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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문 1권 20화
7장. 마도맹으로 (3)
“그나저나 어쩌다가 저 노괴물 하고 시비가 붙었소. 이 지독한 한기에 내 암습을 가볍게 막아 낼 정도의 실력을 가진 노파라. 분명 내 예상이 맞다면 한음마녀(寒陰魔女) 고두모 선배가 아니신지.”
그러나 나타난 것까지는 좋았지만 아무래도 방금의 일합으로 피해는커녕 오히려 손해를 본 자홍의 왼팔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그 짧은 순간에 검에 음한지기를 주입한 것이 자홍의 검을 향해 들어와 그의 왼팔에 타격을 입힌 것이다.
“이 뻥 뚫린 시야에서 그 정도의 은신과 검술을 갖춘 사람은 많지 않지. 더군다나 상대가 좌수검을 쓰는 사람이라면 분명 네놈은 생사섬 자홍이려구나.”
고두모는 자홍을 향해 시선을 돌리더니 날카로운 목소리로 그를 향해 말했다.
그 날카로운 기세에 자홍도 결코 무시하지 못했는지 잠시 말을 멈추고 내기를 조절해야 했다.
한음마녀(寒陰魔女) 고두모.
비록 모르고 행한 일이지만 아마 노파의 정체를 알았다면 자홍이 이렇게 무리하게 만유정을 구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그녀가 주는 존재감은 매우 강력했다.
마도맹이 창설되기 이전 마교를 말할 때 가장 먼저 말하는 것이 있었으니, 첫째가 마교의 주인인 마교주요, 둘째가 바로 그러한 마교를 지탱하는 다섯 개의 가문이었다.
검마가(劍魔家).
창마가(槍魔家).
도마가(刀魔家).
권마가(拳魔家).
지마가(指魔家).
마교를 대표하는 사마(四魔)인 검마, 창마, 도마, 살마 중 세 명이 다섯 개의 가문 중 세 곳에서 배출되었으니 다섯 가문이 마도에 미치는 영향력이란 마교주를 제외하고는 가장 막강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보통 문파를 운영하면서 대개 인맥과 전력 강화를 위해 객(客)을 운영하는 경우가 많은데 아무리 손님이어도 그 손님의 수준에 따라 당연히 대우가 달라지는 것은 당연지사.
특히 강호에 명성이 자자한 경우는 빈객(賓客)이라 하여 극진대우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눈앞에 있는 한음마녀가 바로 그러한 검마가의 세 빈객 중 하나였다. 그러니 그녀 스스로 십사대 고수를 제외하고는 적수가 없다 하는 것도 결코 허언은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자홍도 자신의 윗 상전으로 사마 중 일인인 살마라는 거물이 있었지만 살수의 특성상 직전 제자도 아니었고, 설사 그렇다고 해도 빈객과는 급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살막이라는 특성상 빈객이 없을 뿐이지 아마 있었다면 한음마녀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
“음. 개세신의께서는 제 잃어버린 오른팔을 찾아준 은인입니다. 선배께서 무슨 오해가 있으신지 모르겠지만 이만 서로 화를 푸는 것은 어떨지요.”
그래도 만유정에게 받은 은혜가 있었는지 할 말은 하는 자홍이었다.
“일개 살수가 지금 본녀의 앞길을 막고 있는 것이냐. 지금 당장 꺼지지 않는다면 내 당장 살막으로 쳐들어가 네놈들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 놓을 것이다.”
그래서인가 고두모의 표정이 더욱 불같이 변하며 위협적인 말을 토해 냈다.
“음.”
결국 자홍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하고 말았다. 애써 아닌 척해도 살막에 쳐들어온 한음마녀는 상상하기도 싫은 상황이었다.
“음. 아무래도 고 선배께서 화가 많이 나신 듯하니 신의께서 먼저 사과하심은.”
그러더니 만유정에게 갑자기 사과를 강요하는 자홍이었다.
“…….”
당연 만유정은 그런 자홍을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하느리 안 하느리만 못하다고 했다.
내심 고두모와 실랑이를 하던 중 영심안에 감지된 자홍의 존재에 미소를 지었던 것인데 그런 자홍이 이렇게 나올 줄은 만유정도 상상치 못한 일이었다.
비록 만유정이 이십 년의 내공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그가 공부한 내용은 고금사대고수 중 일인이라 칭해지는 지연화의 천인합일의 경지를 뛰어넘은 내용이었다.
그렇게 얻은 영심안이기에 사실상 만유정의 영심안은 고두모나 자홍을 동급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사실상 자홍과 고두모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지만 영심안이 너무나 높은 경지이기에 그 차이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이렇게 나타났다. 치열하게 싸울 것이라 예상했던 둘은 어느새 타협점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허허. 신의께서는 인정이 많기로 유명한 분 아니시오. 아무래도 먼저 사과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소이다. 물론 그렇다고 다시 망가져 가는 내 오른팔을 외면하시라는 말은 아니오. 허.”
자홍의 넉살 좋은 말은 확실히 듣는 사람의 기분을 묘하게 만드는 면이 있었다. 불같이 화내던 고두모도 그 말에 잠시 들끓던 화를 가라앉혔다.
물론 그와 같은 과정에는 곁에 있던 젊은 여인의 눈총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쨌든 아쉬운 사람은 만유정의 의술이 필요한 고두모와 젊은 여인이었다. 상대가 협박으로 통하지 않는 이상 괜히 긁어 부스럼 나는 것은 좋지 못한 행동이었다.
“내 비록 네놈이 괘씸하지만 이쪽에도 잘못이 없다고 할 수 없으니 참도록 하겠다.”
결국 고두모의 입에서 살짝 물러나는 말을 만유정에게 건넸다. 이제 만유정에게 대답이 넘어간 상황이었다.
부러질지언정 휘어지지 않는다고 했던가. 만유정 역시 자신이 받은 만큼 돌려줘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세상에 어디 받은 만큼 돌려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으며 또한 그렇게 모두가 살아간다면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물론 자홍이 없었다면 눈치 볼 것도 없이 다시 공격적으로 대할 수 있겠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만유정 역시 고집을 피우다간 소인배라는 안 좋은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요. 서로 오해에서 생긴 것 이쯤에서 끝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하나 아시겠지만 무료 진료는 잘 안 하는 편이라.”
하지만 마냥 고집을 꺾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만유정은 살며시 두 여인에게 금전에 관한 압박을 넣었다.
“그것은 걱정하지 말거라. 치료만 제대로 해 준다면 금 두 근(금자 이십 냥)을 사례로 내주겠다.”
금 두 근이라면 만유정이 치료했던 환자 중 가장 큰 액수를 지급하는 금액이었다.
그래서인가 만유정의 내심에 자리 잡던 분노도 어느새 사라지고 이왕 이렇게 된 것 돈이나 챙기자는 마음으로 변하고 말았다.
“물론 치료했을 때 만이다. 만약 잘못됐을 때는 각오해야 할 것이다.”
반대로 고두모는 금전을 요구하는 만유정의 태도에 잠시 화가 났는지 위협의 말을 더하는 걸 잊지 않았지만 말이다.
“허허. 저 역시 이번에도 금자를 두둑이 가져왔소. 다만 이번에는 반드시 마취를 해 주시구려.”
자홍 역시 그러한 고두모의 말에 편승해서 만유정에게 말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애초에 마취제 없이 치료한 것이라 재치료도 그렇게 해야 될 거예요.”
하지만 이미 자홍에게 단단히 미움이 박힌 상태여서인가. 가볍게 자홍의 바람을 무시하는 만유정이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의원을 데리고 와야 되는 상황이어서 그런지 만유정이 두 여인에게 치료에 대해 승낙하자 어느새 그들 앞에 한 대의 마차가 나타났다.
무공을 모를 수 있는 의원이 경공을 펼치지 못할 수도 있으니 미리 마차를 대기해 놓았던 것이다.
“자. 여기 오르세요.”
마차를 보자 젊은 여인은 만유정을 향해 시선을 돌리더니 한마디와 함께 마차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곧이어 고두모 역시 여인을 따라 마차에 올라갔고, 만유정 역시 그 모습을 보더니 발판에 발을 대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결국 난처해진 것은 자홍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자홍은 그저 갑작스럽게 나타난 불청객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마차에 올라타기도 애매했기 때문이다.
“뭐해요. 저기서 치료해 드릴 테니 빨리 오세요.”
그것을 느꼈는지 만유정이 마차로 들어가는 것을 잠시 멈추고는 자홍을 향해 고개를 돌리면서 말했다.
“험. 신의께서는 몸만 치료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리 마음도 잘 헤아리구려. 고맙소.”
당연 그 말에 자홍은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는 역시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는 정작 마차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두 여인이 승낙하지도 않았음에도 자홍은 만유정의 말에 마치 자신의 마차인 양 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마차가 꽤 고급인 모양이오. 좌석이 편안하구려.”
“치료해야 되니 이쪽으로 더 앞당겨서 앉으셔야죠. 왜 이렇게 눈치가 없어요.”
만유정은 그런 자홍을 바라보고는 결국 한마디와 함께 그 역시 당연하다는 듯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어떻게 말하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행동. 두 여인은 둘의 그러한 모습에 잠시 황당하다는 듯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딱히 뭐라 하기도 묘했기에 그대로 입을 다물고는 무언의 시선을 보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렇게 마차까지 준비해 주시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눈치 빠른 만유정이 그러한 시선을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자신감과 자만심은 종이 한 장 차이나 마찬가지.
마차에 올라가서 소심하게 얼굴을 이리저리 붉힌다던가 어쩔 줄 몰라 하는 것만큼 꼴불견도 없겠지만 마치 자기의 마차인 양 너무나 뻔뻔하게 구는 것도 결코 좋은 행동은 아니었다.
“아니에요.”
만유정의 그러한 반응이 약간은 의외였던가 젊은 여인이 그 말에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그의 말에 대답했다.
하긴 고두모 앞에서 어디 한번 베어 보라고 하던 만유정이었으니 그러한 선입견과는 다른 반응이 제법 신선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된 거 아직 소개도 하지 못했군요. 아시다시피 의원을 업으로 하는 만유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느꼈는지 만유정은 자신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했다.
“구자영이라고 해요.”
자신을 소개했다는 것은 이제 너도 소개하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압박에 결국 젊은 여인도 자신의 이름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한빙화(寒氷花)?”
그리고 그 말에 가장 놀란 것은 만유정이 아니 자홍이었다. 강호에 대한 경험이 바삭한 자홍이 단번에 그녀의 정체를 알아챘기 때문이다.
“예. 제가 한빙화라고 불리는 구자영이에요.”
“음. 그럼 설마 그 환자 분이라는 게.”
“예. 제 여동생이에요.”
“흠.”
한빙화라는 별호에 구자영이라는 말을 쓰는 자가 누구냐고 물어본다면 당대 검마가의 가주인 일세마검(一世魔劍) 구일기가 먼저 떠오를 것이다.
위로는 천하십사대 고수이자 사마의 일인인 검마 구일공을 태상가주로 삼고 그 스스로 마도맹의 주력 단체 중 하나인 탈명백팔검수를 맡고 있는 수장으로서 사실상 마도맹을 움직이는 큰 실세 중 한 명이 바로 구일기였다.
그리고 그러한 구일기는 본처 하나만 둔 것과는 다르게 삼남 이녀라는 무려 다섯에 달하는 자식을 낳았는데, 영웅은 호색이다라는 세간의 평가와는 다르게 오로지 본처 하나만 사랑하는 애처가로도 유명했다.
그래서인가 구일기의 자식에 대한 사랑도 그러한 본처의 사랑 못지않게 깊기로 유명했는데 지금 앞에 있는 젊은 여인이 바로 그러한 구일기의 두 딸 중 장녀인 한빙화 구자영이었다.
자홍 스스로도 이미 별호 그대로 세상을 덮을 듯한 만유정의 의술을 경험했기에 머리로는 딱히 걱정이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설마 치료하러 간다는 곳이 그러한 검마가라고 생각하니 내심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빙화라니 전혀 안 그래 보이는데요.”
물론 그러한 걱정은 자홍이 하는 것이고 만유정이 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한빙화라는 말에 마치 재밌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을 건네는 만유정이었다.
“그런가요.”
그 말에 구자영도 왜 자신이 그리 불리는지 모르겠다는 듯 만유정에게 대답했다. 아마 항상 무표정한 듯한 그녀의 표정과 자신의 예상대로 한음마녀의 무공을 배웠다면 그러한 무공의 속성에서 온 별호라고 생각하는 만유정이었다.
“얼굴에 항상 미소를 줘 보세요. 아마 너무 표정이 변화가 없어서 그런 것 같은데. 뭣하면 제가 의학적으로 왜 웃어야 건강에 좋은지 설명이라도 해 드릴까요.”
그러자 그런 그녀의 모습에 의원의 습관이라도 나온 것인가 만유정의 갑작스러운 말이 이어졌다.
“아, 아니에요.”
그리고 그 갑작스러운 말에 구자영은 순간 어찌해야 될지 대처를 못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옆에 사나운 노파가 저렇게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 어느 남자가 저런 소리를 해 댄 적이 있겠는가. 거기다가 냉기가 펄펄 풍기는 무공까지 풍긴다면 거의 상황은 종료였다.
그래서인가 만유정의 내심에는 마침 재밌는 장난이라도 치고 싶은 욕구가 솟아났다. 그리고 그러한 욕구는 곧 행동으로 나왔다.
“……!”
마차 안에 있던 사람들은 만유정이 갑자기 구자영의 손을 잡자 그대로 놀라고 말았다.
물론 만유정은 그녀의 맥을 통해 내기의 흐름을 살피려는 의도였지만 이런 상황에 그런 세세한 것까지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