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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마록 1권 18화
4장 첫 번째 마귀(3)
“나오시오, 소저. 다들 갔소. 언제 다시 그들이 돌아올지 모르니, 얼른 여기서 탈출해야 하오.”
뒤이어 양소현이 겁먹은 표정으로 밖으로 나왔다.
두 사람은 재빨리 계단을 내려왔다.
“주인께는 죄송하게 되었소. 내 원시천존께 날마다 형장의 안녕을 빌어 줄 터이니 너무 슬퍼 마시오. 그럼 보중하시오.”
망연자실한 주인에게 예의 바르게 한마디를 남긴 해륜이 양소현을 이끌고 관병들이 사라진 반대 방향으로 서둘러 달아났다.
“야이, 말코 도사 놈아! 아주 염장을 질러라, 질러!”
멀어져 가는 해륜을 향해 주인이 주먹을 들어 올리며 분통을 터트렸다.
지강현 경계 근처에 다다른 해륜과 양소현은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관병들이 모든 외곽 지역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강현 자체는 평야지대가 대부분이었기에 숨을 곳도 마땅치 않아 적은 인원으로도 넓은 범위를 감시할 수 있는 지형이었다.
때문에 관병들의 눈을 피해 몰래 빠져나가기는 불가능했다.
“이제 어떻게 하죠?”
양소현이 불안한 눈빛으로 물었다.
“좀 무리를 해야겠군요!”
얼굴을 굳힌 해륜이 소매에서 세 장의 부적을 꺼냈다.
“환영부(幻影符)! 분신환영(分身幻影)!”
해륜이 부적을 허공에 던진 후 크게 진언을 외우자, 세 장의 부적에 불이 붙더니 갑자기 사라지면서 흐물흐물한 형상이 나타났다.
“저, 저게 뭐죠!”
눈앞에 나타난 형상에 놀란 양소현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곳에는 바로 자신과 해륜의 모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출(出)!”
다시 한 번 해륜이 진언을 외치자 두 개의 환영이 스스로 움직여 지강현 안쪽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엇! 도사가 도망간다! 잡아라!”
환영을 발견한 관병들이 그 뒤를 쫓아 우르르 몰려가자 현을 빠져나가는 길목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
“소저, 서두르시오. 저 환영은 반 각도 못 버팁니다.”
해륜은 멍하니 서 있는 양소현을 재촉해 환영이 사라진 반대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헉헉, 이제 더 이상 못 가겠어요.”
지강현의 경계를 벗어나 반 각쯤 달리자 양소현이 숨을 헐떡이며 몸을 휘청였다.
무공도 익히지 않은 여인의 몸으로 객잔에서부터 무려 이각 가까이 전속력으로 달려온 터라 이제는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해륜은 걸음을 멈추었다.
“휴, 그럼 잠시 쉬어 가도록 하지요.”
지강현을 벗어난 상태이긴 했지만, 자신들이 쫓던 것이 환영임을 확인한 놈들이 다시 추격을 해 올 염려도 있었기에 아직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이젠 어디로 가야 하죠?”
양소현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물었다.
지강현으로는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일단 의창으로 가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아무리 요마 놈들이라 해도 무벌이 있는 의창까지는 손을 뻗치지 못할 것입니다.”
어차피 관병들이야 자신들의 관할이 아니니 더 이상 두 사람을 쫓지 못할 것이다.
물론, 죄목을 붙여 의창의 관청에 협조를 요청할 수도 있을 테지만, 그렇게 되면 가짜 지현인 곽진의 정체가 드러나게 될 확률이 높기에 그리는 못할 것이 분명했다.
잠시 숨을 돌린 두 사람은 의창을 향해 다시 걸음을 옮겼다.
5장 삼괴(三怪) (1)
의창에 위치한 진씨세가 장원의 정문에 오십 대로 보이는 세 명의 노인이 나타났다.
세 명 다 젓가락처럼 비쩍 마르고 키가 큰 자들이었는데, 그 기세가 날카롭고 범상치 않았다.
세 노인이 다가서자 장원의 대문을 지키던 위사들이 재빨리 달려 나와 허리를 굽혔는데, 바로 이들이 진가 최고의 고수들인 삼괴였다.
“어르신들, 먼 길 오시느라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어느새 달려온 진원도가 고개를 숙여 세 노인에게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현재 진가의 가주인 그도 삼괴를 무시할 수 없었다.
“노고는 개뿔. 겨우 삼 일 거리 가지고.”
가장 왼쪽에 있던 매부리코의 노인, 진회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클클클, 성질머리하곤. 가주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가운데 위치한 애꾸눈 노인, 진구가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며 진회를 타박했다.
“소란들 떨지 말고 일단 안으로 들어가지.”
오른쪽 뺨에 긴 검상이 있는 세 번째 노인, 진가성이 성큼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모두 그 뒤를 따랐다.
“대치 놈은 왜 안 보이는가?”
가주 집무실에 도착한 진가성이 못마땅한 얼굴로 물었다.
“아, 아들놈은 지금 근무 중이라 안타깝게도 어르신들을 마중하지 못했습니다.”
무벌의 집법대에 소속된 진대치였기에 낮 시간에는 무황성에서 근무를 했다.
“크크큭. 그래, 열심히 해야지. 그래도 녀석에게 우리 가문의 미래가 달려 있지 않나.”
쇠를 긁는 듯한 진구의 웃음소리가 사람들의 귀를 자극했다.
“한데 어떤 잡놈이 감히 진가를 노린 게야!”
진회가 눈썹을 치켜올린 채 물었다.
“그게…… 아직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에잉, 이제껏 뭘 한 게야! 쯧쯧!”
진회의 타박에 진원도가 말을 잇지 못했다.
“혹시, 그 뒤로 다른 움직임이 있었나?”
“아직은 잠잠합니다.”
“그럼 놈이 단독으로 행한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이제 겨우 엿새가 지났을 뿐입니다. 확신하기에는 이릅니다.”
“흐음…….”
진가성이 생각에 잠겼다.
“클클클, 어차피 예까지 왔으니 일단은 당분간 가주의 의견에 따르는 것이 좋겠지.”
“흥, 지미럴. 난 술상이나 잘 받아다 주거라. 놈이 나타나면 밥값은 할 테니.”
“이를 말씀입니까. 당연히 최고의 술과 안주들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계집들도 언제든 말씀만 하십시오.”
마지막에 속삭이듯 건넨 진원도의 말에 진회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하하하하! 역시 가주밖에 없구만! 내 이 맛에 가주를 좋아하지! 암!”
경박한 진회의 행동에 진가성이 눈살을 찌푸렸다.
“셋째 말마따나 어차피 여기까지 온 거, 밥값은 해야겠지. 숙소나 안내하게.”
진원도는 얼른 무사들을 시켜 세 사람을 숙소로 안내했다.
“휴, 당분간 골치 좀 아프겠군. 그래도 이게 다 대치 그놈을 위한 것이니 참아야지…….”
진원도가 한숨을 내쉬고는 삼괴를 상대하느라 피곤해진 몸을 의자에 기댔다.
* * *
두 개의 무공은 초씨세가에서 배운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뛰어난 상승 공부였다.
지금은 많이 쇠퇴했다 하나 그래도 무벌을 다스리는 무벌십주에 속한 곳이 바로 담씨세가.
그만큼 뛰어난 무공을 가지고 있음은 당연했다.
담천이 고른 두 개의 무공이 모두 담가의 것이 아닌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사실, 되도록이면 머리와 육신에 이미 익숙해져 있는 담가의 무공을 익히는 것이 유리했으나, 자칫 초식을 알아보는 자가 있다면 정체가 들통 날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주로 검을 사용해야 하는 담천이기에 검법만큼은 담씨세가의 것을 일부러 피한 것이었다.
다행히도 풍운십이검은 생전에 담천이 관심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익힌 검공이었다.
무공을 수련한 지 닷새 정도가 지나자 원래의 몸이 익숙해져 있던 탓인지 어느 정도 초식을 흉내 낼 수 있게 되었다.
하기야 죽은 담천은 무공에 모든 것을 쏟아부은 인물이 아니던가.
그런 그가 특히 심혈을 기울였던 풍운십이검에 얼마나 정성을 쏟았을지는 보지 않고도 짐작할 수 있었다.
“휴, 오늘은 진가의 장원을 살펴봐야겠군.”
연공을 끝내고 숨을 고른 담천이 눈을 빛냈다.
장원의 경계 상황이나 진대치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결국 한 번쯤 직접 들어가 보는 수밖에 없었다.
암혼기를 사용하면 들키지 않고 정보를 얻어내는 정도는 충분할 것이다.
밤이 되어 사위가 어둠에 잠기자 담천은 움직였다.
담천은 지난번처럼 암혼기를 마구 끌어 올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야 쓸데없이 암혼기를 쓸 수 있는 시간만 낭비하는 셈이었다.
아무래도 오랜 시간 암혼기를 사용할수록 원령들에게 잠식되는 꼴밖에 되지 않으니, 되도록 시간을 줄이는 것이 좋았다.
광동진가의 장원에 도착한 담천은 우선 준비해둔 복면을 꺼내 착용했다.
혹시라도 놈들에게 들킬 경우 신분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담천은 머릿속으로 저번에 보아 두었던 장원의 구조와 진대치가 머물던 곳의 위치를 떠올렸다.
이어 어둠에 동화된 담천의 몸이 마치 유령처럼 장원의 담장을 넘었다.
담벼락 밑에 몸을 숨긴 담천이 사방을 살폈다.
경비 무사들이 촘촘히 순찰을 돌고 있었고, 곳곳에 매복한 무사들의 기운이 느껴졌다.
지난번 사건으로 인해 한층 경계가 강화된 듯했다.
‘생각보다 쉽지 않겠군.’
어차피 오늘은 정탐이 목적이었기에 담천 역시 무리할 생각은 없었다.
‘어디, 놈이 있는 곳으로 가 볼까.’
담천의 신형이 스르륵 사라졌다.
매복해 있는 무사들은 아무래도 경비들에 비해 수준이 높았기에 담천은 되도록 그들과 멀리 떨어져 움직이는 길을 택했다.
담장의 좌측 모서리로 움직인 담천이 경비 무사들이 지나간 틈을 노려 재빨리 건물 지붕으로 올라섰다.
스르륵!
“응?”
그 순간, 앞서 가던 경비 무사가 이상함을 느낀 듯 고개를 뒤로 돌렸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고개를 한 번 갸웃거린 후 다시 걸음을 옮겼다.
‘경비 무사들도 그때와 수준이 다르구나!’
담천은 더욱 경각심을 끌어 올렸다.
잠시 한숨을 돌린 담천이 지붕을 타고 조심스럽게 진대치의 처소를 향했다.
다행히도 지붕 위에는 따로 무사들을 배치하지는 않아 움직이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이윽고 진대치의 방이 내려다보이는 위치까지 도착한 담천은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진대치의 거처에는 두 명씩 네 개 조의 경비 무사가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게다가 방 주변에도 네 명의 고수가 매복해 있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담천이 앞으로 움직였을 때였다.
“쥐새끼가 숨어들었구나!”
콰아아앙!
담천이 숨어 있던 건물의 지붕이 터져 나가며 한 명의 노인이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
“이런!”
들켰음을 깨달은 담천이 재빨리 뒤로 몸을 날렸다.
암혼기를 두른 자신의 기척을 눈치챘다는 것은 곧 상대가 짐작하기 힘들 정도의 고수라는 이야기였다.
어차피 오늘은 무리할 필요가 없었기에 담천은 그 즉시 도주를 택했다.
“어딜 도망가느냐! 크크크!”
“이런 시러배 잡놈!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하지만 뒤쪽에서도 두 명의 노인이 나타나 담천의 퇴로를 봉쇄해 버렸다.
‘이자들은 누구지!’
갑작스러운 고수들의 등장에 담천은 고민에 빠졌다.
시간을 끌면 진가의 무사들이 몰려올 것이니만큼 재빨리 이자들을 돌파해 도망쳐야 했다.
어차피 속도로는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 담천이었기에 이들만 돌파하면 탈출하는 데 어려움이 없으리라 생각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