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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문 1권 19화
7장. 마도맹으로 (2)


그러나 만유정의 표정은 그런 것이 아닌 뭔가 더 근원적인 의문의 표정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여인의 옆으로 한 노파가 모습을 드러내자 만유정의 얼굴에 나타난 의아함의 표정이 사라졌다.
‘위험하다.’
만유정의 영심안은 그 노파가 모습을 드러내기 전 이미 위험을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산적을 쫓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돌린 것인데 노파가 아닌 여인의 모습만 눈에 들어오자 잠시 의아했던 것이었다.
그렇게 상황이 파악되자 만유정은 여인과 노파를 다시 살펴볼 수 있었다. 그 결과 노파가 여인을 알게 모르게 호위하는 입장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신이 개세신의인가요.”
그 말은 정작 자신에게 용건을 가진 사람은 바로 눈앞에 있는 여인이라는 말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어진 여인의 말에 만유정은 왜 이 여인이 자신의 앞을 막았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예. 그렇게 불리곤 있습니다만 무슨 일이.”
만유정은 여인이 왜 나타났는지 짐작가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씌웅.
영심안이 위험을 알리는 것과 동시에 싸늘한 예기가 만유정을 엄습했다. 그리고 그 예기와 함께 어느새 만유정의 목은 싸늘한 예기를 풍기는 검과 나란히 하고 있었다.
영심안이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알면서도 못 막은 것이었다. 그만큼 발검부터 이어지는 검의 움직임은 순식간이었다.
“…….”
만유정은 자신의 목에 놓인 검을 잠시 바라보더니 노파에게 시선을 돌렸다. 설마 여인의 옆에 있던 노파가 자신의 목에 검을 들이댈 줄은 아무리 만유정이어도 예측했다면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제야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에 잠시 잊어버린 노파의 허리부터 가슴의 굴곡 그리고 오른팔까지의 전체적인 몸의 균형을 살필 수 있었다.
그러한 몸의 균형과 구조, 그리고 검이 날아오는 궤적. 곽수관의 의술을 뛰어넘은 만유정이다.
그는 노파의 몸을 통해 지금 앞에 있는 그녀가 쾌검의 달인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그러한 노파의 몸매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젊은 여인 역시 몸매로 보아 아마 그녀도 노파처럼 쾌검을 익혔음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결코 자신에게 반갑지 않은 목적을 가졌다는 것도 덤으로 알았지만 말이다.
노파의 검이 만유정의 목 언저리에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만유정에게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당신이 같이 가 주셨으면 하는 곳이 있어요.”
그리고 그 할 말은 노파의 입이 아닌 젊은 여인의 입으로부터 만유정에게 부탁 아닌 부탁이 나오고 있었다.
그나마 젊은 여인은 노파의 행동이 살짝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왕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했는지 곧 찡그린 인상을 다시 싸늘한 본래의 표정으로 되돌렸다.
불같은 노파의 성격을 이미 한두 번 겪는 것이 아니기에 이런 상황에 익숙한 여인이었다.
물론 익숙한 건 둘일 뿐, 만유정은 잠시 그녀의 말에 고개를 돌리며 눈을 마주쳤다. 이미 생사를 초월한 만유정에게 목 언저리에 놓인 검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만유정의 두 눈은 여전히 생사를 초월한 듯한 허무한 눈빛으로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표정이 변화 없다고 만유정의 심정이 변화가 없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예의가 없네.”
결국 만유정의 입이 열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말에 젊은 여인의 눈이 잠시 떨리고 말았다. 그녀 스스로도 지금 자신의 행위가 얼마나 도리에 어긋나는지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이구나. 지금 네놈에게 선택권이 있다고 보느냐. 험한 꼴 당하기 싫거든 조용히 따라오는 것이 신상에 좋을 것이다.”
그러나 노파는 그렇지 못한 모양이었다. 만유정의 예상과도 다른 반응에 잠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곧 날카로운 목소리로 위협했다.
아니 단순한 위협이 아니었다. 만유정의 목 언저리에 놓여 있는 검이 살짝 움직임과 동시에 엄청난 살기가 만유정을 향해 날아갔다.
의형살상(意形殺傷)이라고 흔히 고수와 중수의 경계를 나눔에 있어 기세로만 상대를 압박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한 척도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냥 고수도 아닌 고수 중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노파의 살기가 뿜어져 나왔으니 그 압박감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
아마 범인이 저런 살기에 직면한다면 오금을 저리면서 그대로 기절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강력한 기세였다.
하지만 노파의 그러한 협박도 상대 나름이었다. 어차피 살기라는 것이 상대에게 죽음의 공포를 일으켜서 효과를 보는 것인데, 이미 생사를 초월한 만유정에게 그러한 기세가 먹힌다면 그것이야말로 모순이었다.
그래서인가 갑작스러운 사태에 당황할 법도 하건만 만유정은 아무런 변화 없이 노파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하.”
그러더니 만유정의 입으로부터 한숨과 같은 실소가 뿜어져 나왔다.
“지금 누가 부탁하러 온 것인지 착각이 들 정도로 뻔뻔하네요. 설마 고작 이 검으로 저를 움직일 생각이었으면 잘못 찾아도 한참 잘못 찾은 듯싶습니다만.”
당연히 좋은 말이 나올 리 없었다. 그리고 그 말은 싸늘하던 노파의 표정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광금신의 돈만 밝히는 추잡한 의원이라더니 그래도 제법 강단은 있는 모양이구나.”
아무리 불같은 성격이어도 마냥 상황 판단 없이 살아왔다면 결코 저 나이에 저러한 무공을 소유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인가 그저 협박을 통해 만유정을 데리고 가려고 했던 노파는 잠시 살기를 거두고는 만유정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자신의 살기를 직접 접하고도 저렇게 아무런 변화도 없다는 것은 셋 중 하나였다. 그 자신의 무공이 자신에 비견되거나 그 이상이거나.
‘천성적으로 그 기세를 가지고 태어나고 그러한 환경에서 자라거나.’
그녀 스스로 천하십사대 고수를 제외하고는 적수가 없다고 자부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감각으로도 만유정이 가지고 있는 무공의 수준을 가늠할 수 없었다.
당연 만유정의 나이에 십사대 고수와 비견될 것이라는 건 말이 안 되는 억측이었으니 저렇게 생각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했다.
물론 만유정은 세 가지 모두 해당되는 상황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이렇게 된 이상 노파는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미 기호지세였다.
아마 만유정에 대해 미리 알고 있었다면 노파도 이런 성급한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강호에 만유정은 돈에 미친 신의로 유명해지고 있는 상황이었고, 그러한 선입견을 접한다면 어쩌면 노파의 행동은 중간이 생략된 가장 최적화된 결론인지도 몰랐다.
대개 탐욕에 눈이 먼 자들은 자기 자신을 누구보다 아끼는 경향이 크니깐 말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노파의 행동은 최악의 선택이었고 이렇게 된 이상 굽히고 들어가기에도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 기세는 제법 칭찬해 주마.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상황 판단은 필요하지 않겠느냐. 어차피 이왕 이렇게 된 거, 악의(惡醫) 하나 베어 내서 강호의 도의를 살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결국 노파는 더욱 강수를 두기로 작정했다. 방금 전까지의 말이 단순한 협박이었다면 이번에는 더욱 강도를 높여 생명에 대한 위협이었다.
“그럼 어디 한번 베어 보시던지요.”
당연 통할 리 없었다. 만유정은 실소를 넘어 황당함 가까운 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그 검이 제 목을 향해 날아오는 순간 노파께서도 그 정도의 각오는 하셔야 될 겁니다.”
아니 오히려 만유정은 노파를 향해 협박을 내뱉었다. 지금 만유정의 품에는 파천뢰 두 개가 언제든 터질 준비를 하고 있는 상태였다.
제아무리 노파가 엄청난 고수여도 만유정이 자폭 아닌 자폭을 한다면 그녀로서도 큰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없을 테니 결코 허언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을 느꼈음인가. 노파의 아미가 잠시 찡그러지면서 나이에 맞지 않게 보이지 않던 주름살도 생기고 말았다.
첫 단추가 어긋나고도 옷의 맵시가 살기를 바란다면 그만큼 얼토당토 한 얘기도 없을 것이다.
살면서 아직까지 자신의 기세를 제대로 받아 본 사람도 별로 본 적이 없거니와 그런 자들을 협박할 이유도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에 이번 일은 노파에게도 생소한 일이었다.
“이번 일은 우리가 성급했어요. 일단 검을 놓으세요.”
그것을 옆에 있던 젊은 여인도 느꼈는지 결국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말은 마침 어떻게 할 것인지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던 노파에게 가뭄에 온 단비와 같이 반가운 소식이었다.
곧 만유정의 목 언저리에 있던 노파의 검이 회수됨과 동시에 만유정을 향하던 살기도 씻은 듯 사라졌다.
“돈에 눈이 먼 신의라는 소문이 자자하길래 그 소문의 진의도 파악하지 못하고 이렇게 무례하게 군 것에 대해 먼저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살기가 사라졌다는 것은 엇나간 첫 단추를 다시 끼우겠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노파의 옆에 있던 젊은 여인으로부터 정중한 사과가 이어졌다.
“이렇게 무례를 범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급한 환자가 있어 신의께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니 이해해 주시고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만유정은 그 말에 여전히 무표정하게 여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러더니 살짝 인상이 찡그러졌다.
“여전히 누가 부탁하러 온 것인지 모르겠군. 갑자기 나타나서 목에 칼을 겨눈 것도 모자라 이제 와서 사과를 한다면 그걸로 뭐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 생각하다니.”
자신의 물건을 훔치려는 산적에게 똑같이 보복하려던 만유정이었다. 그런 만유정에게 병 주고 이제 와서 약 준다고 마음이 풀어질 것이라 생각했다면 아직도 두 여인은 상황 파악을 못하고 있는 셈이었다.
정작 만유정은 노파의 검에 아무런 위협도 느끼지 않고 있었는데, 두 여인은 만유정의 기세가 제법 사나우나 여전히 자신이 언제든지 우위에 있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는 착각에서 비롯된 상황이었다.
“옛부터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는 것이 당연한 이치인데 초면에 지은 죄가 있으면 당장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해도 시원치 않을 판인데 어찌 그리 뻔뻔하게 굽니까. 설마 그렇게 다시 사죄를 하면 제가 알겠다면서 순순히 따라가 치료를 해 줄 거라고 착각한다면 잘못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만유정의 말은 그러한 두 여인의 착각을 강타하는 강력한 일침이었다.
“네. 이놈! 정녕 네놈이 처한 상황을 모르는 모양이구나. 그 알량한 기세 하나를 믿고 본녀가 네 목을 치지 못할 거라고 허세를 부리고 있는 줄 아느냐.”
당연 그러한 일침은 불같은 성격의 노파에게는 분노로 다가왔다. 순식간에 다시 노파의 검집에서 검이 튀어나오면서 만유정의 목을 향해 날아왔다.
만유정은 이번에도 영심안으로 그 검을 감지했지만 좀 전과 마찬가지로 막지 못하고 그대로 목 언저리에 노파의 검을 허용하고 말았다. 물론 만유정의 표정은 여전히 변화가 없었지만 말이다.
“자고로 의원이란 첫째도 생명, 둘째도 생명이라고 사람을 치료하는데 있어 사심이 들어가지 말아야 하거늘 네놈이 돈을 탐하는 신의라고 소문난 것도 그런 계산적인 행동 때문에 빚어 낸 결과가 아니겠느냐. 어차피 세상에 의원이 네놈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닐 거. 본맹의 마의(魔醫)가 출맹하지만 않았어도 네놈을 찾아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노파의 검이 분노의 일갈과 함께 그대로 만유정의 피부를 싸늘하게 파고들어 왔다.
뚝뚝.
불사지체지 금강불괴지체는 아닌 만유정이기에 피부는 쉽게 검의 침입을 받고 그대로 피를 흘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만유정은 전혀 두려움 없이 노파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약간의 미소가 감도는 듯한 표정이었다.
단순히 무표정을 넘어 미소를 짓는다는 것은 흘러가는 상황을 은근히 만유정이 즐기는 듯한 느낌이었다.
씌웅.
싸늘한 적막감이 감도는 살벌한 대치 중 한 줄기 날카로운 바람이 불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 바람과 함께 노파의 신형도 순식간에 움직였다.
바람을 느꼈을 때는 이미 한 줄기의 날카로운 검이 다가온 상태였다. 그러나 노파 역시 만만한 상대는 결코 아니었다.
팅.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노파의 신형이 물러났다. 그리고는 만유정을 향하던 시선이 갑자기 나타난 흑의인을 향해 돌려졌다.
“사후 관리는 안 해 드린다고 했는데.”
그렇게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다름 아닌 만유정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만유정의 말에 갑자기 나타난 흑의인이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허허. 할 말이 없소.”
흑의인은 자신의 왼손에 있는 검을 꽉 쥐고는 만유정을 향해 대답했다. 좌수검을 쓰면서 저런 소리를 할 사람은 단 하나. 바로 얼마 전 오른팔 봉합수술을 받고 떠났던 자홍이었다.
오른팔 봉합수술을 받고 만유정이 오른팔에 내기를 주입하지 말라고 그리 말했건만 결국 재수술 받으러 만유정을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공교롭게 노파의 검이 만유정을 위협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기에 나타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