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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마록 1권 17화
4장 첫 번째 마귀(2)
시간을 벌면서 힘도 모을 수 있는 일석이조의 방책이었다.
‘진즉에 이렇게 할 것을!’
곽진은 자신이 왜 이 생각을 이제야 떠올렸는지 후회됐다.
“당장 나가서 명을 전하지 않고 뭣하는 게냐!”
“충!”
서릿발 같은 곽진의 명에 적괴는 식은땀을 흘리며 재빨리 석실을 나섰다.
* * *
밤새 확인해 본 결과, 담천은 암혼기가 전보다 상당히 늘어났음을 알 수 있었다.
암혼기가 늘어난 이점은 여러 가지였다.
일단, 암혼기를 쓸 수 있는 한계가 전보다 제법 늘어난 듯했다.
폭주할 것이라 느낄 만큼의 힘을 써도 이제는 폭주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게다가 아직 확인은 안 해 봤지만 힘과 속도 역시 증가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제 도경 같은 권속은 상대해 볼 만하다는 이야기였다.
만일 도경 같은 권속을 여럿 잡아 그들의 힘을 빼앗는다면, 그들을 부리는 마귀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드르륵!
아침이 되자 어김없이 천혜린이 방문을 열고 나타났다.
이 여인은 미리 기척을 낸다든가 하는 경우가 전혀 없었다.
무작정 담천의 방문을 열고 들이닥치는 것이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담천이 눈살을 찌푸렸다.
“호호호, 뭘 그리 놀라나요? 우리 사이에 숨길 거라도 있으신가요?”
천혜린이 놀리듯 입을 열었다.
이미 천혜린의 정체를 알고 있는 담천으로서는 농이라고 보기엔 너무 섬뜩한 말이었다.
애써 콧방귀를 뀌며 그녀의 말을 무시한 담천이 옷을 챙긴 후 일어섰다.
“오늘도 지강현으로 가는 건가?”
“어제의 일로 놈들이 잔뜩 경계를 하고 있는 상태일 테니 당분간은 상황을 살피는 것이 좋겠어요. 현재 당신의 힘으로는 그들을 모두 상대하기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니까요. 우선은 실력을 키우는 데 집중하도록 해요.”
그렇지 않아도 담천 역시 어제의 싸움으로 인해 자신의 부족함을 절실히 깨달은 상태였다.
물론, 도경을 쓰러뜨리면서 암혼기가 한결 성장한 상태였으나, 겨우 이 정도로 도경보다 몇 배는 더 강할 것이 분명한 마귀를 상대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처음 생각했던 대로 무공을 익히고 암혼기를 더 발전시켜야 했다.
“그럼 지강의 상황은 어떻게 살피지?”
“그건 저에게 맡기도록 하세요. 아시다시피 제가 가진 상단을 이용하면 쉽게 정보를 수집할 수 있으니까. 만일, 변화가 있으면 알려 드리죠.”
천가가 운영하는 천하상단은 회주가 따로 있긴 했으나, 실상 천혜린이 주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천가 자체가 천혜린이 작위적으로 만든 곳이기 때문이었다.
천하상단은 규모가 제법 커서 호북은 물론, 사천과 섬서, 호남, 하북, 안휘까지도 손을 뻗치고 있었다.
상단이 커질수록 필요한 것이 바로 정보였다.
천하상단 역시 만만치 않은 정보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어제까지는 당신에게 새로 얻은 육신과 힘의 사용법에 대해 알려 주기 위해 제가 함께했지만, 앞으로는 당신 혼자 움직이게 될 거예요. 상단을 운용하려면 할 일이 무척 많거든요. 당신 때문에 요 며칠을 아무것도 못한 터라 업무가 많이 밀린 상태예요.”
천혜린의 얼굴에 장난스런 미소가 걸렸다.
“게다가 아무리 혼인을 약속했다곤 하지만, 결혼도 안 한 여인이 남정네의 집에 너무 자주 드나든다면 주변에서 뭐라하겠어요? 호호호.”
그런 일에 신경 쓸 그녀가 아니란 것을 너무도 잘 아는 담천이 코웃음을 쳤다.
“재미없긴…… 훗.”
담천의 냉정한 태도에 실소를 지은 천혜린이 말을 이었다.
“이제 당신도 암혼기의 사용법과 권속들을 상대하는 법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을 잡았을 테니, 앞으로는 스스로 해결해 나가도록 하세요. 물론, 정보라든가 제반적인 도움은 계속 드릴 거예요. 하지만 마귀를 잡고 복수를 하는 일은 이제 오로지 그대의 몫이에요.”
담천으로서는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천혜린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담천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훗, 행여 진대치에게 당장 복수하려는 것이라면 꿈도 꾸지 마세요. 그때, 당신이 벌인 소동으로 인해 지금 진가는 철옹성이 되었어요. 지금 가 봤자 저번과 같은 꼴을 당할 거예요.”
“어차피 좀 더 힘을 키울 생각이었다.”
속마음을 들킨 담천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건 그렇고, 소소에게 부적을 준 자가 해륜인가?”
무안했던 담천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아마도…….”
천혜린이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그가 그토록 위험한가?”
담천이 볼 땐 덜렁거리고 사람 좋은 도사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그가 날린 부적에도 담천은 아무런 영향이 없지 않았던가.
“네, 위험한 자예요. 우리에겐 특히!”
정색을 하며 목소리를 높이는 천혜린의 모습에 담천은 오히려 위화감이 들었다.
물론, 해륜이 명륜안을 깰 정도로 도력이 높고 자신의 정체를 밝혀낼 확률이 있다 해도 사실, 엄밀히 말하면 천혜린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담천이 복수에 성공하든 말든 천혜린에게는 별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
억지로 꿰어맞추자면 마귀를 더 이상 잡지 못할까 걱정하는 것이랄까?
‘과연 그것 때문에 천혜린이 저리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일까?’
담천은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으리라 짐작했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어떠한가.
어차피 담천은 복수를 할 기회를 얻었다.
지금보다 조금만 더 실력이 상승한다면 충분히 진대치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늦어도 혼주라는 존재가 맡겼던 마귀를 잡아들이는 임무가 끝나기 이전에는 담천의 복수가 끝날 것이란 이야기였다.
생각을 정리한 담천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쓸데없이 천혜린과 맞설 이유가 없었다.
“그래요. 당신의 복수에 있어서도 해륜은 위험한 자예요. 만일 그자가 당신의 정체를 알아차린다면…… 물론, 당신이 초유벽이라는 사실을 알긴 쉽지 않겠지만, 당신이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만 알아차린다 해도 바로 적이 될 것이 분명해요.”
나름 일리가 있는 이야기이긴 했으나 담천은 그다지 믿고 싶지 않았다.
천혜린도 결국 혼주라는 존재의 권속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 안에 무슨 음모가 도사리고 있을지 알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담천은 자신의 복수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굳이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뭐, 어차피 난 상관없지. 복수만 할 수 있다면 말이야.”
피식 웃음을 짓는 담천을 보며 천혜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전 이만 천가로 돌아갈 테니,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연락 드릴 때까지 기다리고 계세요.”
마지막 말을 남긴 천혜린이 방을 나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고 홀로 남게 된 담천은 앞으로의 일에 대해 생각했다.
일단 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무공을 익혀야 했다.
암혼기를 늘이는 일도 중요했지만, 어차피 권속이나 마귀를 잡지 않는 이상 크게 늘어나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담천은 당분간 담가의 무공과 비설형을 어느 정도 쓸 수 있을 정도 수준까지 익히기로 마음먹었다.
또한, 진대치에 관한 일도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물론, 당장에 놈을 처리할 수야 없겠지만, 나중을 위해서라도 놈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얻어내야 했다.
우선은 놈의 주변을 탐색하는 것이 먼저였다.
놈의 동선과 하루 일과, 주변의 경계 태세, 진가의 무사들에 대해 상세히 조사할 필요가 있었다.
천혜린에게 물어볼 수도 있었으나 그녀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왠지 내키지 않았다.
그렇다면 직접 발로 뛰며 알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담천은 생각을 정리한 후 일단 무공을 익히기 위해 연공실로 향했다.
* * *
지강현은 한바탕 폭풍을 겪어야 했다.
관에서 쏟아져 나온 위사와 관병들이 저잣거리 왈패들과 소매치기, 자잘한 도둑들까지 모조리 색출해서 잡아간 것이다.
일반 주민들과 상인들이야 이들이 없어져 속편하게 살 수 있으니 좋은 면도 있었으나, 문제는 이를 위해 현청의 관원들이 모두 동원되어 지강현 전체를 들쑤시는 탓에 수많은 마찰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검문검색을 집집마다 하여 호패가 없거나 수상한 자들은 모조리 잡아 가두었다.
게다가 꼬투리를 잡기 위해 상점이나 주점을 수시로 뒤짚어 놓는 통에 손님이 다 도망가는 실정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현청의 관원들이 영흥객잔이라는 곳에 들이닥쳤다.
“아이고, 나리! 삼 일 전에 아무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시고 어찌 또 오신 겝니까!”
주인이 죽을상을 하며 관리에게 하소연했다.
이들이 한 번 들쑤시고 나면 그날은 장사를 접어야 했다.
“어찌 관원이 범인을 색출하겠다는 데 반기를 드는 것이냐? 네가 범인을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우릴 막을 이유가 없지 않더냐?”
날카롭게 생긴 관리는 바로 곽진의 권속 중 하나인 황구라는 자였다.
“아이고, 무슨 말씀이십니까요! 범인을 숨기다니! 절대 아닙니다요! 뒤지십시오! 다 뒤지십시오!”
객잔 주인이 울상을 지으며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섰다.
“모든 방을 뒤져라!”
황구의 명에 따라 관병들이 이층의 객사를 뒤지기 시작했다.
벌컥벌컥 문을 열어젖히자 놀란 투숙객들이 비명을 질러 댔다.
콰앙!
“이게 무슨 짓이오!”
그때, 세 번째 방에서 젊은 도사 하나가 뛰쳐나왔다.
바로 해륜이었다.
그 옆방에는 양소현이 머물고 있었다.
그녀가 관병들에게 발견되면 당장 위험한 상황이었기에 해륜이 나선 것이었다.
관병들은 해륜이 나서자 주춤했다.
아무래도 도사를 함부로 대하기에는 그들도 꺼림칙했기 때문이다.
“뭣들 하는 게냐! 수상한 자가 아니더냐! 놈도 잡아다 꿇려라!”
하지만 황구의 불호령이 떨어지자 관병들은 어쩔 수 없이 해륜에게 달려들었다.
“이런!”
어차피 말로 넘기기엔 틀렸음을 깨달은 해륜이 손을 움직였다.
후우웅!
순간, 해륜의 소매에서 다섯 장의 부적이 발출되어 허공으로 떠올랐다.
슈우우우욱!
“엇!”
“얼레?”
동시에 이층이 연무에 휩싸이며 해륜의 모습이 사라졌다.
“이런! 보통 도사 놈이 아니구나!”
황구가 재빨리 이층으로 몸을 날렸다.
어쩌면 저 도사가 도경을 죽였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니 놈만 잡을 수 있다면 곽진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콰아앙!
이층에 올라서자마자 황구가 해륜이 서 있던 자리를 향해 쌍장을 날렸다.
그러자 나무로 만든 벽이 부서지고, 연무 속에 숨어 있던 부적이 찢어져 흩어졌다.
“이런!”
하지만 연기가 걷히고 드러난 곳에 이미 해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재빨리 주변을 살피니 반대편 창문이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
“놈이 밖으로 달아났다! 모두 도사 놈을 쫓아라!”
명을 내린 황구가 창문을 향해 몸을 날렸고, 관병들도 행여 뒤처질세라 그 뒤를 허겁지겁 쫓았다.
“아이고! 내가 이놈의 지강 땅을 뜨든지 해야지, 이러다 홧병 나서 제 명에 못 살겄네!”
자포자기한 객잔 주인이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할 때였다.
옆방의 문이 열리며 해륜이 천천히 고개를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