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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퍽!
순간 조용수는 주먹에서 묵직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껏 후려친 중에 제일 손맛이 좋았다. 그러니 결과는 보나마나 일 것이다.
‘이 새끼 이제 더 이상 허튼소리는 못하겠지?’
조용수는 의기양양하게 쓰러진 녀석을 비웃어 주려다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녀석은 쓰러지기는커녕 영화에서 이 소룡이 하는 것처럼 고개만 좌우로 꺾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마치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태도였다.
“이, 이럴 수 없어…….”
조용수는 망연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조용수의 말대로 인간이라면 이럴 수는 없었다. 조용수는 13전, 전승, 13KO가 말해 주듯 자타가 공인하는 하드펀처다. 그런 그였기 때문에 완전 무결점의 챔피언이라는 GSP도 조용수의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주먹을 정통으로 맞고 어떻게 전혀 충격을 받지 않는단 말인가?
더군다나 시합 도중에도 아니고 상대가 전혀 피하지 않은 상태에서 작정하고 마음껏 후려치는 주먹을 맞았는데도 어떻게 끄떡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절로 고개가 절레절레 저어졌다.
그런 조용수를 보며 강권은 같잖다는 듯 말했다.
“자네의 그 결정이 자네를 살린 것 같군. 만약 자네가 발경을 해서 가격했었더라면 자네는 아마 병신이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족히 몇 년간은 생고생을 했을 것이네. 각설하고 대화란 것이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어야겠지? 자, 준비하도록.”
마치 조롱하듯 말하는 강권의 말을 듣고 있는 조용수는 분노를 참느라고 안면이 푸들거렸다.
“네 녀석이 감히…….”
“바로 며칠 전에도 발경의 경지에 있는 자들과 한바탕 드잡이를 벌인 적이 있었지. 결과는 그 녀석이 죽었다는 거야. 물론 내가 죽이지는 않았지만 말이지.”
조용수는 강권이 죽이지 않았는데 녀석이 죽었다는 의미를 약이 올라 죽었다는 것으로 해석했다. 조용수는 녀석이 자신을 희롱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악을 바락바락 쓰며 말했다.
“야, 이 새끼야. 네 녀석이 사내라면 쓸데없는 잡설을 늘어놓지 말고 사내답게 주먹으로 말해라.”
“하하, 자네는 스스로를 사내라고 여기고 있는 모양이지?
자신이 마음껏 후려친 주먹에 전혀 타격을 받지 않은 상대에게 조용수는 은근히 기가 꺾였다. 녀석의 미소 띤 얼굴을 보자 등줄기에 식은땀이 흥건하게 흘렀다. 하지만 천하의 조용수가 이런 애송이에게 은근 겁을 먹었다는 생각이 들자 오기가 생겼다.
‘용수야, 한 방만 견디자. 그러고 나서 발경으로 녀석의 턱을 으스러뜨리자.’
조용수는 내심 이렇게 스스로 다짐을 했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생각일 따름이라는 것은 금방 밝혀졌다.
강권은 자기 차례가 오자 조용수의 추락을 비웃기라도 하듯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정권을 내질렀다.
강권은 본래 골격이 굵은데다 편공을 연마하며 바위에 주먹질을 해서 그의 주먹은 완전 옹이 같은 굳은살이 박혀 있었다.
조용수는 강권의 주먹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 그 굳은살이 보이기는 했다. 그렇지만 그 다음은 전혀 기억이 남아 있질 않았다. 천하의 조용수가 단 한 방에 의식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앗!”
“어머!”
조용수가 스르르 무너지는 것을 본 칠 공주들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금껏 조용수가 남을 쓰러뜨리는 것만 보아 왔지 이처럼 조용수가 남에게 얻어맞고 쓰러진 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또한 모르는 사람이 쓰러진 것을 볼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통쾌하다는 생각조차 했었다. 그렇지만 딴에는 아는 사람이 얻어맞고 쓰러지자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사실 경옥과 세나, 명희는 조폭들과 벌였던 일장의 활극을 동영상으로 자세히 보았기 때문에 강권이 나름 운동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조용수는 이미 검증을 받은 세계적인 프로 격투기 선수여서 은근 강권을 걱정하고 있었다. 조용수의 말마따나 프로와 아마는 격이 다르다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걱정되던 강권은 말짱한데 당연히 이길 것이라 생각했던 조용수는 완전 인사불성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것이 또 하나 있었다. 강권은 자신이 승자가 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나 있었다는 듯 표정에 전혀 변화가 없었다. 남자라면 누구나 K1의 강자인 조용수를 한 방에 보냈다는 사실에 득의 했을 것인데도 강권은 잠깐 맨손 체조했다는 듯 대수롭지 않는 태도였다. 심지어 경악하는 칠 공주들을 안심시키기까지 했다.
“하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갑작스런 충격을 받고 잠시 기절했을 뿐이니 금방 깨어날 것입니다.”
상황에 맞지 않은 어색한 말이었지만 강한 남자를 원하는 칠 공주들의 본능은 조용수에서 최강권으로 선호를 바꾸게 되었다.
제9장-드, 드래곤이세요?
강권은 도자기를 판 대금으로 6억을, 가장 큰 다이아몬드 원석을 팔아 100억을 받았다.
원석을 산 사람은 청담동 칠 공주중에서 박채연이었다. 그녀는 국내 최고의 사채업자이자 현찰 왕의 딸답게 돈도 많았지만 돈 냄새를 기막히게 맡았다. 보석은 그 자체로도 값이 나가지만 제대로 된 세공을 거쳐야 그 본연의 가치를 끌어낼 수 있다. 보석 광이기도 한 박채연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원석을 다이아몬드 세공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아르마니 가문에 세공을 맡기면 최소한 두 배 이상 불릴 수 있다는 확신을 했던 것이다.
이런 결과로 전혀 뜻밖의 거금을 손에 쥔 강권은 희희낙락이었다.
‘하하, 뚝배기보다 장맛이라더니 노옴이 생긴 것은 꼭 심술 영감 같은데 엄청난 사건(?)을 저질렀잖아.’
강권은 100억이 넘는 돈이 생겼다고 원한을 잊은 것은 물론 아니었다. 자기 도자기를 강탈하려던 고옥당 주인을 그냥 둘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이번에 아주 발가벗겨 거지로 만들 작정이었다.
고옥당 주인의 재물이 탐나서가 아니었다. 한 사람을 죽여 수천, 수만의 생명을 살린다는 천살문의 도그마에 따라 남의 것을 빼앗아 자기 배를 불리려는 자를 징계하려는 것이었다.
설령 자기가 그에게 당하지 않았더라도 상관이 없었다. 앞으로도 그런 녀석들을 볼 때마다 그렇게 해 줄 작정이었다. 물론 이런 결심이 선 것은 자기가 당했기 때문이었겠지만…….
그렇다고 복수에만 매달릴 생각 또한 추호도 없었다. 고옥당 주인이나 조폭들에 대한 복수를 결코 서두르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고 녀석들에 대한 원한을 잊지 않으면 그것으로 족했다.
무엇보다도 지금 당장 강권이 해야 할 일은 김미진이가 맡긴 장도진 연구원의 행방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장도진 연구원의 행방을 파악하려면 기동력이 필요했다.
그러니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일단 운전면허부터 따야 했다. 강권은 문제집을 딱 한 번 훑어보는 것으로 운전면허 시험에 만점을 받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운전면허란 게 시험만 만점을 받았다고 해서 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장내 기능 시험도 합격을 해야 하고 도로 주행 시험도 통과해야 한다. 장내 기능 시험이란 것도 차를 한 번도 몰아 보지 못한 사람이 단번에 운전면허를 따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강권은 시험장 근처에서 한 시간 가량 차를 타 보고 기능 시험에 당당히 통과했다. 그러더니 도로 주행 시험은 엉뚱하게도 태백에 접수시킨다는 거다.
경옥은 너무 어이가 없어 강권에게 물었다.
“강권 씨, 왜 하필 태백이에요? 태백은 아무 연고도 없잖아요?”
“태백이 제일 빠르잖아? 그리고 미리내에게 보여 줄 곳도 있고 말이야. 부탁해.”
물론 태백까지 태우고 가란 말이었다.
경옥은 별수 없이 강권을 태백까지 태우고 가서 원서를 접수하고 시험을 보게 하는 수고를 해야 했다.
강권이 운전면허를 따는 동안 내내 함께했던 경옥은 그 덕분에 그의 경이로운 능력을 알아볼 수 있었다.
“강권 씨, 도대체 못하는 일이 무엇이에요?”
“미리내야, 운이 좋았던 거겠지. 나는 겨우 중학교 2학년 중퇴가 최종 학력인 무식쟁이라고. 서울대 법대를 다니다가 중도에 때려 치고 서울대 의대까지 합격한 너처럼 그렇게 머리가 좋지도 않고 말이야.”
“강권 씨, 정말 중학교 2학년 중퇴했다는 게 맞아요? 그럼 검정고시를 볼 생각도 하지 않았어요? 문제집을 한 번 훑어보고 만점을 받을 정도라면 검정고시도 금방 합격할 수 있을 텐데 말이죠.”
“하하, 볼 생각이야 항상 갖고 있지. 그렇지만 그동안 먹고 살기 바빠서 그런 것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어.”
경옥은 그런 엄청난 보물들을 갖고 있었던 강권이 먹고 살기에 바빠서 여유가 없었다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다이아몬드 원석들이야 다이아몬드가 아닌 것으로 알았다 쳐도 그때 분명히 자기 입으로 도자기가 10억이 넘는다고 했었잖아? 그렇다면 도자기가 비싼 걸 알았을 것이고, 도자기만 팔아도 10억이 넘는 돈이 생길 텐데 왜 먹고 살기 바빴다고 하지?’
경옥이 의문스런 표정을 짓는 것을 본 강권은 어떻게 그녀에게 자기의 과거를 털어놓을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 중이었다.
강권의 예감으로는 경옥은 분명 자기와 인연이 깊다. 그 인연의 심도가 얼마나 깊은지는 단언하지 못하지만 예감은 절박하게 그녀를 자기 짝으로 받아들이라고 하고 있었다. 강권은 그녀가 전생의 딸이었지만 현생에서 부부가 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천기를 살펴볼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천기를 살피는 일은 능력이 있다고 해서 아무 때나 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천기를 읽는 것은 1년 중 하루 천문이 열리는 날에만 가능했다. 그것도 심신을 정갈하게 하고 하늘에 제를 올려 허락을 받아야 한다. 물론 말이 허락이지 특별하게 인과율에 어긋나지 않으면 거부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인과율을 따지는 일은 엄청 심력을 소모하는 일이었다. 인과율의 계산은 인간이 생각하는 호불호(好不好)의 개념으로 판단할 수도 없고 선악(善惡)의 판단과도 또 달랐다.
또한 정확히 천기를 읽은 것이 아니어서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녀에게서 제왕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 기운은 너무나 유혹적인 것이었다. 물론 제왕의 부모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망설여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제왕의 부모가 된다는 것과 자신의 행복한 삶과의 형량은 강권에게 적잖은 고민을 안겨 주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행복한 삶을 우선적으로 쳤던 강권이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강권은 지금 그 있을 수 없는 일에 휘말리고 있었다.
‘휴우, 이럴 땐 줘도 못 먹느냐는 CM이 꼭 나를 빗대 놓고 하는 것 같단 말이야. 결론은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는 것이겠지.’
이렇게 결정을 하자 강권의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명쾌해지는 것 같았다.
강권은 예나 지금이나 부부간의 가장 큰 덕목이 서로간의 신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과거를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녀를 속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기는 그녀에 대해 낱낱이 아는데 그녀는 자기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신뢰 관계를 형성했다고 볼 수 없다는 게 강권의 결론이었다.
강권은 한참 동안 생각하던 끝에 자기가 수양했던 곳에 가서 자기 능력을 보여 주면서 그녀의 반응에 따라 진정한 자기에 대해서 알려 줄지 말지 결정하기로 했다.
“미리내야, 너에게 보여 줄 게 있으니 서울로 갈 때 화악산 쪽으로 해서 가자.”
“혹시 가평에 있는 화악산이요?”
“왜? 화악산을 잘 알고 있어?”
“세린이가 가평에 펜션을 하나 가지고 있잖아요. 그래서 가평에 몇 번 가 보았어요.”
강권은 경옥이 내비게이션에 가평을 찍는 것을 보면서 문득 운전면허도 땄으니 자기가 직접 운전을 해 보고 싶다고 했다.
경옥은 너무 어이가 없어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예에? 오늘 면허증을 따서 직접 운전을 하겠다고요?”
“고속도로도 아닌데 슬슬 몰아 보지 뭐.”
“예에?”
경옥은 강권의 말에 황당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알기에 강권은 면허증을 따려고 딱 1시간 운전 연수를 받은 것이 전부였다. 1시간이라고 해봐야 설명 듣고 커피 마시고 잡담하고 난 나머지 시간이니 대략 20∼30분 정도였다. 그리고 1종 보통에 응시했으니 그가 다루어 본 차도 승용차도 아니고 트럭이었다.
강권이 아무리 운동신경이 발달했어도 무리가 아닐 수 없었다. 경옥은 운전면허를 따고 처음 운전석에 앉았을 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고 앞이 캄캄했었던 기억이 있었다. 그리고 거의 1년 동안 연수를 받고서야 간신히 운전을 할 수 있었다. 자기는 운동신경이 발달하지 못해서 그랬다 쳐도 그것은 비단 그녀만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운동신경이 엄청 발달했다는 세나도 1주일 동안 거의 매일 연수를 받고서야 간신히 운전을 할 수 있었다. 또 몇 번 가벼운 사고를 내고서야 어느 정도 운전을 하게 됐다.
이런 생각에 경옥은 어이없다는 듯 강권을 바라보다 강권의 다음 말을 듣고 운전대를 양보했다.
“미리내야, 너도 올 때 보았다시피 도로가 무척 한적해서 연수를 한다고 셈치고 운전을 해 보는 것도 좋지 않겠어?”
“휴우, 알았어요. 그럼 조심해야 해요.”
“걱정하지 마. 내가 누구냐?”
“운전 실력은 자랑하는 게 아니래요. 운전 실력을 자랑하는 것은 비명횡사의 지름길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하하, 염려하지 말래도.”
경옥은 강권의 호언장담에 조수석에 앉으면서 제발 큰 사고만 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데 경옥의 이런 우려는 이내 경악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강권이 왕초보라는 것을 빤히 알고 있는데 그의 운전 실력은 완전 베테랑급이었던 것이다.
“어? 어! 강권 씨, 정말 오늘 처음 운전해 보는 것 맞아요?”
“하하, 당근이지. 미리내도 내가 운전면허를 따는 것을 쭉 봐 왔잖아.”
“그렇기야 하지만…… 어떻게 3년 동안 차를 갖고 다닌 나보다도 운전을 더 잘할 수 있죠?”
단순히 립서비스가 아니었다. 경옥이 보기에 단순히 차만 잘 모는 것이 아니었다. 추월해 줘야 할 차들은 추월을 하도록 양보해 주고 추월할 차들은 거침없이 추월을 했다.
가장 감탄한 대목은 추월해야겠다고 말하면서도 추월을 하지 않은 경우에는 반드시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급커브길이 나타났다는 사실이었다. 표지판은 물론이고 앞길의 교통 상황을 정확히 보면서 운전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것뿐이라면 말도 하지 않는다. 처음 운전하는 사람이 운전을 하면서 라디오 채널을 자연스럽게 바꾸고 있었다. 게다가 경옥이 운전했으면 5시간은 걸렸을 거리를 불과 3시간 남짓에 가평에 도착했다. 이른 점심을 먹고 출발을 했는데 가평에 도착하자 4시 무렵이었다.
경옥은 그때부터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마트로 향한 강권은 삼겹살은 물론이고 야채며, 고추장이며 이삼 일은 충분히 먹을 수 있을 만큼 넉넉하게 쌀도 샀다. 심지어는 휴대용 가스버너와 불판, 코펠까지 사는 게 아닌가.
‘이이가 화악산에서 야영을 하려고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것은 백 번 양보를 한다고 쳐도 사람이 잘 찾지 않은 후미진 곳으로 차를 몰아가는 것은 어찌 된 일일까? 경옥은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혹시 이 사람이 나를…….’
아는 것이 병이라는 말이 있듯 여기저기에서 들었던 남자들의 수작이 경옥을 불안에 빠뜨리고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도 아니고 순결이라는 게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경옥은 강권이 마음에 쏙 들어 평생을 함께하겠다는 생각도 갖고 있었다. 그렇지만 자신의 순결을 이런 식으로 그에게 주고 싶지 않았다.
‘어쩌지?’
경옥이 한참 갈등에 빠져 있을 때 차는 막다른 곳에 이르렀다. 강권이 차를 세우더니 차에서 내리란다. 경옥은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호흡이 가빠졌다. 간신히 진정을 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왜요?”
“보여 줄 게 있으니 내려, 여기서 좀 걸어가야 돼.”
그 말만 하고 강권은 성큼성큼 앞으로 가는 것이 한두 번 와 본 곳이 아닌 듯싶었다. 경옥은 망설이다 눈을 찔끔 감고 강권의 뒤를 따랐다. 자신의 순결을 이런 식으로 주어야만 하는가 싶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 미리내야, 왜 우는 거냐?”
“으흐흐흑…….”
강권은 경옥이 느닷없이 울음을 터트리자 엄청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달래 주어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아니 왜?’
한참을 기다려도 눈물을 그치지 않자 보다 못한 강권이 경옥을 품에 안으며 다독거렸다. 그러자 경옥은 울음을 그치기는커녕 울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아니 왜 우는 거냐? 미리내야, 뭔지 우는 이유를 알아야 내가 어떻게 해 주든지 하지?”
“흑흑흑…….”
“뚝, 남들이 보면 내가 너를 잡아먹으려는 줄 알겠다.”
강권의 말이 떨어지자 경옥의 흐느낌은 부모님이라도 돌아가신 듯 대성통곡으로 바뀌었다.
“엉엉엉…….”
경옥의 행동에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강권은 그녀의 행동이 너무 우스워서 파안대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하하하하. 미리내야, 너 혹시 내가 너를 겁탈하려고 이곳으로 데려왔다고 생각하느냐?”
그러자 경옥이 울음을 뚝 그치고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하하하하…….”
경옥은 마치 자기를 비웃는 것 같은 웃음소리를 들으며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경옥은 그 웃음소리에 강권이 더 친하게 느껴지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런 경옥의 기분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한참 배꼽이 빠져라 파안대소를 터트리던 강권이 웃음을 그치고 말했다.
“까지기는…….”
“뭐, 뭐요?”
“그럼 아니야? 멧돼지 눈에는 멧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일화가 있지?”
강권의 웃음소리에 마음의 안정을 찾은 경옥은 방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발랄하게 대꾸했다.
“나도 그 일화 알아요. 이성계와 무학대사 사이에 있었던 일화죠. 이성계가 무학대사에게 당신 돼지처럼 생겼다고 하자 무학대사는 상감은 부처처럼 보인다고 했다고 했다죠.”
“하하, 맞아. 그 말처럼 미리내, 네가 하고 싶은 생각이 있어서 그런 생각을 했을 게 아니겠어?”
“하긴 뭘 해요?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강권 씨가 그런 엉큼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날 이런 후미진 곳으로 끌고 올 이유가 뭐 있겠어요?”
“하하하, 다 왔어. 저 모퉁이만 돌면 내가 보여 주려던 곳이 있어.”
강권이 웃으며 손을 잡고 끌고 가자 경옥은 가자미눈으로 강권을 흘겨보며 따라갔다. 그런데 그 눈길에는 사랑이 흠뻑 담겨 있었다.
정말 모퉁이를 돌자 막다른 곳이 나타났고, 짐승의 굴로 보이는 조그만 구멍이 보였다. 강권은 그 조그만 구멍 앞에 서서 말했다.
“자, 여기야.”
“아, 아무것도 없잖아요?”
“잠깐만 기다려 봐. 여기 구멍 좀 넓히고.”
강권은 이렇게 말하고 노옴을 소환해서 구멍 좀 넓히라고 했다.
[알았다. 여기 참 좋다. 여기 힘 많다.]
노옴이 나타나자마자 이렇게 말하며 구멍을 넓히기 시작했다.
“어? 저, 저것, 노, 노, 노옴 아니에요?”
경옥은 판타지에서나 나오는 노옴을 실제로 보자 말을 더듬으며 연신 눈을 비볐다. 다시 보아도 노옴, 노옴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