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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마록 1권 8화


2장 진대치(3)


“좋다. 지금 아혈을 풀어 줄 것이다. 이제부터 내가 묻는 말에 사실대로 대답하도록 해라. 만일 한 점의 거짓이라도 있다면 너의 목숨을 거둘 것이다.”
어둠 속에서 암혼기를 두른 담천의 모습은 마치 지옥의 사신과도 같았다.
온통 검은 그림자 속에서 두 눈만이 신광을 뿜어내고 있는 담천의 모습은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기괴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살을 엘 듯 밀려드는 강력한 살기는 경비 무사가 두려움에 떨기에 충분했다.
생전 처음 겪어 보는 기괴하고 공포스러운 상황에 경비 무사는 필사적으로 눈을 깜빡였다.
타탁!
“소공자 진대치의 거처가 어디냐?”
혈도를 풀어 준 담천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경비 무사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담천을 바라보았다.
“두 번 묻게 하지 마라!”
서슬 퍼런 눈빛에 경비 무사가 진저리를 쳤다.
“그, 그게…… 오른쪽 끝 문을 지나면 내당이 나오는데, 그곳에서 두 개의 문을 더 통과하시면…….”
살벌한 담천의 기세에 눌린 경비 무사가 주절주절 진대치의 위치를 실토했다.
타탁!
진대치의 위치를 알아낸 담천이 무사의 수혈을 짚어 잠재운 후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렸다.
초유벽이던 시절 억지로 기본공과 함께 배워 뒀던 점혈법을 이렇게 유용하게 써먹게 될 줄은 짐작도 못했다.
이들이 발견되기 전에 진대치를 찾아야 했다.
다행히도 장원을 지키는 경비 무사들을 피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둠과 동화된 담천의 움직임을 그들의 수준으로는 절대 알아차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경비 무사가 토설한 정보를 바탕으로 담천은 순식간에 진대치의 거처에 이를 수 있었다.
진대치의 방은 따로 호위들을 세우지 않은 상태였다.
아마도 워낙 장원 안쪽에 위치해 있기도 했고, 진대치의 무공이 뛰어난 탓도 있을 것이다.
‘다행이군.’
놈을 해치우는 일이 훨씬 수월해진 것이다.
담천은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스르륵!
어둠 속이었지만 암혼기 때문인지 담천은 마치 대낮처럼 모든 사물을 정확히 볼 수 있었다.
곧 침상 위에 잠들어 있는 진대치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담천의 가슴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토록 참혹한 짓을 저지르고도 어떻게 편안히 잠들 수 있단 말인가.
‘네놈이 그리 편히 자는 일도 오늘로 끝이다!’
오직 놈을 죽여야겠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하지만 결코 쉬운 죽음을 허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를 악문 담천이 천천히 침상으로 다가갔다.
딸랑, 딸랑.
그때였다.
갑자기 방 안에 방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런!”
자세히 살펴보니 담천의 다리에 가느다란 은사가 걸려 있었다.
아마도 침입자를 대비해 마련해 둔 장치인 모양이었다.
하긴, 놈이 저지른 악행을 생각하면 언제든 목숨을 노릴 자객이 들이닥쳐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누구냐!”
진대치가 방울 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나 한쪽에 놓인 자신의 검을 잡았다.
담천이 틈을 주지 않고 그대로 진대치를 향해 돌진했다.
투박한 움직임이었으나 그 속도만큼은 놀랍도록 빨랐다.
쉬이익!
담천의 검이 횡으로 긴 호선을 그렸다.
진대치는 급히 검을 들어 올려 담천의 공격을 막았다.
스각!
하나 진대치의 검은 속절없이 잘려 나갔다.
평범한 검으로는 암혼기가 담긴 담천의 공격을 버텨 낼 수 없던 것이다.
“허억!”
당황한 진대치가 헛바람을 들이켜며 재빨리 옆으로 돌아 담천의 검을 피했다.
“여봐라! 누구 없느냐! 침입자다!”
다급해진 진대치가 고함을 쳐 경비 무사들을 불렀다.
담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무사들이 들이닥치면 아무래도 일이 까다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놈들과 드잡이질을 하는 사이 진대치가 달아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담천이 정신을 집중해 검을 내려쳤다.
“이야압!”
콰아아앙!
암혼기가 폭발하듯 침상을 박살 냈다.
하지만 진대치는 어느새 검을 피해 문 쪽으로 몸을 날린 뒤였다.
힘과 속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담천이었지만, 그 움직임은 너무 단순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처 다 피하진 못했는지 왼쪽 뺨에 길게 혈선이 새겨지고 말았다.
콰아앙!
진대치가 재빨리 문을 부수고 밖으로 도망쳤다.
“어딜!”
두 다리에 암혼기를 집중하여 바닥을 박차자 담천의 신형이 길게 늘어났고, 순식간에 진대치의 등이 담천의 검격 범위 안으로 들어왔다.
쉬아악!
담천의 검이 좌에서 우로 은빛 섬광을 뿌렸다.
“크윽!”
진대치가 신음을 흘리며 마당으로 허겁지겁 달아났다.
“자객이다! 소공자를 구하라!”
그때, 경비 무사들이 들이닥쳤다.
거의 땅을 구르다시피 한 진대치가 경비 무사들 사이로 몸을 숨겼다.
진대치의 등은 담천의 검에 맞아 온통 피투성이였다.
깊지는 않은 상처였으나, 출혈이 제법 심했다.
담천은 입술을 깨물었다.
진대치의 움직임이 상당히 민첩했던 탓에 아쉽게도 검이 얕게 들어갔다.
역시 놈의 무공 경지가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놈!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진대치의 낭패한 모습을 확인한 진가의 무사들이 담천을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스악! 쉬익!
검과 도가 담천을 노리고 날아왔다.
하지만 암혼기를 끌어올린 담천의 눈에는 너무도 느려 보였다.
순간, 담천의 몸이 밑으로 꺼지듯 내려앉으며 두 자루의 검과 도가 허공을 갈랐다.
쉐에엑!
“크악!”
“허억!”
훤히 드러난 두 무사의 가슴이 담천이 휘두른 검의 궤적에 걸렸다.
무사들의 비명 소리와 함께 핏물이 튀어 올라 담천의 몸을 적셨다.
검은 기류를 뿜어내며 온몸이 피로 물든 담천의 모습은 마치 악귀를 보는 듯해 진대치와 경비 무사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두 무사를 베어 버린 담천이 곧바로 진대치를 향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막아서는 무사들의 수가 적지 않아 진대치에게 다가가기가 쉽지 않았다.
“젠장!”
담천이 욕지기를 뱉어 냈다.
일이 마음먹은 대로 풀리지 않자 머릿속에서 광기가 다시 꿈틀거리며 일어서고 있었다.
스걱!
순간, 뒤쪽에서 날아온 검이 담천의 등을 베고 지나갔다.
불에 데인 것처럼 화끈한 통증이 등을 마비시켰지만, 담천은 무시한 채 진대치를 향해 전진했다.
“모두 저놈을 막아라!”
심상치 않은 담천의 모습에 진대치가 비틀거리며 소리치자 사방에서 무사들이 담천을 향해 달려들었다.
파앗!
스악!
암혼기를 두른 담천의 검이 무사들을 짚단처럼 베어 넘겼다.
별다른 초식도 없었으나, 쇠를 잘라 내는 암혼기의 위력은 강력했다.
하지만 무사들의 숫자가 너무도 많았다.
무작정 휘두르는 큰 동작들 사이에 빈틈을 파고든 검과 도에 담천의 몸은 순식간에 피투성이로 변했다.
담천이 이를 악물었다.
열 걸음만 더 전진하면 진대치를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벌 떼처럼 달려드는 무사들의 육탄공세에 움직임이 묶여 버리고 말았다.
‘내 앞을 막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부숴 버리겠다!’
담천의 두 눈에 혈광이 일었다.
복수를 가로막는 이들은 그게 누구더라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모두 죽여라! 크크크크!]
머릿속에서 다시 광기에 젖은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진대치와 앞을 막아선 무사들에 대한 증오와 분노가 암혼기를 급격히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으아아아아!”
기합성을 내지른 담천이 암혼기를 한계까지 끌어 올린 채 크게 검을 휘둘렀다.
채앵! 챙!
“흐업!”
담천의 검이 커다란 호선을 그렸고, 그 궤적에 걸린 무기들이 통째로 잘려 나갔다.
담천의 무시무시한 신위와 살기에 놀란 무사들이 잠시 주춤거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담천이 진대치를 향해 돌진했다.
“뭐, 뭣들 하느냐! 놈을 막아라!”
얼굴이 하얗게 질린 진대치가 목이 터져라 고함을 치자 정신을 수습한 무사들이 다시 담천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미 포위망을 돌파한 담천을 막아서는 무사는 겨우 둘뿐이었다.
담천의 검이 횡으로 길게 한 줄기 묵선(墨線)을 그렸다.
너무도 단순한 일격이었으나 그 결과는 참혹했다.
스아악!
“크악!”
“끄으윽!”
암혼기를 가득 담은 담천의 검에 두 무사는 상체와 하체가 검과 함께 분리된 채 무너져 내렸다.
그 뒤로 하얗게 질린 진대치의 얼굴이 보였다.
“놈!”
이제 더 이상 담천과 진대치 사이를 막아서는 장애물은 없었다.
참을 수 없는 살의가 솟구치며 몸을 둘러싼 암혼기가 더욱 짙어졌다.
드디어 복수의 순간이 온 것이다.
“오래 기다렸지?”
검을 치켜든 담천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화아아악!
그때였다.
“크으윽!”
신음을 토해 낸 담천의 신형이 뇌전에 직격당한 것처럼 경련을 일으켰다.
무리해서 일으킨 암혼기가 제어를 벗어나 충돌을 일으킨 것이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에서 섬광이 터지며 의식이 사라져 갔다.
‘크윽! 이, 이게 대체!’
당황한 담천이 흩어지는 의식을 붙잡으려 애썼다.
진대치는 담천의 상태에 무언가 문제가 생겼음을 눈치챘다.
갑자기 몸을 뒤덮은 검은 기류가 흔들리고,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워진 것이다.
“다들 정신 차리고 놈을 잡아라!”
진대치의 고함 소리에 정신을 차린 무사들이 담천을 향해 달려들었다.
쉬익!
경비 무사가 날린 검이 담천의 명치를 향했다.
날카로운 살기에 간신히 정신을 다잡은 담천이 재빨리 몸을 움직여 왼쪽으로 피했다.
하지만 마음만 앞설 뿐, 몸이 따라 주지 않았다.
푸욱!
“크윽!”
검이 그대로 명치를 관통했고 마치 불덩이로 지지는 듯한 극통이 담천을 덮쳤다.
담천의 살기 어린 시선이 향하자 깜짝 놀란 무사가 검을 놓고 주춤 뒤로 물러섰다.
담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눈앞에 바로 진대치 놈이 있었다.
조금만 더 다가가면 놈에게 검을 날릴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암혼기의 폭주로 인해 몸이 말을 듣지 않았고, 의식마저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조금만 더 버텨 다오!’
담천은 이를 악물고 검을 복부에 꽂은 채 앞으로 전진했다.
약 일 장 정도 앞에서 질린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진대치의 모습이 보였다.
담천이 검을 들어 놈에게 뻗었다.
퍼억!
순간, 다른 무사의 검이 담천의 오른 손목을 잘라 버렸다.
검을 쥔 손이 허공으로 떠오르는 모습이 담천의 눈에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가슴을 뚫고 한 자루의 검이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