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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마록 1권 16화


3장 지강현의 괴사(怪事) (7)


물론, 형편없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그나마 다른 무공보다는 익숙할 것이다.
다른 한 권은 비설형(飛雪形)이라는 경신법이었는데, 말 그대로 눈발이 휘날리듯 움직이는 보법이었다.
도경과의 싸움에서 담천이 필요성을 느낀 또 다른 하나가 바로 보법이었다.
물론, 암혼기를 사용하면 담천이 움직이는 속도는 일반 무인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빨랐다.
하지만 도경을 상대해 보니 자신의 빠르기가 마귀와 권속들에겐 통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권속에 불과한 도경의 움직임도 담천에게 그다지 뒤지지 않았는데, 마귀들은 그보다 몇 배 더 빠를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독특하면서 상대가 예측할 수 없는 움직임이 필요했다.
마침 비설형이라는 보법이 바로 그러했다.
눈송이가 어디로 휘날릴지 누가 알겠는가.
담천은 직접 고른 네 권의 책을 밤새 탐독했다.



4장 첫 번째 마귀(1)


서문세가의 별채.
서문유향은 침상에 일어나 앉아 멍하니 방문을 바라보았다.
삼 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잠조차 자지 못해 초췌한 모습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연의 아름다움은 숨길 수 없었다.
“풍영(風影).”
그녀의 입에서 한 사람을 지칭하는 이름이 흘러나오자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검은 형체가 나타났다.
“충!”
검은 형체가 깊숙이 고개를 숙인 채 서문유향의 부름에 읍(揖)했다.
“아저씨는 저의 사람인가요, 아버님의 사람인가요?”
마치 얼음처럼 차갑고 고저(高低) 없는 목소리로 서문유향이 물었다.
“신은 오직 아가씨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입니다!”
풍영이라 불린 자가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좋아요. 현재 제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아저씨뿐이에요. 지금부터 절 위해 움직여 주셔야겠어요.”
그 말에 풍영의 눈빛이 흔들렸다.
“저는 절대 아가씨 곁을 떠날 수 없습니다!”
그는 서문유향의 숨겨진 마지막 호위였다.
서문유향이 열 살이 채 안 됐을 때부터 곁에서 그림자처럼 보호해 온 그였다.
한데 서문유향은 지금 자신에게 무언가 다른 임무를 내리려 하고 있었다.
그것은 곧 서문유향의 곁을 잠시 비워야 된다는 말과도 같았다.
당연히 풍영으로서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찌 보면 가족이 없는 그에게는 딸과도 같은 서문유향이었다.
그런 만큼 그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서문유향의 안전이 가장 중요했다.
“부탁해요. 만일 아저씨가 제 말을 들어주지 않으실 경우, 저는 이대로 죽어 버릴지도 몰라요.”
풍영이 놀란 눈으로 서문유향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현 무림에서 감히 누가 서문세가에 침범해 저를 해할 수 있다 생각하시나요?”
서문유향이 풍영의 말을 끊었다.
현재 서문세가는 무벌의 주인이다.
그 누가 있어 서문세가 가장 깊숙이 위치한 서문유향에게 해를 입힐 수 있겠는가.
“게다가 아저씨 외에도 가문의 수호대가 항상 별채에 머물고 있어요. 하니 저에 대한 걱정은 접으세요.”
얼마 전까지 자리에 누워 흐느끼던 여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서문유향의 목소리에서는 힘과 절도가 넘쳤다.
풍영은 고개를 숙인 채 갈등했다.
서문유향이 원하는 것이 무언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마도 정인이던 초유벽의 죽음에 대해 조사해 달라는 것일 터였다.
계속 서문유향의 곁에 있었기에 풍영은 그동안의 사정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초유벽이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던 그조차도 혈천의 주구였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자신의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서문유향의 안전과 행복을 최우선하는 그였기에 초유벽을 그만큼 철저히 살폈고, 가장 못마땅했던 것이 무가의 자제이면서도 피를 싫어하고 싸움을 피하는 초유벽의 성품이었다.
한데 그런 초유벽이 흡혈마공을 익히고 아이들의 정기를 흡수했다 하니, 의심이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초유벽이 그동안 자신의 정체를 철저히 숨겼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무공을 사용하지 않고 그리 쉽게 목숨을 잃었단 말인가.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 법이다.
누구나 마지막 순간에는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게다가 흡혈마공을 익혔다면 어느 정도 마기가 느껴졌을 터.
마공의 초고수가 아닌 이상 풍영 앞에서 마기를 숨긴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한데 그동안 풍영은 초유벽에서 마기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한 가지 가능성은 있다.
아직 흡혈마공을 익힌 지 오래되지 않은 상황일 경우였다.
흡혈마공을 익히는 초기에는 거의 마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게다가 다른 무공도 익힐 수 없었다.
하지만 흡혈마공 또한 마공이었기에 성격이 변하는 것은 막을 수 없다.
한데 그 얼뜨기 초유벽이 마공을 익혔다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사건이었다.
하니 정인이었던 서문유향은 어떻겠는가.
“휴,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끝내 부탁을 외면하지 못한 풍영의 대답에 서문유향의 눈에서 눈물이 글썽였다.
“고마워요, 아저씨…….”
잠시 풍영을 바라보던 서문유향이 입을 열었다.
“먼저 유벽 오라버니를 발고한 초씨세가의 노복 우삼을 찾아주세요.”
“충!”
순간, 풍영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 *

사방 오 장 정도 되는 석실의 중앙.
곽진이 가부좌를 튼 채 앉아 있었는데, 그 앞에는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알몸의 여인이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곽진은 천천히 손을 들어 여인의 머리 쪽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여인의 머리에 거의 닿았다 싶은 순간,
슈우우우욱!
놀랍게도 여인의 정수리로부터 붉은색 연무가 흘러나와 곽진의 오른손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허어억!”
순간, 죽은 듯 보인 여인이 눈을 뒤집어 까며 경련을 일으켰다.
덜덜덜!
붉은색 연무가 점점 짙어질수록 마치 생선이 퍼덕이듯 여인의 사지가 방향을 잃고 제멋대로 뒤틀리더니, 이내 풍선에 바람이 빠지듯 점차 쪼그라들었다.
반 각 정도의 시간이 지나 곽진의 눈에서 혈광이 한 번 번쩍이고 더 이상 붉은 연무가 발생하지 않게 되자 여인의 움직임 역시 멈추었다.
여인의 몸은 마치 목내이처럼 검게 말라 비틀어져 있었다.
“후우, 정말 감질나는군…….”
잠시 숨을 고른 곽진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이 마을의 인간들의 정기를 모두 빨아들이고 싶었으나,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만일, 그 정도 사건이 터진다면 자신의 정체가 금방 탄로 나게 될 테고, 수많은 도사와 승려들이 자신을 잡기 위해 달려들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세력을 다투고 있는 다른 마귀들도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하니 곽진으로서는 조심스럽게 움직여야만 하는 지금의 상황이 무척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한 명씩 정기를 모아 어느 세월에 힘을 키운단 말인가!”
무언가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주공!”
그때, 석실 밖에서 다급히 곽진을 찾는 적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라.”
슬쩍 눈살을 찌푸린 곽진이 적괴를 석실로 불러들였다.
안으로 들어온 적괴는 잠시 곽진의 눈치를 살피며 멈칫거렸다.
“무슨 일이냐!”
답답해진 곽진이 적괴를 재촉했다.
꼼지락거리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분명 좋지 않은 일이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시, 실은…… 양소현을 처리하러 갔던 도경이 죽었습니다.”
순간, 곽진의 안색이 차갑게 굳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뭐라 했느냐?”
“도, 도경이 죽었습니다.”
우우우우웅!
사방이 얼어붙을 듯한 한기가 순식간에 석실을 가득 채웠다.
그 가공할 기세에 적괴가 이마를 땅에 붙인 채 덜덜 떨었다.
그의 주인은 결코 자비로운 자가 아니었다.
아무런 이유가 없어도 사람 목숨을 쉽게 거두는 이가 아닌가.
지금 그의 목숨도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운 것이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
일그러진 표정으로 곽진이 고함을 쳤다.
도경이 어리석긴 해도 명색이 자신의 권속.
겨우 철없이 날뛰는 여자아이 하나 처리하는 일이었다.
한데 실패하는 것도 모자라 죽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관, 관병들이 도경의 시신을 확인했습니다. 그, 그것이…… 팔과 목이 잘린 것으로 보아 검에 당한 것 같습니다.”
곽진이 눈을 부릅떴다.
“검에?”
도대체 누가 있어 자신의 권속을 검으로 벨 수 있다는 말인가!
물론, 강호에서 이름 높은 팔왕이라든지 강기를 구사할 수 있는 자들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지강은 변변한 문파 하나 없는 곳이다.
‘혹시, 무벌의 고수가 우연찮게 관여하게 된 것인가?’
의창과는 왕복 반나절도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고수들이라면 반 시진 만에도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거리.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문제였다.
무벌이 나서게 되면 곽진이 하려는 일에 상당한 방해를 받을 것이다.
게다가 아무리 곽진이라도 화경을 넘어선 고수는 피해야 했다.
혹시라도 무벌의 수뇌부 중 하나가 관계되었다면 이대로 지강을 떠나는 것이 차라리 나았다.
‘젠장, 그동안 들인 정성이 얼만데!’
이곳에 자리 잡기 위해 일부러 무리하지 않고 무척 조심스럽게 움직여 왔다.
근 세 달 동안 공을 들여 지강현을 자신의 수중에 넣은 상태였다.
이제부터 막 힘을 끌어모으려는 찰나에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다.
“이익! 바보 같은 놈들!”
콰앙!
곽진이 석실 벽에다 대고 화풀이를 했다.
만일 저장강의 일이 없었다면 일이 이 지경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쉽게 포기할 수는 없지. 만일 진정 무벌이 관계되었다면 무리해서라도 힘을 모은 후 잠적하면 그만!’
입술을 꽉 깨문 곽진이 적괴를 매섭게 바라봤다.
“주, 주공!”
그러자 지레 겁을 먹은 적괴가 몸을 떨며 오체투지했다.
“계집은?”
이번에도 적괴는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머뭇거렸다.
“병신 같은 놈들!”
어차피 도경의 정체가 드러난 이상 계집을 죽이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보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야 했다.
“도경을 죽인 자가 누구인지 알아보거라. 그리고 혹시 요즘 들어 이곳에 나타난 고수가 있는지 수소문해 보거라. 두 번 말하지 않겠다. 모든 역량을 동원서 반드시 놈을 찾아내라!”
“존명!”
“그리고 또 한 가지. 현청의 관병과 위사들을 모두 풀어 왈패들이나 범죄자들을 모조리 색출해 잡아들이도록 해라! 시정잡배들까지 남김없이 잡아들여라!”
외부의 시선에 노출되지 않으면서 많은 힘을 한꺼번에 모으려면 죄수들을 이용하는 방법이 제일이었다.
일단, 지현인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면 쉽게 죄수들을 확보할 수 있는데다가 그런 자들이 갑자기 사라진다 해도 누구 하나 신경을 쓰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