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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마록 1권 10화
2장 진대치(5)
“난 당신의 아랫사람이 아니니 착각하지 마세요. 내가 지금 당신을 돕는 것은 오로지 혼주님을 위한 이유에서일 뿐이에요. 그리고 지금 당신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나라는 것을 잊지 말도록 하세요.”
담천은 한낱 가냘픈 여인에게 완벽히 압도당했다는 사실에 굴욕감을 느꼈으나, 결국 그녀의 말이 맞았다.
그녀가 담천의 종이나 시녀는 아니었다.
단지 혼주의 명을 받아 담천의 복수를 돕고 있는 것뿐이다.
오히려 그녀에게 고마워해야 마땅한 상황인 것이다.
담천이 증오하고 화를 내야 할 대상은 바로 진대치였다.
담천의 마음을 읽은 것인지, 천혜린이 한결 부드러워진 음성으로 말했다.
“일단 마귀의 권속들을 잡는 것부터 시작하기로 하죠. 그렇게 조금씩 힘을 쌓은 후 당신이 준비가 되면, 그때 본격적으로 마귀를 잡게 될 거예요.”
툭!
천혜린이 침상에 은색 팔찌 하나를 던져 주었다.
“그것을 가지고 다니세요. 암혼기의 폭주 정도를 확인할 수 있는 도구예요. 팔찌의 색깔이 검게 변하면 위험하다는 신호이니, 반드시 항상 확인하세요. 그리고 당분간 마귀들의 흔적을 파악할 때까지는 절대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마세요. 이건 마지막 경고예요.”
담천은 이를 악물었다.
자신의 힘이 아직 너무도 미약하기에 이런 굴욕을 겪는 것이리라.
아니, 사실 굴욕이랄 것도 없었다.
잘못을 저지른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담천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암혼기를 얻은 것만으로 들떠서 자신의 힘을 너무 과신했다.
담천은 다시는 그런 어리석은 실수를 범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담천은 몸을 추스른 후 서둘러 담씨세가로 향했다.
* * *
“크으윽!”
등에 입은 상처가 제법 깊었는지 침상에서 일어난 진대치가 신음을 토해 냈다.
밤새 생각해 보았지만 어떤 놈이 자신을 노렸는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진대치에게 원한을 가진 자들이 워낙 많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정도 고수에게 원한을 살 정도로 진대치는 멍청하지 않았다.
가장 최근 진대치가 벌인 일은 초씨세가의 사건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죽었다.
마지막 시체 한 구까지 다 확인했으니, 그것은 틀림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대체 누구지? 젠장!’
암살자를 없앴다고는 하나, 혹시 놈이 단독으로 일을 벌인 것이 아닐 경우도 생각해야 했다.
정말 그렇다면 걱정이 아닐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미 한 번 실패를 했으니, 다음에는 더욱 강한 자를 보낼 것이다.
‘어떻게든 놈의 정체를 알아내야 해!’
진대치는 침입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몸놀림이라든지 이상한 기운.
게다가 스스로 재가 되어 사라진 것까지, 어느 하나 범상한 경우가 없었다.
워낙 경황없이 당한 기습이라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 탓도 있었으나, 너무도 황망하게 놈에게 밀렸다.
진대치의 경지도 벌써 절정을 눈앞에 둔, 그 나이 대에서는 제법 뛰어난 고수였다.
한데 손 한 번 재대로 못 쓰고 목숨을 잃을 뻔한 것이다.
게다가 상대의 한 칼에 검이 잘리기까지 했다.
‘검을 자르다니…….’
강기를 다루는 고수가 아니고서야 어찌 단숨에 상대의 무기를 자른단 말인가.
그렇다고 놈이 보검을 사용한 것도 아니었다.
놈이 죽은 뒤 확인해 본 결과, 그저 평범한 청강검이었다.
답답함에 얼굴을 찡그리자 놈의 검이 스치고 지나간 뺨이 은근히 쓰려 왔다.
“젠장!”
답답함을 참지 못한 진대치가 자신도 모르게 욕지기를 토해 냈다.
“소공자님, 가주님께서 찾으십니다.”
그때, 문밖에서 자신을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님이?”
아마도 어제의 일에 대해 의논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진대치는 급히 옷을 챙겨 입고 안채로 향했다.
“어서 오너라. 몸은 어떠냐?”
진대치가 방에 들어서자 진원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통증은 조금 남아 있으나 움직이는 데는 그다지 지장이 없습니다.”
“그래, 다행이구나. 한데 네 생각은 어떠냐? 어제 온 놈에 대해 짐작 가는 바가 있더냐?”
“소자로서도 도무지 추측이 가지 않습니다.”
진대치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 역시도 암살자의 정체를 알고 싶었지만, 도무지 단서라 할 만한 게 없었다.
“너도 잘 알겠지만, 그놈 혼자 도모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역시 진원도도 같은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일단 당분간 장원의 경계를 더욱 강화해야겠다. 그리고 놈의 무공에 대해서 수소문해 보거라. 혹시라도 그런 류의 기운과 무공을 알고 있는 자가 있다면 놈의 정체를 밝힐 수 있겠지.”
“흥, 일단 저에게 원한을 가질 만한 놈들을 하나씩 족치다 보면 결국 놈의 윤곽이 드러날 것입니다.”
분이 치밀어 오른 듯 진대치가 눈썹을 치켜올린 채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 그것도 좋겠지. 어차피 그놈들 중 하나일 테니까. 그리고 본가에 연락을 해서 삼괴 어르신들을 불렀다.”
진대치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삼괴 어르신들까지야…….”
진원도가 말한 삼괴는 모두 초절정의 경지를 넘어선 진가의 최고 고수들이었다.
이미 팔십이 넘은 나이에 괴팍하고 잔혹한 성품으로 인해 진가의 식솔조차도 그들을 꺼려할 정도였다.
그러니 진대치로서도 피하고 싶은 인물들인 것이다.
“아니야. 놈의 실력을 봤을 때, 절대 과한 게 아니다. 물론 어느 정도 피곤함을 감수해야겠지만, 목숨을 잃는 것보다야 낫지. 특히 어르신들을 부른 건 네 녀석을 지키기 위함이니 괜한 불만은 일단 접어 두도록 해라.”
진원도가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만큼 이번 사건을 심각하게 보고 있는 의미였다.
“당분간 놈들의 정체가 확인될 때까지 집법대 일 외에는 집을 나서지 말거라. 놈의 정체를 알아내는 일은 수하들을 시키고.”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세가 바깥에선 쉽게 암습의 표적이 될 수 있었다.
안전이 확보될 때까지는 되도록 움직이지 않는 것이 나았다.
“알겠습니다.”
진대치는 반드시 자신을 노리는 놈들의 정체를 밝혀내리라 다짐하며 진원도의 처소을 나섰다.
3장 지강현의 괴사(怪事) (1)
의창 동쪽, 지강현(枝江縣).
장강 중류에 위치한 마을로, 강하평원(江河平原)의 서쪽 끝에 걸쳐 있으며 하천과 호수가 많아 기름지고 풍요로운 곳이라 할 수 있었다.
장강과 하천에서 나는 물고기와 강하평원에서 수확하는 곡물로 인해 배 곯는 일 없이 살 수 있었기에 사람들의 인심도 후한 편이었으며, 도둑이나 다툼 또한 없는 평화로운 곳이었다.
그런 지강현 내를 흐르는 저장강에는 열 살도 안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해맑게 웃으며 뛰놀고 있었다.
“와하하하!”
풍덩!
옷을 벗고 물속에 뛰어든 아이들은 헤엄을 치기도 하고, 다른 아이에게 물을 끼얹기도 하며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술래잡기라도 하는 듯, 한 아이를 피해 여럿이 도망 다니는 모습이 무척 즐거워 보였다.
아이들의 놀이가 한창 무르익어 갈 때쯤이었다.
“혀, 형! 저, 저것 좀 봐!”
술래 역할을 하던 아이가 놀란 표정으로 강의 중심 쪽을 가리켰다.
“헤헤, 내가 속을 줄 알고!”
형이라 불린 아이가 어림없다는 듯 혓바닥을 내밀며 강의 중심 쪽으로 뒷걸음질 쳤다.
어차피 중심까지 들어가도 아이들 가슴 아래 정도밖에 물이 차지 않는 곳이었다.
물론 위험할 수도 있겠으나, 걸음마보다 헤엄치는 법을 먼저 배운 이곳 아이들에겐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야! 뒤, 뒤에!”
“오삼아! 저, 저거 뭐야!”
하지만 다른 아이들까지 덩달아 놀라 소리를 치자 그제야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오삼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헉!”
고개를 돌린 오삼의 안색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강 중심이 피처럼 붉게 물든 채 부글부글 거품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나이 어린 오삼이지만 핏빛 거품이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게다가 핏빛 거품이 이는 물 위로 물고기들이 허연 배를 드러낸 채 하나둘 떠오르고 있지 않은가.
처음에는 반경 반 장 정도밖에 되지 않던 핏빛 거품이 점차 사방으로 퍼지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오삼이 있는 곳 근처까지 이르렀다.
“어, 엄마야! 으아아악! 사람 살려!”
오삼이 겁에 질려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치기 시작했다.
“도, 도망가자!”
“으아아아앙!”
다른 아이들 역시 울며불며 강가로 피신했다.
하지만 물속이어서 균형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미끌!
기어코 발을 잘못 디딘 오삼이 뭍을 삼 장쯤 남긴 지점에서 넘어지고 말았다.
“으으으악!”
오삼은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
다행히 물이 무릎까지도 차지 않는 곳이라 움직이는 데는 큰 지장이 없었다.
문제는 피거품이 일 장도 안 되는 거리까지 다가와 있다는 것.
오삼은 거의 기다시피 하여 사력을 다해 뭍으로 향했다.
이제 다섯 발자국 정도만 남은 상태.
조금만 더 가면 물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는 생각에 오삼의 표정이 밝아졌다.
피거품과의 거리는 어느새 반 장 정도로 좁혀진 상태였다.
미리 물에서 빠져나간 아이들이 오삼을 향해 다급히 손을 흔들며 재촉했다.
드디어 오삼이 막 몸을 일으켜 마지막 한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돌에 부딪쳐 까진 무릎과 팔꿈치에서 흘러나온 피가 강물에 떨어졌다.
톡!
슈아아아아아악!
순간, 피거품이 가득한 강물이 또아리를 튼 채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촤촤촤촤촤!!
“으아아아악!”
아이들이 지르는 비명에 덩달아 두려움을 느낀 오삼은 뒤를 돌아보지도 못한 채 혼신을 다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다섯 가닥의 핏빛 물줄기가 오삼을 덮쳐왔다.
츄아아아아악!
아이들은 극한의 공포에 질려 아무런 움직임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아이들의 눈에 마치 시간이 정지한 듯 허공에서 안타깝게 손을 뻗는 오삼의 모습이 보였다.
그 위로 굉음을 내며 떨어져 내리던 핏빛 물줄기들이 하나로 뭉치더니, 흡사 괴물처럼 아가리를 벌린 채 순식간에 오삼을 삼켜 강으로 끌고 들어갔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인지라 오삼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강 밖에 남겨진 아이들은 참혹한 광경에 울음마저 터트리지 못한 채 멍한 표정으로 오삼을 삼킨 강물을 바라보았다.
이젠 전체가 핏빛으로 물든 강물은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잔잔하기만 했다.
처음 강의 중심에서 일던 거품도 어느새 사라져 버린 뒤였다.
배를 뒤집은 채 죽어 있는 수백 마리의 물고기들만이 방금 전에 벌어진 일이 결코 꿈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 * *
암흑 속에 두 개의 혈광이 나타났다.
마치 모든 것을 삼켜 버릴 것 같은 서늘한 공포가 담천을 짓눌렀다.
점차 시야가 선명해지고 혈광 주위로 하나의 형체가 드러났다.
‘천혜린!’
놀란 담천이 소리치려 했으나 도무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