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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마록 1권 7화


2장 진대치(2)


“안 돼! 제발 안 돼! 크흐흑!”
이런 상황을 외면하는 세상 모두를 저주했다.
초유벽은 충격으로 실신지경이 되었다.
억겁 같은 시간이 흐르고 진대치가 초유벽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악마와도 같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많이 기다렸지?”

담천의 의식이 다시금 현실로 돌아왔다.
놈이 눈앞에 있었다.
‘진대치!’
[잊지 마세요. 당신은 담천이에요. 거기다 지금은 암혼기도 쓸 수 없는 상태예요. 무엇보다 누명을 씌운 진정한 흉수가 진대치인지도 아직 확실치 않아요.]
천혜린의 냉정한 전음에 담천은 비로소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방금 전, 소소에게 시전했던 명륜안이 실패하는 바람에 암혼기를 사용할 수 없는 상태.
지금 담천의 상태는 일반인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이대로 맞붙는 것은 허무한 개죽음에 불과했다.
머리를 식힌 담천은 마음을 냉정히 가라앉혔다.
‘한데 원래의 담천과 진대치는 대체 무슨 관계인가?’
아무리 기억을 뒤져 봐도 진대치에 대한 특별한 기억은 없었다.
물론, 같은 무벌 소속 후기지수이니 몇 번 마주쳤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부분적으로 이가 빠진 기억임을 감안해도 특별히 친한 사이는 아님이 분명했다.
“이거, 주화입마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많이 걱정했네그려.”
진대치가 날카로운 눈으로 담천을 살폈다.
[진가는 담씨세가의 자리를 노리는 신흥 가문 중 하나예요.]
천혜린의 전음에 담천은 그제야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갔다.
진대치는 광동진가의 후계자였다.
놈은 아마도 담가의 후계자가 주화입마에 걸렸다는 소리를 듣고 그 상태를 확인하러 왔을 것이다.
“호오, 생각보다 멀쩡하네? 다행이군그래.”
진대치가 씨익 웃었다.
담천에게서 내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겉은 멀쩡하나 무공을 모두 잃은 것이다.
그렇다면 담가는 끝났다고 봐야 했다.
담천이 예전의 무공을 회복하려면 최소한 십 년은 넘게 걸릴 것이다.
아니, 단전이 깨진 상태라면, 과연 회복이 가능할지조차 의문이었다.
게다가 회복을 한다 해도 십 년 후면 담천의 나이가 이미 서른 중반이다.
한데 잘해 봐야 겨우 스물 초반 애송이들과 비교될 정도의 실력밖에 없다면 누가 담가의 편에 서겠는가.
걱정을 덜어낸 진대치의 시선이 그제야 담천의 옆에 선 천혜린에게로 향했다.
‘호오, 대단한 미인이로구나.’
진대치가 뱀 같은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며 입맛을 다셨다.
“그대와 나는 병문안을 올 만큼 돈독한 사이가 아닌 듯한데?”
담천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후후, 태어날 때부터 친구인 이들이 어디 있겠나. 만나서 마음을 나누고 뜻이 통하면 친구가 되는 게지. 나도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이라네.”
비릿한 미소가 진대치의 입술에 걸렸다.
“흥! 미안하지만, 나는 사람과만 친구를 한다네. 뱀 새끼를 친구로 둘 순 없지.”
진대치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가 다시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진대치가 느끼기에 담천의 지나친 반응은 어차피 벼랑 끝에 선 자의 마지막 발악에 불과했다.
“어허, 아쉽구만. 앞으로 저잣거리 왈패들이라도 만나면 나같이 든든한 친구가 옆에 있어야 보호해 줄 터인데. 쯧쯧, 이거, 걱정이 되어 발길을 돌리기가 쉽지 않지만, 자네가 그리 말한다면 할 수 없지. 흐흐흐.”
순간, 담천의 눈썹이 치켜올라 갔다.
놈이 저잣거리 왈패에게조차 이기지 못할 만큼 초라한 담천의 무공을 놀리고 있는 것이다.
무인에게는 참으로 굴욕적인 일이었으나 딱히 반박할 수도 없었다.
‘암혼기만 있었어도!’
때마침 사라진 암혼기가 너무도 아쉬운 순간이었다.
[오히려 잘되었어요. 놈이 당신을 무시한다면, 앞으로의 일이 더욱 수월할 거예요. 당신의 정체를 숨기는 데도 도움이 될 테고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 천혜린의 말이 맞았다.
놈이 자신을 우습게 보도록 만드는 것이 오히려 복수에는 도움이 되리라.
혹시라도 배후(背後)가 있다면 놈을 없앤다고 복수가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담천이 어설프게 힘을 드러낸다면 자칫 음모자가 꼬리를 감출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몸이 좋지 않아 배웅하지 못하니, 잘 가시게.”
축객령이었다.
“후후, 그래. 몸도, 마음도 많이 불편할 테지. 그럼 가 볼 테니 당분간 저잣거리에는 함부로 나다니지 말게. 자네의 아름다운 정인이 무슨 일이라도 당한다면 큰일이지 않은가.”
이번엔 아예 자신의 여인조차 지키지 못하는 놈이라 조롱했다.
더없는 모욕에 담천이 이를 악물었다.
그사이, 진대치가 손을 흔들며 천천히 후원을 빠져나갔다.
담천은 방에 들어가 분을 삭였다.
진대치가 눈앞에 있었음에도 손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아직도 이가 갈렸다.
천혜린은 도사를 찾는다고 밖으로 나간 상태였다.
‘놈! 두고 봐라!’
다시 암혼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되면, 곧장 놈에게 달려가 처절한 대가를 치르게 해 줄 것이다.
한 시진 후, 천혜린이 돌아왔다.
표정이 좋지 않은 게, 아마도 나갔던 일이 잘 안 된 듯했다.
“도사는 찾았나?”
“아뇨, 사방을 다 뒤졌지만 흔적도 없이 사라졌더군요. 아마도 천하를 떠도는 자인 것 같아요.”
천혜린이 고운 아미(蛾眉)를 찡그렸다.
왠지 꺼림칙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탓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어찌할 수도 없는 일.
이내 마음을 정리한 천혜린이 담천에게 물었다.
“암혼기는 다시 사용할 수 있나요?”
담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다시 예전처럼 막강한 힘을 되찾았으니 진대치를 응징할 때가 온 것이다.
그에 천혜린이 차가운 얼굴로 계약을 상기시켰다.
“진대치에게 복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귀들을 잡기로 한 혼주님과의 계약을 잊지 마세요.”
“걱정 마라. 계약은 반드시 이행할 것이다!”
담천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당장에는 복수 외에 그 어떤 것도 담천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다.
계약의 이행도 복수보다 우선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담천의 육신을 계속 사용하기 위해선 계약을 소홀히 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한데, 마귀들을 어떻게 찾지?”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기왕 마귀들을 잡아야 한다면 우선 놈들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다.
“마귀들은 평상시 인간의 모습으로 지내고 있기에 찾아내기가 쉽지 않아요. 하지만 방법이 있지요.”
담천은 천혜린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우선 마귀들이 있는 곳에는 징조가 나타나기 마련이에요. 갑자기 사람들이 죽어 나간다든가, 질병이 창궐한다든가, 전쟁이 일어난다든가. 인세에 재앙과도 같은 끔찍한 사건들이 생긴다면 마귀들이 연계되어 있을 확률이 높아요. 그리고 마귀의 근처로 다가가면 명륜안을 사용해 놈들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어요. 물론, 전에 말했듯이 당신보다 월등히 높은 경지의 마귀들은 파악하기 힘들어요.”
한마디로 괴사(怪事)나 흉사(凶事)가 일어나는 곳을 찾으면 된다는 이야기였다.
문제는 담천의 경지보다 높은 마귀들에게는 명륜안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
자칫 놈들에게 먼저 정체를 들킬 수도 있었다.
그런 만큼 암혼기를 어느 정도 키우기 전까지는 최대한 조심해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요. 당신은 암혼기를 더욱 갈고닦아야 해요. 지금 실력으론 마귀들은커녕 그들의 권속들도 어찌하기가 만만치 않은 상황이에요. 이제 몸도 정상이 되었으니, 저도 집으로 돌아가야겠군요. 당분간 병문안을 핑계로 매일 들르기는 할 테지만, 한시가 아까운 입장이니 앞으로는 혼자 암혼기를 수련하는 데 익숙해져야 할 거예요. 혹시라도 제가 없을 때 급한 문제가 있으면 이것에 암혼기를 불어넣으세요. 그럼 저와 연락이 될 거예요.”
천혜린이 옥으로 만든 노리개 하나를 담천에게 건넨 후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담천은 이대로 그냥 밤을 보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암혼기가 돌아온 터라 두려울 것이 없는 상태.
오늘 밤 진대치를 찾아갈 작정이었다.
진가의 위치는 초유벽일 때부터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놈은 오늘 사신(死神)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달마저 사라지고 칠흑 같은 어둠이 사방을 뒤덮은 축시(丑時)경.
검은 그림자가 담천의 방을 빠져나갔다.

* * *

무벌에 소속된 가문들은 대부분 본가와는 따로 의창에 장원을 가지고 있었다.
무벌의 정책 결정이나 여러 사업들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그 중심에 머물러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광동진가의 장원은 의창 남서쪽 장강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
담천은 만일을 대비해서 복면을 착용했다.
혹시라도 놈을 죽이지 못할 경우, 정체가 드러나면 곤란하기 때문이었다.
허리엔 한 자루 청강검이 매달려 있었다.
아무래도 초씨세가가 주로 검을 사용했던 곳인지라 그나마 몇 가지 기본 검공 정도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각 정도 걸려 담천은 광동진가의 장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암혼기를 끌어 올린 상태라 온몸에서는 힘이 넘쳐흘렀다.
움직임 또한 예전에는 상상도 못했을 정도로 민첩하고 은밀해졌다.
이 정도라면 진대치 놈과도 충분히 자웅을 겨룰 수 있으리라.
담천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지금은 일단 진대치가 어디에 있는지부터 알아봐야 했다.
담천은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소리 없이 담장을 넘었다.
암혼기를 운용하는 한 어둠은 담천의 편이었다.
마치 은신술을 쓰는 것처럼 검은 기류에 둘러싸인 그의 모습은 어둠과 동화되어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담천은 적당한 나무를 골라 위로 올라갔다.
이런 상태로 진대치를 찾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시간도 오래 걸릴뿐더러 일일이 방문을 열어 놈이 있는 곳을 살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아무나 한 놈을 잡아 진대치의 위치를 알아내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명륜안을 사용해 볼까도 생각했으나, 혹시 낮에처럼 실패하게 되면 암혼기를 사용하지 못하게 되니 너무도 위험했다.
담천은 조심스럽게 장원 안을 살폈다.
경비 무사들이 두 명씩 짝을 이루어 순찰을 돌고 있었다.
비록 그 시간 간격이 상당히 짧긴 했으나 재빨리 해치운다면 들키지 않을 수 있을 듯싶었다.
담천은 두 명의 경비 무사가 나무 주위로 지나가자 재빨리 몸을 날렸다.
퍽!
갑작스러운 담천의 공격에 좌측에 있던 무사가 미처 대응도 못해 보고 쓰러졌다.
경비 무사의 실력으로 버텨 내기엔 암혼기의 위력이 너무 강한 탓이었다.
“헉! 누, 누구!”
놀란 나머지 무사가 다급히 검을 잡아가는 순간, 담천이 재빨리 혈도를 제압하고 목에 검을 들이댔다.
타탁!
턱 밑에 검이 놓이자 경비 무사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담천을 바라보았다.
“소리를 치거나 다른 이들에게 신호를 보내면 가차 없이 네놈의 목을 벨 것이다. 알아들었으면 눈을 두 번 깜빡이거라.”
경비 무사가 몸을 가늘게 떨며 재빨리 눈을 깜빡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