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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상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이내 문이 닫히고 아버지의 모습이 사라지자 유성이 눈이 빛났다.
“으음, 꿈이 아니다. 이건 진짜 현실이다.”
택시를 타고 집에 오기까지 내내 고민하던 것에 대해 유성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집으로 오는 동안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주변 풍경은 중학교를 갓 졸업했을 때의 모습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 이제는 기억에서조차 가물가물했던 마당의 모습이 보였고, 이내 그곳이 17살 당시 자신이 살았던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결코 꿈일 수 없는 생생한 모습이었다.
드르륵!
지금의 상황이 현실임을 자각하며 곤혹스러워하는 유성의 눈에 미닫이문이 열리며 밝게 웃고 있는 명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뭐 하냐?”
“보면 모르냐? 누워 있다. 어서 들어와라.”
“히히히.”
“자식.”
명현이 냉큼 들어오자 유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베개를 지지대 삼아 벽에 기대어 앉았다.
‘저건 뭐지?’
뭔가 가지고 왔는지 명현의 손에 작은 상자가 들려 있었다.
“그건 뭐냐?”
“응, 아버지가 중동에서 보내오신 거다. 비타민이라고 하는데 너 주려고 가지고 왔다.”
명현은 뿌듯하게 상자를 내밀었다.
‘저 녀석 아버지가 사우디아라비아에 계시지.’
명현의 아버지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중동에 있는 건설현장 소장으로 해외근무를 하고 있는 중이다.
자신의 아들을 위해 가끔씩 선물을 보내왔고, 그걸 받을 때마다 무척이나 좋아하며 자랑하던 명현의 모습이 뇌리에 떠올랐다.
“사우디아라비아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그래, 인마.”
“그렇구나. 그런데 너나 먹지, 왜 가지고 왔냐?”
“인마, 이런 거 하나 또 있으니까 너도 먹어라. 몸에 좋은 거라고 하니까 하루 두 번씩 아침저녁으로 꼬박꼬박 챙겨 먹어야 된다.”
“후후후! 그래, 고맙다.”
이제 보니 내미는 상자가 눈에 익었다.
미래의 기억 속에도 보았던 상자다. 하나만 달라고 그렇게 졸라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던 그때 그 비타민이었다.
유성은 상자를 받아 옆으로 놓았다.
“미안하다. 유성아. 내가 그때 그렇게 서두르지만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아직도 털어 버리지 못한 듯 명현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명현아, 괜찮다고 했지. 그날은 네가 날 위로해 주려고 그랬다는 것 아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마라. 너도 보다시피 난 정말 괜찮으니까 말이야.”
유성은 명현을 위로했다.
장님이 되어 버린 후에 마음고생으로 정신병까지 앓았던 친구였다. 한때는 원망하는 마음도 가졌지만 지금은 아니다.
고등학교 진학이 계획대로 되지 않아 자신을 위로한답시고 그랬던 것이라 마음에서 털어 버린 지 오래였다.
“그래, 흐흐흑!”
명현의 눈시울이 붉어지며 눈물을 흘렸다.
‘이 녀석이 이렇게나 울보였나? 하긴 이렇게 마음이 여리니…….’
병원에서도 그렇고 명현이가 이렇게 눈물이 많았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기야 자신의 사고로 인해 정신병까지 앓았으니 쾌활한 성격과는 달리 속마음은 여리기 그지없는 것이 분명했다.
“인마, 괜찮다고 하잖아. 그러니 울지 마라. 내가 우는 것 싫어하는 거 알지?”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 유성은 목소리를 높였다.
“크큭, 그래, 알았다. 인마.”
눈물을 훔친 명현이 애써 웃으며 말했다.
“자식, 많이 놀랐나 보구나. 하지만 이렇게 무사하니까 쓸데없이 미안하게 생각하지 마라. 자꾸 그러면 나 정말 화낼 거다.”
“그래, 알았다.”
“그나저나 너희 아버지 말이야. 그렇게 더운 중동에서 근무하시는데 건강은 괜찮으신 거냐?”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까지 아파서 되게 고생하셨다고 하시더라. 원래 그곳에서는 이슬람교를 믿어서 돼지고기를 먹지 못하는데 몰래 먹었다가 탈이 나셨나 봐.”
“탈이 나셨다고?”
“그래, 상한 것을 드셔서 그런 건지 배탈이 나셔서 병원에 입원까지 했었다고 하시는데 지금은 그나마 괜찮으신가 봐.”
“어디 다른 데 아프신 데는 없고?”
“그래, 지금은 괜찮다고 하셔.”
“다행이다.”
유성이 명현의 아버지의 건강이 어떤지 물은 것은 한 가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자신이 생생히 살아온 고통스러운 인생이 꿈인지 아니면 사실인지를 확인해 보려던 것이다.
명현의 아버지의 건강 상태를 통해서 알아보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명현은 아버지가 배탈이 났다고만 생각하고 있지만 그가 알고 있는 것은 사실과 상당히 달랐다. 오염된 돼지고기를 먹고 이질에 걸려 거의 죽을 뻔했다는 것이 진실이다.
정확히 명현의 아버지는 이질에 걸려 죽다 살아났다.
가족들이 걱정할까 봐 배탈이 나서 병원에 입원했다고만 했지만 사경을 헤맸었다.
이런 사실은 아들의 고등학교 입학식에 맞추어 며칠 후 중동에서 돌아오시는 명현의 아버지에 의해 알려지게 된다.
그런 일이 있으면 가족에게 알려야지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명현이 무척이나 속상해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유성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맞다면 지금이 현실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기에 물어봤던 것이었다.
‘오시면 진짜 이질을 앓으셨는지 알 수 있겠지. 그것이 사실이라면 내 기억도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많은 것이 변했다. 내가 장님이 아니라는 것도 그렇고, 병원에서 금방 퇴원을 한 것도 그렇고. 내가 살아왔다고 생각한 세월이 진짜 사실인지는 좀 더 지켜봐야 알 수 있겠군.’
구운몽처럼 한낱 일장춘몽일 수도 있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살아온 세월이 너무나 생생하고 지금의 상황도 꿈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 사실 같았다.
유성은 자신이 과거로 왔다는 것을 점점 확신해 가고 있었다.
“아함~!”
생각을 집중한 것 때문인지 졸음이 몰려온 유성이 하품을 했다. 어찌 된 일인지 얼마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이런, 피곤한가 보구나. 내가 너무 오래 있었나 보다. 난 집에 갔다가 내일 다시 올 테니까 그만 쉬어라.”
“그래, 가 봐라.”
“다 나으면 영화나 한 편 보러 가자.”
또다시 몰려오는 졸음 때문에 계속 대화를 나누기 어려웠던 유성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 누워서 명현을 배웅했다.
‘왜 이렇게 졸음이 쏟아지는지 모르겠구나.’
명현이 미닫이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스르르 잠이 쏟아졌다.
그렇게 잠이 든 유성이 아주 깊은 잠을 자기 시작했다.
스스스스!
유성이 잠이 들고 얼마 후, 거무스레한 기운이 방 안을 맴돌기 시작했다.
음산하기 그지없는 검은 기운은 슬금슬금 유성에게로 다가갔다. 남한산성에서 수환과 도환을 함정에 빠트리고 도주했던 사나이의 영혼이었다.
―크크크, 이놈이구나.
배교의 마지막 생존자이자 교주이기도 한 아사한은 자신에게 행운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 기쁘기 그지없었다.
수환과 도환을 맞아 싸우는 동안 아사한은 위기감을 느꼈었다.
금제를 당해 갇혀 있는 동안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진원이 대부분 고갈됐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아 있는 진원만으로도 수환과 도환을 상대하는 것에는 무리가 없었지만 아사한은 과감하게 생각을 바꿨다.
두 사람을 죽이고 나면 자신의 생도 끝나 버려 복수를 완성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사한은 한 가지 계획을 세우고 배교에서도 금단에 속하는 술법 중 하나인 이혼대법을 펼쳤다.
이미 쓸모가 없어져 버린 육체를 이용해 두 사람을 제거하는 동시에 이혼대법을 이용해 자신의 영혼을 다른 사람에게 옮기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렇게 모습을 감춘 후 힘을 기른다면 추적을 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복수 또한 완성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혼대법은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영혼마저 소멸되어 버리는, 아주 위험한 술법이었다.
다른 때 같으면 아무리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런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하겠지만 한 가지 발견한 것이 있기에 과감하게 시도를 했던 것이다.
아사한이 이토록 무리한 계획을 진행하도록 만든 것은 바로 유성의 존재 때문이었다.
금마뢰를 나온 순간 아사한은 수환과 도환 이외에도 유성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었다.
과거로 회귀한 탓에 불안정했던 터라 영혼의 진폭이 커서 유성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조심스럽게 유성의 몸을 살펴보니 예상한 대로 육체에 영혼이 안착되지 못하고 있었다.
―크크크, 예상대로다. 이런 몸을 가지고 있는 놈이 있었다니 정말 다행이다.
자신의 계획대로 실행에 옮긴 후 영혼의 진폭을 쫓아 유성을 찾아온 아사한의 영혼은 희열에 들떠 있었다.
이혼대법이 성공하기에 가장 알맞은 육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네놈의 몸은 내가 잘 써 주도록 하마.
아사한의 영혼인 검은 기운이 유성의 머리 쪽으로 몰려가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눈과 귀, 입과 코를 통해 천천히 스며들었다.
아사한의 영혼이 그렇게 거의 대부분 유성의 머릿속으로 스며들 무렵, 유성의 몸에서 갑작스럽게 푸른빛이 흘러나왔다.
―뭐, 뭐지?
유성의 영혼을 육체에서 떼어 내고 자신의 영혼을 안착시키려던 아사한은 기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거대한 힘이 자신의 영혼을 감싸더니 압박을 해 왔기 때문이었다.
―버, 벗어나야 한다.
아사한은 유성의 몸에서 빠져나오려 애를 썼다.
하지만 그의 영혼을 감싼 미지의 힘은 이미 도망갈 곳을 모두 차단한 후였다.
―끄으으윽!
고통이 밀려왔다.
벗어나려 애를 써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배교의 모든 술법에 통달한 아사한이었지만 압착기로 전신을 짜내듯 영혼을 압박하는 힘은 대항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미지의 힘은 무지막지했다. 용서가 없다는 듯 강한 힘으로 아사한의 영혼을 압착했다.
―크아아아악!
영혼이 갈가리 찢겨 나가는 고통에 아사한은 처절하게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악! 사, 살려 줘!
비명을 지르며 살려 달라 애원하는 아사한의 울부짖음에도 미지의 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콰지지직!
―크아아아아악!!
미지의 힘은 아사한의 영혼을 산산이 부숴 버리며 영원히 소멸시켜 버렸다.
유성의 몸에서 나오던 푸른색의 빛도 어느 사이엔가 잦아들더니 이내 사라지고 없었다.
드르륵!
아사한이 소멸되고 얼마 뒤, 문이 열리며 방 안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유성의 몸을 살피러 온 상혁이었다.
보통 사람보다 예민한 기감을 가지고 있던 상혁도 방금 전까지 아들의 방에서 일어났던 일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