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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검존 1권 11화


제5장 사우비(3)


“남궁진혁.”
정철은 크게 기꺼워하며 문을 열었다.
“소가주께서 여긴 웬일이시오. 뒤에 업은 사람은 또 누구고?”
남궁진혁은 인상을 찡그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호위무사야. 사우비. 좀 들어갈 수 있을까?”
“아차, 내 정신이 이렇다니까. 어서 들어오시구랴.”
정철이 문에서 비켜 주자 남궁진혁은 신발도 벗지 않고 방에 들어와서 사우비를 침상에 내려놓았다. 살짝 내려놨는데도 체중이 워낙 대단해서인지 침상이 푹 꺼졌다.
“이게 무슨…….”
정철은 말을 하다 말고 삼켰다. 의원의 후각이 본능적으로 피 냄새를 맡고 긴장했다. 정철의 표정이 굳어지자 남궁진혁은 고개를 저었다.
“별일 아니야.”
별일이 아닌데 사람이 피떡이 돼서 온단 말인가. 정철은 맑은 물을 하얀 천에 적셔서 사우비의 얼굴을 닦아 냈다. 터지기도 많이 터졌다. 내일이면 얼굴이 퉁퉁 부어서 눈을 뜨지도 못할 판이다.
“쯧쯧쯧, 성한 곳이 없구만.”
정철의 손길은 세심하고 정확했다. 사우비의 피를 모두 닦아낸 그는 금창약을 꺼내서 상처 주변에 발라 주었다.
남궁진혁은 말없이 서서 치료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금창약을 대충 발라 주는 정도의 치료라면 자신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치명상이 없다고 해도 상처가 너무 심했기 때문에 정철에게 데려온 것이다. 뭐라고 해도 만독단으로부터 자신의 목숨을 구해 낸 의원이 아니던가.
“호오, 좋은 몸이군요.”
정철이 사우비의 상의를 벗기더니 감탄했다. 상처의 깊이를 알아보기 위해 뼈와 환부를 만지다가 보기 드문 강골임을 알아챈 것이다. 남궁진혁은 코웃음을 쳤지만 내심 정철의 안목에 감탄했다.
치료가 모두 끝나자 정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앉았다. 여태 남궁진혁이 서 있는 것을 보고 그에게도 의자를 권했다.
“무슨 일입니까. 누가 소가주님의 호위무사를 저렇게…….”
정철은 이전까지 남궁진혁을 도련님이라고 불렀다. 한 달 전, 만독단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도련님’이라는 호칭이 ‘소가주’로 변하게 된 것은 남궁진혁이 만독단에 중독된 이후부터다.
환갑이 된 그에게 인생의 낙이라곤 전혀 없었다.
결혼도 하지 않았고, 일생토록 매진한 의학도 ‘남궁세가의 의원’이라고 불릴 정도로만 익혔다. 열정도 꿈도 없이 이제 이승을 떠날 준비를 할 나이였던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하루에 쓸 약재를 준비하고, 가끔 다쳐서 오는 제자들의 약을 지어 준다. 남궁세가에서 가장 많이 소모되는 약은 금창약이었고 다음으로는 내상을 다스리는 약이었다. 그 외의 것들이라고 해 봤자 세가의 어르신들이 먹을 보약이었다.
어차피 대대로 내려오는 의원의 직업이었기에 이은 것이지, 스스로 의원이 되고 싶었던 생각은 없던 정철이다.
삶에 만족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딱히 큰 불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무료한 생활에는 모험도 꿈도 없었지만 그는 그냥 살아갔다. 그러나 평생을 되돌아보면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어 허무한 마음이 들곤 했었다.
‘……그때 소가주께서 나타나셨지요.’
무림인은 언제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다. 남궁세가의 인물들도 마찬가지여서 아주 가끔 있는 일이지만 치명상을 입고 정철을 찾아올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의원이 치료를 해도 살아날 수 있는 환자와 살아날 수 없는 환자, 어느 쪽이 됐든 정철은 책임질 생각이 없었다. 그저 마땅한 치료만 하고나서 운이 좋으면 사는 것이요, 팔자가 나쁘면 죽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궁진혁이 만독단에 중독되는 사건이 터진 것이다. 만독단이 무엇인가. 독중지왕으로 불리는 절대의 독약이 아니던가. 설령 조부인 천수신의 정약사가 환생한다고 해도 살릴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내 평생에 첫 모험이었다.’
이론으로만 알고 있던 역천의 침술을 처음 펼친 날이다. 돼지 시체를 눕혀 놓고 연습한 적은 있어도 산 사람에게 펼친 것은 처음이었다. 난생처음 조부의 권위에 도전하였고, 조부만이 이룩했던 경지에 손을 뻗었다.
천운이 닿아 역천의 침술은 성공하였고, 이렇게 살아남은 소가주는 눈앞에 있다. 그 뿌듯함이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정철은 그날로 살아갈 의욕을 얻었고, 자신이 맛보지 못한 또 다른 의술의 경지에 오르길 바랐다.
이후로 정철의 방에 등불은 꺼질 줄 몰랐다.
‘왜 자꾸 히죽거려.’
남궁진혁은 정철의 얼굴이 무척이나 보기 싫었다. 간신히 성공했던 만독단 자살 사건을 무위로 돌려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이미 지나간 일이지만 속이 뒤틀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손윗사람이라면 하녀나 집사에게도 온대를 쓰는 남궁진혁이 유독 정철에게만 반말을 쓰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내가 그랬어. 다른 사람에게는 비밀로 하고 치료를 좀 부탁해.”
남궁진혁이 인상을 찌푸리자 정철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몸이 워낙 튼튼하여 사흘이면 자리를 털고 일어날 것 같습니다. 그것이면 되겠지요?”
“충분해. 이만 가 볼게.”
용건이 끝난 남궁진혁은 방문을 나서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처참한 몰골의 사우비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갑자기 아까의 장면이 번개처럼 머리를 스쳐지나 갔다.
“제가 이겼습니다라?”
분명 그렇게 말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니, 아무것도.”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그의 말대로라면 분명 패배다.
승부의 기준이 서로 달랐다는 것은 논외로 하자. 사우비는 스스로가 납득하는 승리를 거두기 위해 필사적으로 버텼다. 대지에 뿌리를 박은 듯 굳건히 서 있던 그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입 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웃기는 녀석이야.’
남궁진혁은 상쾌한 마음으로 방을 나섰다. 바람이 시원하게 불었다.



제6장 무공을 배우다(1)


아프다고 할 작정이었다.
사우비가 지독한 몸살이 나서 거동을 못할 지경이라고. 그래서 며칠간 쉬게 할 작정이라고.
남궁성화가 의심할 때를 대비해서 미리 준비해 둔 핑계다. 남궁세가의 의원인 정철이 직접 관리한다는데 누가 의심할까.
얼굴에 피멍이 엷어질 때까지, 너구리가 된 두 눈이 사람의 몰골로 돌아올 때까지만 숨겨 두려고 했다.
은폐 공작은 어렵지 않았다. 정철이 협조적으로 나왔고, 어차피 사우비는 사흘 정도는 일어나지 못할 테니까.
아침까지는 그래서 기분이 좋았다. 사우비의 감시에서 당분간 벗어날 수 있으니까. 스스로 방문을 열고 아침 공기를 마시러 나올 때까지는 정말 기분이 좋았다.
‘아파서 누워 있을 녀석에겐 조금 미안하군.’
남궁진혁은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간만에 무공을 썼더니 사지가 삐걱거렸다. 극한의 움직임을 소화하기엔 단련되지 않은 근육이 놀란 것이다. 그러나 저리는 통증마저 기분 좋게 느껴졌다.
“날씨가 아주 좋구나!”
혼잣말인데 대답이 있었다.
“일어나셨습니까.”
“……누구?”
팬더다.
문 앞에 거대한 팬더가 옷을 입고 서 있었다. 남궁진혁은 기겁을 하고 눈을 비볐다. 자세히 보니 사우비를 닮은 팬더다. 혹시나 하고 확인했다.
“……사우비냐?”
“예, 도련님. 좋은 아침입니다.”
사우비가 히죽 웃었다.
“너, 너 왜 여기에 있어! 정철이 아무 소리 안 하든? 그냥 가도 된대?”
분명 신신당부했다. 비밀로 하고 치료해 달라고. 정철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남궁진혁의 의도를 파악했을 것이다. 그런데 사우비는 지금 이 자리에 있다.
“처음에는 말리셨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도련님을 호위해야 하는 몸이 아닙니까. 제가 간곡히 부탁드리자 결국은 보내 주셨습니다.”
어떻게 간곡했을지 심히 궁금해진다.
하룻밤 만에 병상을 박차고 일어나다니 남궁진혁은 기가 막혔다.
“아, 아프지는…… 않고?”
“상처가 조금 가렵습니다.”
송아지도 다진 고기로 만들 공격을 받아 낸 게 바로 어젯밤이다. 그런데 상처가 조금 가렵다니. 남궁진혁의 눈썰미는 날카로웠고, 만약 억지로 고통을 참는 거라면 단숨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도 사우비는 정말로 멀쩡했다.
‘철강시냐?’
이래서야 정철도 잡을 방법이 없었으리라. 아프지 않다면 더 이상 환자가 아닌데 무슨 핑계로 잡을 것인가. 게다가 간밤에 직접 체험했듯이 사우비의 고집은 막무가내였다.
‘제길, 귀찮아지겠구나. 에이, 몰라!’
저 얼굴로 돌아다녔으니 분명 소문이 퍼져도 벌써 퍼졌을 것이다.

남궁진혁의 예상대로, 소문은 빠르다.
새벽부터 아침을 준비한 시녀와 마당을 쓸던 하인이 사우비의 몰골을 보고 진작부터 입방아를 찧어 대고 있었다.
“얼굴이 저게 뭐래?”
“……맞은 것 같은데?”
“설마 또 도련님이 암습을 당하신 걸까?”
남궁진혁이 손쓸 사이도 없이 퍼져 나간 소문은 금세 가주인 남궁성화의 귀까지 들어갔다.
“암습이 있었느냐? 이게 무슨 일이냐!”
버선발로 뛰어온 남궁성화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사우비의 얼굴을 눈으로 확인하더니 어깨를 쥐고 흔들며 다그쳤다.
“상대는 몇 명이었느냐! 얼굴을 보았냐? 어서 설명하래도!”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성화도 자식에 대해서만큼은 평정을 유지하지 못했다. 사우비가 우물쭈물하다가 멀찍이 먼 산을 바라보고 있는 남궁진혁을 곁눈질했다.
‘나는 모르는 일이다.’
남궁진혁이 애써 못 본 척하였지만, 남궁성화는 사우비의 곁눈질의 의미를 알았다.
“진혁아, 네가 보았느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냐.”
더 이상 딴청을 피울 수 없게 되자 남궁진혁은 마지못해 한숨을 터뜨리며 사실을 털어놓았다.
“휴. 어젯밤, 뒷산을 거닐다 곰을 만났어요. 다행히 소자는 몸을 피했지만 사우비가 크게 다쳤습니다.”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남궁성화는 물끄러미 아들을 응시했다.
“뒷산에 무슨 곰이 있다고 그러냐. 작년까지 곰 가족이 살긴 했으나, 진작 네 배 속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먼 산을 바라보던 남궁진혁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아, 착각이었습니다. 호랑이였군요.”
“그것도 사 년 전에 잡았다! 아비 방에 깔린 호피를 보지 못했느냐!”
“……늑대였습니다.”
이쯤 되니 남궁성화도 뭔가 수상하다는 걸 깨닫고 의심을 갖기 시작했다.
남궁성화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지레 찔린 남궁진혁이 먼 산을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말을 덧붙였다.
“생각해 보니 승냥이 같기도 했는데…… 아무튼 맹수였어요.”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겠느냐!”
되는대로 갖다 붙이기도 잘한다.
상처만 보아도 작은 짐승에게 당한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승냥이 따위가 붙었다면 긁히는 상처로 끝났을 테니까. 남궁성화는 속이 터져서 다시 사우비에게 물었다.
“말해라! 진혁이의 말대로 맹수였느냐!”
멀뚱멀뚱 서 있던 사우비가 깜짝 놀라 대답했다.
“예? 아, 예! 곰이었습니다!”
이 대답은 순전히 남궁진혁이 찰나의 순간에 사우비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충성심을 발휘한 것인데, 결국 도로 아미타불이 되어 버렸다. 남궁성화가 화를 내기 시작했다.
“지금 장난하는 것이냐! 곰은 무슨 곰이 있다는 얘기냐! 진혁이, 네가 말해 봐라! 모두 사실대로 말하는 게 좋을 것이다!”
‘제기랄! 저 곰 때문에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남궁진혁은 역시 사우비를 죽였어야 했다고 생각하며 순순히 털어놓았다.
“사실은…… 제가 팼습니다.”
“뭐?”
이번엔 또 무슨 소리를 하려나 벼르던 남궁성화는 당황했다. 어째 맹수 얘기보다 더 허황되다. 아들의 ‘제길, 들켰다’라는 얼굴을 바라보던 남궁성화는 사우비에게 시선을 옮겼다. 역시 ‘거봐요, 들켰잖습니까’라는 표정이다.
“너 때문에 들켰잖아!”
“아이구, 제가 뭘 잘못했다고 그러십니까.”
남궁성화는 순간 말을 잃었다. 이제 딴청 부리길 중지한 남궁진혁이 사우비를 타박하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 남궁성화는 조용히 양손을 벌려 사우비의 체구를 쟀다.
정말 곰처럼 크다.
이어서 남궁진혁의 어깨 너비도 쟀다.
정확히 세 배다.
남궁성화의 시선이 몇 번이고 사우비와 남궁진혁을 오갔다. 멍한 얼굴에 조금씩 화색이 돌았다.
‘대단하다, 아들! 세구나!’
호랑이가 개를 낳는 법이 없다더니, 정말 대단하다. 벌써 무공의 오의를 터득하고 있는지 남궁세가의 이대제자를 팼단다! 팔불출 아버지 남궁성화는 내심 흐뭇했지만, 이내 얼굴에 떠오르는 웃음을 억지로 지웠다.
‘험험, 칭찬할 일이 아니다. 이유가 무엇이든 호위무사를 두드려 팼다는 건 벌을 내려야지. 무공만큼 중요한 게 인품이 아니던가.’
남궁성화는 짐짓 엄하게 말했다.
“남궁진혁!”
“왜요?”
남궁진혁이 시큰둥하게 답했다.

마보(馬步)는 가장 기초적인 단련법이다. 말을 타는 것처럼 적당히 발을 벌리고 서서 무릎을 반쯤 굽히고 허리를 꼿꼿이 세워 버티는 자세인데, 하체를 단련하는 데 탁월하다.
“유치해.”
입술이 댓 발은 나온 남궁진혁이 연무장을 독차지하고 마보 중이었다. 남궁가주는 이미 자리를 비운 지 오래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 것을 보아 벌써 한 시진은 흘렀다.
“좀 참신한 방법은 없는 거냐?”
마보의 효능은 남궁진혁도 잘 알고 있었다. 오랜 기간 동안 공을 들이면 하체가 안정이 된다. 몸을 지탱하고 대지를 밀어내는 역할을 하는 하체가 강화되면, 자연 주먹도 세지고 발차기도 강해진다. 기본 중의 기본이다.
“이건 지겹다고!”
사우비가 움찔 놀랐다. 여전히 호위를 서겠답시고 연무장 근처에서 주변을 경계하는 중이다.
“곰!”
“예?”
“멍청이! 팬더! 너구리! 하나 쓸데없는 둔한 녀석! 나가 죽어 버려!”
사우비가 울상을 지었다. 뭘 잘못했지? 뭘 잘못해서 도련님이 저렇게 화를 내는 거지? 도무지 알 도리가 없었다. 사우비가 우왕좌왕하며 머리를 긁고 당황하는 꼴을 보니 남궁진혁은 속이 더 끓었다. 아니, 눈앞에 있는 것만으로 속이 뒤집혔다.
“더워! 짜증나! 지겹다고! 힘들어!”
사실 해가 중천에 떠서 숨이 막히긴 했다. 말이 한서불침이지 날이 더워서 오는 불쾌감까지 없어지는 건 아니다. 남궁진혁이 한 치의 미동도 없이 그림 같은 자세의 마보로 성질을 내자 사우비가 우물쭈물하다 말했다.
“더, 더우시면 물이라도…….”
“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