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봉마록 1권 11화
3장 지강현의 괴사(怪事) (2)
그녀는 붉은 눈으로 담천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속이 훤히 비치는 얇은 나삼을 입은 탓에 천혜린의 탄력 있는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터질 듯 탐스러운 가슴과 버들가지처럼 부드럽고 가느다란 허리, 그 아래로 이어지는 농염한 곡선에 담천은 숨조차 쉴 수 없었다.
평소와 달리 관능적인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그녀가 담천에게 다가왔다.
이어 그녀의 가늘고 긴 팔이 부드럽게 담천을 감싸 안았다.
밀착된 그녀의 몸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가 담천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담천은 그녀를 밀어내려 했으나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 순간, 그녀의 입술이 담천의 귓가로 다가왔다.
“당신의 영혼은 이제 내 것이에요.”
속삭이듯 들려오는 천혜린의 목소리에 담천은 온몸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스으으으!
순간, 천혜린은 거대한 한 마리 뱀이 되어 담천의 온몸을 조여 왔다.
우두둑!
어마어마한 압력에 담천의 뼈가 수수깡처럼 부서졌다.
‘아아악!’
“허억! 허억!”
담천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제 잠들었던 자신의 침상이었다.
“꿈이었나…….”
몸을 일으킨 담천이 이마 위로 흘러내린 땀을 닦았다.
다시는 꾸고 싶지 않은 악몽이었다.
‘어제 일로 충격을 받아서인가?’
담천은 온몸을 흥건하게 적신 땀을 닦아 낸 후 주섬주섬 옷을 걸쳤다.
그때, 갑자기 방문이 열리며 천혜린이 나타났다.
“호호호, 마치 괴물이라도 본 듯한 표정이군요?”
천혜린이 교태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생글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담천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어젯밤 일을 떠올려 보면 담천은 그녀의 진면목에 대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온 것을 보니 내가 제법 오랜 시간 잠이 들었나 보군.’
담천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의 집에서 이곳까지가 그리 멀지는 않았으나 새벽부터 찾아올 리는 없으니 최소한 아침은 훌쩍 넘어선 시간이라는 이야기였다.
사실, 담천은 굳이 수면을 취하지 않아도 되는 몸이었다.
한데도 꽤 오랜 시간 잠이 들은 것을 보면 아마도 어제의 일로 상당히 피로했던 모양이다.
천혜린의 집안은 의창에서 최근 급작스럽게 신흥 부호로 떠오른 상인 가문이었다.
물론, 모두 천혜린이 만든 것이었고, 그녀의 가족들 역시 실상은 그녀가 거느리고 있는 수하들이었다.
“몸은 괜찮아졌나요? 그러니 앞으로는 제 말을 흘려듣지 말도록 하세요. 모두가 당신을 위해 하는 이야기니까요. 물론, 당신의 조급한 마음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에요. 하지만 복수도 못하고 소멸되어 버린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천혜린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담천을 달랬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담천은 왠지 모를 거부감이 들었다.
‘괜한 자격지심인가?’
죽기 전의 담천, 아니, 초유벽은 원래 겁이 많고 유약한 성격을 가졌다.
하지만 혼주와의 계약을 통해 부활한 이후 다시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며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한데 겨우 여인에게 두려움을 느꼈다는 것이 한심하고 치욕스러웠던 것일까?
“그건 그렇고, 드디어 마귀의 흔적이 발견되었어요.”
천혜린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담천의 얼굴에 긴장감이 어렸다.
혼주(魂主)와의 맺은 거래를 수행할 때가 온 것이다.
과연 마귀라는 존재는 어떻게 생겼고, 얼마나 강할까?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놈들도 있다고 들었다.
만일 그렇다면 천혜린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잠시 담천의 반응을 살피던 천혜린이 말을 이었다.
“저장강에 접해 있는 지강현에서 기괴한 사건이 벌어졌어요. 목격한 아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강물이 핏빛으로 변해 물고기를 죽이고 아이를 덮쳤다고 해요.”
그야말로 괴담에나 나올 만한 이야기였다.
‘하긴, 내가 다시 살아난 것이야말로 불가사의한 일이지.’
천혜린이나 혼주라는 존재, 마귀들, 담천의 부활.
이미 무엇 하나 평범한 일이 없었다.
“인간의 능력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은 대부분 귀계(鬼界)나 신계(神界)가 연관된 것일 확률이 높아요. 목격한 아이들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요괴나 마귀의 짓이 분명해요.”
어젯밤 천혜린이 말한 대로라면 담천은 아직 마귀를 잡을 힘이 없었다.
그러니 처음에는 권속(眷屬)을 처치하는 일부터 해야 할 것이다.
담천은 조용히 그녀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일단 지강현에 가서 상황을 지켜본 후 움직이도록 하죠. 권속들도 결코 만만치 않으니 신중을 기해야 해요.”
다른 이들 같으면 맥이 빠질 이야기였으나 담천은 결코 실망하지 않았다.
진대치를 습격할 때도 느꼈지만, 섣불리 움직이는 것은 애써 얻은 기적과도 같은 기회를 스스로 날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조금 시간이 걸린다 해도 차근차근 힘을 키워 실패할 확률을 줄이는 것이 옳았다.
확실한 복수를 할 수 있다면, 그 시간이 십 년이 되고 백 년이 된다 해도 기다릴 것이다.
“앞으로는 이 검을 쓰도록 하세요. 천령검(天靈劍)이라는 탕마검(蕩魔劍)이에요. 암혼기를 담게 되면 마귀라 해도 벨 수 있어요.”
천령검은 신기하게도 검신이 마치 피를 머금은 듯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우우우우웅!
담천이 천령검의 손잡이를 쥐자 낮은 울림이 들려왔다.
“손바닥을 베어 당신의 피를 먹이세요. 그리하면 검이 당신을 주인으로 인식하게 될 거예요. 그 검은 한 번 주인으로 인식하면 절대 다른 사람이 사용할 수 없어요.”
담천이 천혜린의 말에 따라 천령검으로 손바닥을 베었다.
화아아악!
순간, 검에서 빛이 일더니 담천의 피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런!”
몸 안의 피가 쑤욱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괴한 느낌에 담천이 재빨리 손을 떼어내려 했지만, 천령검은 손바닥에 달라붙은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절대 위험하지 않으니 당황하지 마세요.”
천혜린의 말에 담천은 그제야 마음을 가라앉히고 검을 잡은 손에서 힘을 뺐다.
그리고 천령검의 붉은빛이 마치 피가 뚝뚝 떨어져 내릴 듯 짙어졌을 즈음, 갑자기 검의 울림이 멈추더니 피를 빨아들이는 것 역시 멈추었다.
“후우……!”
생각보다 많은 양의 피를 빨린 듯 담천은 약간의 현기증을 느꼈다.
‘이런 몸에도 피는 흐르는구나…….’
한편으로는 괴물 같은 자신의 육신에 붉은 피가 흐른다는 사실이 왠지 모순적으로 느껴졌다.
담천이 쓴웃음을 지은 채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손의 상처는 사라지고 없었다.
불사의 능력이 발휘된 것이다.
검 역시 처음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놀랄 것 없어요. 그저 주인을 인식하는 의식에 불과하니까요. 이제 준비는 다 되었으니, 서둘러 지강현으로 출발하도록 하죠.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니 정오 이전에 도착할 수 있을 거예요. 오늘은 대략적인 정보만 알아보고 일찍 돌아오도록 해요.”
유유히 방을 나서는 천혜린을 따라 담천이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은 담일명 부부에게 문안을 올리고는 즉시 지강현으로 향했다.
* * *
“도무지 마음에 드는 게 없군. 후우…….”
눈이 반쯤 감긴 나른한 표정의 청년이 하품을 하며 말했다.
어찌 보면 모든 게 귀찮다는 듯 나른하고 늘어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현청을 가득 메운 관리들은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었다.
“후우, 대체 왜 우리 현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겐가. 내가 덕이 부족한 것인가?”
한숨까지 내쉬며 한탄하는 청년의 표정과는 달리 관리들은 창백한 안색으로 두려움에 질려 있었다.
청년은 바로 부임한 지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은 지강현의 지현, 곽진이었다.
곽진은 새하얀 피부에 가냘픈 몸매를 가지고 있었는데, 여인으로 태어났다면 상당한 미인이 되었을 듯한 얼굴이었다.
곽진이 붉고 얇은 입술을 혀로 핥으며 관리들을 쓸어보았다.
얼핏 다른 사람들이 이 상황을 본다면 무척 의아해할 것이다.
곽진이 관리들을 윽박지르는 것도 아니고 분노한 듯 보이지도 않는데, 모두가 겁에 질려 덜덜 떨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보기와는 달리 이 새로운 젊은 지현은 그 성격이 매우 종잡을 수 없어서, 농담을 나누다가도 갑자기 사람을 죽여 버릴 만큼 잔혹한 자였다.
처음 그 일이 벌어진 것은 바로 곽진이 부임하던 날이었다.
관리들과 상견례를 하고 업무에 대해 보고를 받던 중 갑자기 곽진이 현청의 실무를 담당하던 주부(主簿) 양윤을 죽였다.
아니, 이유는 있었다.
단지 목소리가 기분이 나쁘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유.
곽진이 돌변한 것은 그야말로 한순간이었다.
더욱 두려운 것은 그가 양윤을 죽인 방법이었다.
곽진은 그 자리에서 양윤을 맨주먹으로 때려 죽였다.
양윤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곽진의 주먹질은 멈추지 않았다.
사방으로 피가 튀고 양윤의 얼굴이 형체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피 떡이 되었다.
그 질식할 듯한 살기와 잔혹성에 관리들은 숨조차 마음대로 쉴 수 없었다.
온몸에 양윤의 피를 흠뻑 뒤집어쓴 채 미소를 짓던 곽진의 악귀 같은 모습에 관리들은 감히 그 일에 대해 입 밖에 내거나 따지지도 못했다.
그것은 공포였다.
저항할 수 없는 절대적인 공포!
“만일 오늘 일이 밖으로 새어 나간다면 여기 있는 네놈들은 물론, 어미와 아비, 자식 놈들까지 모두 내 손으로 직접 찢어 죽여 주마!”
광기에 젖은 그 모습은 결코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것이었다.
관리들은 그날 이후, 마치 최면에라도 걸린 것처럼 그 일을 머리에서 지워 버렸다.
아니, 그런 일은 애당초 없었다고 스스로에게 암시를 걸었다는 것이 맞았다.
그 후에 지현이 직접 데려온 이가 현재의 주부, 적괴였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그 뒤로도 현청의 관리 중 삼분지 일이 파직되거나 죄를 덮어쓴 채 처형되었고, 어김없이 다른 이들로 채워졌다.
지현이 데려온 이들은 모두 외지에서 온 자들이었는데, 그 분위기가 묘하고 음산해서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다.
번들거리는 눈빛도 그러거니와,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 또한 소름이 끼칠 정도로 귀를 자극했다.
“어찌 대답들이 없는가? 갑자기 모두들 꿀 먹은 벙어리라도 된 건가?”
곽진이 고개를 좌우로 갸웃거리며 입꼬리를 슬쩍 말아 올렸다.
그러자 현청을 메운 관리들의 표정이 더욱 창백해졌다.
저 차가운 미소야말로 곽진이 항상 누군가를 죽이기 전에 짓던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버러지 같은 놈들! 다 물러가라!”
하지만 다행히도 곽진은 그대로 관리들을 물렸다.
뜻밖의 상황에 관리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얼른 현청 밖으로 달아났다.
“너희는 남아라!”
순간, 일곱 사내가 움직임을 멈추고 곽진 앞에 부복했다.
그들은 바로 곽진이 직접 데려와 관리로 임명한 자들이었다.
다른 관리들이 모두 빠져나간 것을 확인한 곽진이 싸늘한 표정으로 일곱 사내를 바라보았다.
“쯧쯧, 내가 그동안 네놈들을 너무 풀어놓았구나.”
일곱 사내가 아무 말도 못하고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내가 무어라 했더라?”
곽진이 턱을 괴고 일곱 사내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