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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깊어 오가는 이가 없는 병실 복도를 걷고 있는 환자가 있었다.
내일 퇴원을 위해 부모님이 잠시 집을 다니러 간 후 병실을 나선 유성이었다.
‘피곤했던 모양이구나.’
야간 당직을 서고 있는 간호사가 꾸벅꾸벅 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조심스럽게 데스크를 지나 계단으로 올라간 유성은 옥상으로 향했다.
다행히도 옥상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휘이―잉!
문을 열고 옥상으로 나서자 차가운 밤바람이 온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직 2월이라 그런지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느라 싸늘한 바람이 연신 불고 있었다.
“이상하군. 바람이 부는데도 별로 춥지가 않구나.”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척 봐도 매서운 바람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환자복만 입은 유성은 추위를 거의 느끼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특별한 일이지만 생각이 다른 데로 가 있는 유성은 미처 그런 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어서 가 보자. 내 기억이 맞는지 확인할 수 있을 거다.”
유성은 옥상을 가로질러 병원 뒤쪽으로 갔다. 가파른 언덕 앞쪽 아래로 드문드문 집이 보였다.
“으음, 역시나 없구나.”
자신의 기억으로는 병원 뒤편에 도로를 사이에 두고 아파트 단지가 있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언덕 밑으로 작은 가옥들만 몇 채 있을 뿐, 아파트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곳에 아파트가 들어서는 것은 몇 년 뒤다. 지금 상황이라면 내가 과거로 돌아온 것은 맞는데 말이야. 눈도 멀쩡한 상태에서 과거로 돌아오다니 도무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구나.”
불가능한 일이 황당하게도 현실로 나타났다.
아직 확인할 것이 많이 남았지만 과거로 회귀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지금으로서는 알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내가 과거로 진짜 돌아온 것인지도 확실하지가 않다.”
생각할수록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유성은 곰곰이 생각을 이어 나갔다.
“혹시?”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누군가 탐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유성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고전영화지만 감명 깊게 봤던 영화가 갑자기 기억이 났기 때문이었다.
영화는 잠재의식을 소재로 한 것이었다.
여러 단계를 거쳐 다른 사람의 심층의 의식까지 파고들어가 비밀을 캐내는 줄거리를 가지고 있었다.
남의 의식 속에 들어가는 것은 물론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설계한 대로 현실과 같은 상황을 만들어 내는 정말이지 상상하기도 힘든 일들을 영화 속에서 연출했다.
시력을 상실한 탓에 시뮬레이터에 접속해 눈이 아닌 뇌로 직접 보았던 터라 무척이나 인상이 깊어 아직까지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런 상황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실제로도 가능하다고 뉴스에도 나온 적이 있으니까.”
대부분의 영화가 인간의 상상력에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 상상력이 현실로 변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 왔다.
유성이 보았던 이 영화도 현실이 되어 버렸다.
과학의 발달로 미지의 영역인 뇌를 직접 조작해 정신병을 치료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을 뉴스에서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 같은 놈에게 뭐 득 볼 게 있다고 그런 조작을 하겠느냔 말이지. 엄청난 돈이 들어간다고 했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특별한 능력에 대해서 정부에서 알 리도 없고 말이야. 혹시, 조폭들이라면 모를까.”
뇌를 직접 자극해서 심층 단계의 의식 조작을 하기 위해서는 슈퍼컴퓨터를 비롯해 여러 가지 보조 컴퓨터를 사용해야 한다.
거기다가 여러 가지 신물질을 사용하기 때문에 비용이 상당히 많이 든다고 방송에 나왔다.
“내게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것도 조폭들 사이에서나 알려진 일이다. 놈들도 나를 통해 돈을 벌려고만 했지 내가 어떻게 그런 능력을 가지게 됐는지 관심이 전혀 없었다. 그냥 초능력을 가진 것으로만 생각을 했지. 나중에는 내가 폐인이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그냥 내버려 두기까지 했으니 그럴 리는 없다. 작두 녀석을 보낸 것을 보면 나중에 관심을 조금 가진 것 같기는 하지만 그놈들이 할 만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정부에서 그랬을 리도 없고…….”
의식 조작을 하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들의 규모를 볼 때 절대 조폭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그렇다고 자신처럼 인생을 다 산 별 볼일 없는 늙은이를 대상으로 확실하지도 않은 일에 정부가 나설 일도 없었다.
자신이 가진 능력이 아무리 특별하다고 해도 쉽게 나설 일이 아니었다.
여러 가지 상황으로 생각해 봤을 때, 특히나 엄청난 비용을 들여 가면서까지 그런 작업을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기 때문이다.
“설사 지금의 내 상태가 예상에서 벗어나 정신을 조작하고 있는 중이라도 내 능력에 대해 알아낼 수는 없다. 아무리 좋은 슈퍼컴퓨터나 약물을 쓴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가진 미지의 영역에 대해서 다 아는 것은 아니니까. 그렇다면 지금 상황이 진짜 과거라는 것인데…….”
이렇게 모든 가능성을 접으니 결론은 하나였다. 자신이 과거로 돌아왔다는 것이 현실일 수 있다는 것이다.
믿어야 할지, 아니면 믿지 말아야 할지 정말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생각이 더해질수록 유성의 머릿속은 점점 더 복잡해져 갔다.
“꿈처럼 사라지는 않을 테니 일단은 기다려 보자.”
어차피 고민을 해 봐야 소용이 없었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일단은 기다리는 것이 유성으로서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이런 시간이 얼마나 지속될지 모르지만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기다리며 확인을 해 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오실 시간이 얼추 된 것 같으니 이제는 내려가야겠다.”
옥상으로 올라온 후 한참을 서 있었다.
이제는 병실로 돌아가서 집에 갔다가 돌아오실 어머니를 기다려야 했다.
자신이 병실에 없는 것을 알게 되면 유독 자신을 끔찍이 여기시는 어머니가 놀라서 자신을 찾아 나설 것이 분명했다.
유성은 괜한 일로 걱정시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옥상 출입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응! 뭐지?”
옥탑 문을 열고 계단으로 내려가려던 유성은 뭔가 섬뜩한 감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가슴이 떨릴 정도로 강렬한 존재감이었다.
“저쪽은 육군교도소가 있는 곳인데…….”
정신을 집중하고 자신이 느낀 것이 맞는지 살폈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사실 유성은 강렬한 존재감에 이어 꺼져 가는 생명의 기운을 느꼈다.
하지만 워낙 생소한 느낌인데다가 나타나자마자 곧바로 사라져 버렸기에 아무런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내가 잘못 느낀 건가?”
아무리 살펴봐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기에 유성은 자신이 잘못 느낀 것이라고 치부했다.
“누가 사형이라도 당한 건가? 기분이 영 찜찜하네.”
기분이 별로 좋지가 않았다.
개운치 않은 느낌에 입맛이 썼다.
하지만 유성은 부모님이 오실지도 모르기에 더 이상 깊게 생각하지 않고 옥상을 내려와 병실로 향했다.
“아직 오지 않으셨구나.”
병실로 들어섰지만 아무도 없었다. 부모님은 아직 돌아오시지 않아 다행이었다.
“피곤하다. 잠이나 자자.”
생각을 많이 했더니 무척 피곤했다.
유성은 곧장 침대에 몸을 눕히고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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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오래된 세월만큼이나 여러 가지 사연과 깊은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 바로 남한산성이다.
신라 문무왕 때 처음 성을 쌓아 주장성(晝長城)이라 이름 붙여진 이 산성은 조선시대에 석축산성으로 다시 쌓아져 조선왕조의 수도인 한양을 방어하는 책임을 졌던 곳으로, 둘레가 8킬로미터나 되는 큰 성이다.
무수한 전투가 이곳에서 치러졌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는 것은 이곳이 역사에 다시없을 치욕의 현장이며, 아픔을 간직한 곳이라는 것이다.
병자호란이 일어날 당시 남한산성에서 47일간을 항전하다 청나라의 태종 앞에 조선의 임금인 인조가 무릎을 꿇고 빌었던 삼전도의 치욕을 아직도 새기고 있는 곳이 바로 남한산성이었다.
남한산성 내에는 유명한 곳이 하나 있는데, 바로 군에서 범죄를 저지른 자들을 수용하고 하고 있는 육군교도소다.
남한산성에 들어가면 온전한 몸으로는 나오기 힘들다는 말이 돌 정도로 악명을 떨치고 있는 곳이었다.
정상 부근에 위치한 육군교도소는 군 범죄자들을 수감하는 건물을 가운데 두고 군데군데 망루와 철조망이 설치되어 있었다.
수감된 이들이 잠이 든 듯 육군교도소는 지금 짙은 어둠에 잠긴 채 적막에 싸여 있었다.
파다다닥!
고요하기만 하던 교도소 인근에서 갑작스럽게 소란이 일어났다.
철조망 근처를 맴돌던 야생동물들이 무언가에 놀란 듯 급하게 산 아래로 줄행랑을 놓고 있었다.
교도소 인근에는 놀라게 할 만한 것이 보이지 않았음에도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가는 동물들은 하나같이 공포에 질려 있었다.
공포의 근원은 소리였다.
저주파처럼 인간의 귀로는 들을 수 없는 음역대의 소리가 철조망이 빙 둘러쳐져 있는 건물들 사이에서 흘러나왔던 것이다.
츠츠츠츠츠!
건물들 사이에서 퍼져 나온 알 수 없는 소리는 점차 새벽으로 넘어가는 어두운 밤을 지배하고 있었다.
소리가 강해지다가 멈춘 후 교도소 내에 있는 한 독방에서 기괴한 기운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직 초봄이건만 끈적끈적할 정도로 습하고, 기분이 나쁜 기운이었다.
소리의 근원지는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의 지하에 위치한 독방이었다.
특별한 이유 때문에 만들어진 독방이었다.
다른 곳과는 달리 지하에 만들어진 이 독방은 1미터가 넘는 콘크리트와 30센티미터가 넘는 철문으로 잠겨진 곳이었다.
세간에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은 독방에는 이름이 무엇인지, 언제부터 수감이 됐는지, 그리고 죄명이 무엇인지조차 알려져 있지 않은 자가 갇혀 있었다.
수인번호 0048호가 갇혀 있는 독방 안은 기이한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알 수 없는 검은 기운으로 덮여 있었다.
자연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독방 근처에는 지금, 살아 있는 생명체라고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 살아 있던 존재가 방금 전 세상을 달리해 버린 것이다.
부르르르…….
두 개의 철창 너머에서 독방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자는 생명이 끊어졌음에도 죽기 전의 고통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듯 아직도 몸을 떨고 있었다.
두 눈은 더할 나위 없이 크게 떠져 있고, 혀를 길게 빼어 문 모습이 상당한 고통을 겪은 듯했다.
끼이―기기기긱!
두꺼운 철제문이 모골이 송연한 소음을 흘리며 열리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검은 기운이 흘러나와 철창을 넘어서 복도로 퍼지기 시작했다.
푸시시시식!
염산에 부식이 되듯 쇠창살이 녹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주검도 녹아내리며 검은 연기가 복도 안을 가득 메웠다.
“크크크크, 이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건가?”
어둠 사이에서 한 번 들으면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암울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