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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숨을 돌린 유성은 다시 앞으로 나섰다.
인혁도 바닥에서 일어나 3미터 정도 거리를 두고 섰다.
조금 전의 격전으로 인해 어지럽혀진 풀밭 위로 다시 긴장감이 흘렀다.
“꿀꺽!”
명현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방금 전에 보았던 대결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격전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 때문이었다.
팟!
공격을 먼저 시작한 것은 인혁이었다.
그야말로 눈 깜빡할 사이에 유성 앞에 당도한 인혁의 발이 공중에서 내리찍혔다.
퍽!
실패를 예상한 듯 발목 깊이까지 땅속으로 파고든 발을 중심으로 인혁의 몸이 휘돌았다. 회전하는 몸을 따라 말라 버린 토사가 휘말려 올라갔다.
‘우와! 용오름 같다.’
인혁의 몸을 따라 회전하는 흙과 먼지를 보면서 명현은 언젠가 울릉도에 놀러 갔을 때 보았던 용오름 현상을 떠올릴 수 있었다.
티티티티틱!
흙먼지 속에서 번득이듯 발이 비치고 콩 볶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인혁이 녀석도 그렇지만 유성이도 대단하다. 저런 공격을 전부 막아 내다니!’
회전하며 날아오는 발차기를 그 자리에서 손으로만 막아 내고 있었다.
손에 비해 발차기 공격이 거의 다섯 배에 달하는 파괴력이 있음에도 아무렇지 않게 막아 내는 모습을 보니 질리지 않을 수 없었다.
‘싸움을 잘한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저 정도였다니…….’
명현은 지금 냉정하다 못해 무표정한 얼굴로 인혁의 공격을 막아 내고 있는 유성을 보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친구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파파팡!
“어?”
유성에 대해 생각을 하는 도중에 갑자기 파열음이 터져 나오자 명현이 의문이 섞인 탄성을 토해 냈다.
‘우와! 완전히 날아다니는구나.’
둘 사이의 공방이 어땠는지는 몰라도 인혁이 허공으로 떠올라 뒤로 날아가더니 처음 공격했던 자리로 내려서고 있었다.
“진유성! 정말 대단하다.”
“너도 마찬가지다.”
“그럼 본격적으로 해볼까?”
“좋지.”
“그럼, 간다. 차앗!”
샤샥!
‘어디로 간 거야?’
기합과 함께 인혁의 모습이 사라졌다. 얼마나 빠른지 명현은 인혁의 신형을 찾을 수 없었다.
파파팡!
‘뭐야? 언제 저렇게 날아오른 거야?’
파열음이 터져 나온 곳은 공중이었다.
지상에서 2미터 정도 상공에서 인혁과 유성이 스치듯 마주친 후 반대 방향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어? 또 어디로 간 거야?’
떨어져 내리는 것이 보이는 것도 잠시였다.
발이 땅에 닿은 순간, 이내 두 사람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기에 명현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팡! 파팡! 파파팡!
모습은 보이지 않는데 파열음만 주변에서 들려왔다.
명현의 시선은 두 사람을 좇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때로는 허공에서, 때로는 뒤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명현은 어디서 공방을 진행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파파파파파팡!
간간이 이어지던 파열음이 갑자기 연속해서 들려왔다.
‘싸우는 곳이 저기는 맞는 것 같은데…… 영화를 보는 것도 아니고, 저 녀석들 사람이 맞는 건가?’
바로 눈앞에서 싸우고 있었지만 인혁과 유성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피어오르는 흙먼지만 아니었다면 귀신의 장난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였다.
명현은 인혁과 유성이 도저히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제 끝난 건가?’
잠시 후, 파열음이 멈추고 흙먼지가 가라앉았다.
마주 선 유성과 인혁은 붉게 상기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묻지 않는 것이 좋겠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보고 있던 두 사람 중 먼저 입을 연 것은 인혁이었다.
“지금은 그러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럼 묻지 않도록 하지.”
무가마다 비밀이 있는 법이었다.
내기를 막아 낼 정도의 무예를 가진 무가라면 묻지 않는 것이 관례였기에 인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녀석 가문이 어느 곳인지는 모르지만, 결코 무시할 만한 곳은 아닐 것이다.’
동작 하나하나에 세밀하게 담겨진 무리를 보면 보통 가문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하지? 절대 그럴 수 없는데 말이야.’
천천히 숨을 고르며 유성을 바라보는 인혁의 표정이 묘했다. 자신은 내기를 사용했지만 유성은 내기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공격을 막아 냈기 때문이다.
궁금함이 가득한 표정과 함께 눈동자에는 여전히 의문의 빛이 서려 있지만 조금 전 합의한 대로 유성은 묻지 않기로 했다.
‘궁금하기는 하지만 참자. 오늘 저 녀석과의 대련으로 얻은 것이 많으니까. 형들처럼 수련을 했으면 몇 년이 걸려도 알지 못했을 텐데, 그나마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는 일이다. 오늘 얻은 것을 체득하면 형들을 앞설 수 있을 테니까.’
대련을 하면서 유성을 통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리기는 하겠지만 오늘 깨달은 것들을 갈무리한다면 그 누구보다 빨리 수련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인혁은 아쉬움을 접었다.
“이제는 무승부니까 그만해도 괜찮겠지?”
거친 숨이 가라앉고 차츰 호흡이 회복되자 유성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래, 됐다.”
“그럼, 이제 그만 끝내고 헤어지자.”
“알았다. 이대로 끝내는 것이 낫겠다. 더 이상 했다가는 내 밑천이 다 드러날 테니까. 유성아, 그동안 고마웠다. 덕분에 내 실력도 많이 늘었으니 말이다.”
“후후, 그래. 나도 너 때문에 많이 늘었다. 그동안 조금 괴롭기는 했지만.”
“괴롭기는? 자식, 너도 즐겼다고 솔직하게 말해라.”
“하하하하! 그런가?”
“그나저나 이제 이사를 가게 되면 언제 널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디 멀리 가는 거냐?”
심상치 않은 말에 유성이 물었다.
“그래, 미국으로 간다.”
“미국?”
“아버지께서 결정하셔서 이번에 가족들이 전부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됐다.”
“그렇구나. 이민을 가다니…….”
조금 멀리 이사를 가는 거라 생각했는데 이민이라니, 유성으로서는 뜻밖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거 좀 아쉽네. 미국으로 이민을 가다니 말이다.”
“정말 아쉽냐?”
인혁이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그럼 아쉽지. 언제 다시 볼지 모르는데 말이다.”
“걱정하지 마라. 성인이 되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거다.”
“돌아온다고?”
“그래, 고향이 여긴데 안 돌아올 수 있겠냐? 그리고 난 미국이 싫다.”
“후후후, 녀석!”
“그런데 말이다.”
“뭐 할 말이라도 있냐?”
“내가 돌아오면 너를 다시 볼 수 있을까?”
“글쎄, 모르겠다. 다시 볼 수 있을지…….”
인혁이 바라는 것이 빤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거취가 어떻게 될지 모르기에 유성이 말끝을 흐렸다.
“돌아오면 보자. 아니, 그럴 것이 아니라 우리 스물다섯 살이 되는 해, 광복절에 이곳에서 보도록 하자.”
“스물다섯 살이 되는 해, 광복절에 이곳에서?”
“그래, 만약 여기가 없어진다면 그때는 도장으로 와라. 한국으로 오면 그곳에 연락처를 남겨 놓을 테니까 말이다.”
인혁이 간절한 눈빛으로 말했다.
‘뭔가 말 못할 사정이라도 있는 건가?’
인혁의 말투가 전에 없이 진지했다. 아무래도 자신과 한 달에 한 번 대련을 했던 것과 관련이 있을 것 같았다.
“약속은 못하겠지만 기회가 되면 오도록 해 보지.”
“아니, 확실히 약속을 해라. 꼭 날 보러 오겠다고 말이다.”
약속을 지키라고 인혁이 채근했다.
“그렇게 하마. 스물다섯 살이 되는 해에 광복절 날 보자.”
“고맙다.”
인혁은 유성의 대답을 듣자 무척이나 고마워했다.
“고맙기는.”
“그럼, 난 이만 가 보마. 그동안 귀찮게 굴어서 미안하다. 그리고 정말 고마웠다.”
“그래, 잘 가라. 몸조심하고.”
인혁은 작별 인사를 하고 나무로 가서 벗어 놓았던 옷을 입었다. 그리고 산 위쪽으로 빠르게 올라갔다.
산을 넘으면 곧바로 집으로 가기 때문이었다.
“명현아, 옷 좀 줘라.”
서둘러 사라지는 인혁의 모습을 바라보다 유성이 말했다.
“저 녀석 때문에 귀찮은 게 한둘이 아니었는데 이제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니 정말 잘됐다.”
“그래도 아쉽기는 하다. 저 녀석 덕분에 나도 실력이 많이 늘었거든.”
“하긴, 전보다 더 실력이 좋아진 것 같더라. 이제 너희 둘 다 사람 같지 않아 보이더라.”
매달 지켜보았던 명현이었다.
상당한 실력을 지니고 있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오늘 두 사람의 진짜 실력을 본 후라 새롭게 개안한 기분이었다.
“후후후, 녀석! 사람 같지가 않기는. 우와, 한바탕 뛰었더니 배고프다. 어서 만복당에나 가자.”
“그래, 그렇게 싸워 댔으니 배가 고프기도 하겠다. 어서 가자. 덕분에 구경은 잘했지만 나도 배고파 미치겠다.”
명현이 배를 움켜잡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래, 어서 가서 왕창 먹자. 윽!”
명현의 어깨를 잡으며 발걸음을 옮기려던 유성이 신음과 함께 비틀거렸다.
“유성아, 괜찮니?”
“허리가 조금 결리네.”
“그 녀석에게 맞은 거냐?”
“정통으로 맞은 건 아니지만 아까 그 녀석 공격에 살짝 스쳤는데 조금 결리네.”
“그럼 어서 집에 가서 쉬어야지?”
“아니다. 그렇게 크게 다친 것은 아니니까 괜찮아. 어서 만복당에나 가자.”
“너 정말 괜찮은 거냐? 웬만하면 집에 가서 쉬어라.”
인혁과의 대결에서 항상 일방적인 승리를 거뒀던 유성이었기에 명현은 걱정이 되는지 권유했다.
“하하하! 괜찮다, 인마.”
“정말 괜찮은 거지?
“그래, 인마. 어서 가자.”
웃으며 자신을 이끄는 유성의 손길에 명현도 발걸음을 옮겼다.
축대 쪽으로 온 두 사람은 인도로 내려가 만복당이 있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인도를 따라 30여 분 걷다 보니 종합시장 사거리가 나왔다.
사거리에서 널따란 차도를 지나 개천을 가로지른 다리를 건너면 골목길에 만복당이 있었다.
“유성아, 그 자식 때문에 많이 늦어서 그런지 되게 배가 고픈 것 같다.”
“그래, 조금 늦기는 했다.”
“어! 신호가 바뀌려고 하네. 어서 가자.”
황단보도에 서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던 유성과 대화를 나누던 명현은 차량 신호를 바라봤다.
노란불이 들어오려고 하자 차도를 건너려고 유성을 잡아끌었다.
“위험해. 조금 있다 신호가 완전히 바뀌면 가자.”
“금방 바뀌니까 괜찮아. 너무 늦어서 자리가 없을지도 몰라.”
“그래도…….”
차량 진행 신호가 노란색이니 곧바로 횡단보도에 녹색 신호가 들어올 것이기에 팔을 잡아끄는 명현을 따라 유성도 차도로 내려섰다.
끼이이익!!
귀곡성마냥 사람의 귀를 파고드는 날카로운 소리가 차도를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