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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검존 1권 17화
제8장 제갈세가의 쌍둥이(2)
“크으윽, 도옥?”
“예. 칠보단명사의 독입니다. 천하십대독약의 하나지요.”
남궁진혁이 무릎을 꿇고 바들바들 떨었다. 몸이 차가워지고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네, 네가…… 날 죽이려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만독단으로 생긴 내성은 칠보단명사를 가볍게 누를 수 있습니다.”
“크어어어억.”
남궁진혁은 죽는다고 아우성치며 앞으로 쓰러졌다. 그런데 어느 순간 신음이 그쳤다. 독 기운이 천천히 가신 것이다. 질척한 독액이 모공으로 흘러나왔다.
탈진한 남궁진혁을 앞에 두고 정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에 실험의 결과를 기록했다.
“과연…… 독을 태우지도 못할 정도로 약해졌군요.”
진기는 생명과 같다. 몸이 위기에 처하거나 악독한 기운이 밀려들어 오면 자연스럽게 몰려가서 몸을 지키는 것이다. 그런데 독약이 들어와도 진기의 변화는 없었다. 만약 만독불침의 몸이 아니었으면 그대로 저승행이었다는 얘기다.
“그, 그럼 치료 방법은?”
“잠시만 기다리세요. 조금 더 봐야겠습니다.”
정철은 이어서 남궁진혁의 몸을 눕히고 비전의 은침을 꺼냈다. 조부인 천수신의가 물려준 것으로, 기물 중의 기물이었다. 정철은 빠르게 남궁진혁의 혈 일곱 군데를 은침으로 찔렀다. 역천지법을 응용하여 내기를 폭발시키는 수법이었다.
‘반응이 있다!’
남궁진혁의 진기의 흐름에 집중하던 정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미약하지만 반응이 있었다. 문제는 그곳이 단전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몸 곳곳에서 미약하나마 내기의 격발이 느껴졌다. 그러나 단전으로 흐르지는 않았다.
갑자기 정철이 손뼉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냈습니다, 왜 금강불괴가 돌아오지 않는지! 이미 주화입마로 기혈이 뒤틀리고 내상이 심해서 원정진기가 손상되었을 뿐 아니라 단전으로 향하는 모든 길이 막혔습니다. 진기가 제대로 흐르지 못하니 금강불괴는 물론이요, 내공도 쓰지 못하는 것이지요!”
어려운 문제를 맞힌 학자처럼 기뻐하는 꼴이라 남궁진혁은 인상을 쓰고 아까 했던 질문을 반복했다. 탈진한 몸이 덜덜 떨렸다.
“그, 그, 그렇다면 치료 방법은?”
“현재로썬 없습니다!”
정철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남궁진혁은 역시 만독단 사건 때 정철부터 죽였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지금 소가주님의 상태는 저도 처음 보는 것이라 뭐라고 확답을 내릴 수 없어요. 주화입마로 상한 기혈이 거의 막혀 버렸고, 이 갑자의 내공이 전신에 퍼져서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어요.”
의술을 모르는 남궁진혁도 무슨 뜻인지 금세 알아들었다. 무림인으로서는 폐인에 가까운 판정을 받은 것이다. 천수신의의 진전을 이은 정철이 치료 가능성을 점칠 수 없다고 할 정도다.
“그러나…….”
남궁진혁이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정철이 한 가지 희망적인 얘기를 꺼내 놓았다.
“소가주님의 회복력은 분명 범인의 배 이상입니다. 게다가 폐맥이 되었다고 해서 불구가 되었다거나 팔다리가 움직이지 않는 것은 아니니, 시간을 들여 치료법을 찾는다면 회복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남궁진혁은 얼굴을 찌푸렸다. 위로를 하려면 더 그럴듯하게 해야지, 그런 얘기는 기적을 바라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최악이잖아!”
거처로 돌아온 남궁진혁은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감각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 보고 맡고 맛보고 만지고 듣는 오감. 그러나 남궁진혁은 거기에 더불어 또 하나의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기감이다. 그것도 보통의 고수들이 느끼는 기감과는 질적으로 다른, 완전히 다른 세계를 볼 수 있는 능력이었다.
원하기만 한다면 사방 백 리 안의 생명을 모두 감지할 수 있고, 바라기만 한다면 건물 한 채를 손도 대지 않고 압박하여 무너뜨릴 수도 있다. 천리안, 천리지청술……. 내공을 가졌을 때는 모두 장난 같은 일이었다.
지금의 남궁진혁은 눈과 귀가 막힌 것과 같았다.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손과 발을 잃은 것과 같았다.
“으드득.”
남궁진혁은 이를 갈며 가부좌를 틀고 자리에 앉았다. 대연신공의 심법에 따라 호흡을 가다듬었다. 들이마시고 이끌어서 단전으로 당긴다. 너무나 당연해서 신경조차 쓸 필요도 없었던 일인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기가 가야 할 길이 느껴지지 않았다.
전신기혈이 뭉개지고 끊어져서 막혀 버렸다. 돌파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꽉! 어떻게 목숨을 부지하고 있을까 궁금할 정도로 폐물이 되어 버렸다.
남궁진혁은 무인이다. 뼛속부터, 아니 영혼까지도 완벽한 무림인이다. 비록 스스로 무림을 배척하고 있어도 무혼까지 버릴 수는 없다. 그런 그가 무공을 잃었다. 영혼을 잃은 것과 마찬가지다.
“없어. 느껴지지 않아.”
남궁진혁의 눈이 깊이 가라앉았다. 화조차 내지 못하고 숨을 죽였다. 커다란 눈에 이슬이 맺혔다. 소년의 몸을 가진 무신이 몸을 떨었다.
“이제…….”
깊은 회한.
짙은 슬픔.
죽음을 넘어선 자의 원통함이 절절이 목소리에 깊이 배었다.
“모두 끝이야…….”
포기하는 것인가.
소년의 목소리는 낮고 힘이 없었다. 이제는 지친 것만 같았다. 절망과 절망과 절망을 딛고 다시 일어나야만 했으니, 영혼까지 지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그때였다.
갑자기 소년이 얼굴을 번쩍 들었다.
그 얼굴에 떠오른 것은 절망도, 패배도, 체념도 아니었다. 오로지 원한으로 가득 찬 눈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염라대왕 때문이다! 죽지 못한 것도, 주화입마도! 애초에 지상에 내려온 것도! 원죄의 덩어리! 네놈의 생명이 백 개쯤 되기를 바라라! 천 번은 죽여야 속이 풀리겠으니! 크아아악, 나는 진천검존이다! 내가 천하제일고수다! 무공을 펼칠 수 없다는 게 말이나 돼? 두고 봐라! 얼마가 걸리든 회복해 보이겠다! 회복해서 천의검을 익히고 염라대왕도 죽일 거다!”
좌절이 십 초를 못 갔다. 그러기에는 소년의 마음이 너무나 쪼잔했던 것이다. 그의 혼이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다음 날부터 남궁진혁은 하루에 한 번씩 정철을 방문했다. 그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치료를 하겠노라 약속했기 때문이다.
‘비록 제가 신의라 불리지는 못하나 명색이 남궁가의 의원입니다. 기필코 소가주님의 상세를 호전시키겠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몸이 회복되어서 살고 싶은 게 아니었다. 무공을 되찾아서 옛 영화를 누리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내공을 되찾아 천의검을 익히는 것, 그리고 미련 없이 저승으로 돌아가는 게 목표였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꼴 보기 싫은 정철에게라도 몸을 맡길 수 있어. 어찌 됐든 천수신의의 진전을 이었잖아.’
정철은 하루에 두 시진을 남궁진혁에게 할애했다.
한 시진은 특유의 침술로 치료했다.
“으아악, 으악, 으아악! 너 지금 일부러 아프게 하는 거지! 우, 우끼약!”
엄살이 아니다. 은침이 혈을 깊숙이 찌를 때마다 몸이 찢어지는 고통이 엄습했다. 뒤틀린 혈도의 자리를 복구하려고 하니,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까무러치고 혼절하기를 여러 번, 이윽고 한 시진이 지나자 정철은 남궁진혁을 집어 들고 미리 준비한 나무통에 던져 넣었다.
풍덩!
새까맣게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약물에 머리끝까지 잠겼다. 침이 찔린 부위에 스며든 약물이 지독하게 쓰렸다. 게다가 약물은 왜 이리 뜨거운지 살이 다 익어 버릴 것 같았다. 남궁진혁은 머리를 내밀고 외쳤다.
“살려 줘! 살려…… 우억! 꿀꺽, 꿀꺽. 머리 누르지 마! 우억!”
“머리까지 잠겨야 합니다. 그래야 약이 완전히 스며들지요.”
“익사…… 우억, 나 죽…… 꿀꺽.”
이대로 있으면 익사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퍼뜩 스쳤다.
‘빠져 죽으면 어쩌려고 눌러 대는 거야! 설마 날 죽일 셈이냐, 정철!’
그러나 정철도 남궁진혁의 목숨을 끊을 생각은 없었는지 숨이 한계에 달할 때마다 손을 가볍게 해서 놓아주었다. 한 모금의 숨을 쉬고 나면 다시 머리를 짓눌러서 물속에 잠기게 했다.
결국 남궁진혁은 나무통의 물을 반쯤 마시고서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허억. 허억. 배가 터지겠다. 허억.”
개구리처럼 부푼 배를 안고 남궁진혁이 픽 쓰러졌다.
낮은 망가진 몸의 회복을 위해 시간을 할애했다. 그렇다면 밤에는 무엇을 했을까.
남궁진혁은 천의검공을 일단 접어 두고, 자신의 무공에 대해서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다. 그중에서도 내공심법에 집중했다.
“무극무한심법.”
진천검존이 직접 창안한 희대의 내공심법이다. 오행의 기운에 치우침이 없고, 음양의 조화에 어긋남이 없다. 일단 익히기 시작하면 걷거나 누워서, 심지어는 자면서도 운기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창안하고도 전수할 사람을 찾지 못하여 무림에는 이미 전설이 되어 버린 내공심법이다. 기재로 손꼽히는 제자 열 명을 데려다 놓고 가르쳤는데, 그중 일 푼이라도 깨우친 녀석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익혀 놓을걸.”
남궁진혁은 무극무한심법의 구결을 떠올리면서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사실 무림에 나갈 생각이 없어서 전생에 익혔던 무극무한심법은 손도 대지 않았던 것이다. 남궁진혁의 몸으로 익힌 것은 남궁성화가 가르친 대연신공이 전부였다.
지금도 무림에 나갈 생각도, 무공을 굳이 되찾아야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다만 몸을 고쳐야 천의검을 익힐 것이고, 무극무한심법처럼 심신의 균형을 잡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는 심법이라면 도움이 될 것이라 여긴 것이다.
남궁진혁은 눈을 반개하고 자세를 잡았다.
대기에 흐르는 기운을 들이마시고 각 혈도로 이끌었다.
스으으.
전대 천하제일고수의 독문심법이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려 하고 있다.
남궁진혁의 두 손이 펼쳐져 둥근 원을 그렸다. 천천히 움직이는 그의 손에 무극이 담겼다.
한참이 지난 후, 남궁진혁이 눈을 번쩍 떴다.
“그래, 실패할 줄 알았다. 내가 하는 게 다 이렇지, 뭐. 인생 별거 있어?”
혈도가 모두 폐맥됐는데 진기가 흐를 리 있나. 혹시나 하고 시전한 무극무한심법은 시작도 못해 보고 목구멍 언저리에서 맴돌다 사라졌다. 남궁진혁은 이제 일이 실패해도 심드렁한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
한 달이 지났다. 낮에는 정철의 치료를 받고, 밤에는 전생의 무공을 되새기니 시간이 쏜살같이 지났다. 그러나 기혈의 뒤틀림은 쉽게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내공이 없으니 아무리 많은 무공을 떠올려도 그림의 떡이었다.
십이월 말, 눈이 무던히도 내렸다. 밤새 내리고도 그칠 줄 모르는 눈을 남궁진혁이 시큰둥하게 바라보았다. 미간에 한 줄기 주름이 잡힌 게 영락없이 심술꾸러기다. 그 심술꾸러기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저들은 누구냐? 오늘 중요한 손님이라도 있었어?”
방을 청소하던 시비가 남궁진혁이 가리키는 창밖을 보고 탄성을 질렀다.
“아! 오늘 제갈세가에서 손님이 오기로 되어 있었어요.”
“제갈세가?”
남궁진혁이 눈을 굴렸다. 남궁세가와 함께 무림 사대세가 중의 하나로, 검은 옷을 입고 문사건을 쓰고 다닌다. 무복을 입지 않는 특이한 무림세가였다.
‘만통자가 제갈세가의 문주였지. 마주치지 않는 게 좋겠다.’
무불통지 만통자, 지략이 하늘에 닿았고 각종 진법, 기관에 통달한 기인이다. 지금도 살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전생의 인연과 마주치고 싶지는 않았다.
대외적으로 남궁진혁은 주화입마의 후유증으로 요양 중이었다. 손님이 왔다고 해서 인사를 드리러 나갈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남궁진혁은 제갈세가에 대해서 신경을 끄고 정철에게 치료를 받으러 나갔다.
눈발이 차갑다. 금강불괴에 이어 한서불침마저 깨졌다는 걸 남궁진혁은 새삼 깨달았다. 옷 속으로 파고드는 한기에 몸이 떨렸다.
“이익, 춥다. 추워! 정철, 나 왔어! 들어간다!”
벌컥!
추워서 대답을 듣지도 않고 문을 벌컥 열었다. 세가에 아픈 사람이 특별히 없었기 때문에 대개의 경우 정철은 한가했다. 이맘때쯤 찾아온다는 것도 알고 있었으니 양해를 구할 필요도 없었다.
평소에는 그랬다.
“얼레? 누구야?”
쳐들어와서 할 소리는 아니다.
남궁진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진맥을 받고 있는 소년에게 물었다. 창백한 안색의 소년은 한순간 말을 잃었다.
“오늘 치료는 손님이 있어 조금 늦게 하자고 연락드리는 것을 잊었군요. 소가주님, 찬바람 들어옵니다. 문 닫으세요.”
남궁진혁이 그제야 문을 닫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상대의 신분을 알아차린 소년은 살짝 고개만 끄덕여 인사했다.
“소문이 자자한 금룡공자로군요. 저는 제갈상진입니다.”
“남궁진혁이다.”
냉큼 하대를 쓰자 정철이 당황하여 입모양으로 ‘이쪽도 소가주입니다’라고 알려 주었다. 그러나 새파란 애송이에게까지 온대를 해 줄 남궁진혁이 아니었다.
‘소가주라면 가주의 아들이겠고, 아직 제갈가의 가주가 바뀌었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으니 만통자의 손자 녀석이군.’
제갈상진의 안색은 창백했다. 병이라도 앓고 있는지 피부에 핏기가 없고 몸이 깡말랐다. 맑게 빛나는 눈을 보니 제갈세가의 자식답게 총명한 두뇌를 물려받았을 것인데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모양이었다.
“잠시 두 분은 여기 계시겠습니까? 저는 약재를 좀 챙겨 와야겠습니다.”
정철이 자리를 비우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남궁진혁은 제갈상진을 곁눈질로 뜯어보았으나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 침묵을 견디다 못한 제갈상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눈이 참 많이 오는군요.”
“겨울이니까.”
남궁진혁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만통자의 손자라서 관심을 갖고 보았는데 몸이 저리 약해서야 실망이다.
남궁세가 소가주의 반응이 냉담하니 제갈상진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렇지요. 겨울이니까요. 이처럼 눈이 많이 오면 민초들이 겨울을 나기가 힘들 텐데 말입니다.”
“…….”
“그, 그렇지 않습니까?”
뭐랄까. 어색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해서 대화거리를 찾는 모양인데, 도저히 맞장구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아직 열 살도 되지 않은 소년들이 나누기에는 지나치게 고지식한 화제가 아닌가. 남궁진혁이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자 제갈상진은 점점 주눅이 들었다.
“그런데 어디가 아픈 거야?”
“아, 저 말입니까?”
남궁진혁이 질문을 던지자, 제갈상진이 살았다는 듯이 얼굴을 폈다. 그러나 질문 내용 때문인지 곧 씁쓸한 표정이 됐다.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했습니다. 특히 심장이 약하지요. 삼양절맥이라고 불리는 희귀한 병입니다. 아마 모르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