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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검존 1권 22화
제10장 정천맹(2)
남궁진혁의 나이도 어느덧 열일곱, 사우비의 허리 아래에도 채 미치지 못했던 소년은 어느새 턱 밑의 솜털이 슬그머니 색을 더해 가 청년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남궁성화의 머리에도 희끗한 서리가 내려앉았고, 평생 변함없을 것 같던 하옥란의 옥용도 세월을 비껴가지는 못했다.
주방의 찬모들 중의 몇몇이 바뀌었고, 남궁세가에 땔감을 대는 사람은 이제 나이가 들었다며 아들을 대신 보내오고 있었다. 남궁가의 검수들을 위해 검을 만들던 대장장이 역시 후계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표표히 여행을 떠났고, 사우비의 시연을 보며 검초를 배워 가던 동기들은 어느새 무림에 나가 자신의 실력을 시험하는 데 여념이 없어 세가조차 잊은 듯이 보였다.
든 사람, 난 사람, 기다리는 사람과 떠나는 사람들.
사우비가 기억하는 얼굴들만도 이제는 셀 수 없을 지경으로 바뀌고 또 바뀌었다.
그러나 한 집안의 사람들은 이렇게나 변해 가는데도 세상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 것 같았다.
십 년 전에도 그러했듯이 하늘은 여전히 구름 한 점 없이 높고 푸르고, 마구간의 말들은 피둥피둥 살이 올랐다.
농가의 사람들은 여전히 농사를 지었고, 어부는 물고기를 낚고 사냥꾼은 사냥을 한다.
그리고 무림은 여느 때와 같이 큰일이 없이 조용했다. 사도의 무리들이 나타나지도 않았으나 사도의 무리들이 완전히 일망했다는 소식도 들리지 않았다.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리고 십 년 후에도 아마도 세상은 그리 변하지 않을 것 같았다.
진천검존이 세상을 정리한 이후로 늘 그랬듯이…….
꼬르륵.
그리고 배도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시간에 요동을 쳤다. 사우비는 하늘 보고, 단풍 보고 마음을 다잡은 후 열심히 비질을 시작했다.
‘이제 배만 부르면 금상첨화다. 빨리 하고 밥 먹자.’
그때였다. 공기를 찢는 파공성이 들린 것은.
쉬쉬쉬쉭!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요란했다. 흙먼지가 뽀얗게 일어났다. 바닥을 딛는 발이 보이지 않았다. 평온하게 마당을 쓸던 사우비를 향해 하얀 인영 하나가 흙먼지를 이끌고 점점 가깝게 다가오고 있었다.
“헉!”
‘긴급사태다!’
사우비가 빗자루를 던져 버리고, 두 팔을 넓게 벌려 별채의 입구를 막아섰다.
“흥! 감히!”
날카로운 코웃음과 함께 하얀 인영이 허공에서 몇 번 몸을 흔들었다.
휘리릭.
몇 개로 갈라진 인영이 사우비의 눈앞을 현혹했지만 사우비는 우직하게 몸을 오른쪽 아래로 던졌다.
촤악!
그러나 사우비가 쫓은 것은 잔상에 불과했다.
“느려!”
“으헉!”
제갈성진은 넘어진 사우비의 등을 밟고 유유히 별채 안으로 들어섰다. 무너진 사우비가 찢어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도련님, 도망!”
흙먼지를 날리던 그 모습 그대로 별채로 질주한 제갈성진의 입술이 실쭉 올라갔다. 도망? 얼마든지 도망쳐 보시지.
“토룡아!”
쿠당탕! 쿵탕!
방 안쪽에서 뭔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때 이미 제갈성진의 손은 남궁진혁의 방문 고리를 잡아 열고 있었다.
그 소리에 사우비는 질끈 눈을 감아 버렸다. 오로지 남궁진혁에게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또…… 지켜 드리지 못했습니다.’
“우리 토룡이, 잘 지냈냐! 형님 오셨다!”
“으와아아악!”
발버둥을 치며 도망가려던 남궁진혁은 창문을 넘다가 제갈성진의 다리에 걸려 다시 방 안으로 패대기쳐졌다.
“푸하핫! 삼백육십이 전 삼백육십이 승!”
남궁진혁의 몸에 한쪽 발을 척 걸친 제갈성진이 하얀 부채를 쫙 펼치며 광오하게 외쳤다. 조금 버둥거리던 남궁진혁은 이내 체념한 듯 눈을 감았다. 별다른 반응이 없자 제갈성진이 발끝으로 남궁진혁의 옆구리를 툭툭 찼다.
“야, 야, 죽었어?”
“다 했으면 발 치워라.”
남궁진혁의 목소리는 차갑고 냉정했다.
“…….”
시무룩해진 제갈성진이 발을 치우자 남궁진혁이 몸을 툭툭 털고 일어섰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쉰 남궁진혁은 쓰러진 책들을 정리하고 한 권의 책을 집어 책상에 앉았다.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제갈성진이 구석으로 가서 손가락 끝을 바닥에 척 걸치더니 빙글빙글 그림을 그렸다.
“우리 진혁이가 변했어. 예전엔 내가 오면 온몸으로 반겨 주더니, 요샌 만날 책만 보고. 나 없으면 잠도 잘 못 자더니, 이제 나 같은 건 잊어버린 거야? 흑!”
“누가 우리 진혁이야! 누가 잠을 못 자! 이이익!”
남궁진혁이 들고 있던 책을 제갈성진에게 집어 던졌다. 원했던 반응이 돌아오자 제갈성진은 유유히 책을 피하고 낄낄 웃었다.
남궁진혁이 이를 갈며 외쳤다.
“또 왜 온 거냐!”
“또 왜 왔겠냐?”
남궁진혁이 말없이 제갈성진을 노려보았다. 제갈성진이 히죽 웃었다.
“심야 대탈주극이라고 들어 봤냐? 호위무사 다섯을 뚫고 시냇가 따라 낮은 포복으로 백 리를 기었지!”
“간단하게 말해!”
“가출했어.”
“씨발. 또야?”
제갈성진이 다시 구석에 앉았다.
“우리 토룡이가 이제 욕도 해요. 난 널 그렇게 안 키웠다, 진혁아. 흑흑흑.”
남궁진혁이 게거품을 물었다.
“하지 마, 그거! 그림 그리지 마! 자폐냐고! 하여튼 그러니까 먹여 주고 재워 줘.”
“안 먹여 주고 안 재워 주면 집에 갈 거냐?”
“그럼 널 뜯어 먹지 뭐.”
남궁진혁이 다시 책을 집어 던졌다. 제갈성진은 이제 날아오는 책을 옆에 쌓기 시작했다.
더 던질 책도 없어지자, 남궁진혁은 지독한 두통을 느꼈다. 새로 태어나서 가장 후회되는 일이 있다면 제갈성진과 연을 맺은 것이다.
제갈성진을 만난 이후로 남궁진혁의 삶은 고달파졌다.
일곱 살과 아홉 살의 첫 만남.
그 한 달의 기억만으로 끝났다면 차라리 잊어버리고라도 살지. 어느 날부터인가 가출했답시고 나타나 남궁세가를 시끌벅적한 시장통으로 만들어 놓는 데는 아주 도가 튼 제갈성진이었다.
처음 가출했답시고 남궁세가로 찾아왔을 때의 제갈성진은 그나마 가출 소년답기라도 했다.
때가 꼬질꼬질 낀 소년이 대문 앞에서 호방하게 ‘남궁진혁, 나와!’를 외쳤을 때만 해도 진짜 개방 거지인 줄 알았다. 그 거지가 히죽히죽 웃으며 ‘배고프다! 밥!’이라고 할 때까지도.
아무리 제갈세가가 있는 호북성과 남궁세가가 있는 안휘성이 가깝다고는 하나 어린아이가 혼자 찾아올 거리는 아니었다. 아니, 찾아올 수 있어서는 안 될 거리였다.
오는 와중에 호환을 당할 가능성은 물론이요, 애 혼자 다니는데 납치의 유혹을 느끼지 않을 산적 혹은 마적, 또는 유괴범은 왜 없었겠으며, 대체 뭘 먹고 어디서 잤단 말인가? 하루 이틀 걸려 찾아올 거리는 더더욱 아니니, 살아서 용케 찾아왔다 싶었다.
그때 연을 끊었어야 했다.
뭔가 무서운 놈이다 싶었을 때 연을 끊고 다신 오지 말라고 못을 박았어야 했다. 생각해 보니, 다신 오지 말라는 못을 해마다 박긴 박았던 것 같았다.
그 후로 제갈성진은 해마다 가출이랍시고 남궁세가에 찾아왔는데, 그때마다 때가 낀 정도와 배를 곯은 정도가 점점 줄어들었다.
작년부터는 옆집에 놀러 온 사람처럼 화사하기 짝이 없지 않은가. 먼지 한 톨 안 묻은 것 같은 백의가 하얗게 빛나지 않은가!
게다가 호북성과 안휘성을 오가는 동안 뭔 짓거리를 하고 다녔는지 별호까지 붙었다. 열다섯 살에 이미 백로공자라는 별호가 붙었으니 그 행실이 심히 궁금했다.
두통이 조금 더 심해졌다. 남궁진혁은 신음하듯이 제갈성진을 흘겨보며 말했다.
“그래, 조용히 처먹고 쳐 자다가 제발 빨리 가라.”
“우리 진혁이가 부끄러움을 타는 모양이네? 형님이 찾아와서 기쁘다는 표현을 그런 식으로 하다니.”
“오늘 그냥 너랑 나랑 같이 죽자!”
“고백이냐?”
“으와아악!”
금룡검이 울었다. 흙먼지가 피었다. 마당을 쓸던 사우비의 주변에 흙먼지가 동그란 원을 그렸다. 십 년이 지났지만 변한 것은 없었다. 사우비는 이제 포기한 표정이었다.
“죽어! 죽어! 죽으란 말이다!”
“하하하하핫!”
밤이 깊었다. 남궁진혁은 진이 모두 빠져서 자신의 거처로 힘겹게 돌아왔다.
하루 종일 제갈성진에게 시달리다가 하옥란에게 잡혀 이제껏 제갈성진의 수다를 경청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벌써 제갈성진의 나이는 열아홉이건만, 아직도 체면을 차릴 줄 몰랐다.
“지긋지긋한 망나니 녀석 같으니.”
남궁진혁은 책상머리에 앉아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벌써 제갈성진을 알게 된 지 십 년이 지났다는 것은 주화입마에 빠진 지도 십 년이 지났다는 소리다. 남궁진혁은 몰려오는 졸음을 참으며 책을 펼쳤다.
“하아암, 졸려 죽겠네. 오늘 안에 모두 읽을 생각이었는데.”
놀랍게도 그의 방에는 서책이 꽉 차 있었다. 과거의 금적풍이라면 상상도 못할 광경이었다. 그러나 남궁진혁이 책을 읽게 된 이유는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 남궁진혁의 주화입마는 무공으로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전대의 천하제일인이었던 자신으로서도 손쓸 도리가 없었고, 그렇다고 천수신의의 후예인 정철에게도 딱히 방법이 없었다.
여전히 정철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남궁진혁의 몸을 고치려는 노력은 하고 있지만, 남궁진혁은 스스로도 방법을 찾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기본적으로 의술이나 의술에 근접한 무공에 대해서 연구가 필요했다.
둘째, 주화입마에 빠져 있어도 천의검공을 연구하며 수련할 생각이었는데 도무지 책으로는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은 남궁진혁이 무의 극한에 닿았던 몸이라도 머리가 도무지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여 글로 쓰인 무리를 이해하기 위하여 책을 읽었다.
그러나 독서에 따른 부작용이 만만치 않았다. 자꾸만 책상에 가득 쌓인 서책이 서류 더미로 보였던 것이다. 남궁진혁은 책을 접하고 일 년 동안은 심각한 기시감에 시달리며 몇 번씩이고 책상을 엎고 발광했다.
“크아아악! 다 치워 버려! 죽어 버릴 테다! 또 이렇게 살 수는 없어!”
그렇게 발광하다 결국 정철에게 묶이기를 몇 번, 남궁진혁은 피눈물을 흘리며 광증을 억누르고 독서에 습관을 들였다.
그렇게 몇 해가 흐르자 독서라는 것이 제법 익숙해지기 시작했고, 십 년이 지난 지금 남궁진혁은 완전히 책에 빠진 문사로 보였다. 물론 보이기만 그렇게 보였다는 말이다.
이 모든 것이 오로지 죽음을 향한 가열 찬 행보라는 사실을 모르니, 사람들은 주화입마로 폐인이 된 소가주가 그나마 책에서 위안을 찾는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남궁진혁에게서 과거의 어린 고수를 기억하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남궁진혁은 한숨을 내쉬며 책장을 넘기려 했다.
“토룡아.”
빠직.
낮 동안 내내 사람 진을 빼 놨으면 이제 그만 해! 남궁진혁은 핏발 선 눈으로 목소리가 들린 창문을 노려보았다. 삐걱 소리와 함께 열린 창문에 덜렁 나타난 것은 의외로 제갈성진의 얼굴이 아니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호리병 하나가 창을 넘어 남궁진혁의 침상으로 던져졌다. 방금 전까지 오만 인상을 다 쓰던 남궁진혁이 표정을 풀며 침을 꿀꺽 삼켰다. 두 번째, 세 번째 호리병이 넘어왔을 때쯤, 남궁진혁은 몸을 일으켜 방문을 단단히 잠갔다.
“안주는?”
선인께서 말씀하셨다. 현실에 타협하면 달콤한 결과가 온다고.
남궁진혁은 선인인지, 범죄자인지 모를 사람의 말씀을 따르기로 했다.
“육포랑 저녁에 남은 오리 고기가 있더라고?”
마지막으로 창문을 넘어온 제갈성진의 허리춤에도 호리병 몇 개가 대롱거렸다. 제갈성진이 히죽 웃으며 마개를 땄다.
“자, 어서 형님이라고 부르지 못해?”
“형님!”
책 몇 권 읽었다고 본성이 어디 가겠냐.
알딸딸하게 취기가 올랐는데도 여전히 책에서 손을 떼지 않는 남궁진혁의 모습에 제갈성진은 한탄하듯이 말했다.
“진혁이 넌 대체 무슨 재미로 사냐?”
“죽지 못해 산다.”
“하루 종일 책만 보고 있으면 엉덩이에 땀띠 안 나냐? 당최 이해가 안 되네?”
육포 한 조각을 입 안에 집어넣으며 책장을 넘기던 남궁진혁은 시큰둥하게 어깨를 으쓱이고는 다시 책에 집중했다. 결국 제갈성진은 남궁진혁의 손에서 책을 빼앗았다. 남궁진혁은 벌그레하게 달아오른 제갈성진의 얼굴과 책을 번갈아 보다가 다른 책을 손에 쥐려 했다.
“인마!”
“아, 깜짝이야.”
하나도 놀란 얼굴이 아닌 남궁진혁이다. 제갈성진은 씩씩거리며 호리병을 나발 불고는 빈 병을 바닥으로 굴렸다.
“쳇, 이젠 여기 와도 별로 재밌지가 않아. 네놈도 점점 냉담해지는 거 같고…….”
잘 생각했다. 다신 오지 마라, 좀! 남궁진혁은 말 대신 얼마 남지 않은 술을 홀짝거리며 그렇게 생각했다. 제갈성진은 무심해 보이는 남궁진혁의 머리를 딱 때렸다. 남궁진혁이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죽을래?”
“허, 허, 허, 네 주제에?”
제갈성진이 기가 찬다는 얼굴로 손가락을 뻗어 남궁진혁과 자신을 번갈아 가리켰다. 무공도 없는 서생 주제에 지금 갑자 급 내공을 지닌 날 죽이시겠다고? 아이, 무서워서 죽겠네? 관심법을 익힌 적도 없는데 남궁진혁의 귀에는 제갈성진의 마음이 들렸다.
“이익…….”
발끈하려던 남궁진혁은 애써 마음을 다스리며 심호흡을 했다. 그 모습이 마음에 안 드는지 제갈성진이 벌러덩 침상에 드러누웠다.
“에효, 답답해 죽겠네.”
“그럼 집에 가든가.”
“집에 가면 더 답답한걸. 상진이 녀석도 제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다고. 놀 사람이 있어야지. 근데 너까지 방에 틀어박혀서 책이나 읽고 있으니, 내가 안 심심하겠냔 말이야!”
벌컥 소리치는 제갈성진의 모습에 남궁진혁은 혀를 찼다. 열아홉이나 먹어서도 아직 철이라곤 쥐꼬리만큼도 들지 않은 제갈성진을 보고 있으니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제갈성진이 불퉁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쪼끄만 게 어디다 대고 혀를 차?”
“내가 너보다 작았던 시절은 무려 이 년 전에 지나갔다네.”
말 그대로, 어느새 남궁진혁은 제갈성진을 내려다볼 정도로 자랐다. 또래에 비해 작은 편이었던 키가 언제였냐는 듯이 훌쩍 자란 남궁진혁에 비해 제갈성진의 성장은 느린 편이었다. 언젠가부터 머리 하나쯤 아래에 제갈성진의 머리가 있었다.
“흥! 그래 봤자 넌 토룡이라고. 쥐톨만 하던 녀석이 키만 커졌다고…….”
괘씸하다는 듯이 얼굴을 붉힌 제갈성진이 손을 휘둘렀다. 술이 얼큰한지 휘젓는 손에 힘이 들어 있지 않았다. 남궁진혁은 비틀거리면서도 몸을 일으켜 제갈성진의 몸을 바닥으로 굴렸다.
“아프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