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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괜찮겠어요?”
미화가 수저를 들다 말고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어제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조금 더 있다가 시작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사고가 나서 몸속에 들어찬 어혈을 푸는 데는 도움이 될 되니 당신은 잠자코 있어. 이런 건 오래 끌수록 더 안 좋아.”
“그래도…….”
“유성이가 이렇게 무사한 것도 매일 하고 있는 수련 덕이니 나에게 맡겨 둬.”
남편의 단호한 목소리에 뭐라 더 말하려 했던 미화는 입을 다물었다.
한 번 한다고 하면 거의 바꾸지 않는 성정을 아는 탓이기도 했지만 어제보다 더 강한 의지를 보이는 것을 보면 단순한 수련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성아. 꼭꼭 씹어 먹어라. 식사 끝나면 바로 운동장에 가야 한다니까.”
“예, 어머니.”
이미 아버지의 행동을 예상하고 있었던 유성은 별다른 말없이 식사를 계속했다.
‘학교도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과 똑같겠지?’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국민학교가 하나 있었다. 바로 유성이 졸업한 학교였다.
태권도장에 다니기 시작하던 5살이 될 때부터 유성은 아버지와 함께 학교 운동장에서 아침 수련을 시작했었다.
현재 시점으로 보면 병원에 입원한 기간과 어제를 빼놓고는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수련을 해 왔었던 곳이지만 지금의 유성으로서는 새삼스러웠다.
미래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유성으로서는 학교의 모습이 잘 기억나지 않았기에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성이 다녔던 국민학교는 한때 3학년까지는 3부제로, 4학년은 2부제 수업을 진행했던데다가 15반까지 있어서 전국에서 최고로 많은 학생이 재학하던 곳으로 유명했다.
‘생각해 보면 콩나물시루나 다름없었지.’
한 반에 학생이 보통 60명이었다. 최고로 학생이 많았을 때는 10,000명이 넘어 설 때도 있었다. 덕분에 점심시간에는 그야말로 운동장에 학생들이 바글거렸다.
‘그나저나 우리 집은 여전하구나.’
밥을 먹을 때 소리를 내는 것을 질색하는 아버지 때문에 항상 조용한 식사가 이어졌지만 오늘은 특히 더 그랬다.
아무 말없이 묵묵히 밥을 먹는 아버지와 조용히 수저를 놀리는 어머니, 그리고 열심히 수저를 움직이고 있는 유성까지 무척이나 조용한 식사 시간이었다.
‘후후후, 그래도 좋다.’
절간 같은 침묵 속에서도 남들이 알지 못하는 따뜻한 가족의 정이 흐르고 있었기에 유성은 기분이 좋았다.
찌개를 떠먹으며 식사를 하고 있는 아버지는 계란말이에는 일절 손을 대지 않고 있었다.
대신 먹기 편하도록 접시를 유성의 밥그릇 앞으로 밀어 놓았다.
어머니 또한 기름에 부친 두부를 유성의 밥 위에 말없이 올려놓으며 식사를 계속하고 있었기에 유성은 가슴이 복받쳐 올랐다.
‘아버지, 어머니! 크흑!’
부모님의 사랑을 느끼며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유성은 붉어진 눈시울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말없이 수저를 놀렸다.
정성과 사랑이 담긴 밥과 반찬을 먹고, 감칠맛 나는 김치찌개를 먹으며 열심히 그릇을 비워 나갔다.
식사가 끝나자 유성은 조심스럽게 수저를 내려놓았다.
“유성아! 벌써, 다 먹은 거니?”
“예, 어머니.”
“좀 더 줄까?”
“아니에요. 많이 먹었어요. 그리고 저 배불러요.”
“유성아, 밥을 다 먹었으면 방에 들어가서 도복을 입고 나와라.”
모자의 대화에 상혁이 끼어들었다.
“예, 아버지.”
이미 예상하고 있던 터라 유성은 머뭇거리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보, 아직…….”
미화가 그런 아들을 말리려는지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유성은 안타까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어머니를 뒤로하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돌아갔다.
“도복이 어디 있더라? 으음, 저기에 들어 있었지…….”
책상 옆에 보이는 작은 서랍장에 도복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 낸 유성은 서랍을 열었다.
“후후후, 있구나.”
어렸을 적의 기억과 같았다.
검은색 천으로 만들어진 도복이 잘 개켜 있었고, 흰색의 띠도 그 옆에 동그랗게 말려져 놓여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빛바랜 도복이었지만 유성의 마음을 푸근하게 했다. 도복을 통해 다시 한 번 지금이 현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련을 그만두게 된 것이 사고 때문이었지. 그때 아버지께 못할 짓을 많이 했었는데…….”
교통사고로 실명을 한 이후에는 수련을 전혀 하지 않았다. 계속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씀에 병신이 지랄하는 것이라며 아버지 가슴에 못을 박은 것이 생각났다.
“앞으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미안한 마음이 든 유성은 서둘러 옷을 벗고는 도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허리춤에 하얀색 띠를 둘러매고는 곧바로 방을 나섰다.
‘벌써 나오셨구나.’
밖으로 나가니 자신과 같은 종류의 도복을 입고 마당에 서 있는 아버지를 볼 수 있었다.
“가자!”
“예.”
대문을 나서는 아버지를 따라 골목길을 걸어 학교 운동장으로 향했다.
겨우 10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 도착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후우~ 힘드네.’
몸이 약해진 탓인지 차가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도복 안에 땀이 들어찼다.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운동장에는 아무도 없구나.’
아직은 쌀쌀한 날씨가 계속되고 있었고 봄방학에 들어가서 인지 학교 운동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유성아, 아직은 격한 수련은 무리니 오늘은 몸이나 풀도록 하자.”
“예, 아버지.”
수련을 시키실 생각이 분명하신 것 같았다.
‘그래도 교통사고가 난 것 때문인지 오늘은 몸만 푸는 것으로 끝내실 모양이구나. 역시 아버지다.’
감기에 걸리거나 아파도 수련을 거르는 일이 없었던 아버지였다.
수련의 강도가 약해지기는 했지만 아버지의 변함없는 태도에 유성은 지금 자신의 상황이 현실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었다.
“오늘 할 것은 음양십세까지다.”
“알겠습니다.”
‘이상하군. 몸을 푸는 것이라면 굳이 음양십세까지 할 필요는 없을 텐데…….’
유성은 음양십세까지라는 아버지의 말에서 무작정 수련을 하러 온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음양십세까지 간다면 본격적인 수련이었다. 몸을 푼다고 한 아버지의 말과 어긋나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허튼 소리를 하실 분은 아니다. 사고가 나서 다친 나에게 음양십세까지 하라고 한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몸을 갈고닦아 튼튼해지는 데는 이만한 것이 없다고 늘 말씀하셨으니까.’
특이한 이름과 자세 때문에 어렸을 적에 물어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수련을 하는 것만으로도 웬만한 병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이 아버지의 설명이었다.
어려서부터 수련을 하면서도 유성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지만 일정한 경지에 다다르면 대자연의 기운도 느낄 수 있다고 했었다.
‘내가 배우는 것들이 다른 운동들과는 아주 많이 다르기는 했지.’
아침마다 하는 이 수련은 보통 도장에서 가르치는 합기도나 십팔기 등의 투기와는 사뭇 달랐다.
어려서부터 배웠던 태권도도 품세를 통해 투로(套路)와 기세(氣勢)를 배우기는 했지만 아버지로부터 배운 수련법은 조금 특이했다.
마치 중학교 1학년 때 읽었던 무협소설에 나오는 무공처럼 특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유성이 특이하다고 생각한 것은 아버지께 배우고 있는 것들이 마치 무협소설에서 말하는 내공과 같은 것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디…….’
유성은 천천히 자세를 잡고 음양십세를 펼칠 준비를 하며 몸을 푸는 동안 아버지가 했던 말씀들을 떠올려 보려고 애를 썼다.
실명이 된 후에는 수련을 완전히 중단했기 때문에 이미 오래전에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가물거리는 기억들이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상혁이 말한 음양십세는 유성이 배웠던 것 중 세 번째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음양십세에 들어가기 전까지 두 개의 투로를 거쳐야 하는데 열화세(熱火勢)와 한빙세(寒氷勢)라는 것이었다.
정해진 투로를 따라 움직이기만 해도 몸을 정화하고 단련이 되는 효과가 있다고 했다.
아버지는 자세한 내용을 알려 주며 투로를 익히게 했고, 뜻을 지향하라는 말을 항상 강조하곤 하셨다.
이상한 생각도 했었다. 혹시나 내가 무협소설에 나오는 비전의 무술을 익히고 있는 것이 아니었나 생각을 했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의 말씀대로 몸을 단련하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는 수련법이었기도 했지만 유성에게 복과 화를 같이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었다.
‘수련한 것 덕분에 장님에 된 뒤에도 먹고 살기는 했지만 오히려 나에게는 복이 아니라 화가 되었었지.’
음양십세에 대해 생각하다가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다.
“후우, 잊어버리자. 나쁜 일을 기억해 봤자 좋을 게 없을 테니까. 그나저나 많이 잊어버렸구나.’
좋지 않은 기억을 털어 버렸지만 너무 오래됐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대략의 형은 기억이 났지만 아버지가 하셨던 말씀들은 대부분 잊어버린 상태였다.
‘좀 더 생각해 보자. 생각하다 보면 기억이 날 거다.’
아예 따라 하지 못한다면 아버지가 실망할 것이라는 생각에 유성은 생각을 집중했다.
그렇게 한동안 생각을 집중하니 완전하지는 않지만 음양십세까지는 대충 기억이 났다.
‘조금 더 기억을 더듬어 보자.’
전부는 아니지만 예상외로 또렷이 기억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렇게 좀 더 생각을 전진하자 자신이 이렇게 기억력이 좋았나 싶을 정도로 아버지가 말씀하셨던 것 중 상당수가 생각이 났다.
‘으음, 열화세와 한빙세, 그리고 음양십세라……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열화세는 몸 안의 화기를 끌어내 불순한 기운을 태우고, 한빙세는 물의 기운을 끌어내는데 정화의 힘을 가지고 있어 몸을 깨끗하게 만든다고 했었지. 그리고 음양십세(陰陽十勢)는 이 두 기운을 합해 몸 안에 근기(根氣)를 키워 최상의 신체를 만드는 것이 수련의 요체라고도 하셨고. 그때 배웠던 것들이…… 그러고 보니 수련을 시작하기 전에 해야 되는 것도 빼먹었구나.’
수련에 앞서 집을 나오기 전에 해야 하는 것을 잊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가 늘 강조하던 것으로 수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첫 단추였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수련에 앞서 해야 하는 것은 명상과 아버지로부터 배운 호흡이었다.
이 또한 수련을 시작하던 때 배웠던 것이기도 했다.
심신을 정갈하게 해서 수련의 성과를 높이는 효과가 있어 한 번도 빼먹지 않았던 것이었다.
절망에 빠졌을 때 자신을 구원해 준 호흡법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미처 생각이 나지 않았던 것이었다.
‘투로도 완벽하게 따라 했었는데 이렇게까지 많이 잊어버린 것을 보면 역시…….’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 맞는 것인지 확신을 하지 못한다는 것 자체가 지금의 현실과 기억 속의 인생의 괴리를 설명해 주고 있었다.
기억 속의 인생을 직접 산 것이 아니라면 이렇게 기억이 희미해질 리 없었다. 지금의 상황이 현실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과거로 회귀해 왔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런!’
준비운동을 하며 잠깐 생각에 잠긴 사이에 아버지가 먼저 투로를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먼저 시작하시는 것을 보면 따라 하라는 뜻이로구나.’
배움을 시작한 초창기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간혹 형이 틀어질 때마다 자신이 하고 있는 바른 자세를 보고 따라 하라며 먼저 시작해 나가던 아버지였다.
바른 자세로 신체의 균형을 바로 잡으라는 뜻임을 직감한 유성도 천천히 동작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