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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마록 1권 23화


6장 해륜(3)


이내 눈에서 번쩍하고 섬광이 일더니, 담천의 몸을 둘러싼 기운들이 모두 사라졌다.
곁에서 지켜보던 몇 명 남지 않은 관병이 혼비백산하여 무기를 놓고 멀리 달아났다.
두 번째 권속의 힘을 흡수하고 나니 몸이 훨씬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암혼기를 운용하지 않고 있음에도 온몸에서 활력이 느껴졌다.
‘진즉에 이런 식으로 기습을 하는 건데.’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절실히 느껴졌다.
한 줌도 안 되는 힘에 취해 멋대로 날뛰었던 것이 부끄럽고 가소로웠다.
어쨌든 모두 지난 일.
이제 다시는 그런 어리석은 행동들은 결코 없을 것이라 다짐하는 담천이었다.
“적이 나타났다!”
“저쪽이다!”
멀리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도망간 관병들이 담천의 정체를 알린 것이리라.
일단, 담천은 다른 놈들이 몰려오기 전에 서둘러 몸을 피했다.
이번에야 기습의 이점을 살려 황구가 본신의 힘을 사용하기도 전에 쉽게 제거했지만, 소란을 듣고 권속들이 모두 몰려든다면 담천으로서도 감당할 수 없었다.
건물 지붕을 타고 다른 곳으로 움직이려는 순간, 한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앗! 도사 놈이다! 잡아라!”
콰앙!
담천의 눈썹이 꿈틀했다.
간간이 들려오는 목소리는 분명 해륜의 것.
아무래도 멀리서 자신의 뒤를 따라온 듯했다.
천천히 다가가 살피니 해륜은 두 명의 권속과 스무 명의 관병에게 둘러싸여 공격을 당하고 있었다.
해륜이 부적들을 날리며 분전하고 있었으나 수적으로 너무 역부족이었다.
결국 손발이 어지러워진 해륜이 위기에 몰렸다.
“생포해라! 지현께서 반드시 놈을 살려서 데려오라 명하셨다!”
관병들이 해륜을 제압했다.
“놈! 네놈이 도경을 죽였겠다!”
권속 중 하나가 붉은 기운을 잔뜩 끌어 올린 채 소리쳤다.
아마도 도경을 죽인 것이 해륜이라 여기는 모양이었다.
“흥! 주공께서 목숨만 살려 두면 된다 하셨으니 네놈의 팔다리를 잘라 도경의 복수를 해 주마!”
또 다른 권속이 살기를 피워 내며 거치도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한편, 담천은 갈등에 빠져 있었다.
처음엔 그냥 모른 척하려 했다.
해륜이라는 방해 요소가 사라지는 것이니 오히려 잘되었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곧 열흘 전 일이 떠올라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날 해륜은 위기에 빠진 담천을 도와주었다.
만일 담천이 불사의 육신이 아니었다면 목숨을 구함받은 것과 같다.
아무리 감정이 메말라 버린 담천이라지만 자신에게 도움을 준 이를 모른 체할 수는 없었다.
‘정체를 의심받을 수도 있는데…….’
암혼기를 사용하는 것과 놈들의 힘을 흡수하는 것을 본다면 분명 자신을 의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은혜를 모르면서 어찌 복수를 논한단 말인가!’
담천이 이를 악문 채 몸을 날렸다.
이미 온몸은 검은 기운에 둘러싸인 채였다.
번쩍!
천령검이 섬광을 뿜어내는 것과 동시에 해륜의 목에 창날을 들이밀고 있던 두 관병의 목이 날아갔다.
상황이 급박한지라 담천도 사정을 봐줄 여유가 없었다.
놀란 관병들과 두 권속이 미처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담천의 신형이 왼쪽에 있던 거치도를 든 권속 앞에 나타났다.
담천이 놈을 선택한 이유는 녀석이 아직 붉은 기운을 일으키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쉬아아악!
천령검이 대기를 횡으로 가르며 파공성을 토해 냈다.
스걱!
놈이 재빨리 뒤로 몸을 날려 피했으나 배가 길게 갈라지는 상처를 입은 후였다.
“크악!”
“이놈! 감히!”
놈이 배를 잡고 주저앉는 순간, 나머지 한 놈이 권격을 날렸다.
쩌어엉!
담천이 검을 돌려 급히 놈의 주먹을 쳐 낸 후 뒤로 물러섰다.
역시 붉은 기운을 끌어 올린 녀석은 상대하기 만만치 않았다.
“공자!”
복면을 썼음에도 해륜이 단숨에 알아보자 담천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마도 복장 때문이리라.
아침에 만났기에 금세 알아차린 것이다.
‘이럴 때는 암혼기가 좀 더 짙었으면 좋으련만!’
나중에 설명할 것을 생각하면 무척 귀찮은 상황이었다.
그나마 자신의 성을 부르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놈들이 바보가 아니라면 나중에 담씨세가와 연결시킬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한패가 있었구나!”
짝귀라 불리는 권속이 붉은 기운을 온몸에 두른 채 이글거리는 눈으로 담천을 노려보았다.
“관병들은 물러서시오! 놈들은 요마요! 지금 저 모습을 보고도 모르겠소?”
호통 소리에 담천이 고개를 돌려보니 몸이 자유로워진 해륜이 관병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해륜의 실력이라면 스무 명의 관병을 처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죄 없는 이들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관병들이 갈등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보기에도 붉은 기운을 두른 자신들의 상관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인간의 두 배가 넘는 체격과 뾰족한 이빨, 툭 튀어나온 광대뼈.
게다가 요즘 그들이 벌이는 일은 관병들 사이에서도 말이 많았다.
어쩔 수 없이 명에 따르고는 있었으나, 결국 자신의 이웃들을 잡아넣는 일이 아닌가.
“흥! 어차피 모조리 죽여 버리면 될 일!”
짝귀가 붉은 기운을 촉수처럼 움직여 관병들을 덮쳤다.
“크아악!”
“아악!”
순식간에 여섯 명의 관병이 붉은 기운에 몸이 뚫리거나 목이 부러져 목숨을 잃었고, 그에 놀란 나머지 관병들은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달아났다.
“후후, 이제 우리만 남았구나!”
짝귀가 잔혹한 미소를 입에 문 채 기세를 끌어 올렸다.
동시에 한쪽에 주저앉아 있던 나머지 한 녀석도 붉은 기운을 뿜어내며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시간을 너무 끌었군…….’
담천의 표정이 굳어졌다.
온전한 힘을 사용하는 두 명의 권속을 상대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거기다 담천에게는 시간도 없었다.
다른 놈들이 언제 몰려올지 모르는 것이다.
담천은 일단 황구의 힘을 흡수하며 늘어난 암혼기를 믿어 보기로 했다.
거기다 그동안 수련한 무공들을 적절히 사용한다면 승산이 늘어날 것이다.
짝귀의 커다란 주먹이 담천의 얼굴에 처박히는가 싶은 순간, 담천의 신형이 갑자기 휘청이듯 움직였다.
비설형이 발휘된 것이다.
술에 취한 듯 흐느적거리는 듯한 움직임은 마치 개방의 취팔선보를 보는 듯했다.
종이 한 장 차이로 짝귀의 주먹이 허공을 때리자 담천이 놈의 빈 옆구리로 천령검을 찔러 들어갔다.
“큭!”
짝귀가 위험을 느끼고 다급히 몸을 피했으나 옆구리에 제법 깊은 상처가 났다.
“놈! 보통 검이 아니구나!”
강기도 두르지 않은 검이 자신의 몸에 상처를 냈다는 것은 예사롭지 않은 물건이란 이야기였다.
짝귀의 반응을 무시한 채 담천은 그대로 몸을 회전시키며 놈의 목을 노렸다.
천운십이검 제삼초식, 회선탄류(回線?流)였다.
쉬아악!
“허억!”
깜짝 놀란 짝귀가 헛바람을 들이켰다.
도무지 피할 수 있는 여지가 보이지 않은 것이다.
그때, 주저앉아 있던 나머지 권속이 담천의 뒤통수를 노리며 도를 쳐 냈다.
배가 갈라져 내장이 삐져나오려는 상태에서도 전혀 개의치 않는 움직임이었다.
아마도 몸을 두른 붉은 기운 때문이리라.
‘젠장!’
담천이 속으로 욕지기를 토해 냈다.
이대로 검을 휘두르면 짝귀의 목을 칠 수 있겠지만, 동시에 담천의 육신은 반 토막이 날 것이다.
쩌엉!
어쩔 수 없이 검을 돌려 뒤쪽 공격을 막아 낸 담천이 옆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서 숨을 골랐다.
최소한 한 놈은 처리했어야 했는데, 결국 둘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휘이익!
“제마멸사(制魔滅邪)!”
그때, 담천의 뒤쪽에서 고함 소리와 함께 두 장의 부적이 날아왔다.
해륜이 제마부를 날린 것이다.
처척!
“우웃!”
두 개의 부적이 짝귀와 나머지 권속에게 달라붙자 순간적으로 놈들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권속들을 제압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그들의 행동에 제약을 줄 정도는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담천에게는 황금 같은 기회였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담천이 천령검을 날렸다.
번쩍!
공간이 세로로 갈라지며 다시 한 번 일섬단일이 펼쳐졌다.
“커어억!”
배가 갈라지는 상처를 입고도 담천에게 도를 날리던 권속의 머리가 반으로 갈라진 채 뇌수를 뿌리며 뒤로 넘어갔다.
“이노옴!”
분노한 짝귀가 담천이 아닌 해륜에게 달려들었다.
해륜을 진즉에 죽이지 못해 지금과 같은 상황이 일어난 것이라 여긴 것이다.
해륜이 급히 부적들을 날렸다.
세 장의 부적이 흩어지며 순식간에 불의 벽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짝귀는 불의 벽을 무시한 채 해륜에게 달려들었다.
몸에 불이 붙은 채 해륜에게 달려드는 짝귀의 모습은 그야말로 악귀의 그것이었다.
콰아앙!
짝귀의 주먹이 작렬하자 해륜이 뒤로 튕겨져 날아갔다.
재빨리 방어부(防禦符)를 사용해 막았으나 그 반탄력이 워낙 강했기 때문이다.
벽에 부딪친 후 바닥에 쓰러진 해륜을 향해 짝귀가 달려들었다.
쉬이익!
하지만 비설형을 펼친 담천이 이미 놈의 등을 향해 천령검을 찌르고 있었다.
“이익!”
할 수 없이 짝귀가 몸을 옆으로 돌리는 순간, 담천의 두 다리가 기괴하게 꺾이더니 마치 짝귀의 움직임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푸욱!
오히려 먼저 앞을 막아선 담천이 검을 뻗어 내자 짝귀는 피할 방법이 없었다.
어깨를 틀어 심장에 검이 꽂히는 것을 간신히 모면한 짝귀가 그대로 담천을 밀어붙였다.
순간, 담천의 두 다리가 다시 묘하게 움직였다.
비설형의 절초 중 하나인 풍중설비(風中雪飛)가 발휘된 것이다.
이 초식은 마치 바람에 눈송이가 흩날리듯 상대의 힘을 이용해 몸을 움직이는 보법이었다.
마치 유령처럼 짝귀의 우측으로 돌아간 담천이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자 짝귀의 오른팔이 어깨째 떨어져 나갔다.
“크아악!”
피를 뿌리며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두르는 짝귀를 향해 담천이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번쩍!
목이 잘린 짝귀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끄응!”
그제야 쓰러졌던 해륜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후우우욱!
그때, 짝귀의 시신으로부터 붉은 기운이 빠져나와 담천에게 몰려들었다.
‘아차! 암혼기를 미처 풀지 못했구나!’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붉은 기운들이 곧바로 담천의 온몸을 들쑤셨다.
하는 수 없이 담천은 암혼기를 움직여 붉은 기운을 흡수했다.
“다, 당신은 대체!”
해륜이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담천을 바라보았다.
요마의 정기를 흡수하다니.
그렇다면 담천도 역시 요마란 말인가!
“그동안 나를 속인 것이오?”
해륜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으로 부적들을 꺼내 들고는 담천을 노려봤다.
이런 상황이 벌어질 것을 염려해 해륜을 구하는 것을 망설였던 담천이다.
하지만 결국 해륜을 구하는 것을 선택했고, 예상했던 대로 해륜은 담천의 정체를 의심했다.
씁쓸히 입맛을 다신 담천이 해륜을 담담히 바라보았다.
“당신이 요마라면 난 당신을 없애야 합니다!”
해륜이 차가운 얼굴로 담천에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