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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검존 1권 9화
제4장 만독단(萬毒團)(3)
“당금 무림은 겉으로 보기는 평화로우나 속은 이미 썩을 대로 썩었다. 진천검존이 천하를 통일한 것이 벌써 팔십 년 전, 가까이 할 수 없는 정도와 사도를 진천의 이름 아래 하나로 묶는 데는 성공했지만 진천검존의 사후까지는 보장할 수 없다.”
남궁진혁이 태어나기 전, 남궁현은 평소 친분이 두터운 천기신인과 무림의 정세에 대해 논의했다. 하늘의 흐름을 읽는 천기신인은 진천검존의 죽음이 멀지 않았음을 예견했고, 그에 따른 파장을 걱정했다.
“혈풍이 불겠어. 잠들었던 사도가 깨어나고 은거한 기인들이 야망을 갖고 몰려들 거야. 진천검존에게 굴복하기 싫어 산야로 숨었던 수많은 무림인들이 나타나겠지. 하나로 합쳐진 정사는 금세 분열되어 피 튀기는 싸움을 반복할 것이고.”
“무서운 얘기로군. 그러나 신빙성이 있는 얘기야. 수많은 마두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자취를 감췄으니까. 그러나 진천문이 있지 않은가. 진천검존이 죽는다 하여도 진천문이 그 뜻을 이어받아 무림을…… 아니, 불가능하겠군. 진천문이 무림의 지배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건 진천검존 한 사람의 힘이었지.”
“그렇지. 진천검존이 사라진다면 진천문은 더 이상 무림의 지배자로 남을 수 없게 될 거야. 진천문이 그간 쌓아온 무력은 천하제일이지만, 진천검존 없이 군림하기에는 부족하네. 게다가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라고, 이미 밑바닥부터 곪아가기 시작하는 진천문으로서는 더더욱……. 무림에 피바람이 불 걸세. 남궁세가는 스스로를 지킬 힘을 길러야 할 거야.”
남궁세가는 충분히 스스로를 지킬 힘이 있었다. 무림 사대세가 중 하나인 남궁세가가 스스로를 지키지 못한다고 누가 말하겠는가. 그러나 천기신인이 말한 뜻은 그게 아니었다. 난세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힘을 기르라고 말한 것이다.
남궁현은 그 길로 남궁세가로 돌아와 젊은 가주 남궁성화에게만 천기신인의 말을 전했다. 무림의 기인으로 소문 난 천기신인의 예상은 소름 끼치는 것이었다. 남궁성화는 세가의 내실을 다지는 한편 무공 수련에도 박차를 가했다. 과연 몇 해 지나지 않아 진천검존은 사망하였고 무림의 평화를 책임지던 진천문은…… 본래의 모습을 잃기 시작했다.
난세의 힘은 무력이다. 금력은 힘을 잃고, 권력은 흔들리지만 무력은 난세에서도 유용하다. 그걸 염두에 둔 남궁성화의 타고난 자질과 필사적인 노력이 합쳐져, 그는 서른이 되기 전에 천하십대고수에 자신의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지난 육십 년간, 남궁세가에 검을 들이댄 문파는 한 곳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는 건…… 난세의 조짐이라는 것이겠지요.”
남궁성화가 침중하게 말했다. 아마 다른 문파들도 서로 부딪치기 시작했을 것이다. 진천검존 금적풍이 죽은 지 벌써 십일 년이 흘렀다. 여태껏 평화를 유지한 것도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흉수도 실패했다는 걸 알게 되면 당분간은 경계를 염려하여 조용할 것이다. 그 사이에 너는 세가가 외침에서 견딜 수 있도록 방비를 철저히 해라.”
“알겠습니다.”
“진혁이에 대해서는 어쩔 셈이냐. 아무리 내공이 깊고 성취가 빨라도 어린아이에 불과한데 또다시 암습을 받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설령 남궁세가 안에서라도 위험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호위를 붙여 줄 생각입니다.”
남궁현은 좋은 생각이라고 대답했다.
설마 남궁진혁이 자살을 시도하고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남궁성화와 남궁현은 어긋난 추리를 하고 있었다.
제5장 사우비(1)
“뭐? 호위?”
“예! 도련님의 호위로 뽑힌 이대제자 사우비입니다!”
남궁진혁의 날카로운 시선이 사우비라 이름을 밝힌 청년의 전신을 위아래로 훑었다. 곰처럼 거대한 체구에, 순박하게 처진 눈매를 가진 푸근한 표정의 청년이었다.
‘애송이잖아!’
남궁진혁은 순식간에 결론을 내렸다. 검기 발현은 고사하고 신검합일의 언저리에도 미치지 못한 하수다.
피식. 남궁진혁의 한쪽 입 꼬리가 올라갔다.
“후후, 네가 내 호위라고? 하하하핫!”
“그렇습니다! 가주님께서 앞으로 도련님을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래, 호위. 호위라……. 하하하하!”
남궁진혁이 웃자 사우비가 분위기를 파악 못하고 따라 웃었다. 순간 폭소를 터뜨리던 남궁진혁이 번개처럼 날아올라 사우비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호위는 얼어 죽을 호위! 지금 장난하냐!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가 감히 내 호위를 서겠다고? 안 그래도 열 받아 죽겠는데, 너까지 내 성질을 긁어! 썩 꺼지지 못해?!”
크르릉!
짐승이 울부짖는 것처럼 격한 분노를 토했다. 죽지 못해 쌓인 울화가 애꿎은 사우비에게 향했다. 남궁진혁은 만독단을 삼킨 지 나흘이 지난 오늘까지도 열불이 터져서 식음을 전폐할 정도였으니 신경이 예민할 대로 예민했다.
“가라, 응? 좋은 말로 할 때 가.”
남궁진혁이 씹어 뱉듯이 말했다. 목소리가 크지 않았는데도 위압적이었다. 일곱 살 꼬마치고는. 사우비가 씩씩하게 거절했다.
“그건 안 됩니다. 가주님께서 도련님의 곁에서 절대 떨어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으득!
사우비의 멱살에 대롱대롱 매달린 남궁진혁의 눈에 시퍼런 불꽃이 일렁였다. 지금 네가 내 말을 무시한 거냐. 그런 거야? 이제는 너 같은 애송이도 나를 무시해?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였냐!
“됐으니까 꺼져! 신경 거슬리게 하지 말고 가란 말이다! 아버님께는 내가 직접 말씀드릴 테니까 죽기 싫으면 당장 사라져! 아니면 내가 네놈 목을 베어 주리?”
이번에는 효과가 조금 있었나 보다. 사우비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남궁진혁은 코웃음을 치며 사우비의 멱살을 놓고 뛰어내렸다.
‘죽을 방법 찾는 것도 바빠 죽겠는데, 엉뚱한 게 속을 긁고 난리야.’
남궁진혁은 씨근덕거리면서 다시 사우비가 나타나기 이전의 작업으로 돌아갔다. 그것은 바로 깔끔한 자살법의 구상이었다. 그러나 첫 번째 자살 방법을 떠올리기도 전에 사우비가 맥을 끊었다.
“도련님의 그림자가 되겠습니다!”
너무나 씩씩하게 외쳐서 한순간 잘못 들었나 싶었다. 이내 남궁진혁의 얼굴이 처절하게 일그러졌다.
“너 도대체 뭘 들은 거야! 필요 없다니까!”
남궁진혁이 아무리 미친 듯이 화를 내도 사우비는 떨어질 줄을 몰랐다. 욕을 하고 겁을 줘도 소용이 없으니 남궁진혁은 가슴만 쳤다. 마음 같아서는 늘씬하게 두들겨 패고 싶었는데 세가의 보는 눈이 많아서 그것만은 자중했다.
결국 남궁진혁이 가는 곳에는 언제나 사우비가 있었다. 그리고 남궁세가의 후계자는 힘겨운 동거 생활에 들어갔다.
첫 마찰은 생리적인 욕구 앞에서 벌어졌다.
“어딜 따라 들어와!”
“아이쿠, 왜 때리십니까! 저는 절대로 도련님과 떨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미친 자식아. 그렇다고 일 보는 데 따라 들어와?”
듣고 보니 화낼 만도 하다. 아무리 사우비라도 그 말은 납득했는지 머리를 벅벅 긁고 해우소 문에 기대서 주변을 경계하는 것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남궁진혁은 민망하고 답답하여 빨리 사우비를 떼어 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대로 데리고 있으면 내가 일을 볼 때마다 저 녀석이 ‘도련님, 지금 일 보는 중이오!’라고 광고할 것 아냐!”
그것만은 죽어도 싫었다.
두 번째 마찰도 생리적인 욕구 앞에서 벌어졌다.
본래 남궁진혁은 입이 짧다. 나이를 먹으면서 반찬 투정이 늘었다. 어린아이가 되니까 더욱 투정이 늘었다. 덕분에 식사 때마다 상다리가 휘어져라 음식이 차려졌다. 그런데 사우비가 오고 나서 식전에 한 가지 과정이 더 생겼다.
“잠깐! 도련님, 기다리십시오. 제가 먼저 독이 들었는지 확인하겠습니다!”
젓가락을 드는데 사우비가 황급히 만류했다.
“독은 얼어 죽을 독이냐. 나는 만독불침이라 독이 들어 있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아닙니다! 그래도 위험할 수 있으니 제가 먼저 확인하겠습니다! 다 도련님의 안전을 위해서니 잠시만 참으십시오!”
남궁진혁이 무시하고 젓가락을 뻗으려고 하자 사우비가 밥상을 통째로 당겼다. 그리고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재빨리 밥상 위의 음식들을 조금씩 주워 먹었다. 모든 음식을 다 맛본 사우비가 잠시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죽지 않았으니 독도 없습니다. 드시지요.”
밥맛이 떨어진 남궁진혁이 숟가락을 집어 던졌다. 사우비가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왜 도련님이 화가 났는지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사우비는 그날 밤, 식중독에 걸려 쓰러졌다. 엄청난 양의 땀을 쏟아 내며 배앓이를 하는 것을 보고 남궁진혁이 할 말을 잃었다.
‘……우연히 음식에 문제가 있었나?’
“아이고, 아이고! 도련님을 제가 구했습니다! 아이고!”
남궁진혁은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우비가 식중독에 걸렸으니, 당분간 병상에 눕지 않겠는가. 그런데 사우비는 다음 날 훌훌 털고 일어나서 그를 실망시켰다. 그런데 같은 음식을 먹은 다른 사람들은 다 멀쩡했다고 한다.
‘혼자 걸리는 식중독도 있나?’
남궁세가에서 우연히 꽃놀이를 나갈 기회가 생겼다. 남궁세가에서 말을 타고 한 시진만 달리면 유벽산이 나오는데, 봄과 여름의 절경이 아름답다고 소문난 곳이었다. 원래 세가의 여인들만 가기로 했는데 남궁진혁이 따라 가겠다고 우겼다.
“역시 좋구나. 경치가 제법이다. 속이 다 시원해.”
남궁진혁이 산의 정상에 올라서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그러나 사실 그는 경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바로 한 발만 삐끗해도 굴러 떨어지는 천 길 낭떠러지를 응시하고 있었다.
‘제대로다! 이번에는 정말 죽을 수 있을지도 몰라! 이렇게 높은 곳이라면 금강불괴라도 파괴되겠어!’
칼날처럼 깎아진 절벽이 살벌하다.
휘이잉!
절벽에 가까이 가니 스치는 바람이 귀곡성을 냈다. 남궁진혁은 슬그머니 미소를 지으며 곁에 선 사우비를 살폈다. 다행히 사우비도 절경에 취해 있었다.
‘좋다! 뛰자!’
남궁진혁이 심호흡을 하고 뛰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사우비가 정신을 차리고 기겁을 하더니 남궁진혁의 팔목을 잡았다.
“도, 도련님! 그쪽은 위험합니다!”
“이런 개자식!”
놔두란 말이다! 남궁진혁은 욕설을 내뱉으며 잡힌 손목을 빼려고 했다. 그 순간, 사우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눈앞에서 사라졌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남궁진혁은 잠시 사태를 파악하지 못했다.
“으아아아아악!”
사우비의 행방이 드러났다.
“떨어진 거냐!”
남궁진혁은 여전히 절벽 위에 있었는데, 사우비가 한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어이를 상실한 남궁진혁이 털썩 무릎을 꿇고 절벽 밑을 내려다보았다.
퍼억!
추락하던 몸뚱이가 다행히 절벽 중턱의 튀어나온 부분에 걸렸다.
“……죽었냐?”
꿈틀. 꿈틀.
안력을 돋우자 사우비가 죽지 않고 고통스럽게 몸을 뒤트는 게 보였다. 남궁진혁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안 죽었군.”
밀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다리를 헛디뎌서 떨어지다니, 무서울 정도로 둔한 반사 신경이었다. 사우비는 그날 밤 사경을 헤맸다. 남궁진혁은 호위무사의 불행에 대해 마음 아파하기보다는 자유를 되찾은 기쁨에 자축했다. 그러나 다음 날 사우비가 목발을 짚고 돌아온 것을 보고 시무룩해졌다.
처음에는 아니다 싶었다. 식중독에 걸린 것은 우연히 균이 있었기 때문이고, 절벽에서 떨어진 것도 실수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검은 속하가 보관하겠습니다! 너무 위험한 물건이니 제게 맡기십시오!”
어차피 금룡검에 애착이 없던 남궁진혁은 대수롭지 않게 검을 맡겼다. 그런데 다음 순간, 사우비가 검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 ‘역시 둔한 놈이다’라고 생각했고, 검이 공교롭게도 발가락에 떨어져서 새끼발가락이 부러지는 것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아이고! 아이고, 나 죽네!”
“……세상의 온갖 불운은 너한테 모이는 것 같다.”
멀쩡한 검을 떨어뜨려서 발가락을 부러뜨리는 일이 어디 흔하단 말인가. 남궁진혁은 탄식하며 사우비가 엄청나게 재수 없는 녀석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 내가 죽을 운마저 이 녀석이 가지고 가는 건지도 몰라!’
식중독도, 절벽에서 떨어진 것도, 하다못해 애꿎은 검에게 발가락이 부러지는 것도 모두 사우비가 불행의 별을 타고났다는 반증이다. 적어도 남궁진혁은 그렇게 믿었다.
‘저놈을 빨리 떼어 버려야겠어!’
구실이 없다. 남궁성화에게 따져 보았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다. 어찌 됐든 세가 안에서는 호위를 데리고 있으란다. 침상에 누운 남궁진혁은 지난 며칠 동안을 회상하며 뒤척거렸다. 그동안 차분히 죽을 방법을 구상할 시간도 없었다.
“이게 다 그놈 때문이야. 신경에 거슬려서 뭘 할 수가 있어야지.”
식사를 해도, 산책을 해도, 생각을 해도, 언제나 사우비가 알짱거리니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조용히 있으면 그나마 한결 나을 텐데 이건 숫제 사고만 치고 있었으니 엄청나게 거슬렸다.
“쫓아내야 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남궁진혁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눈에서는 결연한 의지가 유형화되어 빛나고 있었다.
“사우비! 이 자식을!”
“부르셨습니까!”
“…….”
침대 밑에서 머리만 튀어나온 것은 분명 사우비였다. 반쯤 감긴 눈으로 보아 자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왜 거기 있어! 당장 나오지 못해?”
사우비가 엉금엉금 침상 밑에서 기어 나왔다. 워낙 커다란 침상이라 그 같은 거구도 몸을 숨길 수 있었다. 남궁진혁은 몸을 퉁겨 침상에서 뛰어내렸다.
“야, 덤벼.”
“예?”
“덤벼! 오늘 너 죽고 나 살자. 아니, 나도 좀 죽자.”
“예?”
“덤비라고, 이 자식아! 남자 대 남자로 당당하게 한판 붙자! 내가 이기면 다시는 내 옆에 얼씬도 하지 마! 내 밥 먼저 먹지도 말고, 아예 사라져!”
“…….”
“덤벼! 삼 초를 양보해 주겠다! 덤벼!”
순간, 사우비가 피식 웃었다. 공손한 성격의 그였지만 속내가 얼굴에 몽땅 드러나는 솔직한 성격이기도 했다. 남궁진혁의 눈이 뒤집혔다.
“웃어? 덤벼! 너, 지금 나 무시해? 금룡검도 모자라서 너도 나 무시해? 덤비라니까!”
사우비가 두 손을 들어 그를 달래려고 했다.
“다치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