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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검존 1권 15화


제7장 죽어도 좋을까(2)


“소가주, 일어나시구려. 식사할 시간이오.”
어렴풋이 정철의 목소리를 들은 남궁진혁은 하품을 하며 눈을 떴다. 재갈이 여전히 물려 있어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하아읍.”
정철은 남궁진혁의 눈이 맑게 빛나는 것을 보고 의아해 했다.
“얼굴이 많이 좋아 보이는구려. 간밤에 좋은 꿈이라도 꾸셨소?”
“읍읍.”
남궁진혁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철이 안심하며 재갈을 풀어 주었다.
“푸하, 답답해서 죽는 줄 알았네. 밧줄도 풀어 줘.”
“한 가지 약속하시구려.”
“다시는 흥분하지 않을 테니까 풀어 줘.”
“너무 선선히 대답하니 못 믿겠소.”
정철이 딴청을 피우자 남궁진혁은 소리를 버럭 지르려고 했다. 그러나 간신히 자제하고 생각해 보니 이건 유도신문이었다. 한 번만 참기로 했다.
“정말로 약속할게. 제발 풀어 주세요.”
할아버지가 장난감을 들고 흔들자 손자가 재롱을 피우는 꼴이다. 정철은 껄껄 웃으며 결박을 풀어 주었다.
“놀랍구려. 소가주의 몸이 아주 많이 좋아졌소. 간밤에 신선이라도 다녀갔는지 모르겠소. 얼굴이 화사하게 폈구려.”
“다 정 의원 실력이 좋아서 그래.”
남궁진혁은 공치사를 하면서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과연 침상에서 일어나는 것만으로도 힘겨웠는데 지금은 수월하게 상반신이 올라왔다. 마음을 편하게 먹어서 그런 거라고 남궁진혁은 생각했다.
‘가만?’
정말로 몸이 좋아진 기분이다. 남궁진혁은 형언할 수 없는 공포심을 느끼며 상세를 살폈다. 과연 내기의 흐름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상처 입은 단전에서 폭포수 같은 내공이 쏟아져 나와 몸에 흘렀다.
“자고로 환자가 좋은 마음을 먹으면 몸이 빨리 낫는다고 했소. 아마도 소가주께서 빨리 나아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이구려.”
그런 얘기는 남궁진혁도 들은 적이 있다. 좋은 기분을 갖고, 좋은 생각만 하면 몸이 빨리 낫는다고 했다. 반대로 나쁜 마음을 갖고, 항상 우울해 있으면 회복이 더뎌진다고 했다. 몸이 마음을 따라가는 것이다.
“죽을 드시오. 오늘은 특별히 고기죽이라오. 이제 내일부터는 밥을 먹어도 될 것 같소.”
정철이 인자하게 웃었다. 주름살 가득한 얼굴에 인자한 미소가 떠올랐다. 남궁진혁은 속으로만 비명을 지르면서 자신의 팔뚝을 세차게 꼬집어 보았다.
‘통증이 있다! 당황하지 말자. 아직 금강불괴는 아니다! 죽을 수 있어!’
예상보다 회복이 빨랐지만 걱정할 단계는 아니었다. 늦어도 오늘 안에만 자살하면 저승으로 날아오를 수 있다. 내일을 장담할 수 없다. 남궁진혁의 눈이 의욕으로 타올랐다. 거사 일은 오늘! 이제 칠 년의 기다림에 종지부를 찍을 차례다.
“뭐 하시오?”
자기 팔을 꼬집는 건 무슨 경우란 말인가. 정철은 슬그머니 옆에 놓아둔 밧줄에 손을 뻗었다. 남궁진혁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히죽 웃고는 고기죽을 먹어 치웠다. 아주 보란 듯이 멀쩡하다는 표정으로.
정철이 손수 죽 그릇을 들고 나갔다. 방에 혼자 남은 남궁진혁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과연 한 번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두 번의 기회는 없다.’
평범한 검이면 될까. 손톱을 세워서 팔을 세게 긁었다. 발갛게 변하긴 했지만 까지진 않았다. 벌써 가죽의 강도가 단단해지고 있는 것이다. 날카롭게 세운 철검이면 베이긴 할 것이나 왠지 걱정이 됐다.
‘좋은 검이 필요하다. 좋은 검, 좋은 검.’
문득 벽에 걸려 있는 금룡검이 눈에 들어왔다. 침상에 묶여 있는 동안은 손에 닿지 않게 하기 위해서 멀찍이도 걸려 있었다.
“금룡아!”
우우우!
울음소리가 이상하다. 절대 싫다. 부르지 마세요. 안 들립니다! 금룡검이 그렇게 울부짖었다. 검집째로 색이 누렇게 바래 버리는 걸 보니 아주 통나무처럼 무뎌질 작정인 듯했다.
“흥! 할 줄 아는 건 번쩍이는 거밖에 없는 놈!”
우우우우우우웅!
금룡검이 항의했지만 남궁진혁은 이미 다른 검을 떠올렸다.
‘맞다. 칠성검이 있었다!’
남궁성화의 애검인 칠성검이 있다. 그거라면 금룡검에 크게 뒤지지 않는다. 백련오철을 베었다고 하니 날카롭기가 천하에 손꼽히리라. 칠성검은 평소에는 남궁성화가 차고 다녔고, 날이 저물면 가주의 집무실에 검집째로 걸려 있다.
‘좋아! 너로 결정했다. 칠성검, 오늘 밤에 보자꾸나!’

남궁진혁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저녁을 먹은 후, 정철이 탕약 그릇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안 먹어!”
수면제가 들어 있는 탕약을 단호히 거부하자 정철은 밧줄을 들었다.
저놈의 밧줄! 남궁진혁은 피눈물을 흘리면서 탕약을 마셨다. 정철이 만족스럽게 밧줄을 내려놓았다.
“말을 잘 들으니 얼마나 좋소.”
정철은 껄껄 웃으며 등불을 끄고 나갔다.
한 시진쯤 흘렀을까. 하나 둘 불이 꺼지고 사람들이 잠들기 시작했다. 한참을 더 기다리니 남궁세가는 완전히 어두워졌다. 순찰을 도는 몇몇 호위무사들이 들고 있는 등불이 불빛의 전부다.
‘슬슬 움직여 볼까?’
남궁진혁은 침상에서 조심스레 내려와서 두 발로 섰다. 무릎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몸이 휘청거렸다. 남궁진혁은 이를 악물고 삐걱거리는 몸을 풀었다. 근육과 뼈마디 마디가 쑤시고 아팠다. 문득 죽기 전에도 이런 아픔을 느낀 적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 할 수 있다. 상태를 보니 내가 오늘 죽으려나 보다!
정철이 보았다면 다시 밧줄로 묶겠다고 달려들 만한 광기 어린 미소를 실실 흘리며, 남궁진혁은 의자를 끌어 창가에 놓았다. 의자 위에 올라서는 것만으로도 당장 비명을 지르고 싶을 정도로 아팠다.
“힘내자, 적풍아. 이제 조금 남았다.”
남궁진혁은 이를 바득 깨물고 창문을 통해서 밖으로 나갔다.
‘순찰이 한 명 지나갈 텐데……. 옳지, 지나갔다.’
남궁진혁은 지면에 몸을 착 붙이고 조금씩 기었다. 무림세가의 경계는 삼엄하지만, 만독단도 훔쳐 냈던 남궁진혁이다. 이미 예전에 보초들의 순찰 경로와 교대 시간, 그리고 사각지대까지 훤하게 꿰고 있었다.
‘모퉁이를 돌면 불을 밝혀 놓았었지.’
남궁진혁은 바득바득 기었다. 당장이라도 침대로 돌아가 끙끙 앓고 싶었다.
‘제기랄! 금룡검!’
협조만 해 줘도 얼마나 예뻐하겠느냔 말이다! 그럼 내가 이 고생을 왜 하겠어!
‘정철, 이 나쁜 놈!’
만독단 때부터 하는 짓 하나하나 마음에 안 들어! 능력도 안 되는 놈이 왜 사람을 살려!
‘염라대왕, 이, 이……!’
빠득빠득!
어린 나이에 혈압이 상승했다. 머릿속의 혈관들이 일시에 분노로 터져 버릴 듯이 팽창했다. 이 개고생의 모든 근원, 만 악의 근원, 죄의 근본! 염라대왕!
“죽일 테다. 곱게는 아니 죽일 거다! 한 달 열흘, 아니 내가 살아 온 시간만큼은 고통을 받게 할 거다. 노옴!”
음산하게 뇌까린 남궁진혁은 화톳불을 멀리 돌아서 나무 그림자 뒤에서 겨우 숨을 돌렸다.
“어이.”
가주의 집무실까지 겨우 십 장을 남겨 뒀는데 갑자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남궁진혁은 그대로 굳었다. 흠뻑 흘린 땀이 차갑게 식었다.
“소식 들었어? 어제 또 소가주의 광증이 도졌다더구만.”
남궁진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들킨 것이 아니었다.
숨을 죽이고 보초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데, 다른 보초가 무거운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 들었지. 쯧쯧. 큰일이야. 그렇게 어린 나이에 주화입마에 빠지고 미치기까지 했다니. 가주님께서도 걱정이 크시겠어.”
남궁진혁은 이를 바득 갈았다.
‘이 자식들이!’
화가 치밀었지만 지금은 따질 입장이 아니었다. 남궁진혁은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가주의 집무실까지 기어 올라갔다. 집무실은 정문보다 창문 쪽에 경계가 많았다. 정문으로 당당히 들어가는 편이 낫다.
드르륵.
아주 살살 열었는데도 문의 마찰음이 났다. 남궁진혁은 주변을 다시 살폈다. 다행히 들키지 않았다.
‘도착이다!’
조심스레 들어가 문을 닫았다. 긴장이 풀리자 극심한 피로가 몰려왔다.
‘빌어먹을……. 역시 수면제였어!’
억눌러 온 약 기운이 일시에 몸에 돌아 졸음이 미친 듯이 쏟아졌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잠들 것 같으냐!’
혀를 콱 깨물었다. 비릿한 피 냄새가 났다. 찌르는 듯한 통증 덕분에 머리가 조금 맑아졌다. 남궁진혁은 필사적으로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집무실에서는 청량한 숲의 냄새가 났다. 한구석에 가져다 놓은 향목 때문이리라. 칠성검은 바로 향목의 옆에 걸려 있었다. 화려한 자주색의 검집이 눈에 띄었다. 남궁진혁은 술 취한 걸음으로 다가가 칠성검을 집었다.
“너로구……나.”
명검이다.
쥐는 것만으로 알 수 있었다. 검이 가진 예기가 손을 타고 흘러들어 왔다. 남궁진혁은 천천히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은백의 검신이 찬란하게 빛나며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에 휩싸였던 집무실에 촛불을 켜기라도 한 것처럼 사물이 눈에 들어왔다.
“요란하기는. 너 때문에 들키겠다.”
그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빛의 세기가 약해졌다. 남궁진혁은 부드럽게 웃었다. 사람보다 검을 좋아하던 그다. 게다가 지긋지긋한 인생의 종지부를 찍어 줄 검이니 더욱더 사랑스러웠다.
남궁진혁은 자세를 바로 하고 검을 목에 가져갔다. 목에 검날이 걸리는 순간, 느꼈다. 뜨겁고 날카로운 통증을. 목에서 뜨뜻한 핏방울이 흘렀다. 아주 살짝 대었을 뿐인데 가죽이 베인 것이다.
“아아, 드디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지난 칠 년간 이어져 온 괴로운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갔다. 끊임없는 영약의 파도, 사람인지 강시인지 실험용 인형인지 분간 못했던 시절도 있었다. 벼락도 맞았지, 우물에도 들어앉았었지, 만독단도 먹었지. 그래도 끊이지 않던 바퀴벌레보다 더 한 이놈의 명줄!
이 지긋지긋한 명줄을 이제야 끊어 버릴 수 있는 것이다. 드디어 가는 것이다!
“이제…… 정말로 끝이다.”
감동으로 가슴이 먹먹하면서도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더 시간을 끌 것도 없다.
‘기다려라, 저승!’
남궁진혁은 검을 단숨에 당기려고 했다.
그런데.
집무실 책상에 올려져 있는 책자가 눈에 띄었다.

천의검공

‘천의검!’
머릿속에 벼락이 친 기분이다. 단번에 목숨을 끊으려던 남궁진혁은 멈칫한 채로 책을 노려보았다.
‘나를 이 꼴로 만든 천의검이렷다!’
익히다 말고 주화입마에 빠진 그 검법! 정철에게 묶이게 만든 검법! 광증에 빠졌다는 소문이 나게 만든 검법!
머릿속에 지난 두 달이 번개처럼 스쳤다.
‘난생처음으로 익히지 못한 검법……. 빌어먹을!’
남궁진혁은 문득 마음에 한 가닥 주저함이 생겼다. 이대로 죽어도 되는 걸까. 천의검을 남겨 두고 그냥 가도 되나. 무공을 익히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도 되는 것인가.
수많은 상념이 머리를 스쳤다.
‘아니야! 죽을 기회가 또 언제 올지 모른다! 지금 죽지 못하면 나는 다시는 죽을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다. 천운이 닿아 주화입마에 빠졌다고는 하나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질 리가 없다. 자칫하면 백 살도 넘게 살 텐데……. 지금 눈 딱 감고 죽는 게 낫지 않나!’
혼란스럽다.
남궁진혁은 억지로 마음을 다잡았다. 죽는 것이 옳다고, 덤으로 산 인생은 신경 쓸 것이 못 된다고! 남궁진혁은 머리를 휘휘 저어 천의검에 대한 생각을 떨쳤다.

천의검공

“이이이익!”
눈을 뜨니 다시 보였다. 단지 칠성검이 발하는 빛만으로도 천의검공의 이름은 또렷하게 보였다. 굵고 새카만 글씨가 심장에 박힌다. 남궁진혁은 바르르 떨며 눈을 감아 버렸다.
‘나는 금적풍이다! 세상에서 떠난 금적풍! 무슨 미련이 남아도 이제는 끝낸다! 할 만큼 했잖아! 내가 이제껏 왜 살아왔느냐! 지금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 살아오지 않았던가!’
결심했다. 천의검이 다 무엇이냐! 죽음으로 종지부를 찍고 저승으로 돌아가 염라대왕을 조질 것이다! 마음을 다잡고 손에 힘을 주었다.
칠성검이 조금씩 목을 파고들었다. 피가 흘러 옷을 적셨다.
‘……응?’
그런데 갑자기 위화감이 들었다.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남궁진혁은 검을 당기다 말고 눈을 떴다. 집무실의 문 쪽에 웬 시커먼 그림자가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누군가 있다.
새카만 옷과 새카만 동아줄.
‘저승사자?’
몇 번이고 본 저승사자! 창백한 낯빛을 한 저승사자는 남궁진혁을 정면으로 보고 있었다. 무서워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다. 남궁진혁을 뚫어져라 보던 저승사자의 시선이 책상 위의 천의검공으로 옮겨 갔다.
‘뭐, 뭘 보는 거냐? 잠시만 기다려라 이놈, 네놈을 앞세워 내 곧 염라에게 갈지니!’
스윽.
저승사자의 시선이 남궁진혁에게 돌아왔다. 그는 가만히 남궁진혁을 응시하더니 한쪽 입 꼬리만 올려서 피식 웃었다. 순간 남궁진혁은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웃어? 주제에 웃어? 지금 웃었단 말이냐? 오냐, 일단 죽고 보자!’
발끈하려는 찰나에 저승사자의 시선이 다시 천의검공으로 돌아갔다. 또 한 번 피식, 저승사자가 웃었다.
‘왜, 왜 웃는 거냐. 뭘 보고 웃는 거냐! 설마, 설마 지금 내 꼴이 웃긴다는 거냐!’
일령의 말이 기억났다. 그들의 도락은 인간 세상을 훔쳐보는 것이라고도 했다. 그렇다는 말인즉슨, 남궁진혁으로서의 삶도 훔쳐보았다는 얘기가 아닐까!
‘웃기느냐? 웃긴다는 거냐? 한때 진천검존이었던 자가 저따위 무공을 익히지 못하고 죽는다는 것을 비웃는 것이냐!’
남궁진혁은 책상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오른손으로는 여전히 빛을 발하는 칠성검을 비스듬히 들고 있었다.

천의검공

너무나도 뚜렷한 네 글자.
빠드득.
어금니가 부서져라 갈렸다.
“좋다! 좋아! 익혀 주면 될 것이 아니냐! 네놈을 그냥 두고 가면 천추의 한이 될 것이니, 내가 자근자근 익혀서 씹어 삼켜 주마!”
‘이대로 저승에 가서 창피를 당하느니 당당하게 모두 처리하고 가 주마! 두고 봐라, 염라대왕, 저승사자 놈들! 감히 나를 비웃고 간 죄까지 합쳐서 벌해 주마! 다 죽여 버리겠어!’
스르릉!
칠성검을 거칠게 검집에 쑤셔 박고 비급을 콱 쥐었다.
‘누가 만든 무공인지는 모르나 나와 전생에 원수였던 것만은 틀림없으렷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