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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검존 1권 20화


제9장 의욕 상실 사우비(2)


그래도 사우비가 우물쭈물하자 곽우전이 등을 떠밀었다.
“빨리! 모두 기다린다고!”
사우비가 주춤주춤하며 남궁진혁에게 다가갔다. 너무나 민망하고 송구하여 감히 도련님 앞에 나타나기도 겁이 났다. 햇볕을 쬐며 산책을 즐기던 남궁진혁이 사우비를 발견했다.
“얼레? 사우비 아니냐? 웬일이야?”
“예, 도, 도련님. 다, 다름이 아니오라 이대제자들의 수련 때문에 속하가 잠시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습니다.”
남궁진혁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오랜만에 나타나서 자리를 비운다니?’
이해가 가질 않았지만, 상대가 사우비이다 보니 남궁진혁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대제자들과 수련이라도 하고 오겠다는 소리로 이해했다.
“다녀와.”
남궁진혁이 귀찮다는 듯이 손을 젓자 사우비가 공손히 인사를 하고 곽우전과 함께 후원을 빠져나갔다. 남궁진혁은 멀어지는 사우비의 뒷모습을 보다가 이내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사우비 저 녀석은 왜 요즘 호위를 안 서는 거지? 통 보이지도 않고……. 짤렸나?’
설마 사우비가 수십 장 밖에서 은밀히 호위를 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남궁진혁이다. 둔해서 짤렸나 보다 하고 생각하는데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토룡아, 놀자!”
빠득!
남궁진혁이 이를 갈고 눈에 불을 켰다.
“제갈성진, 네 이노오오옴!”
멀리서 헤실헤실 웃으며 나타난 것은 제갈성진이었다. 남궁진혁은 금룡검을 움켜쥐고 바람같이 제갈성진을 쫓았다.

사우비가 도착한 연무장에는 수십 명의 이대제자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우비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왜 이렇게 늦었어! 동기들이 너 때문에 기다리고 있었잖아!”
“소가주의 호위무사가 되었다고 이제 동기들을 우습게 보는 거냐?”
사우비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이 꼭 겁에 질린 것처럼 보였다. 덕분에 다른 이대제자들은 기세가 등등해졌다.
“저런 둔한 녀석이 어떻게 소가주의 호위무사가 되었는지……. 쯧쯧, 소가주만 불쌍하지.”
“아니야. 소식 못 들었어? 알고 보니 소가주도 광증이 도졌더래. 그 주인에 그 호위지, 뭐.”
사우비가 울상을 지었다.
‘나 때문에 도련님까지 욕을 먹고 있다. 으흑, 역시 나는 호위무사로서 실격이야.’
“흥, 태생도 모르는 천한 것.”
사실 사우비가 욕을 먹는 것은 둔하거나 성격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의 출신이 문제였다. 다른 이대제자와 달리 사우비는 정식 입문제자가 아니라 남궁세가의 교관이 주워 온 고아였던 것이다.
사우비가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자, 곽우전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딱히 사우비에게 호감이 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출신을 문제 삼아 몰아붙이는 것도 보기 싫었다.
“자자, 적당히 하고 빨리 대연검법을 수련하자고, 벌써 시간이 많이 지났잖아.”
곽우전의 말에 사우비를 구박하던 이대제자들도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사우비가 우물거리고 있자, 결국 다시금 구박이 터져 나왔다.
“빨리 대연검법을 펼치라고, 곰 같은 자식아!”
“여태 뭐 하고 있는 거야! 저러니 어미도 모르는 자식이라는 소리를 듣지.”
어떻게 화제를 돌려도 비난은 끊이질 않았다. 사우비가 구원을 청하듯이 눈을 들어 곽우전을 바라보았지만, 곽우전도 이제는 고개를 돌려 버리고 외면했다. 사우비는 한숨과 함께 허리춤에 장식품같이 매달린 검으로 손을 옮겼다. 힐끔 사람들을 한번 둘러본 사우비가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시작을 알렸다.
“그, 그럼 시작한다?”
사우비는 울 것 같은 얼굴을 한 채 자신의 검을 뽑았다.
스르릉.
사우비가 검을 들자 소란이 그쳤다. 스스로는 몰랐으나 사우비의 표정도 바뀌었다. 검을 잡았을 때의 사우비는 마치 다른 사람과 같아서 경건하고 엄숙했다.
검이 도도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사우비의 검은 날렵하고 절제되었으며 예리했다. 만약 남궁진혁이 보았다면 ‘너는 누구냐!’ 하며 외쳤으리라.
“역시…….”
누군가 신음을 삼켰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사우비의 성취는 이대제자 중에서도 발군이었다. 그들은 아직 검초를 따라가기에 급급했는데 사우비는 자로 잰 것처럼 정확하게 펼쳤다. 내공만 받쳐 준다면 이미 일대제자들을 뛰어넘었을 실력이었다. 그래서 이대제자 중에서 소가주의 호위를 사우비로 뽑는다고 했을 때, 불만은 가졌으되 누구도 반박하지는 못했다.
단 한 번, 대연검법 십이식의 검초를 펼쳐 냈을 뿐인데도 사우비의 전신이 땀에 푹 절었다. 극도로 예리하고 정교한 검초를 펼치기 위해 온몸이 완벽하게 검초에 집중한 탓이었다. 검이 마지막 초식의 끝을 그림처럼 뽑아냈다. 숨을 멈추었던 제자들이 그제야 한탄과 감탄 섞인 한숨을 토하며 긴장을 풀었다.
잠시 사우비의 검에 넋을 잃었던 이들의 얼굴이 어느 순간 벌게져 있었다. 종종 보았던 사우비의 시연인데도 볼 때마다 넋을 잃게 된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한 탓이다.
“하! 그래 봐야 사우비지. 초식만 따라 할 줄 안다고 강한 건 아니야.”
“큭큭큭, 그건 그렇지.”
누군가 외친 말에 동조하듯이 다시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이대제자끼리의 대련에서 사우비는 단 한 번도 이겨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검초를 펼치는 것은 고사하고 상대를 앞에 두고 굳어서 움직이지를 못하니까. 실력이 아깝다고 혀를 차는 교관들은 물론이거니와 처음 사우비의 시연을 보고 긴장했던 동기들은 이제 누구도 없었다.
“그만하면 됐어! 이제 잘난 소가주나 모시러 가라고! 썩 가지 못해?”
심술이 덕지덕지 붙은 이대제자가 소리쳤다. 그게 너무 심하다 싶었는지 옆에 있던 동기가 말렸다.
“야야, 가서 이르면 어쩌려고 그래.”
“야, 사우비! 이를 거야?”
심술 단지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묻자 사우비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아, 아니…….”
“큭. 거봐, 겁쟁이라니까.”
심술 단지가 만족스럽게 웃자 이대제자들 사이에서도 경멸의 웃음이 어렸다. 남궁세가에서 받는 제자들은 모두 가문이 보장되어 있고, 자질이 뛰어나다. 무림 사대세가의 하나인 만큼 구파일방에 뒤지지 않는 특권 의식이 있는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우연히 운이 좋아서 흘러들어 온 사우비가 좋게 보일 리 없었다. 게다가 성격까지 유순했기 때문에 자연히 먹잇감으로만 보였다.
그나마 소가주의 호위가 되기 전에는 그래도 지금처럼 무조건 구박만 하지는 않았다. 천성이 착하다 보니 그렇게 구박하진 않아도 그냥저냥 좋게 보고 무시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사우비가 앞으로 남궁세가에서 가장 확실한 출셋길인 소가주의 호위가 되자, 그냥 무시하던 동기들마저 사우비를 질투하여 구박하기 시작했다.
“사우비, 됐으니까 빨리 가 봐. 소가주가 찾겠다.”
결국 곽우전이 슬며시 나서서 사우비를 보낼 때쯤엔 미친 소가주와 바보 호위에 대해 한 편의 소설을 써도 될 만큼의 이죽거림과 경멸의 말들이 쏟아졌다.

돌아오는 길에 사우비는 강재일을 만났다. 강재일은 일대제자의 지도를 맡은 교관 중 하나였다.
“오오, 오랜만이구나. 사우비야, 그동안 잘 지냈느냐?”
“안녕하십니까, 강 교관님.”
고개를 푹 숙이고 걷던 사우비가 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하고는 반색했다. 강재일은 그가 좋아하는 몇 안 되는 교관 중 하나였다. 원래 강재일은 이대제자를 가르치는 일을 맡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일대제자의 담당으로 바뀌었다.
“제자는 아주 잘 지냈습니다.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나야 잘 지내지. 도련님의 호위무사가 되었다는 소식은 진작 들었다. 하하하, 내가 제자 하나는 잘 키웠구나. 네 덕분에 내가 어깨를 펴고 다닌다.”
강재일이 호탕하게 웃자, 사우비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안색이 좋지 않구나.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
“제자가 왜 호위무사가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너무나 부족하여 도련님을 지키지도 못했는데……. 저보다 나은 사람은 얼마든지 많은데 어째서 제가 뽑혔는지 모르겠습니다.”
강재일은 그제야 얼마 전에 소가주가 주화입마에 빠졌다는 얘기를 떠올렸다. 당시에 외부에 나가 있었고, 소가주의 회복이 빨라 잠시 잊고 있었던 얘기였다.
물론 남궁세가의 소가주에게 변이 생긴 만큼 보통 큰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설마 사우비가 그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 일은 네 책임이 아니다. 네가 아니라 나라고 하더라도 주화입마에 든 사람을 지킬 수는 없는 법이다. 괜한 자책 말거라.”
“그러나 이대제자 중에 제가 가장 약합니다. 제자에게 호위무사의 임무는 너무 과분합니다. 저는, 저는 쓸모없는 놈입니다!”
말을 하다 보니 감정이 격해졌다. 남궁진혁이 피를 토하고 쓰러진 모습이 떠올랐다. 사우비의 얼굴이 조금씩 붉게 달아올랐다.
“저 때문에……. 크헝헝! 제자 때문에 소가주님이 다치셨습니다! 크허헝! 제자는 지키지 못했습니다. 크허허헝!”
곰처럼 거대한 사우비가 울었다. 아녀자가 우는 소리와는 차원이 달라서 사방이 진동했다.
강재일이 기겁을 하고 사우비를 말렸다.
“뚝! 뚝 그치지 못하겠느냐! 네 나이가 몇인데 질질 짜는 것이냐!”
“흐어어엉! 도련님! 흐어어엉! 읍!”
“조용히 하래두!”
강재일이 사우비의 입을 틀어막았다. 사우비가 눈물을 줄줄 흘리는 꼴은 곰이 통곡하는 것만 같았다.
‘너는 십 년이 지나도록 몸만 컸지 속은 그대로구나.’
강재일은 울고 있는 사우비를 보며 답답한 심경을 느꼈다.
십여 년 전, 강재일은 무술 교관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남궁세가의 무사로서 강호에서 현역으로 뛰는 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산골 마을을 지나다가 동네 아이들에게 두들겨 맞고 있는 사우비를 발견했다. 그때의 사우비는 덩치가 또래 아이들보다 두 배는 컸는데도 손 한 번 뻗지 못하고 맞고만 있었다.
“뒈져라, 이 고아 자식아!”
“돼지! 우리 동네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지!”
강재일은 씁쓸한 기분을 느끼며 그곳을 지나치려 했다. 어느 마을에든 이런 아이는 한둘쯤 있었다. 당장 도와준다고 해도 강재일이 가 버리고 나면 더욱 커다란 보복이 아이에게 향하리라.
“또 왜 나타났어? 또 항아리 들어 준다고 하고 던져 버리려고?”
“아니면 나무 쪼갠답시고 도끼 자루 부러뜨리려고 왔냐?”
몸을 돌리려던 강재일은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으헝헝! 아니야! 나는 그냥 일을 도와주려고……. 아이쿠, 으헝헝!”
“일을 도와줘? 웃기고 있네. 그 핑계로 밥 얻어먹으려는 거잖아. 먹기는 더럽게 많이 먹는 주제에 일을 도와주기는커녕 사고만 치잖아! 뒈져랏!”
퍼억! 퍼억! 퍼억!
십여 명의 꼬마들이 모여 발길질을 하니 소리가 제법 컸다. 그러나 덩치 큰 아이는 울음을 터뜨려도 비명은 지르지 않았다. 강재일이 무심코 꼬마들에게 말을 건넸다.
“어이, 너희들, 잠깐 멈추어 보아라.”
몰매질을 하던 아이들이 힐끗 강재일을 돌아보았다. 웬 참견이냐는 눈빛이었는데, 옆구리에 찬 칼을 보더니 새파랗게 질려서 얌전해졌다. 그중 골목대장 격인 꼬마가 머뭇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무슨 일이세요?”
“어째서 그 아이를 괴롭히는 거냐?”
“괴롭힌다고요?”
골목대장 꼬마의 입매가 비틀렸다. 꼬마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손가락으로 덩치 큰 아이를 가리켰다.
“우리가 사우비를 괴롭힌다고요? 저 사고뭉치 곰탱이를요? 쟤가 우리를 괴롭힌다고요!”
“지금 둘러싸서 패고 있지 않느냐?”
“아저씨가 모르고 하시는 말씀이에요.”
골목대장 꼬마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사우비는 원래 마을에서 떨어진 산기슭에 할머니와 함께 살던 아이였다. 그러나 사우비가 다섯 살이 되던 해에 할머니가 노환으로 이승을 떠났다. 그 이후로 사우비는 마을로 와서 집집을 돌며 빌어먹고 살았다.
문제는 사우비가 너무 많이 먹는다는 것이었다. 웬만한 성인 남자보다 많이 먹으니, 넉넉지 못한 동네에서는 크나큰 부담이었다. 눈총을 받던 사우비는 자신이 일을 돕겠다면서 설쳤다. 마을 어른들은 그나마라도 도움이 될까 하여 수긍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에 벌어졌다.
사우비는 타고난 장사였다. 아직 일곱 살에 불과한데 쌀가마니를 번쩍 들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장사는 장사이되 힘을 조절할 줄 모르는 장사였다. 사우비가 깨 먹은 장독이며, 잘못 떨어뜨려서 터뜨린 가마니며, 옮기다가 깨 먹은 집기가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어른들은 사우비를 쫓아냈고, 마을 아이들부터 사우비를 따돌리고 괴롭히기 시작했다. 벌써 사우비가 맞고 지낸 지 삼 년이나 지났다.
“생각을 해 봐요. 아저씨 같으면 한 식구 먹을 밥을 혼자 먹어 치우고 사고만 치는데 가만 놔두겠어요? 오지 말라고 해도 계속 오니까 패서 쫓아낼 수밖에요.”
다른 꼬마들이 맞는 말이라며 맞장구를 쳤다.
“이름이 사우비라고?”
강재일은 덩치 큰 아이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팔로 얼굴을 가리고 웅크리고 있던 덩치 큰 아이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강재일을 보았다.
“네.”
강재일은 사우비를 일으켜 주었다. 그와 동시에 몸을 살짝 훑으니 근골이 뛰어났다.
‘이 정도의 강골이라면 신력(神力)을 타고났을 수도 있다.’
처음에는 아이들의 말이라 믿지 않았다. 그런데 사우비의 몸은 정말로 힘이 좋아 보였다. 강재일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풀어 칼집째로 사우비에게 주었다.
“들어 보거라.”
“네? 아, 알겠어요.”
사우비가 두 손을 공손히 내밀었다. 강재일이 고개를 저었다.
“한 손으로.”
사우비는 영문을 몰랐지만 강재일의 검을 한 손으로 받아 들었다. 강재일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정말로 장사로구나! 내 검은 웬만한 사람도 한 손으로 들기 어려운 것인데!’
“너, 나랑 가자!”
“어, 어디로요?”
“남궁세가로!”
“에에에엑? 사우비를 남궁세가로 데려간다고요?”
사우비는 영문을 몰라 눈만 끔뻑거렸고, 골목대장은 거짓말이라며 비명을 질렀다. 강재일은 대답도 듣지 않고 사우비를 주워갔다.

그로부터 십 년이 흘러 사우비도 스무 살의 청년이 되었다. 사우비는 강골을 타고난 만큼 무공에도 자질이 있어서 남궁세가의 무공을 빠르게 익혀 나갔다. 그러나 순하고 심약한 심성은 그대로라서 무공을 익힐 줄만 알았지 쓸 줄을 몰랐다. 오죽하면 동기들에게 이겨 본 적이 없겠는가.
강재일은 착잡한 마음으로 울고 있는 사우비를 보았다.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우비는 변한 게 없었다. 괴롭힘을 당해도 반항하지 않았고, 무슨 일이 생기면 자기 탓인 줄로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