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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마록 1권 9화


2장 진대치(4)


또 다른 무사가 뒤에서 담천의 등에 검을 찌른 것이다.
‘끄으으! 진대치, 이노옴!’
절규하는 담천의 입술로 검붉은 핏물이 흘러나왔다.
진대치의 눈꺼풀이 한차례 파르르 떨렸다.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한 것이다.
“이익! 감히 나 진대치의 목숨을 노려!”
진대치가 이를 갈며 검을 치켜올렸다.
쉬이익!
퍼억!
순간, 은빛 섬광이 작렬하며 담천의 머리가 몸과 분리되어 허공에 떠올랐다.
검은 피를 사방으로 흩날리며 담천의 육신이 땅에 쓰러졌다.
“놈의 복면을 벗겨라!”
진대치가 수하들에게 명했다.
대체 어떤 놈이기에 이토록 악착같이 자신을 노린단 말인가.
거기다 검과 도를 단숨에 자르는 그 괴이한 기운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무사들이 복면을 벗기기 위해 담천의 시체로 다가서는 순간이었다.
화아악!
갑자기 담천의 몸과 머리에서 불꽃이 솟아올랐다.
“허억!”
놀란 무사들이 뒤로 물러섰다.
불꽃의 열기가 쇠를 녹일 듯 강렬했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진대치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담천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지옥의 업화처럼 맹렬히 타오르던 불꽃은 담천의 시신을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들었다.
그도 모자랐는지, 끝내 재마저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자 불꽃이 거짓말처럼 사그라들었다.
“빌어먹을! 대체 이게 무슨 괴사란 말이냐! 오늘 경비조장이 어떤 놈이냐!”
진대치가 피투성이 몰골로 비틀대며 수하들에게 호통을 쳤다.
오늘 경비 책임자였던 도렴이 창백한 얼굴로 진대치 앞에 나섰다.
그는 진대치의 잔혹한 성격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자신이 무사하지 못할 것임을 직감했다.
“이놈!”
쉬이익!
“크윽!”
아니나 다를까.
진대치가 휘두른 검에 도렴의 왼팔이 잘려져 나갔다.
일말의 주저함도 없는 독한 손속이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도렴의 어깨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경비 무사들은 진대치의 분노가 자신들에게도 미칠까 두려움에 덜덜 몸을 떨었다.
“쓸모없는 새끼들! 놈이 내 처소로 오기까지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게 말이 되느냐! 오늘은 이 정도로 끝내겠다만, 또다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때는 경비대 전원의 목을 칠 것이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음인지 말을 마친 진대치가 휘청거렸다.
진대치의 몰골 또한 말이 아니었다.
머리는 온통 헝클어져 있었으며, 뺨과 등의 상처에서는 피가 흘러나와 상의가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무슨 일이냐!”
그때, 진가의 가주 진원도가 나타났다.
소란을 듣고 이제야 달려온 것이다.
“이런! 많이 다쳤느냐? 어서 의원을 데려오거라!”
낭패스런 진대치의 몰골을 본 진원도가 다급히 수하들에게 명한 후 물었다.
“어찌 된 일이냐?”
“크으, 자객이 습격했습니다.”
진대치가 고통에 신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정체는?”
“놈의 시체가 스스로 불에 타 사라지는 바람에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허허, 독단이라도 사용한 것인가. 아니, 그렇다 해도 몸이 녹아야지 불에 타다니…… 참으로 괴사로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진원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진대치를 바라보았다.
“안 되겠다. 의원이 올 때까지 기다릴 게 아니라, 일단 안채로 가서 몸을 누인 후 거기서 치료를 받도록 하자.”
진원도가 수하들을 시켜 진대치를 안채로 옮겼다.
진대치의 방은 담천과의 싸움으로 인해 이미 엉망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객을 보낸 놈들의 정체를 밝혀 반드시 후회하도록 만들 것입니다!”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진대치가 이를 갈며 말했다.
“당연히 놈들에게 백 배, 천 배로 되돌려 줄 것이다!”
진원도의 눈에서도 한광이 쏟아져 나왔다.

* * *

화아아악!
섬광과 함께 암흑이 걷히며 담천의 시야가 서서히 밝아졌다.
동시에 참을 수 없는 극통이 온몸을 관통했다.
마치 송곳으로 온몸을 헤집는 듯한 통증에 담천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크르르…….”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경련이 서서히 멈추고 점차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지분 냄새와 색색의 장식들.
흐릿하게 보이는 여인의 윤곽.
“어리석군요! 제 경고를 듣지 않다니!”
담천의 눈앞에는 서 있는 여인은 다름 아닌 천혜린이었다.
“크으, 대체…….”
담천은 두통이 몰아치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정신을 차리려 애를 썼다.
자신은 분명 진대치에게 목이 잘려 죽었다.
한데 어찌 천혜린이 눈앞에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이 거울은 명혼경(銘魂鏡)이라는 귀물이에요. 이름 그대로 혼을 새긴 거울이라는 뜻이죠. 지금 이 거울에는 당신의 혼을 각인시켜 두었어요. 만일 당신의 육신이 회생 불능의 상처를 입게 되면 소멸되어 명혼경을 통해 이곳으로 돌아오게 되지요.”
담천의 육신은 원래 혼이 봉인된 그릇이 있는 곳에 소생되어야 하나,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릇에게 정체가 들통 나게 되어 술법이 깨지게 된다.
해서 명혼경이 필요한 것이었다.
명혼경은 혼을 각인시켜 마치 전서구가 집을 찾듯 백(魄)이 혼(魂)의 흔적을 찾아올 수 있는 등대 역할을 했다.
거기다 봉혼단시의 술법에 의해 담천의 육신은 얼마든지 재생 가능한 상황이니, 백만 돌아오면 일각도 안 되어 다시 소생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불사의 육신이라는 말이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많이 혼란스럽고, 또 궁금한 것이 많겠죠?”
천혜린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실 당신이 진대치를 한 번쯤 찾아가리라 짐작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일부러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죠. 제가 아무리 이야기해 봐야 당신이 직접 겪어 보지 않고는 왜 지금 진대치를 찾아가면 안 되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 빤하기 때문이에요.”
사실이 그랬다.
진대치를 마주한 이후, 담천은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인해 이성적인 생각을 하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무조건 놈을 죽여야 한다는 일념만이 앞서서 천혜린의 경고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결국엔 몰래 진대치에게 찾아가기에 이른 것이다.
“결국 무리하게 암혼기를 운용해 폭주하고 말았군요. 그나마 진대치가 당신의 목을 쳐 육신을 소멸시키지 않았으면 암혼기에 잡아먹히고 말았을 거예요.”
천혜린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만일 조금만 더 시간이 흘렀다면 담천의 영혼은 암혼기에 완전히 잠식당해 이지를 상실한 채 날뛰고 말았을 것이다.
물론, 그에 대비해 미리 담천의 몸에 금제를 걸어놓은 것을 천혜린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폭주 후에 담천의 몸이 말을 듣지 않은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담천은 지금 이 자리에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불사의 육신이라는 건가?”
담천이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살피며 혼주와의 계약을 떠올렸다.
“불사의 육신이라고 해서 멋대로 몸을 굴려도 되는 것은 아니에요. 물론, 당신에게는 별다른 피해가 없겠지만…….”
말꼬리를 흐린 천혜린의 입가에 조소가 어렸다.
“무슨 소리지?”
무언가 심상치 않은 느낌에 담천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잠시 담천을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천혜린이 명혼경을 쓰다듬자 거울에 점차 하나의 상이 맺히기 시작했다.
“유향!”
거울 속에 나타난 영상을 확인한 담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놀랍게도 거울에 비친 곳은 서문유향의 방이었다.
한데 서문유향이 신음을 흘리며 침상에 누워 앓고 있었다.
의원과 서문광천, 시녀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서문유향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저게 대체 어떻게 된 것이지? 유향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다급한 목소리로 담천이 물었다.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채 차를 한 모금 마신 천혜린이 서서히 입을 열었다.
“흥분하지 말아요. 위험한 상황은 아니니. 아마도 며칠 정도면 다시 예전의 건강을 되찾을 거예요.”
담천은 도대체 왜 천혜린이 자신에게 이 영상을 보여 주었는지 알 수 없어 마음이 불안해졌다.
서문유향이 앓아누운 것과 불사의 육신이 어떤 관계가 있단 말인가.
“서문유향이 당신 혼을 담은 그릇임은 이미 알고 있겠죠? 그런데 당신이 죽음을 당할 정도의 충격을 받게 된다면 혼을 봉인한 그릇은 어떻게 될까요?”
담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천혜린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한 것이다.
“이번에야 며칠 앓아눕는 정도로 끝나겠지만, 당신이 죽음을 거듭할수록 그 타격의 정도가 점점 커질 거예요. 물론, 어지간해서 그런 일로 서문유향이 목숨을 잃지는 않을 거예요. 하지만 심할 경우, 갑자기 눈이 먼다든가, 다리 한쪽이 마비된다든가…….”
“무슨 말인지 알겠으니, 그만!”
담천이 천혜린의 말을 끊었다.
주먹을 꽉 움켜쥔 채 가늘게 떨고 있는 담천의 모습에 천혜린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는 화제를 돌렸다.
“지금 당신의 힘으로는 암혼기의 위력이 제대로 발휘될 수 없어요. 오히려 힘에 휩쓸리기 십상이지요. 그러니 당장은 경지를 끌어 올리는 데 주력해야 해요.”
“어떻게 하면 힘을 키울 수 있지?”
“당신 스스로의 증오와 원념만으로는 한계가 있어요. 한계를 넘어 암혼기를 더욱 크게 키우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마귀와 그 권속들을 죽여 힘을 흡수하는 거예요.”
천혜린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결국, 마귀들을 잡아야 암혼기를 제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왠지 혼주라는 존재가 원하는 대로 놀아나는 느낌인지라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지금 당장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당장 놈들을 잡으러 가지.”
결심을 굳힌 담천이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한시라도 빨리 마귀들을 해치워야 진대치에 대한 복수도 빨라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호호호호, 당신은 참으로 어리석군요. 지금 그 실력으로 마귀를 잡는 게 가능할 것 같은가요?”
그녀는 어이가 없는지 한참을 웃었다.
자신을 비웃는 것이 명백한 천혜린의 행동에 담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대체! 그럼 어쩌잔 말인가! 마귀도 잡을 수 없고, 복수도 할 수 없다니, 도대체 나에게 무엇을 바라는 거지?”
순간, 천혜린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어린애처럼 칭얼대지 마세요. 나는 그대의 보모가 아니에요. 누가 그대에게 새로운 삶을 줬는지 잊은 건 아니겠지요?”
호통과 함께 천혜린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서늘한 한기에 담천은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었다.
“크으으…….”
온몸을 짓누르는 엄청난 압력에 담천의 입에서 신음성이 새어 나왔다.
‘젠장, 저 여인의 진정한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마치 그동안과는 전혀 다른 사람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비교적 부드럽고 여성스럽던 그녀가 한순간 야차처럼 변해 버린 것이다.
방 안을 가득 채운 막강한 기운에 담천의 안색이 창백해지고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하자, 그제야 천혜린의 표정이 서서히 풀리며 다시 평상시의 차분한 모습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