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불사문 1권 12화
4장. 불사(不死) (4)


만유정이 다시 본래의 몸으로 되돌아오자 휘몰아치던 도끼도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 관문도 통과한 것이다. 만유정은 이리저리 손을 휘저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슥삭. 슥삭.
이리저리 휘젓는 손이 너무나 넓었기에 다시 기관의 도끼들을 건드렸지만 잘려 나가는 족족 순식간에 재생하며 만유정의 진격은 거침이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만유정은 세 번째 관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크아아아아!!!!!!!!!!!!!”
거대한 용암 덩이리로 가득한 세 번째 관문. 만유정은 그 용암을 바라보며 크게 소리를 내질렀다. 그리고는 그대로 용암을 향해 몸을 던졌다. 마치 애초에 이곳을 목적으로 온 것처럼 말이다.
만유정이 호신강기를 두를 정도의 고수도 아니었고 용암에 빠지는 순간 만유정의 신체는 그대로 녹고 말았다.
그 뜨거운 열기에 만유정을 이루고 있는 세포도 그대로 소멸되 가고 말았다. 팔대 문주가 겪었던 것처럼 만유정에게 드디어 죽음의 그림자가 찾아온 것이다.
영체화된 만유정이 다시 자신의 신체로 되돌아가려고 했지만 세포 하나 없는 신체에 다시 들어가기는 요연했다.
설사 세포를 찾는다고 해도 재생하는 족족 용암에 소멸될 것이 뻔했다. 더군다나 지금은 이지를 잃은 상태, 방금 이 관문으로 영체를 옮겨 떨어진 팔을 통해 재생을 시도하려는 논리적 사고도 지금 만유정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본능만이 존재할 뿐.
이성을 잃은 만유정은 영체에 관한 지배력도 잃은 상태였다. 그래서인가 만유정의 영체는 점점 소멸을 향해 허공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 속도는 처음에는 매우 느렸지만 점점 빨라지면서부터는 우주 저 끝까지 날아갈 기세였다. 아마 그리고 그렇게 하늘로 향하던 만유정의 영혼이 어느 기점이 되면 죽음이라는 이름하에 소멸될 것이다.
―안 돼.
그래서인가 갑자기 만유정의 내부로부터 거대한 울림이 울려 퍼졌다. 죽음의 위기 앞에 만유정이 드디어 한 줄기의 이성을 찾은 것이다.
만유정은 소멸을 향해 빨려가는 자신의 영혼을 다시 움직이려 했다. 그러나 만유정의 영체는 이미 기호지세였다.
과거 말 잘 듣던 영체가 만유정의 그런 바람에도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소멸을 향해 속도를 높여 갔다.
만유정은 점점 소멸을 향해 가는 영체를 붙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그러한 만유정의 노력은 마치 거대한 파도 앞에 낙엽이나 마찬가지였다. 점점 소멸을 향해 다가가는 자신의 영체를 바라보며 만유정은 결국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
죽는 건가.
황홀경에서 우주의 이치를 보려고 했던 오만함이 낳은 결과였던 것일까. 아니면 사실상 불사지체를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인 만유정의 욕심이 부른 인과응보인 것일까.
다만 확실한 것은 이제 곧 만유정은 죽음을 맞이할 것이고, 불사문의 염원은 다음 십일 대 문주로 넘어갈 거라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만유정은 왠지 아쉬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초대 문주부터 구대 문주 독구환까지의 아홉 문주와는 다르게 만유정의 인생은 불사문으로부터 시작됐다.
그리고 그러한 불사문과의 인연을 한 번도 후회한 적도 없었다. 그렇기에 만유정 역시 영생불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할 준비가 돼 있었다.
그래도 역대 문주들처럼 강호에서 실컷 놀다가 죽는다면 여한이 없겠지만 애초에 불사문으로부터 시작된 인생이기에 이대로 죽는다니 아무래도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문득 만유정은 독구환의 죽음을 보고 과거 서고에 적었던 내용을 떠올렸다.

초대 문주부터 구대 문주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불사에 실패하고 죽은 이유에 대한 원인을 발견했다. 그것은 살고자 하는 마음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래 아직 포기하긴 일렀다. 아니 포기할 수 없었다. 불사문의 영생불사가 실패로 끝난 것은 바로 이러한 살고자 하는 마음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만유정은 끝없이 추락하는 영체를 바라보며 다시 삶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
―죽을 수 없다.
소멸을 향해 빨려가는 영체를 끊임없이 다잡았다. 영즉심(靈卽心), 심즉영(心卽靈)이라. 스스로 죽음에 대해 기정사실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러한 영적 저항을 약하게 하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만유정은 생존에 대한 집념을 불태웠다. 자신의 기억이 시작되는 이곳에서부터의 인연 그리고 지금까지의 삶, 그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만유정의 뇌리로 스쳐 갔다. 그리고 이윽고 만유정의 기억이 자신이 이렇게 되기 바로 전 황홀경에 빠졌던 상태에 도달했다.
―아.
드디어 생각난 모양이었다. 자신이 긴 황홀경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만유정은 삶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던 중 탄성을 내질렀다.
삶에 대한 의지를 다시 포기한 것일까. 그러나 소멸을 향해 다가가는 영체가 갑자기 진행을 멈춘 것으로 보아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만유정은 죽음에 대한 저항을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삶에 대해 집념을 불태우는 것도 아니었다.
긴 황홀경에서 만유정이 본 우주의 이치. 그것은 생(生)과 사(死)에 대한 경계였다. 만유정은 그 경계로 자신의 영체를 내밀었다. 그리고 그 순간.
만유정의 주변은 어느새 다시 용암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용암으로 만유정의 신체가 다시 맹렬한 속도로 재생을 반복했다.
만유정이 그동안 생각했던 세포의 창조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창조와 함께 재생을 반복하는 만유정의 재생 속도는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순식간이었다.
용암의 세포 소멸도 이제는 만유정의 재생 속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어느새 만유정은 용암을 헤치면서 용암을 벗어났다.
“성공이다.”
과거 초대 문주부터 시작되던 영생불사의 길. 그 길을 십대 문주인 만유정이 완성한 것이다.
물론 지금 만유정에게 자신의 상태를 말하라면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닌 존재라고 말할 테니 어찌 보면 불사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불사문의 세 관문이 모두 통과됐다. 불사문의 염원이 드디어 만유정에 의해 해결됐다.
두두두두.
그것을 축하하려는 것인가. 갑자기 동굴 전체가 거대한 진동을 내뿜었다. 불사문의 동굴을 지탱하는 지각이 변동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뭔가 인위적인 엄청난 힘에 의해 작동하는 진동이었다.
그래서인가 용암에서도 거대한 진동과 함께 이리저리 동굴을 향해 용암을 흘리고 있었다.
“설마.”
만유정은 잠시 그 광경을 보고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역시나 동굴의 천장에서는 그 설마가 사실이 되고 있었다.
동굴의 진동은 점점 강해졌고 그 진동의 세기는 이내 한계점을 넘어 동굴의 근간을 흔들고 있었던 것이다.
불사문의 관문은 세 개가 아니었던 것이다. 저 거대한 진동과 함께 네 번째 관문이 작동하면서 이 동굴은 순식간에 무덤과 용암으로 변하고 말 것이다. 그것이 바로 네 번째 관문이었다.
만유정은 무너지는 동굴을 바라보며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 출구로 향했다. 그러나 출구는 이미 무너진 상태였다. 그리고 그런 만유정의 머리 위로 동굴의 천장이 무너지고 있었다.
쏴아악.
용암의 파도가 순식간에 동굴을 휘감았고 그대로 만유정의 신체는 거대한 동굴과 함께 잠기고 말았다.
네 번째 관문은 영생불사를 완성한 만유정을 끝으로 불사문의 운명도 같이하는 안배였던 것이다.
만유정의 몸은 이리저리 날아오는 돌멩이들에 찢겨지고 용암에 의해 녹여졌다. 그러나 생사의 경계를 뛰어넘은 만유정이기에 그러한 것들은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다.
네 번째 관문은 불사문의 흔적을 지우기 위함이지 세 번째 관문을 죽이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르르르. 쿵쿵. 쾅.
진동은 더욱 거세지고 어느새 동굴이 무너지면서 그러한 진동음도 절정에 다다랐다. 그리고 그 절정음과 함께 진동은 사라지고 그대로 불사문 또한 사라지고 말았다. 밖에서 본다면 작은 산이 그대로 폭삭 무너지면서 구릉으로 변했다고 할 정도로 거대한 변동이었다.
“이런.”
작은 산이 키가 작아져서 구릉이 됐다면 그 큰 키를 유지하던 것이 어디로 갔겠는가. 만유정은 자신의 몸을 누르고 있는 수많은 돌덩어리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옆에 작은 공간이 있었기에 그곳에서 신체를 재생시킬 수 있었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나가지.”
이 수많은 돌덩어리들을 헤치고 나갈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몇백 년 지나면 엄청난 내공과 함께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만유정의 힘으로는 무리였다.
만유정이 오 년간의 황홀경에서 얻은 우주의 이치는 어디까지나 영생불사에 관한 것이지 무공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영생불사에 가까워진다고 무공이 상승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지금 만유정의 주위로 이십 년에 해당하는 내공을 가지고 있었지만 무공에 대한 깨달음이 높아 검기라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내공을 담아 주먹질을 해봤자 자신을 덮고 있는 돌들은 요지부동이었다.
물론 죽진 않는다. 다만 나가려면 오랫동안 기다려야 할 뿐. 애초에 영생불사를 이루어도 딱히 세상으로 나갈 마음이 없었던 만유정이기에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진 않을지도 몰랐다.
“영체를 이용해 볼까.”
그의 머리에 차오르는 호기심만 아니었으면 말이다.
만유정은 문득 영체화하여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이제 세포를 창조하는 경지에 오른 그였기에 영체만 밖으로 나갈 수 있으면 그곳에서 신체를 재구성하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만유정은 한번 시도하기로 했다. 곧 만유정의 신체화 된 몸은 영체로 변화했다. 영체화 된 만유정은 돌을 향해 영체를 움직였다.
그러자 놀랍게도 영체는 그 돌을 그대로 통과했다. 아니 그 돌만이 아니었다. 그 뒤로도 수많은 돌들을 만유정의 영체는 순식간에 지나쳤다.
하나둘씩 그렇게 지나치다 보니 어느새 만유정의 영체는 돌무덤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세포를 창조하면서 자신의 신체를 재생시켰다.
천하제일쾌검수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빠른 검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아마 심검(心劍)이라고 말을 할 것이다.
흔히 모든 무공의 궁극은 결국 심도(心道)로 향하게 된다고 한다. 아무리 빠른 쾌검이어도 결국 인간의 마음보다 빠를 순 없기 때문이다.
만유정의 재생술도 일종의 그러한 심도나 마찬가지였다. 세포 창조를 하는 법 그것은 간단했다.
강한 의념을 일으키면 그 의념이 형상화되어 세포를 창조하는 것이 바로 세포 창조의 방법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심체(心體)의 경지라고 할까.
“하.”
어찌 됐든 만유정은 불사문에서 나오고 말았다.
“어.”
그리고 그런 만유정을 마침 옆에 떨어진 불사검이 반갑게 맞이하고 있었다. 만유정이 과거 만들었던 명검 일호인 불사검, 아무래도 인연인지 동굴이 붕괴되고 떨어진 장소가 만유정이 신체를 재생한 장소였다.



5장. 강호 (1)


생전 햇빛을 본 적이 없어서인지 온몸은 아기와 같이 새하얀 피부로 도배됐고, 그러한 피부와 함께 울퉁불퉁한 근육 하나 보이지 않는 몸은 묘하게 안 좋은 쪽으로 조화를 이루어 허약한 모습이었다.
그래서인지 몸의 비율부터 얼굴의 크기 그리고 생김새까지 절세의 미남자라 해도 손색이 없을 몸이지만 그것 역시 안 좋은 쪽으로 조화를 이루어 더욱 허약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더군다나 사람의 마음을 대변한다는 두 눈은 초점을 잃은 것처럼 이리저리 풀려 제 딴에는 생과 사를 초월한 사람의 눈이라고 주장할지 몰라도 남들이 보기에는 삶에 대한 의욕을 잃은 한심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한마디로 옷 한 점 없는 초라한 알몸에 칼집은 없지만 보기만 해도 서늘함이 느껴지는 검을 들고 있는 상태. 지금 만유정을 표현할 수 있는 외형이었다.
그래서인가 만유정의 앞에 서 있는 사나운 인상의 세 사내는 그런 만유정을 측은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정파 무림이 중원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대부분을 관할하고 있다지만 어디까지나 대부분이지 모든 곳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감숙, 청해, 신강으로 대표되는 마도 무림과 운남, 광동, 광서로 대표되는 사도 무림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감숙, 청해, 신강 지역은 마도, 운남, 광동, 광서는 사도의 중심지나 마찬가지였다.
청해성의 장우현 역시 그러한 마도의 영역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인지 청해성 곳곳에서는 산적과 도적들이 들끓었고, 비단길을 통해 교역하려면 마도맹에 막대한 통행료를 지불하지 않는 이상 통과가 불가능할 정도로 치안이 엉망이었다.
그런 청해인데 일행도 없이 혼자서 알몸으로 돌아다니고 있는 만유정을 산적들이 불쌍하게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가진 것 다 내놓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