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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검존 1권 16화
제7장 죽어도 좋을까(3)
남궁진혁은 쌍욕을 해 가며 자신의 방으로 기어서 돌아갔다. 바닥난 체력과 수면제의 약효가 그를 끝없이 괴롭혔다. 결국 방에 도착한 남궁진혁은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거참, 어린놈이 귀엽게도 논다.”
한편, 저승사자는 밤하늘에 둥실둥실 떠올라서 남궁세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인간 세상에 내려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자로, 저승사자로서는 신참이었다. 명부첩을 뒤적이던 그는 머리를 긁적였다.
“새파랗게 어린놈이 어디서 배워먹은 버릇인지. 쯧, 명부첩에도 남궁 씨가 죽는다는 얘기는 없구만.”
죽음의 기운에 이끌려서 가 봤더니 꼬마가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었다. 워낙 분위기가 살벌해서 정말 자살하는 줄 알았지만 명부첩에는 오늘 남궁가에서 죽는 자가 없었다. 그렇다면 중도에 그만두고 말 녀석이란 얘기다.
책상에 있던 책을 원독 어린 눈으로 노려보다 검을 당기려던 것으로 보아, 지지리도 공부가 하기 싫었던 것이 분명했다. 분명 부모에게 겁이라도 줄 요량으로 슬쩍 피가 날 정도로 목을 그어 놓고 죽겠다고 요란을 떨어 글공부를 피해 가려는 속셈일 터이지.
“벌써부터 잔머리를 굴리다니, 아주 싹수가 노랗구만. 그나저나 선배들은 왜 이쪽 동네는 안 오려고 하는지 모르겠네.”
신참 저승사자가 저승의 멸망을 막은 날이다. 물론 뒷감당할 일이 더 커졌다는 건 논외로 하자.
다음 날, 이른 아침.
남궁진혁은 소란통에 잠에서 깼다. 세가에 무슨 일이라도 벌어졌는지 시끄러웠다.
“나 죽는다, 나 죽어. 팔, 다리, 어깨, 삭신이 몽땅 쑤셔.”
머리가 깨질 것 같고 근육이 저리고 팔꿈치와 무릎이 까졌다. 입고 있는 옷은 어떠한가. 흙밭을 기어갔더니 완전히 걸레가 되어 있었다. 남궁진혁은 바들거리는 손으로 그제야 잠옷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다행히 들키지 않은 모양이야.”
천의검공만 빼내고 걸레가 된 옷은 뭉쳐서 침상 밑에 쑤셔 넣었다. 모든 일을 끝마치고 나니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씻지는 못했지만 일단 옷이라도 갈아입으니 한결 상쾌했다.
“무슨 일이지?”
그제야 세가가 시끄러운 것에 생각이 미쳤지만 곧바로 관심을 끊어 버렸다. 그런 것에 신경을 돌릴 때가 아니다.
‘이제 사소한 일은 개의치 말고 천의검에 전념한다.’
이건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며, 나아가서 영혼이 걸리고 목숨이 걸렸다고 할 수 있다.
“어디 보자. 얼마나 잘난 검법이냐.”
천의검공에 쓰여 있는 것은 남궁성화가 말해 준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머리 아프다!”
한참을 읽던 남궁진혁이 바락 거렸다. 비급을 보고 무공을 익힌 적이 없으니, 당연히 머리가 아플 수밖에. 물론 검의 극의를 이룬지라 못할 것도 없었지만, 글씨가 눈앞에 오가니 왈칵 짜증이 났다.
“제길! 두고 봐라. 내가 곧 짓밟아 줄 테니까!”
남궁진혁은 천의검을 펼칠 때를 회상했다. 남궁성화가 보여 준 검법을 토대로 구결과 주석을 결합하여 검로를 이끌어 냈다.
‘분명 조금만 방향을 바꾸면 대성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몸을 회복하는 게 우선이겠지만…….’
주화입마에 빠지기 전에 도달한 천의검의 경지는 칠성. 오의를 제대로 쥐었다면 분명 단숨에 성취를 높여 대성했을 것이다. 그러나 몸이 버티질 못했다.
‘무리였어. 영약만 많이 먹었지, 단련도 하지 않은 몸으로 사흘이나 무공을 연이어 펼치다니.’
남궁진혁은 자신의 상태를 점검하고 앞날의 계획을 세웠다.
‘그래, 일단 회복에 전념하자. 몸이 회복되는 동안은 연구를 하고 체력을 단련하자. 주화입마의 후유증이 사라지면 그때 익혀야겠……. 빌어먹을, 몇 년은 걸리겠네! 이런 쓰레기 같은 무공을 만든 자식이 누구야! 다 때려치우고 죽어 버릴까 보다! 저승에 가면 있으려나?’
남궁진혁이 이름 모를 전대의 고수에게 욕을 퍼붓고 있는데 방문이 벌컥 열렸다.
“진혁아, 몸은 괜찮으냐!”
남궁성화가 탁상에 앉아서 책을 보는 남궁진혁을 보고 반겼다. 벌써 아들이 일어나서 거동할 수 있게 된 것이 기쁜 모양이었다. 그런데 다른 용무가 있는지 표정이 굳은 채 땀을 흘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벌어졌습니까?”
“아! 혹시 너는 수상한 사람을 보지 못했느냐?”
“예, 보지 못했습니다.”
남궁성화가 땀을 훔치며 말했다.
“지금 세가에 도둑이 들었단다. 도둑의 흔적을 찾으려고 백방으로 노력…… 그 책이 무엇이냐?”
“이것 말입니까?”
남궁진혁은 책을 공중으로 들어 올려서 제목이 보이도록 해 주었다.
천의검공
이제 남궁성화는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그, 그걸 어찌 네가 갖고 있느냐?”
남궁진혁은 멀뚱하게 책과 남궁성화를 번갈아 쳐다보고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제가 천의검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다고 하니 아버님께서 빌려 주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언제?”
“기억이 안 나십니까?”
남궁진혁이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반문하자 남궁성화는 그럴 리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기억이 정녕 없으십니까?”
이번에는 걱정스럽게 아들이 아버지를 보았다. 그 눈빛이 마치 ‘벌써부터 기억이 오락가락하십니까?’ 하고 말하는 것 같아 남궁성화는 자신이 없어졌다. 정말 빌려 주고 기억을 못한단 말인가.
“정녕 내가 빌려 주었느냐?”
남궁진혁이 확고하게 눈을 빛내고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 진짜?”
끄덕끄덕.
“……정말? 그, 그래, 알았다. 그, 그럼 열심히 보려무나.”
떨떠름한 표정으로 아들의 방을 나선 남궁성화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정철의 거처로 발길을 옮겼다. 그의 얼굴에 심각한 불안이 맴돌고 있었다.
“이보게, 정철. 나 요즘 이상해.”
“이상하다니요?”
“아무래도 기억이 오락가락하나 봐. 좋은 약 없나?”
제8장 제갈세가의 쌍둥이(1)
주화입마를 당하고 어느덧 석 달.
겨울이 왔다.
이제 겨우 십일월의 막바지인데 첫눈이 내렸다. 금년 동장군의 방문이 예년보다 일렀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자 남궁진혁은 자신의 거처에 틀어박혀 나올 줄을 몰랐다. 사우비가 그 이유를 묻자, ‘춥잖아!’ 하면서 창문을 쾅 닫아 버렸다.
“추운데 나가긴 어딜 나가.”
남궁진혁은 침상에 몸을 파묻고 천의검공을 읽는 데 몰두하고 있었다. 그동안 몸이 회복되지 않아서 본격적인 수련은 불가능했다. 한번 상한 몸은 눈만 내리면 허리가 쑤시고 관절이 삐그덕거렸다.
그러나 이제 금강불괴도 돌아오고, 주화입마로 다친 내상도 제법 치유가 됐으니 슬슬 몸을 움직일 때가 왔다.
‘내가 주화입마에 빠진 건, 몸이 너무 약했기 때문이야. 천의검을 익히기에 앞서 몸을 먼저 만들어야겠어. 춥지만 한번 나가 볼까.’
고절한 내공이 있어도 몸이 버티지 못하면 별무소용이다. 남궁진혁은 가장 기본 중의 기본인 신체를 단련하기로 결심했다. 천의검을 익히기로 했으니 금룡검도 필요하다. 그렇게 생각한 남궁진혁은 허공에 손을 뻗어 허공섭물을 펼쳤다.
“금룡아, 가자!”
웅웅웅!
산책 나가는 강아지처럼 금룡검이 즐거워했다. 그런데 벽에 걸린 금룡검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남궁진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한 번 손을 떨쳤다.
바르르.
손이 떨렸지만 금룡검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웅웅웅!
혹시 놀리고 있는 거냐? 금룡검이 불만스럽게 울었는데 남궁진혁의 표정은 진지하기만 했다.
“이, 이상한데? 이익! 와랏!”
날카롭게 손을 떨쳤는데도 내공이 흐르지 않았다. 그에게 허공섭물은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인데도 실패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어째서지?”
진기를 모아서 다시 허공섭물을 펼치려던 남궁진혁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넘쳐흐르던 내공이 어째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았다. 평소에는 이 갑자의 내력을 담고 있던 단전이 텅 비어 있었다.
“말도 안 돼!”
남궁진혁이 황급히 심법을 운용하여 대기의 진기를 빨아들였다. 그러나 속이 꽉 막힌 듯 아무것도 흡수할 수 없었다. 사태가 심상치 않다. 남궁진혁은 당황하다가 한 가지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그렇다면 금강불괴는?”
손톱을 날카롭게 세워서 손등을 긁어 내렸다.
지이익.
손톱이 지나간 자리에는 흠집조차 남지 않았다. 간지럽지도 않다.
“뭐야, 이거! 금강불괴는 확실히 돌아왔잖아! 그럼 왜 내공이 없어!”
금강불괴는 극성에 달한 내가진기로 몸을 보호하는 것, 내공이 없다면 이루어질 리가 없다.
남궁진혁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과도로 팔뚝을 찔렀다.
푸욱.
“…….”
박혔다.
“…….”
줄줄줄.
피가 흐른다. 뒤늦게 불같은 고통이 찾아왔다.
“으아아악! 금강불괴도 돌아오다 말았잖아!”
팔에 칼을 꽂고 남궁진혁이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방에서 약재를 고르고 있던 정철은 남궁진혁이 피를 뿜으며 뛰어 들어오자 기겁을 했다.
“소가주님, 무슨 일입니까! 어쩌다 그렇게 다치신 거요!”
“아프다! 칼로 찔렀더니 피가 나!”
“찔렸다고요?”
“아니, 찔렀다고! 봐!”
남궁진혁은 칼이 꽂힌 팔뚝을 자랑스럽게 내보였다. 정철은 긴장한 표정을 짓더니 뒤로 물러서면서 벽에 걸어 놓은 밧줄을 붙잡았다. 마침 남궁진혁을 따라서 사우비가 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사우비, 소가주님을 붙잡아라! 지금 매우 위험하시다!”
“예? 옛!”
사우비는 곧 충성스럽게 남궁진혁에게 달려들었다. 이미 모든 내공을 잃은 남궁진혁은 사우비에게 맥없이 잡혀서 발버둥 쳤다.
“뭐 하는 거얏! 놓지 못해!”
“사우비, 절대로 놓지 마라! 소가주님, 광증이 다시 도졌어요!”
정철이 순식간에 남궁진혁의 몸을 솜씨 좋게 묶었다.
“안 돼! 묶지 마! 무슨 짓이야! 나는 아파서 왔단 말이다. 미치지 않았어! 누굴 또 미친놈 취급하는 거야!”
“휴, 되었다. 사우비, 놓아도 된다. 소가주님, 이해하세요. 원래 미친 사람은 스스로 미쳤다고 하지 않는 법이니 말입니다.”
남궁진혁을 완전히 묶어 버리고 여유를 차린 정철은 그제야 붕대와 지혈제를 가져와서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과도를 뽑으니 새빨간 선혈이 튀었지만, 상처가 깊지 않아서 피가 금세 멎었다.
“이이익! 당장 풀지 못해!”
“조용히! 이런 재갈이 없군. 괜히 버렸어. 할 수 없지. 이거라도 물고 계시지요.”
정철이 남궁진혁의 양 볼을 움켜쥐고 붕대 뭉치를 쑤셔 넣으려고 했다. 남궁진혁은 너무 억울해서 시뻘게진 얼굴로 바락 소리를 질렀다.
“그아부괴아 아오아아아!”
“알고 있어요. 소가주님이 많이 아프다는 것을. 지금 치료해야 할 곳은 피륙의 상처뿐만이 아니라 마음의 병이기도 합니다. 내가 곧 약을 지어 주겠어요.”
‘안 미쳤다고!’
볼이 잡힌 채로 말하니 발음이 이상했다. 이미 정철은 내용도 듣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다 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남궁진혁은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고개를 비틀어 정철의 손을 떨쳐 냈다.
“금강불괴가 안 돌아온다고! 돌아오다 말았다고, 망할 돌팔이 노인네야!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들어! 읍읍, 퉤! 입 막지 마!”
“사우비, 잡아라! 아니, 잠깐!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금강불괴가 깨졌다고! 찔렀는데 피나잖아!”
정철이 눈을 크게 뜨더니 남궁진혁의 상처와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정말이군요.”
남궁진혁이 자신의 상태를 설명했다. 내공도 돌아오지 않았고, 금강불괴도 돌아오다 말았다고. 피부가 쇠가죽처럼 질기고 단단한데도 칼에는 베였다. 정철은 심각한 표정으로 얘기를 듣고는 당장 진맥에 들어갔다.
“과연…… 진기의 흐름이 미약하군요.”
미약하다 못해서 거의 없을 판이다. 이 정도라면 무공을 익히지 않은 범인의 수준이다. 정철은 뭔가 생각하더니 서랍을 뒤져서 적, 녹, 황, 세 가지 색의 단환을 꺼냈다. 향이 심상치 않았다.
“붉은 것을 먼저 드시지요.”
“이게 뭔데?”
남궁진혁이 붉은 단환을 들고 냄새를 킁킁 맡았다. 청아한 향이 가슴까지 시원하게 했다.
‘영약이잖아!’
남궁진혁의 얼굴이 본능적으로 찌푸려졌다.
“힘이 나는 약이지요. 장복하면 내공의 상승도 꾀할 수 있습니다.”
절로 미간이 꿈틀거렸다.
‘적풍아, 무림에 나가려고 먹는 게 아니다. 그저 몸을 회복하고 천의검을 짓밟기 위해서이니 이런 수모는 감수하자.’
역시 영약을 죽도록 먹고 자란 기억이 상처가 된 모양이다. 남궁진혁은 눈을 질끈 감고 단환을 삼켰다. 입에서 부드럽게 풀어진 영약이 목구멍을 타고 내렸다.
두근!
갑자기 내기의 흐름이 거세졌다. 심장의 박동이 빨라졌다.
“오! 갑자기!”
“어떻습니까?!”
“진기의 움직임이 느껴지……려다 마네?”
금세 진정이 됐다.
정철은 고개를 끄덕이고 방금 일어난 일을 종이에 적었다.
“다음은 녹색을 드시지요.”
“이건 또 뭔데?”
또 영약인가 싶었는데 정철이 아니란다.
“일시적으로 단전을 자극해서 내력을 격발시키는 약입니다. 오래가지 않으니 위급할 때만 쓰는 것이지요.”
그런 거라면 영약보다는 좀 낫다. 남궁진혁은 녹색 단환을 삼켰다. 과연 약을 삼키니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이내 약기운이 퍼지자 몸이 벼락 맞은 것처럼 떨렸다.
“윽!”
“반응이 있습니까?”
약기운이 독해서 남궁진혁이 신음을 흘렸다.
“……아, 괜찮아졌어.”
그런데 곧 표정이 편안해졌다. 약기운이 일시에 사라진 것이다. 정철이 다시 고개를 끄덕이고 종이에 뭔가를 적었다.
“남은 것도 드시지요.”
“이건?”
“먼저 먹은 것들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남궁진혁은 고개를 끄덕이고 황색 단환을 입에 넣었다. 그런데 맛이 비릿하고 독했다. 순식간에 녹아 버린 단환이 목구멍을 타고 배 속으로 흘렀다. 정철이 기대에 찬 표정으로 남궁진혁을 보았다.
“윽, 크으윽. 이, 이거 뭐……야…….”
배 속을 쥐어뜯는 복통! 남궁진혁은 눈을 부릅뜨고 바들바들 떨었다. 먼젓번 먹었던 약들과 다르다. 토하고 싶은데 구역질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떨렸다.
“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