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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이 잠에서 깨어난 것은 새벽 무렵이었다.
“으음, 아직 밤인가?”
눈을 뜬 유성은 아직도 방 안이 어둠에 잠겨 있는 것을 느끼며 유성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부터 켜자.”
누구보다 어둠이 싫었던 유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천장에 달린 형광등에서 전선을 따라 길게 늘어진 스위치를 찾았다.
“있군.”
유성은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더니 이내 스위치를 찾았다.
딸칵!
전선에 매달려 있는 메추리알 정도 크기의 스위치를 누르자 천장에 붙은 형광등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팅! 팅! 티티팅!
몇 번 깜빡이던 형광등에 불이 들어오고 방 안이 환하게 밝아졌다.
“후후, 이것도 예전 그대로구나.”
곧바로 불이 들어오지 않는 모습을 보며 과거의 상태와 같음을 상기한 유성은 조심스럽게 한쪽 구석에 있는 벽걸이 거울로 다가갔다.
“내가 예전에 이런 모습이었던가?”
병원 화장실에서 보기는 했지만 여전히 앳된 얼굴이 거울 안에 있었다.
이미 기억에서도 오래전에 지워진 중학교를 졸업한 17살의 어린 자신의 얼굴이었다.
“그냥 옷을 입고서 잔 모양이구나.”
병원에서 퇴원한 후에 곧바로 잠이 든 탓에 미처 벗지 못하고 혼절하듯 잠이 든 것이 분명했다.
“으음, 이 옷은…….”
졸업식 때 입고 있었던 것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사고 당시에 입고 있던 옷이지만 그로 인해 찢어진 곳도 없었다.
유성은 모르고 있었지만 집에 있는 것 중 제일 좋은 옷이었기에 미화가 깨끗하게 빨아 두었다가 퇴원에 맞추어 입혀 주었던 것이다.
옷을 통해 유성은 또 한 번 지금이 과거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역시, 그때가 맞구나.”
지금 입고 있는 옷은 기억에 유난히 많이 남는 것이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기억으로는 아주 오래전의 일이지만 잊을 수가 없었다.
중학교 졸업식을 위해서 어머니가 어려운 형편임에도 집안 사정에 비해 꽤나 큰돈을 들여서 사 주신 옷이다.
사고 당시의 기억 때문에 입고 싶지 않았지만 형편이 형편인지라 장님이 된 이후에도 억지로 입었었다.
어머니가 자신을 위해 어렵게 장만한 것이었기도 하지만 사고의 기억이 어린 것이라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는 옷이었다.
‘어디!’
자신이 과거의 시점에 있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은 유성은 자신의 얼굴을 만지며 살며시 꼬집었다.
“아!”
진한 아픔이 느껴졌다.
꿈에서는 아픔이 절대로 느껴지지 않는다고 하니 현실이 틀림없었다.
“그럼, 내가 살아왔다고 생각하던 인생이 꿈이라는 말인가? 그래, 어쩌면 내가 고생하며 살았다고 생각한 그 인생은 장자가 꾸었다는 나비의 꿈처럼 입원해 있는 동안 꾸었던 꿈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살았던 인생이 꿈이라 생각했지만 유성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크크크, 아니다. 절대로 꿈일 리가 없지. 내가 꿈이라고 생각하는 인생에서도 아픈 경험이 무척이나 많았었으니 말이다. 후우~! 정말 어느 것이 진짜 꿈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구나. 지금이 현실인지, 아니면 고달프게 살았던 그 모진 인생이 현실이었는지…….”
지금의 아픔처럼 고생을 하며 살 때도 많은 아픔을 느꼈다.
모진 고생을 한 인생 속에서 겪었던 수많은 고통들도 무척이나 생생했다.
안마사 일을 하며 번 돈을 뜯기지 않으려다가 조직폭력배에게 두들겨 맞을 때도 아팠고, 술이 취해 시비를 거는 손님에게 이유 없이 맞을 때도 아팠다.
기억의 마지막인 사고가 날 당시에도 말로는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고통을 느꼈었다.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유성은 옷깃을 잡고 거울을 보았다.
“어쩌면 둘 다 현실일지도 모른다. 절대 불가능한 일이지만 내가 과거로 회귀해 왔다면 모든 것이 설명이 된다.”
자신이 과거로 왔다면 지금의 상황도 그렇고,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인생도 현실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유성은 지금 겪고 있는 것이 과거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원인을 찾아야 했기에 자신이 이 시간대로 회귀할 만한 사건이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눈이 먼 후부터 차근차근 사고가 난 날 저녁까지 천천히 기억을 되새겨 보았다.
주마등처럼 자신의 인생이 스치듯 지나갔다. 사고가 나기 전까지 기억을 돌이켜 봤지만 과거로 회귀할 만한 일들은 발견할 수는 없었다.
“어디, 그러면…….”
유성은 교통사고가 나던 날을 세심히 기억해 보았다. 모텔로 일을 가던 당시부터 시작해 안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지나가고 사고가 날 당시까지 기억해 냈다.
“크으!!”
사고가 난 시간의 기억들을 하나하나 더듬어 가던 유성이 비틀거렸다. 머리가 깨질 듯한 통증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크으, 머리야. 왜 이렇게 머리가 아픈 거지?”
교통사고로 인해 느꼈던 고통을 기억하는 순간부터 급격하게 머리가 아파왔다.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 같은 고통 이후 다시 칼로 헤집는 것 같은 통증이 찾아왔다.
생각을 중단해야 했다.
더 생각을 이어 보려 했지만 점점 강해지는 통증으로 인해 도저히 생각을 이어갈 수 없었다.
“후우, 이제 조금 괜찮군.”
생각을 중단하자 고통도 사라졌다.
모든 것이 백지 상태인 것마냥 머리가 멍하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잠시 뒤, 어느 정도 아픔이 가신 유성은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 도로를 건너다가 차가 들이받으며…… 크으윽!”
고통이 가라앉았기에 다시 한 번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하지만 조금 전보다 더한 고통에 곧바로 생각하는 것을 중단해야 했다.
“으으으, 어지러워.”
고통도 고통이지만 머리가 빙글빙글 돌며 어지러워지자 중심을 잡기 어려웠다.
속이 울렁거리고 메스꺼운 것이 토할 것 같았다.
털썩!
“후우! 후우!”
쓰러지듯 자리에 앉은 유성은 조심스럽게 숨을 가다듬으며 고통이 가시기를 기다렸다.
“후우…… 다른 때의 기억은 괜찮고, 그때의 기억만 생각하면 머리가 아픈 것을 보니, 당시 일어났던 사고에 내가 알지 못하는 뭔가가 일어났던 것이 분명하다. 어쩌면 지금 내 상태가 이렇게 된 것도 그때 일어난 교통사고 때문일지도 모른다.”
머리가 아파서 더는 시도해 볼 수 없었지만 유성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교통사고로 인해서인지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 없는 지금의 상황이 생겼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래, 아직 여유는 있으니까 차츰 생각해 보자.”
고통 때문에 기억을 떠올리기 힘든 유성은 기회가 닿는 대로 교통사고가 났던 상황은 여유를 두고 파헤쳐 보기로 했다.
“그나저나 이렇게 아픈데 아버지께서 다시 수련을 하라고 하실지가 의문이구나. 거의 시간이 다 된 것 같은데 말이야.”
유성은 어려서부터 태권도를 했다.
도장을 다닌 것은 국민학교 3학년 겨울 방학이 될 무렵 아버지가 운영하는 옷 공장에 불이 나기 전까지였다.
태권도는 아버지의 권유로 5살 때부터 배우기 시작했는데 아침 수련도 그때부터 시작됐다.
어려운 형편에 도장을 다닐 수 없게 되었지만 아침 수련은 계속되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아버지와 함께 수련을 하는 것이 중학교 때까지의 일과였다.
고등학교 진학 문제로 사이가 틀어졌어도 매일 아침 빼먹지 않은 것이 아버지와 하는 수련이었다.
그렇게 아침 수련만은 중단되지 않고 12년째 이어 가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어머니가 일어나실 시간인데…….”
아침 수련이 시작되는 시간은 아침 7시부터였다.
슬슬 아침을 준비하기 위해 어머니가 일어나실 시간임을 알 수 있었다.
드르륵!
“나오신 모양이구나.”
아니나 다를까 유성의 예상대로 어머니가 방에서 나오신 것인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뒤를 이어 부엌문이 열리는 소리도 들렸다.
“어머니도 일찍 일어나셨구나. 그나저나 몸은 괜찮으신 것인지 모르겠다.”
유성은 자신 때문에 몸살기가 있던 어머니가 걱정이 되었다.
“부엌에 들어가신 것을 보면 많이 좋아지신 것 같은데 오늘은 뭘 해 주시려나? 후후, 뭘 해 주시던 상관없다. 어머니가 해 주시는 것은 무엇이든 맛있을 테니까.”
오랜만에 어머니가 차려 주시는 아침을 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유성은 기분이 좋아졌다.
“일단은 부르실 때까지 기다리자.”
자신도 모르게 침이 삼켜지며 허기가 지는 것을 느낀 유성은 자리에 앉아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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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깨어나지 못한 열흘 동안 노심초사하며 보살폈던 미화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몸살이 났다.
가뜩이나 몸도 약한데다가 마음고생이 심해서 그런지 새벽까지 꼬박 앓아누워 있어야만 했다. 저녁나절 남편이 사 가지고 온 약을 먹고 몸살기를 조금이나마 털어 내기는 했지만 아직도 여운이 남아 있었다.
“아직은 몸이 별로 좋지 않구나.”
약간 미열이 있기는 하지만 남편과 아들에게 아침은 해 먹여야 했다.
미회는 쌀독에서 쌀을 꺼내 씻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에는 반찬을 뭘 하지?”
쌀을 씻어 솥에 담아 연탄불에 올려놓은 미화는 반찬이 걱정되었다. 아파서 누워 있느라 어제는 장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딸랑! 딸랑!
뭘 해야 하나 고민하던 미화의 귀로 종소리가 들려왔다.
“안 되겠다. 두부라도 사 와야겠다.”
두부 장수가 치는 종소리를 들은 미화는 찬장에서 동전 몇 개를 꺼내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다행히 아직 안 갔구나.’
골목 사거리에서 두부 장수가 오토바이 뒤에 두부 상자를 쌓아 놓고 종을 치는 모습이 보였다.
“한 모 주세요.”
“예~!”
100원짜리 동전을 주고 비닐 봉투에 담겨진 두부 한 모를 건네받았다.
미화는 종종걸음으로 부엌에 돌아와 곧바로 찌개를 끓일 준비를 했다.
결혼하기 전부터 부모님과 8남매나 되는 동생들의 끼니를 책임졌던 미화는 요리 솜씨가 좋았다.
특히나 김치와 고추장, 된장 등을 아주 잘 담가서 그런지 유성은 언제나 이것만으로도 밥을 잘 먹었다.
바깥으로 나가 김장독에서 김치를 꺼내 온 미화는 두부 반 모를 넣고 아들이 좋아하는 김치찌개를 끓였다.
그리고 남은 반 모를 얇게 저며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부쳤다.
그렇게 두부를 부치는 것이 끝나자 병원에서 아들이 깨어나면 해 먹이려고 미리 사 놓았던 계란도 꺼내 계란말이를 해 밥상을 차렸다.
“아들, 밥 먹자.”
식사 준비가 끝나자 상을 차려 안방으로 들고 가던 미화가 큰 목소리로 유성을 불렀다.
“예, 어머니.”
아들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미화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부엌으로 올 때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며 아들이 깨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언제나처럼 들어가 보지 못했다.
내심 걱정을 했었는데 대답하는 목소리를 들어 보니 어제보다 밝아 보였다.
‘다행히 괜찮은가 보구나. 어제보다는 기운이 좀 있는 것 같으니 다행이다.’
마음이 놓인 미화는 밥상을 들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자 대답을 한 유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후, 그래도 힘이 좀 붙었군. 움직이려고 하면 힘을 줄 수가 없어 몸을 가누기도 힘들었는데. 그나저나 아픈 곳이 없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조금 전과는 달리 무력했던 전신에 빠르게 활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이제는 혼자서도 충분히 걸을 수 있다고 생각한 유성은 곧바로 방을 나섰다.
미닫이문을 열고 안방으로 들어가자 아버지와 어머니가 상을 두고 앉아 있었다.
‘꿀꺽! 맛있겠다.’
칼칼하게 코를 자극하는 냄새에 저절로 입맛이 돌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는 음식점에서 사 먹거나 편의점에서 인스턴트 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했던 유성이다.
형편이 어려워져 간단한 반찬만 몇 가지인 초라한 상이었지만 유성은 그 어느 진수성찬보다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먹어 보는 어머니의 음식이라 유성은 서둘러 자리에 앉았다.
“어서 먹어라. 식사가 끝나면 곧바로 수련하러 가야 하니까 말이다.”
“예.”
아버지는 예상한 대로 수련을 할 것임을 알려 왔다. 식사를 마친 후 한다는 것만 전과 다를 뿐이다.
역시나 자신의 아버지는 변하지 않는 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