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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마록 1권 24화
6장 해륜(4)
“내가 만일 요마였다면 위기에 빠진 도사를 구했을 리가 없겠지. 게다가 나는 오히려 요마를 셋이나 죽였다는 것을 잊었소?”
해륜이 망설였다.
담천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만일 담천이 요마였다면 자신을 살리기 위해 일부러 다른 요마를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해륜에게 접근하거나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는 수작이라 할 수도 없는 것이, 담천은 애초에 해륜을 멀리하려 했고 오히려 해륜이 거의 억지를 부리다시피 해 담천의 주변에 머물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더군다나 만일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 했다면, 해륜을 돕지 않고 죽도록 내버려 두는 편이 훨씬 담천에게 유리했다.
“게다가 저번에 보니 그 부적이 나한테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 같았소만.”
해륜은 고민에 빠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담천은 요마라고 하기엔 너무 안 맞는 면이 많았다.
“도, 도대체 그렇다면 담 공자의 진정한 정체가 뭐요? 그 이상한 검은 기운하며, 그리고 요마의 정기를 흡수하다니…….”
조금은 경계심이 풀린 목소리로 해륜이 물었다.
“그것은 사정상 밝힐 수 없소. 내가 그대의 진정한 정체를 묻는다면 말해 주겠소?”
천혜린의 반응이나 그동안 보아 온 해륜의 능력들을 볼 때 결코 평범한 전진교의 도사가 아님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도 진정한 신분을 숨기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 그것은…….”
해륜이 미처 대답을 못하자 담천이 피식 웃고는 돌아서 두 번째 권속의 시신으로 향했다.
어차피 들킨 거 아까운 기운을 남기고 갈 수는 없던 것이다.
담천이 또 다른 권속의 시체에서 붉은 기운을 흡수하는 모습을 보며 해륜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나서서 담천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이미 마음속으로는 담천이 요마가 아님을 인정한 것이다.
어쨌든 전에는 양소현의 목숨을 구하고 이번엔 자신의 목숨까지 구하지 않았던가.
요마가 사람들을 구하며 돌아다닌다는 말은 어디에서도 듣지 못했다.
“어쨌든 이것으로 전에 신세 진 것은 갚았으니 이제 우리 사이에 빚은 더 이상 없는 거요. 그리고 따질 일이 있으면 우선 이곳을 벗어난 후에 해결합시다.”
담천의 말에 그제야 해륜은 지금 이곳은 적진의 한복판임을 떠올렸다.
이미 많은 시간을 지체한 상태였다.
나머지 권속들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었다 하더라도 지금쯤은 연락이 갔을 것이다.
놈들이 오기 전에 빨리 빠져나가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놈들이 연락용 폭죽이나 신호탄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안 그랬으면 이곳은 벌써 관병과 권속들에게 포위되어 있을 터였다.
어쩔 수 없이 해륜은 일단 의구심을 접고 담천과 함께 지강현을 빠져나왔다.
* * *
서문세가의 별원.
세가의 꽃 서문유향이 머물고 있는 곳.
그곳으로 한 명의 준수한 청년과 마치 한 자루 검을 보는 듯 느껴지는 백발노인 하나가 함께 들어섰다.
함부로 출입할 수 없는 이곳에 아무런 제지도 없이 올 수 있는 것을 보면 두 사람의 신분이 범상치 않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을 안내해 온 시녀가 잠시 그들의 걸음을 멈춰 세운 후 먼저 서문유향의 방문 앞으로 다가갔다.
“아가씨, 남궁 공자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랬다.
청년은 현 남궁세가의 소가주이자 후기지수들 중 단연 최고의 기재라 일컬어지는 옥면신룡(玉面新龍) 남궁영재였던 것이다.
또한, 그 옆에 자리 잡은 노인은 항상 남궁영재를 밀착 호위하는 남궁가의 고수, 경천신검(驚天神劍) 남궁태였다.
방문이 열리며 서문유향이 밖으로 나와 고개를 숙여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귀한 분이 오셨는데 미처 마중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 순간, 남궁영재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극히 공손한 태도와 말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감정은 느껴지지 않은 탓이었다.
“아닙니다. 미리 연락을 드리지 않고 찾아온 제가 잘못이지요. 요즘 두문불출하신다는 소식에 걱정이 되어 이리 실례를 무릅쓰고 왔으니 소저께서 너그러이 이해해 주십시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보시다시피 그저 잠시 게으름을 피운 것뿐입니다. 소녀로 인해 괜한 발걸음을 하신 듯하니 참으로 죄송할 따름입니다.”
남궁태가 난감한 표정으로 잠시 헛기침을 했다.
걱정이 되어 일부러 찾아온 귀한 손님일진대, 서문유향은 차 한 잔 내놓지 않고 밖에다 세워 둔 채 상대하고 있었다.
사실상 축객령에 가까운 태도였다.
자신이 모시는 이가 홀대를 받는데 당연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이해라니요. 이렇게 소저의 건강한 얼굴을 본 것만으로 저는 충분합니다. 소저께서 기운을 차린 것을 확인했으니 저는 안심하고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남궁영재가 작별 인사를 했다.
“멀리 못 나가 죄송합니다. 그럼 살펴 가십시오.”
붙잡지도 않고 단숨에 돌아서는 서문유향을 보며 남궁태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만 세가로 돌아가지요.”
착잡한 표정으로 남궁영재가 별원을 나섰다.
“아무리 서문가의 여식이라지만 감히 소공자님께 어찌 저럴 수가 있습니까!”
분을 삭이지 못한 남궁태가 기어이 목소리를 높였다.
“어차피 결국엔 제 여인이 될 사람입니다. 아직은 충격이 가시지 않은 상태일 것입니다. 하니 너무 책하지 마십시오.”
남궁영재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휴, 정말 소공자의 속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그려.”
남궁태가 한숨을 내쉬며 남궁영재의 뒤를 따랐다.
한편, 방으로 돌아온 서문유향은 남궁영재가 사라진 방향을 노려보고 있었다.
초유벽이 죽기 전에도 그녀에게 끊임없이 관심을 표시하던 남궁영재였다.
물론, 그녀는 남궁영재의 호의를 거절했다.
그가 노리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 서문광천의 후계자 자리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서문광천이 남궁영재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천하제일인이자 현 무림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이끌고 있는 서문광천의 눈에 초유벽이 들어올 리가 없었다.
아버지 서문광천은 심하진 않았으나 초유벽과 서문유향이 만나는 것을 은연중에 반대했다.
오히려 기회만 있으면 남궁영재를 불러들여 서문유향과 자리를 만들려 애썼던 것이다.
서문유향은 그래서 남궁영재가 더욱 싫었다.
사실, 알고 보면 남궁영재야말로 단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사내였다.
무벌의 후계자 자리를 노리는 것도 사실 그의 위치에 있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가 특별히 노리지 않는다 해도 많은 이들이 이미 남궁영재가 무벌의 다음 대 벌주가 될 것이라 이야기하고 있었다.
물론, 서문가의 장남인 서문제혁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했지만, 서문제혁이 이미 서른을 넘어선 나이임을 감안하면 시간이 흐를수록 남궁영재의 우위가 분명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 인간 같지 않은 완벽함이야말로 서문유향이 가장 싫어하는 이유였다.
남궁영재에게선 사람 냄새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서문유향은 실수도 하고, 잘못도 저지르고, 용서하고, 이해하는 감정의 교류야말로 사람이 사람다워지는 가장 큰 요소라 여겼다.
하지만 남궁영재는 너무도 완벽했고, 그가 실수하거나 잘못을 저지르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유벽…….’
서문유향의 두 뺨 위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신의 마음을 유일하게 차지하고 있는 그야말로 가장 인간다운 이였다.
* * *
“이런 젠장!”
곽진이 그답지 않게 흥분한 상태로 물건들을 집어 던졌다.
쨍끄랑!
퍼억!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무려 네 명의 권속이 죽었다.
게다가 도사 하나가 아니라 또 다른 놈이 있다니.
대법을 펼치려면 아직 나흘이나 기다려야 하는데 갈수록 일이 꼬이고 있었다.
“새로 나타난 복면인은 그야말로 괴물이었다 합니다. 온몸에 검은 기운을 두르고 붉은 검을 휘두르는 자인데, 그 실력이 놀라울 정도로 뛰어났다 합니다. 게다가 놈의 검은 죽은 황구와 짝귀의 몸에 쉽게 상처를 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곽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권속들의 몸에 쉽게 상처를 낼 수 있다면 둘 중 하나였다.
최소 초절정 끄트머리에 다다른 고수이든지, 아니면 특수한 기운이 깃든 검이나 그 자신이 특수한 기운을 사용하든지.
놈의 몸을 검은 기운이 둘러싸고 있다는 것으로 보아 후자일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그 검은 기운의 정체는 무엇일까?’
기운에 대해 알게 되면 놈의 정체를 알아내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검은 기운이 그다지 희귀한 편은 아니었다.
마기나 사기도 대부분 검은색을 띤다.
마귀들 중에서도 검은 기운을 사용하는 놈들이 많았다.
그렇기에 더욱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혹시, 다른 마귀들이 나를 노리는 것은 아니겠지!’
강한 마귀가 약한 마귀를 잡아먹는 일은 그들에겐 늘 있는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끼리도 되도록 정체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최대한 은밀하고 조용히 움직이는 것이다.
‘아니야, 그렇다면 도사와 손을 잡았을 리가 없지.’
곽진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어쨌든 나흘 후 펼쳐질 대법 때까지 놈들을 막아 내야 했다.
곽진은 잠시 권속들을 노려보았다.
생각 같아서는 모조리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지금은 일손이 부족했다.
“일단 제물들은 그만 잡아들이고 너희는 놈들의 습격에 대비해라. 그리고 동요하는 관병들은 모두 죽여 다른 놈들이 괜한 마음을 품지 않도록 해라!”
살기를 가라앉힌 곽진이 수하들에게 명령했다.
이젠 겨우 세 명만 남은 권속들이었다.
‘아무래도 인원이 부족해…….’
인상을 찌푸린 곽진이 결심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옥사에 가서 죄수들 중에 덩치가 크고 싸움을 잘하는 놈들로 두 놈만 추려 오거라!”
권속들을 더 만들려는 것이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열 명이고 백 명이고 최대한 많이 만들고 싶었으나, 권속을 만들어 내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권속을 만들기 위해선 자신의 피를 써야 했고, 그 양이 상당히 많이 필요했다.
거기다 권속을 만들고 나면 한동안 칠 할에서 팔 할의 힘밖에 발휘하지 못한다.
사실, 두 명도 상당한 무리를 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대법을 위해 진을 완성하는 동안 현청을 지킬 존재가 반드시 필요했다.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는 곽진은 대법에만 전념해야 했기에 도사와 복면인을 막아 줄 권속들이 필요한 것이다.
적괴를 비롯한 권속들은 명을 이행하기 위해 서둘러 대전을 나섰다.
* * *
의창 입구에 도착한 해륜이 걸음을 멈추고 담천을 막아섰다.
“이제 놈들을 떨쳐 냈으니 확실히 말해 보시오! 당신은 인간이오, 요괴요!”
담천이 조소를 지었다.
“질문이 잘못되었군.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냐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할 것이냐가 아니오? 만일, 내가 인간이라 해도 잔혹한 살인마일 수도 있고, 내가 인간이 아니라 해도 선한 존재일 수도 있지 않겠소? 세상에는 요마만도 못한 인간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는데 그대는 내가 인간이라는 것만으로 믿을 수 있겠소?”
담천의 서늘한 눈빛에 해륜이 움찔했다.
“그, 그건…….”
해륜이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자 담천이 코웃음을 쳤다.
“좋아, 그대의 의문을 조금만 풀어 주기로 하지. 일단, 나는 마귀들과 그 권속들을 잡아야 할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고 말해 두겠소. 도사이니 그대도 마귀들을 잡는 것을 뭐라 하진 않겠지?”
해륜의 눈빛이 흔들렸다.
마귀를 잡는 것은 결코 탓할 일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