 뛰어나다. 이런 특성으로 인해 각종 스포츠 용품, 항공우주산업, 자동차, 토목건축재, 전기전자, 등 각 분야에 쓰이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 만큼 어떻게 제조하느냐에 따라 그 종류도 다양했고 부가가치도 엄청났다.
또한 미진의 말대로라면 기존에 나온 어떤 탄소섬유보다 경쟁력이 있었다. 우선 탄성과 강도가 뛰어나니 미진이 말처럼 방탄복 제조에도 쓰일 수 있고 자동차나 항공기 동체로도 쓰일 수 있다. 게다가 부도체와 전도체의 성질을 띠면서 동시에 탄성력이 뛰어나다면 해저케이블에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이 앰비패러카본으로 전선을 만들어서 땅속에 깔면 전신주나 송전탑이 필요 없을 것이고 어지간한 지진에도 안전할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엄청 돈이 되는 획기적인 소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그 해킹한 곳 말이야. 어디였어?”
“전 세계를 아홉 차례나 돌아서 확실한 것은 모르겠는데 아마도 중국이 아닌가 싶어. 우리도 확신하지는 못하는데, 아마도 베일에 싸여 있는 중국의 첩보 기관인 MSS(중국 국가안전부) 산하의 사이버 전략 연구소가 아닌가 싶어.”
“중국의 첩보 기관 MSS?”
“그래, MSS. 근래에 중국이 갑자기 급부상하고 있잖아. 워낙에 인구가 많아서 나름 저력이 있는 것도 그 원인이 있지만 상당 부분은 산업스파이를 활용해서 세계 각국의 첨단 기술과 고급 경영 정보를 빼간 결과래. 우리나라에 대략 2,000여 명의 산업스파이가 암약을 하고 있는데 그중의 반 이상은 중국의 산업스파이라는 게 공공연한 비밀이래.”
“뭐야? 그런 것들을 그냥 둔다는 말이야?”
“호호호, 내가 누구냐? 걔네들 전산망에 치우천황 님을 강림시켜 두었잖아. 앞으로 걔들이 모으는 자료들은 전부 우리 미림 전산망으로 들어오게 되어 있어. 재주는 뭐가 넘고 돈은 누가 챙긴다는 말을 요런 때 쓰나?”
강권은 명상을 하여 나름 미래에 대해서 알아보던 중에 자신에게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만 얻고 명상에서 깨어나는 순간 미진이와 세린이 주고받는 말을 들었다.
그 말들의 대부분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남산 중국 영사부에서 보았던 자들의 정체는 나름 알아낼 수 있었다.
‘아! 그놈들이 MSS인가 하는, 거기 소속인 모양이구나. 산업스파이라…… 그럼 불길한 예감은 그놈들과 관계 있다는 것인가?’
사실 강권은 자신의 도자기가 깨진 것과 관계된 자들에 엄청 분개하고 있던 터라 그자들이 우리나라의 산업 기밀을 빼가는 스파이라는 것에 혼내 주겠다는 결심을 한층 더 굳혔다.
하지만 자신에게 좋지 않는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예감을 들자 녀석들과 부딪힐 때 최대한 조심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 불길한 예감이 그들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안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물론 그의 예지능력이 아직 궤도에 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8장-바람이 나무를 흔들다
강권이 아가씨들에 둘러싸여 한창 얘기를 하는 중에 홍태희가 사귀고 있는 조용수가 왔다. 평소 같으면 칠 공주들이 일제히 반겼을 것인데 어쩐지 오늘은 조용했다. 그러고 보니 평소 칠 공주들이 차지하고 있었을 테이블에 어떤 녀석과 김미진, 홍태희만 앉아 있고 나머지들은 옆 테이블에 있었다.
처음 보는 녀석이었다. 조용수는 자기를 보았을 것인데도 전혀 아는 체를 하지 않는 칠 공주들에게 은근히 뿔이 났다.
‘이년들 봐라, 내가 누군데 그런 나를 감히 장기판의 졸 취급을 한다는 말이지?’
조용수는 K1에 등장하자마자 단 세 번 싸워 입지를 굳혔다. 그 후에 홍태희를 만나 K1보다는 연기 쪽에 주력하고 있지만 MMA(Mixed Martial Arts), 종합 격투, 어느 쪽에서도 강자로 대접받고 있는 스타였다. 자타가 공인하는 스타인만큼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무척이나 강한 인물이었다. 그런 조용수가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그대로 지나칠 리 없다.
하지만 조용수가 아무리 스타라고 하지만 청담동 칠 공주들이 어떤 아가씨들이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녀들과 자신은 비교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차원이 달라 그녀들에게 무작정 화를 낼 수 없었다. 지금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따져 보면 홍태희와 알고 지내는 사이였기 때문이다. 조용수의 일행은 이곳에 들어오지 못하고 근처 카페에서 조용수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조용수의 치민 울화통을 달랠 만한 녀석이 하나 있기는 했다. 물론 최강권이었다.
‘사내는 주먹으로 말하지, 맞장을 떠서 깨지게 되면 천하없어도 꼬리를 내리는 게 사내들이고. 그게 천고의 진리지.’
조용수는 내심 녀석을 박살을 내도 칠 공주들이 계속 녀석을 감싸고돌까 하는 생각을 갖자 은근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녀석에게 어떻게 시비를 걸지?’
조용수는 칠 공주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강권을 어떻게 박살낼까 고심을 했다. 녀석은 자기가 노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홍태희의 사주를 봐 주고 있었다. 녀석의 행동을 보면서 조용수는 생각나는 것이 있어 내심 가소로움을 느꼈다.
‘푸웃, 꼴에 여자를 후리시겠다고?’
조용수에게 있어 최강권은 허여멀건 한 것이 아무리 봐도 딱 기생오라비 정도로 밖에로는 보이지 않는다. 언젠가 자칭 카사노바라는 그의 친구가 여자를 꼬드기려면 가장 먼저 여자의 방어 본능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했다. 녀석의 말에 따르면 방어 본능을 무너뜨리는 첫걸음은 스킨십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여자들에게 수작을 부릴 때 보통 사주를 봐 주겠다느니, 관상을 봐 주겠다느니 하면서 스킨십을 시작한다는 거다. 실제 조용수도 첫사랑에게 수상을 봐 준다면서 손을 잡았고, 관상을 봐준다면서 키스에 성공한 적도 있었다. 벌써 십여 년 전의 일이다.
그런데 가관인 것은 나이도 어려 보이는 녀석에게 청담동 칠 공주들이 죄다 오빠라고 부른다는 것이었다. 대스타인 자기에게도 부르지 않은 호칭이었다. 그렇잖아도 자존심이 상해 있는 조용수는 그 꼴을 보고 눈에 불통이 튀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묵묵히 참아야 할 때다.
‘풋, 저런 돌팔이 새끼를 족집게라고? 족집게가 엊그제 추위에 다 얼어 죽었다지 아마?’
조용수가 강권을 돌팔이라고 단정하는 이유는 태희의 사주풀이를 듣고 난 후였다. 바로 얼마 전 태희가 자기한테 결혼하자고 했었는데 그런 태희에게 평생 가야 결혼을 하지 못한다니 그게 어디 말이 될 법한 소리인가. 그런데 이상한 것은 태희가 돌팔이의 말에 동조를 하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쟤는 또 왜 저러는데? 세 달도 아니고 불과 삼일 전에 나한테 결혼하자고 한 말은 또 뭐고?’
여자가 질투하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 했다. 그렇지만 남자들의 질투는 전쟁을 일으키게 하고 애꿎은 피를 보게 만드는 게 천고의 진리인 법이다. 조용수가 강권에게 시비를 붙일 기회를 엿보고 있는데 나머지 다섯 공주들이 테이블에 합석을 해서 한참이나 떠들다 그제야 조용수를 발견했는지 인사를 했다.
“어! 용수 씨, 언제 왔어요?”
‘이년들아, 내가 이곳에 온 지 벌써 한 시간은 됐을 거다.’
조용수는 이 말이 튀어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고 억지웃음을 지으며 태연을 가장하고 대꾸했다. 이때가 강권이 무진신공을 돌리면서 불길한 예감을 느꼈던 바로 그 무렵이었다.
“온지 좀 됐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 사주를 본다면서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더군요.”
“아! 그랬구나. 용수 씨, 이분 너무 잘 맞추는 것 같으니 한 번 봐 봐. 중요한 시합이 얼마 남지 않았잖아.”
‘이년 보게, 항상 자기라고 했으면서 지금은 용수 씨라고? 이놈이 그렇게 맘에 든단 말이지?’
의심암귀(疑心暗鬼)[의심이 생기면 귀신이 생긴다는 뜻으로, 의심을 하게 되면 대수롭지 않은 일까지 불안해한다는 의미다.]라고 일단 태희의 말에 불신을 갖자 사소한 말까지 의심을 품게 되었다. 그렇지만 태희에게 대놓고 막말을 할 수는 없었다. 태희는 지금 톱클래스 스타인데 비해 자신은 겨우 떠오르는 신성일 뿐이었다. 게다가 자신이 스타가 될 수 있었던 이면에는 홍태희의 도움이 컸다. 대한민국의 모든 영역에서 그렇듯 연예계도 학연, 지연, 인맥의 영향이 컸던 것이다.
“그래? 그럼 한 번 봐 볼까?”
조용수는 그렇잖아도 강권에게 시비를 걸 건수를 찾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심드렁하게 대꾸하고는 강권에게 말했다.
“이봐, 형씨. 들었지? 나 사주 좀 봐 주게.”
강권은 조용수의 삐딱한 말이 귀에 거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권은 싫은 내색을 하지 않고 부드럽게 대답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조용수의 광팬이었기 때문이다.
“저는 그저 취미로 명리학(命理學)을 익혀서 남의 사주를 봐 줄 정도는 아닙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하! 이 친구 보게, 여자들은 봐 주고 남자인 나는 거절한다라. 형씨, 이거 같은 사내의 입장에서 너무한다고 생각지 않는가? 게다가 나보다 나이도 훨씬 어린 것 같은데 이 형님을 그렇게 차별하면 안 되지. 이 형님은 자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한 인물이 아니거든. 자네는 이점을 어떻게 생각하나.”
말이 짧다. 조용수의 말투에 적의가 배어 있었다. 시비를 거는 것이리라. 외유내강한 강권은 먼저 시비를 걸지는 않았지만 걸어 오는 시비를 한 번도 거절해 본 적이 없었다.
‘이거 웃기는 놈이군. 자기가 나보다 몇 살이나 많다고 함부로 말을 놓으려고 들어?’
한때는 자신이 조용수의 팬이었다고 하더라도 자신은 그때의 최강권이 아니었다. 작고 약했던 예전의 강권에게는 조용수가 우상이었을지 모르지만 누구보다 강해진 지금의 강권에게 있어 조용수는 그저 그런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조용수 정도가 백 명이 덤벼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최강권인 것이다. 특히 역술가의 입장에서 조용수의 상을 볼 때 한순간 반짝 잘나가고 있는 그렇고 그런 중생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강권은 이런 성격을 가진 녀석들을 상대한 전생의 경험도 많아 녀석을 어떻게 상대하면 어르고 뺨칠 수 있는지 또한 알고 있었다.
‘스스로 족함을 알고 물러서면 본전은 건질 수 있겠지만 끝까지 자존망대해서 분수를 모르고 덤비겠다면 갖고 있는 것을 깡그리 털어 주겠다. 조용수 너는 어떤 결정을 내릴래?’
강권은 내심 이런 결정을 내리고는 미소 띤 얼굴로 차분하게 대꾸했다.
“본인이 스스로를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사주를 한 번 보고 싶은 생각도 드는군요. 그럼 사주를 불러 주시겠습니까?”
강권이 사주를 봐 준다고 사주를 불러 달라고 하자 정작 조용수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홍태희가 자기보다 두 살이나 나이가 많아서 무려 세 살이나 속였기 때문이다. 연상이 유행하고 있는 세태라 사실 여자가 한두 살 나이가 많은 것은 아무런 흉도 아니었다. 그런데 조용수는 자기와 혈연관계가 없는 또래의 여자들에게 누나라고 부르는 것을 싫어해서 그렇게 했었다. 그러니 홍태희가 듣고 있는 곳에서 본래의 사주를 불러 줄 수 없었다. 나름 순진한 구석이 있다는 증거였다. 조용수는 약간 고민을 하다 본래 나이보다 세 살 많게 불러 주었다.
사주(四柱)는 태어난 년, 월, 일, 시를 각각 년주(年柱), 월주(月柱), 일주(日柱), 시주(時柱)로 잡아 구성된다. 각 주는 천간(天干)과 지지(地支) 두 개로 구성되어 있어 팔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년주가 잘못되면 팔자 중 두 개가 틀어져 결과가 전혀 틀리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강권은 조용수가 사주를 불러 주자마자 들은 대로 백지에 적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었다.
“이게 정말 본래 사주가 맞습니까?”
“그럼 본래 사주지, 아닐까 봐?”
강권은 사주를 들여다보며 무언가 한참 따지더니 단정하듯 말했다.
“불러 주신 사주는 이미 죽었어야 할 사람의 사주군요.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계유(癸酉)생이 아니고 병자(丙子)생이라야 모든 게 딱 맞아 떨어지겠군요. 병자생으로 해서 봐 줄까요?”
‘이 자식 이거 정말 족집게 아냐?’
조용수는 내심 섬뜩했지만 홍태희가 옆에 듣고 있었기 때문에 본래 사주로는 도저히 볼 수 없었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만 그 아무것도 아닌 일이 남녀 사이에서 큰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것쯤은 조용수도 나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궁지에 몰리면 일단 신경질부터 부리는 것이 단순한 남자들의 행태다. 조용수도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벌컥 화부터 냈다.
“이 자식 지금 뭔 말을 하고 있어? 그러니까 내가 지금 나이를 속이고 있다는 거야 뭐야?”
“도둑이 제 발 저리다는 말이 있습니다. 조용수 씨, 그러신가요?”
“뭐야? 이 자식이, 보자보자 하니까 내가 보자기로 보이냐? 지금 나랑 해 보자는 거야, 뭐야?”
“하시든지 말시든지 그것은 추호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불러 준 사주는 이미 죽은 사람의 사주니까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구차하게 굳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병자생으로 보면 국회의원이나 장관이 될 정도의 귀한 사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먹질이나 하고 배우가 되려고 하면 자기 복을 다 찾아 먹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죽은 사람으로 남겠습니까? 아니면 본래의 사주로 보시겠습니까? 알아서 하십시오.”
강권은 천하의 조용수 앞에서 당당했다.
그런 강권이 묘하게 자신을 도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 일까?
‘이 녀석이 정말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조용수는 자기 사주가 좋다고 하니까 기분이 다소 풀리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강권에 대한 유감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기분이 나쁜 것은 기생오라비처럼 호리호리한 녀석이 세계 격투기계에서도 알아주는 자기에게 전혀 겁먹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한주먹감도 되지 않는 이 녀석을 패? 마라?’
조용수는 내심 고심을 하다 녀석의 도발에 응해서 본때를 보여 주기로 했다. 그렇게 결정을 한 조용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강권에게 말했다.
“정말 하든지 말든지 상관이 없다는 거냐? 그럼 사내답게 한 번 맞장을 떠 보자. 이리 나와.”
강권은 조용수의 뭣 때문에 이런 행동을 하고 있는지를 깨닫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실소가 나왔다. 강권이 비웃는 듯 비릿한 미소를 짓는 것을 본 칠 공주들은 안색이 달라졌다. 강권의 그런 행동은 그녀들이 보기에도 도발을 하는 것처럼 비쳐졌기 때문이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이이가 정말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강권에게 나름 강권에게 친밀감을 갖고 있는 노경옥은 정말 싸움이라도 벌어질까 봐 다급하게 소리쳤다.
“조용수 씨, 그게 무슨 말이에요? 프로가 어떻게 일반인하고 싸움을 하자고 할 수 있단 말이죠?”
“경옥 씨, 그럼 일반인 녀석이 겁도 없이 프로에게 저런 식으로 도발을 하는 것은 괜찮다는 거요?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저딴 녀석이 나와 싸움을 할 수 있는 주제나 된다고 보시오?”
“그야 그렇지만, 그래도…….”
그런데 정작 겁을 먹고 꼬리를 말고 있어야 할 강권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태연하게 말했다.
“미리내야, 걱정하지 마라. 나는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허약하지 않아. 인사동에서 너도 봤잖아? 다만 나는 저 친구가 괜히 나에게 얻어맞고 인생무상 삶의 회의를 느껴 자칫 자살이라도 할까 봐, 오히려 그게 걱정이로구나. 하지만 저 친구를 위해서도 적당한 좌절이 필요할 거야.”
강권의 말은 격투기계의 강자에게 자기가 이긴다고 공언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명백한 도발이었다.
그런데 강권의 도발에 길길이 날뛰어야 할 조용수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다. 너무 같잖고 가소로우면 어처구니없어서 도리어 화를 내지 않는 법이다. 조용수는 강권의 도발에 차분한 어조로 대꾸했다.
“친구, 왜 지금 이 순간에 내 뇌리에 선자불래(善者不來) 내자불선(來者不善)[선한 자는 오지 않고 온 자는 선하지 않다. 여기서는 너 시비 걸고 있냐는 의미.]이라는 말이 스쳐 지나가는지 모르겠네. 그런데 과연 자네가 관을 보지 않으면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는 말의 의미를 알고 있는지 모르겠네.”
“친구라? 그거 좋지. 그런데 과연 자네가 내 친구가 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네. 그리고 또 말이 나왔으니 말이네만 나는 과연 자네가 우물 안 개구리가 무슨 의미인지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네.”
조용수가 중국 속담을 말하자 이에 녀석이 우리나라 속담으로 응수하는 것에 더 화가 났다. 심사가 뒤틀린 조용수의 귀에는 자기는 신토불이의 실천자고 너는 줏대도 없는 녀석이라고 하는 것처럼 들렸다.
‘아니, 이자식이 정말.’
그것을 떠나서 이런 식으로 대꾸하는 것은 누가 보아도 막가자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조용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이 애송이에게 본때를 보여 주기로 결심했다.
“아야, 주둥아리만 놀리지 말고 사내답게 주먹으로 대화를 하는 게 어떻겠냐?”
“나야 좋지. 그런데 자네는 대화가 뭔지 알고 있겠지? 똘마니들처럼 싸울 게 아니라 한 대씩 주고받는 게 어때? 겁이 나면 그만두어도 좋고.”
‘뭐? 똘마니들.’
옆에서 들으면 아무것도 아닌 말이 희한하게 조용수의 심사를 긁고 있었다. 조용수는 울화가 치밀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자식 정말 미친 놈 아냐? 너 정말 내가 누군지 모르고 있는 거야?”
“K1에서 13전 13승 13KO. 그런 전적을 믿고 자존망대하고 있는 우물 안 개구리겠지? 왜? 내가 그 정도로 우쭐하는 자네의 그릇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은가? 그래서 내가 자네를 우물 안 개구리라고 말한 거야. 정작 진인은 저자거리에 있다는 진리를 자네는 모르고 있겠지.”
촌철살인이라 했던가. 녀석은 정말 사람의 화를 돋우는데 천부적인 소질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조용수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알고도 감히 도발을 하고 있는 강권의 저의를 알 수 없었다.
‘이 자식을 정말 죽여, 마라?’
조용수는 여자들 앞이라고 죽을 줄도 모르고 큰소리를 치려는 녀석이 갑자기 불쌍해 보였다. 그러자 치밀어 오른 화가 수그러짐을 느끼고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하하, 그걸 알면서도 감히 나에게 도발을 하고 있단 말이지?”
“하하,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자는 말이 있지?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먼저 도발을 한 게 아니고 자네가 먼저 나에게 도발을 한 거야.”
“하하하하, 이거 어린 친구에게 한 방 먹었군. 좋아, 아까도 말했지만 사내라면 입으로 수다를 떨 것이 아니라 주먹으로 대화를 해야겠지. 사내답게 시작해 보자고. 자네가 먼저 시작하겠나?”
“내가 먼저 시작하면 자네는 기회도 없을 걸세. 그러니 자네가 먼저 하는 게 좋겠네.”
세간에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사실 조용수는 우리의 전통 무예인 선인무(仙人舞)의 고수였다. 발경의 경지에 올라 있으니만큼 그 누구라도 자신의 한 방에 정통으로 맞으면 골로 간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간단하게 말해서 단단하다는 조약돌을 바스러뜨릴 수 있는 주먹에 맞고 멀쩡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런 정도의 고수가 아니라고 해도 K1 전적이 13전, 13승, 13KO의 하드펀처였다. 그 누구라도 쉽게 보지 못한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먼저 때리라니 이자식이 도대체 제정신이란 말인가? 조용수는 다른 것은 몰라도 녀석의 배짱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조용수는 강권의 뺀질뺀질한 얼굴을 쳐다보다 녀석이 너무 얄밉게 보여 혼꾸멍을 내 주기로 했다.
“그래? 그것도 좋겠지. 그럼 들어가겠네.”
조용수는 잘못하다간 애먼 송장을 치를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녀석의 턱을 때릴까 복부를 가격할까 고민을 하다 녀석이 너무 밉상으로 여겨져 턱을 후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