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15화

제10장-백억을 다오


“인석아! 네 녀석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아느냐?”
“제가 뭘요?”
“정말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모른단 말이냐?”
“글쎄, 저도 제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궁금하니까 구체적으로 말씀해 보세요.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어이가 없다는 듯 한참 노려보더니 말했다.
“제왕이란 것은 하늘에서 점지를 해 주어야 하는 거야. 너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잖아? 그런데 제왕을 낳을 여인을 냉큼 가로채 버리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더냐?”
“아! 그 말씀이셨군요. 그런데 가로채다니 좀 듣기가 그렇습니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무주물은 선점한 사람이 주인이라는 것은 천고의 진리 아닙니까? 제가 남의 여자를 가로챈 것도 아니고 선남선녀가 만나다 보면 정분이 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 아닙니까? 제가 그 여자를 강제로 취했습니까? 그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인석아! 그 말이 아니지 않느냐? 제왕을 낳으려면 그 선조가 다 그만한 덕을 쌓아야 하는데 너도 빤히 알다시피 네 선조가 덕을 쌓았고, 네가 전생에 그만한 덕을 쌓았으면 네가 그 고생을 했겠느냐? 또한 그 아이의 부모마저 조상이 실덕(失德)을 해서 사정이 묘하게 꼬이게 되었다.”
“하! 이제야 할아버지 잘못을 시인하시는군요. 그러게 생전에 덕을 좀 쌓으시지 그랬어요? 그랬으면 경옥의 부모가 실덕을 했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문제도 없었을 거잖아요.”
“인석아! 그 말이 아니지 않느냐?”
할아버지는 한숨을 내쉬더니 한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휴우, 이렇게 된 걸 어쩌겠느냐? 네가 덕을 쌓아서라도 사태를 수습해야지.”
“제가 덕을 쌓아요? 그렇게 해서 되겠어요?”
“안 되면 되게 해야지, 달리 방법이 없지 않느냐?”
“어떻게요?”
“네가 가지고 있는 백억 원을 나에게 다오. 그럼 알아서 처리해 주마.”
“예에?”
강권은 기가 막혀 더 이상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젠장, 무슨 놈의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돈이 생기는 꼴을 보지 못하고 뺏어 가려고 안달을 한단 말이냐?’
“인석아! 속으로 꽁알거리지 마. 다 너 잘되고, 네 아들 녀석 잘되라고 하는 짓이야. 나도 엉뚱한 일에 말려들고 싶지 않다. 그런데 네가 저질러 놓은 일 때문에 여러 골이 시끄러운 걸 어떡하겠느냐?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돈이야 또 그 땅 귀신에게 보석 좀 캐 오라고 하면 될 게 아니겠느냐?”
“그야 그렇지만…….”
“이런 좀생이 녀석 같으니라고. 네 녀석과는 말이 되지 않으니 새애기와 말해야 되겠구나. 그렇게 알아라.”
“하, 할아버지, 할아버지.”
강권은 그 말을 끝으로 사라져가는 할아버지를 연신 불렀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대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강권이 일어나 보니 꿈이었다.
‘덕을 쌓으라고?’
그랬다. 사실 강권이 경옥에게 집착을 했던 이유는 단지 전생의 딸이어서가 아니었다. 경옥은 선연(先緣)으로 이어진 제왕의 어머니가 될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의 솔방울이 땅에 떨어져서 낙랑장송이 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이 맞아떨어져야 한다. 그렇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조건은 땅의 기운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경옥은 거목이 자랄 수 있는 기름진 땅이었고, 좋은 소출을 거둘 수 있는 밭이었다.
물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경옥의 선조가 나름 다 그만한 덕을 쌓았기에 가능하였다. 그런데 경옥의 부모가 정상적인 결합을 하지 못해 한 여자의 일생을 암울하게 만들었고 또 한을 품고 죽게 했다. 그렇게 조상이 쌓아 놓은 덕을 까먹자 상황이 조금 복잡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강권이나 강권의 조상이 제왕의 조상이 될 만큼의 덕을 쌓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강권이 과한 욕심으로 경옥과 인연을 맺자 문제가 자못 심각해지게 된 것이다.
하늘은 복과 화를 번갈아 내린다. 그런데 이 복이나 화는 확정적으로 내려지는 게 아니고 스스로 복을 찾아 먹어야 하고 화는 알아서 피해야 한다. 그 말은 게으르고 멍청해서 하늘이 준 제 복을 찾아 먹지 못하면 그 복은 고스란히 남의 것이 된다.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에는 화가 닥친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산이 높으면 골이 깊어진다고 복이 크면 화도 그만큼 큰 법이다.
‘죽을 쒀서 개를 주지 않으려면 천생 복을 찾아 먹어야 한다는 말인데…… 결론은 죽으나 사나 내가 덕을 쌓아야 하겠군.’
문제는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먹는다고 강권은 전생이나 현생이나 덕을 쌓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내 배부르고 등 따시면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미래를 읽고 후손들에게 땅 투기를 하라고 부추겼고, 자기 잘살자고 값비싼 도자기까지 남겨 두었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덕을 쌓는 게 어떻다는 것을 제대로 알 리 있을까?
강권은 경옥을 만나면서부터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일들을 돌이켜 보자 자신이 하고 있는 일들이 전혀 자신답지 않게 행동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우 제왕의 부모가 된다는 것에 내가 이렇게 들뜨는 거지?’
본래의 강권이라면 제왕을 골치 아픈 삶 정도로 생각해야 그게 정상이었다.
‘그런데 왜?’
아무리 생각을 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오느니 한숨뿐이었다.
“휴우, 그나저나 어떻게 덕을 쌓아야 하나?”
한참 고민을 하고 있는데 경옥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일어났다. 경옥의 표정을 보며 강권은 언뜻 뇌리에 스쳐 가는 것이 있었다.
‘정말 할아버지가 경옥이의 꿈에 현몽하셨나?’
아니나 다를까 경옥은 강권에게 꿈 얘기를 했다.
“……그러니까 꿈에 할아버지가 나타나셔서 우리 2세의 앞날을 위해서 백억 원으로 제단을 만들어야 한다고 그러셨다고?”
“예, 그렇게 덕을 쌓지 못하면 우리 아이는 비참한 삶을 산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덕을 쌓게 되면 우리 아이, 최강경이 인류 역사상 가장 훌륭한 위인 중에서 한 사람이 될 거래요.”
“우리 아이, 최강경? 벌써 이름까지 지었어?”
“아이! 이이는…… 나와 당신 아이니까 최씨 성을 쓰게 될 거고, 당신 이름과 내 이름에서 한자씩 따면 최강경 아니에요?”
강권은 아직 생기지도 않은 아이의 이름까지 지은 경옥의 행동에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싫지는 않았다.
‘최강경이라고?’
경옥은 꿈꾸는 듯 몽롱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할아버지 말씀이 몇 년 안에 우리나라는 통일이 될 것이고, 세계 제일의 영향력을 가진 엄청 강대국이 될 거래요. 그러기 위해서는 홍익인간의 이념을 전 세계에 널리 퍼뜨릴 필요가 있대요. 저는 당신이 허락만 하면 우선 백억을 종자돈으로 해서 강경 재단을 만들 거예요. 그래서 가난한 나라들의 어린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 줄 거예요. 그리고 그 재단을 키워 나가 우리 아이 강경이의 정치적 기반을 만들어 줄 거예요.”
강권은 자기에게 돈만 생겼다 하면 어떻게든 뺏어 가려는 할아버지의 수작에 기가 막혔다.
‘이제 경옥이까지 동원해서 내 피 같은 돈을 뺏어 가시겠다고?’
그나마 다행인 점은 예전처럼 한 푼 남기지 않고 홀랑 벗겨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결국 강권은 꼼짝없이 다이아몬드 원석을 팔아 생긴 돈 백억으로 재단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 * *

강권은 면허를 따자마자 가장 사고 싶었던 K사의 SUV 차량인 모데라토를 구입했다. 모데라토는 찻값만 5,000만 원에 육박했고 기름 값이 엄청 많이 드는 단점이 있긴 했지만 340마력의 강력한 힘이 마음에 쏙 들었다. 자고로 남자와 차는 힘 아니겠는가? 게다가 항상 4륜구동이니 무진신공을 익히기 위해 종종 험한 산길을 다녀야 할 강권으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차를 사자마자 강권이 향한 곳은 성남시 분당 경찰서였다.
실종된 장도진 연구원이 최종적으로 있었던 곳이 성남시였고, 장도진의 주소가 분당구로 되어 있으며 실종 신고가 된 곳이 분당 경찰서였다. 그러니 관할이 분당 경찰서일 것이다.
장도진의 행방을 찾으려면 가장 먼저 분당 경찰서를 찾아 수사의 진척 사항 등을 알아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강권은 경찰서에 들어가는 것이 꺼려져서 경찰서 앞 도로변에 일단 정차를 했다.
강권이 경찰서에 들어가려는 것을 꺼리는 까닭은 어린 시절 겪었던 트라우마 때문이었다. 강권은 그동안 회피하기에 급급했던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방법을 경옥에게 들었다. 경옥은 보통 사람이라면 정서적 안정을 꾀하며 서서히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방법을 써야 하겠지만 강권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다.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고 공무원들은 국민들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민주주의 이념만 제대로 알고 있다면 공권력은 전혀 두려운 게 아니라고 말했다. 과거 우리나라는 공무원이 국민들의 우위에 있는 비정상적인 적도 있었지만 현재 우리나라에서 공무원의 존재 이유는 국민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국민이 국가의 주인인 정치제도니까 주인인 내가 공무원들이나 공권력을 전혀 겁낼 필요가 없다고?”
강권은 무진신공을 유포시켜 안정을 한 후에 새로 산 애마인 황금색 모데라토를 몰고 경찰서로 들어갔다.
“실례합니다만 실종된 장도진 연구원의 수사 진척 상황을 알아보려고 미림에서 왔습니다. 실종자의 수사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알아보려면 어디로 가야 하겠습니까?”
강권은 최대한 정중하게 물었다.
그런데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덩치 좋은 경사가 강권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강권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러더니 강권이 어려 보이자 단박 반말로 짜증을 부렸다.
“에이! 짜증나. 미림의 어떤 새끼가 실종이 됐기에 요새는 밤낮없이 미림, 미림이야.”
순간 강권의 심장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차압을 당한 후에 학교에 갔을 때 아이들이 강권의 아버지가 나쁜 짓을 해서 나라에서 재산을 몽땅 압수했다는 놀림을 당할 때 느꼈던 딱 그 기분이었다.
강권은 무진신공을 유포시켜 안정을 꾀하며 내심 중얼거렸다.
‘이 자식은 내 종이고 나는 주인이다. 침착하자, 최강권.’
무진신공의 공능 덕분인지 금방 안정을 되찾자 강권은 그 경사에게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뭐라고요? 실례지만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건 됐고, 실종자 수사에 대해서는 방금 전화로 당신네 회사에 알려 줬어. 우리 분당 경찰서가 미림 전담 경찰서도 아니고 다른 일도 엄청 쌓여 있는데 너무 귀찮게 하지 말라고.”
강권은 쥐꼬리 같은 권력도 권력이라고 어깨에 힘주려는 말단 경찰들의 태도와 이를 보고도 보지 못한 척하는 다른 경찰들의 복지부동에 내심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파리 네 개면 경사, 명패를 보니 이철현이었다. 20대 후반에 경사면 승진이 빠르다고 볼 수 있었다.
“이철현 경사님, 거 민원을 이렇게 대해도 되는 겁니까?”
“에이 씨, 자꾸 귀찮게 하니까 그러지? 당신도 한 번 생각해 봐. 오늘만 해도 벌써 세 번째야, 세 번째. 다른 일도 잔뜩 밀렸는데 당신 같으면 짜증이 안 나겠어?”
“이봐, 이철현 경사, 당신의 사정은 알 바 없고 민원을 그따위로 상대해서야 어디 공무원의 올바른 자세라고 할 수 있어?”
“에이, 씨팔. 요새는 경찰이 봉이라더니 이제 별게 다 시비 거네. 야, 이 자식아. 나이도 어린 녀석이 어디서 훈계하려 들어? 내 막내 동생도 너보다 나이가 많겠다. 너 콩밥 좀 먹고 싶어?”
“좋아, 어디 콩밥 좀 먹여 봐. 당신 나 콩밥 먹이지 못하면 당신 옷 벗을 줄 알아.”
“그 자식 공무집행방해죄로 입건시켜. 나이도 어린 게 꼬박꼬박 대드네. 어디 시끄러워서 업무를 제대로 볼 수가 있어야지.”
뒤에서 누군가가 소리치자 이철현 경사가 민원실 밖으로 나와서 강권을 제압하려 했다. 이철현 경사가 나름 운동을 했다고는 하지만 강권을 당할 수 없었다. 아니, 도리어 호리호리한 강권이 덩치가 산만한 이철현을 순식간에 제압해서 항거 불능 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저 자식 잡아!”
누군가가 소리치자 민원실에 있던 의경들이 우르르 달려 나왔다.
“이러고도 당신들이 국민의 공복인 공무원이라고 할 수 있어? 이제 보니 이것들 이거 순 깡패 새끼들 아냐? CCTV에 찍혀 있으니 내가 정당방위인 것은 명백할 테고, 어디 그럼 본격적으로 해 볼까?”
강권이 큰 소리로 떠들자 강권에게 달려들던 의경들이 주춤했다.
강권은 의경들이 두렵지는 않았지만 싸우고 싶지 않아 큰소리로 겁만 주었다.
“나는 그대들 따위가 함부로 반말을 지껄일 정도로 그렇게 간단한 사람이 아니야. 민원이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함부로 그렇게 반말을 하면 되나? 그래서야 민중의 지팡이라고 할 수 있겠어?”
강권이 지르는 소리는 민원실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때 날렵한 인상을 가진 20대 중반의 경찰이 들어왔다. 어깨에 무궁화 하나가 있는 것을 보니 경위였다. 경위는 들어오다 그 광경을 보고 강권에게 다가와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
강권은 차가운 목소리로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예, 다름이 아니라 우리 회사 직원이 실종돼서 수사가 어떻게 진척이 되고 있는지 알아보려고 했는데, 이 이철현 경사가 다짜고짜 쌍욕을 하면서 나를 다그쳐서 이렇게 된 것입니다.”
강권의 얘기를 들은 경위는 상황이 대충 파악되는 듯 즉각 사죄를 했다.
“아! 죄송합니다. 그런데 실종자와 어떤 관계가 되십니까? 실종자 사건은 원칙적으로 실종자와 밀접한 관계가 없으면 정보 열람이 불가능합니다.”
“아! 그렇군요. 여기 제 명함이 있습니다.”
강권이 내미는 명함에는 주식회사 미림의 총괄 담당 이사 최강권이라는 글자가 금박으로 찍혀 있었다. 미진이 장도진을 찾는 강권에게 해 준 일종의 보답이자 배려였다. 총괄 담당 이사라는 초유의 직책이 주어진 것은 강권의 나이도 있고 학력이나 경력도 일천한 까닭이었다.
고경탁 경위는 명함을 받고는 깜짝 놀랐다.
‘아무리 봐도 아직 20대 초반인데 이사라니…… 그런데 총괄 담당 이사? 그런 직책도 있었나?’
고경탁 경위가 이처럼 놀라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요새 경찰서가 하도 시끄러워서 고경탁은 미림에 대해서 알아본 바 있었다. 그에 따르면 미림은 이른바 4세대 메모리라는 탄탄한 IT 기술을 기반으로 INT(탄소나노튜브 메모리) 및 IBT(분자 메모리)로 대변되는 퓨전 메모리 분야의 선두주자였다. 이 4세대 메모리는 세포를 이용한 바이오컴퓨터와 인공 장기, 감각의 디지털화[인간의 감각은 전기적 자극으로 외부의 사물을 판단하기 때문에 냄새나 소리도 디지털화 할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이 기술을 통해서 차세대 TV는 화면에 맞는 냄새까지도 송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를 이루는데 필수적인 요소였다. 그래서 어떤 경제 잡지는 이 미림을 향후 20년 내에 세계 3대 기업에 들 것이라는 전망까지 내놓고 있었다.
그런 미림의 이사라면 경찰서장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거물이라고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경탁 경위는 강권을 즉시 자기 사무실로 안내해서 간단하게 브리핑을 해 주었다.
“미림의 연구원 장도진 씨는 17일 오후 10시 경에 단대동에 있는 수산시장 성남점에서 동창들과 동창회 도중에 분당에 있는 집으로 가기 위해 51번을 탔다고 합니다. 그런데 ……중략…… 우리 분당 경찰서는 수정 경찰서와 성남 경찰서에 업무 협조를 얻어 실종된 장도진 씨의 행방을 찾기 위해 연 인원 1,028명의 경찰 인력으로 24시간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상입니다.”
“고경탁 경위님, 우리 회사의 사장님께서 장도진 연구원의 행방을 제보하시는 분에게 1억의 포상금을 걸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신속하게 처리해 주실 것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예에?”
일개 연구원의 실종에 1억이란 거액의 포상금을 선뜻 걸었다는 것에 놀란 고경탁은 이 사안이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신중한 어조로 대답했다.
“예, 그렇게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저희도 실종자의 행적을 찾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참, 아까 보니 이철현 경사를 비롯해서 민원 담당 경찰들이 민원을 대하는 태도가 영 아니더군요. 그들의 처벌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민원들에게 좀 더 친절했으면 합니다. 만약 다시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그때는 이대로 끝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고경탁 경위님을 믿고 이번만은 이대로 넘어가겠으니, 그리 아십시오.”
“아! 고맙습니다. 사실 제가 바로 며칠 전에 민원실로 발령을 받아서 아직 업무조차 제대로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직원들의 태도를 살피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강권은 고경탁의 나이가 어려 보여서 경찰대를 나왔을 것이라는 짐작은 하고 있었다. 경찰대를 나왔다면 나름 엘리트 코스를 밟아 가고 있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그의 기파가 안정이 되어 있고, 좋은 상을 갖고 있어서 나름 인재라면 인재일 것 같았다.
강권은 그를 알아 두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함께 식사나 하자고 했다. 또 경찰 쪽에서는 중국의 산업 스파이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고경탁 경위님, 마침 점심때도 되었는데 이 근처 괜찮은 식당 좀 알려 주십시오.”
“식당이오?”
“예, 예전에 분당에 와 봤는데 너무 바뀐 것 같아서요. 또 고 경위님과 식사나 함께하면서 여쭤 볼 말도 있고요.”
“아! 그러십니까? 한식 좋아하시면 근처에 그럴듯한 한정식 집이 있는데 어떠십니까?”
“예, 좋습니다.”
고경탁으로서도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었다. 미림의 이사를 알아서 손해 볼 일은 없었기 때문에 민원인과 식사를 한다는 것이 좀 걸리기는 했지만 순순히 응했다.
근처 한정식 집에 도착한 그들은 조용한 방으로 들어갔다. 강권은 방에 들어서자 고경탁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고 경위님, 혹시 중국 산업스파이들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산업스파이요?”
고경탁은 반문을 했지만 안색은 대강은 알고 있다는 기색이었다. 그것을 읽은 강권은 탁 깨놓고 말했다.
“그렇습니다. 제가 고 경위님에게 묻고 싶은 것이 바로 중국 산업스파이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 미림에선 우리 연구원 장도진 씨가 중국 산업스파이들에 의해서 납치당하지 않았나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예에?”
“아마 거의 확실할 것입니다. 얼마 전 우리 미림에서 중국의 해커 전산망에 침투해서 그들의 책동을 분쇄시킨 다음에 우리 연구원이 실종되었거든요.”
“…….”
강권이 보니 고경탁이 뭔가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무는 것이 느껴지자 순간 뇌리에 스치는 것이 있었다.
‘이 사람은 분명 뭔가 알고 있구나. 하긴 산업스파이들이 2,000여 명이나 암약하고 있는데 그것을 모른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하겠지.’
강권이 이런 생각이 들자 슬슬 알고 있는 것을 토해 내도록 유도를 했다. 그러자 고 경위가 한참 무언가 생각을 하더니 말했다.
“사실 제가 알고 있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다만 외사국에 근무하는 선배에게 얼핏 들은 것이 있습니다만…… 공무원 신분인 제가 잘 모르는, 거기에 국가 기밀이나 다름이 없는 일을 함부로 누설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선배라면 이사님께 무언가 해 줄 말씀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러니까 고 경위님은 그 선배와 다리를 놔 주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예, 그게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최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