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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문 1권 21화
7장. 마도맹으로 (4)
“체내에 음기가 많이 쌓여서 이러다가 자칫 몸이 상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러거나 말거나 만유정은 잠시 그녀의 맥을 짚어 보더니 체내에 쌓인 음기 덩어리를 대략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음공(陰功)이나 양공(陽功)과 같이 한쪽으로 치우친 무공은 비록 여성이 음한지기를 남성은 양강지기를 잘 받아들이는 체질이라고 해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대개 한쪽 기운이 너무 강해져 태극의 균형이 무너지고 주화입마의 경우에 빠지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설사 주화입마의 경우는 잘 넘기고 무공의 발전을 이룬다고 해도 나중에 회임(懷妊)을 하려고 해도 남성의 경우 양강지력에 정자가 모두 타버리거나 여성의 경우는 그러한 정자를 반대로 얼려 버리는 등 건강상 부작용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만유정과 같은 신의가 있다면 그러한 부작용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말이다.
“네 이놈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것이냐.”
그렇게 만유정이 구자영의 맥을 짚자 당연 옆에 있던 고두모가 벌컥 소리를 지르며 만유정에게 소리쳤다.
아무리 마도의 인물이라지만 외간 남자가 여인의 손을 잡았으니 가뜩이나 만유정에게 앙금이 있던 고두모의 분노가 다시 솟아오른 것이었다.
“옛부터 반반한 얼굴에 감미로운 말로 여인을 희롱하는 자치고 제대로 된 인간이 없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네놈 모습이 본녀의 어릴 적 그 미친놈하고 비슷하구나.”
한음마녀라는 칭호를 얻기 이전 그녀는 산적사자(山賊死者)라고 불릴 정도로 산적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명백히 정파의 인물이기도 했다.
하지만 당대 최고의 호색한이이자 풍류객이었던 지금은 강호 십사대 고수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도봉(刀峰) 팽두염을 만나고부터 그녀는 마도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남녀 관계의 복잡한 사정이야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분명 좋게 끝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인가 만유정을 향해 소리를 지르던 고두모는 아예 살기까지 강하게 담겨 있었다.
그러나 만유정은 그러한 고두모의 살기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방금 전 장난끼 다분하던 얼굴이 어느새 진진하게 변해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음한지기를 익혀 반강제적으로 굳어 있는 느낌을 받고 맥을 한번 짚어 본 것인데 의외의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설마 어릴 적부터 온몸이 차갑고 가끔 몸이 이리저리 뻣뻣해서 움직이지 않던 적이 없던가요.”
그래서인가 만유정은 구자영을 바라보며 그 표정에 맞게 진지하게 물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진지했는지 어느새 화내던 고두모도 그대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예. 어릴 적 자주 그랬었는데. 그런데 왜 그런 걸 물어보는지.”
구자영도 만유정의 그러한 행동에 왠지 말을 해야 될 것 같았다.
“혹시 최근에도 그러한 뻣뻣함이 다시 느껴지지 않는지요.”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어릴 적만큼은 아니지만 가끔 그런 증상이 오긴 해요.”
역시 이번에도 그녀는 만유정의 말에 그대로 대답했다. 그리고 그렇게 그녀의 대답이 끝났을 때였다.
“하. 음한지체(陰寒之體)를 가진 사람에게 음공을 수련시키다니.”
결국 만유정의 한숨이 커다랗게 흘러나왔다. 빚을 빚을 내서 갚는다는 말이 있다. 비록 그 순간에는 위기를 넘길 수 있지만 결국 그렇게 돌려 막다 보면 쌓이고 쌓여 나중에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채무로 자신에게 돌아온다.
음한지체를 지닌 구자영에게 음공을 익히는 것은 돌려 막기로 채무를 갚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무모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이 세상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만유정이었기에 방금 전 만유정의 한숨은 그러한 어리석음에 대한 간접적 표현이나 마찬가지였다.
8장. 음한지체(陰寒之體)와 양강지체(陽剛之體) (1)
만유정의 말이 끝나자 마차 안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변화했다. 그중 가장 크게 변화한 사람은 만유정의 목을 향해 곧 검을 들이댈 것 같던 고두모였다.
어려서부터 타고난 음기를 미리 알아보고 한음진결을 전수한 사람이 다름 아닌 고두모 그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네놈 말은 그러면 공녀께서 음공을 익힌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냐. 어려서부터 음기에 탁월한 재능을 가졌고, 지금 또래에서도 적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그 성취가 탁월하거늘 괜한 억측으로 네놈이 잘못 입을 놀리는 것이라면 결코 용서치 않겠다.”
그러나 인정하기 싫었는지 곧 다시 만유정을 향해 더욱 큰 목소리를 내었다.
“아니 그럼 제가 헛소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환자가 의원을 믿지 못한다면 의원도 그런 환자를 치료할 이유가 없겠지요. 그럴 거면 지금 당장 마차를 세우고 내쫓으시던가요.”
물론 만유정의 대답이 고울 리 없었다. 아니 이제는 약간의 분노마저 담긴 듯한 목소리였다. 비록 냉정하게 상황 판단을 하긴 하지만 독구환이라는 괴노인으로부터 성장한 만유정이었다. 계속해서 공격적으로 나오는 고두모가 거슬리지 않는다면 만유정이 아니었다.
“뭣이 네 이놈이 정녕. 좋다. 네놈이 나가든 내가 나가든 끝장을 보자구나.”
휘이이이잉.
결국 화난 고두모의 살기가 다시 뿜어져 나오고 그 살기는 이윽고 사방으로 퍼지면서 달리던 말들을 발광하게 만들었다.
“험.”
누워서 치료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던 자홍은 갑작스러운 마차의 떨림에 정색하고는 얼른 자세를 자리 잡아야 했다.
그러나 역시나 그 역시 무공의 고수답게 곧 자세를 잡으며 상황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만유정의 나약한 무공으론 고두모의 검을 피하기란 절대 불가능이었다.
어느새 만유정의 목에는 또다시 검이 놓여져 있었다. 물론 여전히 만유정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고두모를 살피고 있었지만 말이다.
“설마.”
그 모습을 보고 자홍은 문득 자신이 만유정을 방문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자신의 은신을 정확히 파악했었다.
그리고 그때 자홍은 만유정이 무공의 고수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치료를 받으면서 만유정으로부터 아무런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고, 그 결과 자신의 생각이 착각이라고 결론 내렸던 자홍이었다.
‘그러나 만약. 그게 아니라면.’
마차에 타기 전 이미 자신의 존재를 감지하고 일부러 고두모의 검을 허용한 것이라면 그리고 지금도 구자영의 생사가 걸린 상태였기에 상대가 자신을 베어 낼 수 없다는 걸 알고 행동한 것이라면.
자홍은 문득 만유정에 대해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생기고 말았다.
그리고 그러한 두려움이 실체가 되려고 할 때였다.
“그만하세요. 고파파 지금 신의께 무슨 무례를 범하시는 거예요.”
구자영의 앙증맞은 입이 열리면서 옥음과 같은 소리가 나왔다. 그 옥음은 한 줄기 날카로운 비수처럼 그대로 고두모를 향해 날아갔다.
“제 몸이 어려서부터 정상이 아니란 건 파파께서 더 잘 아시잖아요. 그거 때문에 제가 어떤 고생을 했는지도.”
구자영의 옥음과도 같은 음성은 어느새 약간의 비장미마저 느껴지기도 했다. 그동안 음한지체로 태어났단 이유만으로 겪었던 고통이 바로 이 한순간을 위해 토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음.”
그래서인가 설마 구자영이 자신을 향해 저런 말을 할 줄 몰랐는지 고두모의 살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그러한 기세의 변화는 구자영의 입을 더욱 활발하게 열리게 하는 계기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파파께서 저희 아버지의 빈객이시고 어려서부터 무공을 가르쳐 준 사부와 같은 존재라고 해도 이 이상으로 신의께 무례를 범한다면 저 역시 가만히 있지 않겠어요.”
조금의 오차도 없는 또박또박한 그녀의 말은 묘한 박력과 싸늘함을 선사했다. 만유정은 괜히 그녀가 한빙화로 불리는 것이 아니란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죄송해요. 파파를 대신해서 제가 사과를 드릴게요. 그러니 화를 푸셨으면 해요.”
구자영은 그렇게 순식간에 고두모를 제압하더니 만유정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 기세가 얼마나 강력한지 웬만한 사람이었으면 그대로 그 말에 알았다고 대답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만유정 역시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요. 소저께서 사과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만. 아니 해서는 안 될 일이죠. 그리고 설사 사과하신다고 해도 마침 마차도 이왕 멈춘 거 저는 이대로 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네요.”
그리고 그렇게 한마디 함으로 다시 마차 안에 있던 상황은 다시 묘한 기류로 흘러가고 말았다. 그만큼 만유정의 한마디는 흐름을 거스리는 한 줄기의 역행(逆行)이었다.
그래서인가 구자영은 만유정의 말에 싸늘하던 기세도 온데간데없이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니 굳이 제가 필요하다면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죠. 소저가 아닌 당사자가 직접 진심을 담아 사과를 한다면!”
그러한 구자영의 분위기를 만유정이 놓칠 리 없었다. 그리고 그 분위기에 맞추어 내뱉어진 만유정의 말은 치명적인 비수가 되어 고두모를 향해 날아갔다.
촌절살인(寸鐵殺人)이라고 구자영의 어린 시절과 함께 해 온 고두모가 어떻게 보면 잘못한 것도 없는데 단지 성격이 불같다는 이유만으로 만유정의 몇 마디에 그대로 궁지에 물리고 만 것이다.
아마 구자영의 옆에 고두모가 아닌 구일기가 있었다고 하면 오히려 고두모보다 더 흥분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만큼 여인의 손을 함부로 잡는 것은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아니 객관적으로 보면 만유정이 잘못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만 고두모가 불같은 성격으로 인해 쉽게 흥분한다는 점과 구자영의 싸늘한 기세에도 눌리지 않고 자신의 말을 건네는 만유정의 대담함이 이렇게 만든 것이었다. 한 사람의 세 치 혀가 얼마나 무서운지 제대로 증명하는 만유정이었다.
결국 고두모는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한음마녀라는 별호의 싸늘함도 지금 이 상황에서는 어떤 도움도 되지 않았다.
졸지에 그녀는 자신의 상전이라 할 수 있는 구자영을 치료하기 위한 의원과 시비가 붙어 내쫓으려 한 암적인 존재가 되고 말았다.
“마의가 출맹해서 저를 찾아오셨다고 하는데 그 마의를 무시하는 건 결코 아니지만 제가 아니면 소저의 병은 거의 고치기 힘들다고 말씀도 드리고 싶군요.”
음한지체를 타고난 여인에게 음공을 익히게 했기에 비록 무공의 발전이 비약적으로 상승하여 그동안 버텼다고 하지만, 지금 구자영의 신체에 담긴 음양의 불균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즉 엄청난 양기를 주입해서 몸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전설의 양강지력을 가진 영약이 필요하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만유정이야 시간만 있다면 연단술로 그러한 영약을 무한으로 만들 수 있지만 강호에 나타나기만 해도 피바람이 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러한 영약은 희귀 그 자체였다.
아니 설사 구한다고 해도 그 미세한 균형을 맞추기 위해 필요한 의술도 결코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 만유정과 같은 신의(神醫)가 아니라면, 즉 인간은 결코 고칠 수 없는 신의 영역이라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만유정의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그러한 궁지에 몰린 고두모를 구자영도 느꼈음인가 그녀의 내심이 서서히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생각한 결과는 이것이 아니었다.
자신과 가장 친하다고 할 수 있는 고두모에게 오히려 호통을 하며 만유정의 화를 가라앉히자는 것이 바로 그녀의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이런 식으로 돌아왔으니 어떻게 해야 될지 난감해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감정은 옆에 있던 고두모에게 그대로 전달됐다. 구자영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그녀는 결코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애초에 베어 버렸어야 했다.’
고두모는 내심 만유정의 목을 베어 버리지 못한 것을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후회는 후회일 뿐 과거에 대한 집착은 결코 더 나은 미래를 제시하지 못하는 법이다.
“가죠. 이런 움직이는 마차에서 하기에도 나름 고급 의술인데 뭐 상관은 없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굳이 마차에서 할 필요는 없으니깐요.”
만유정은 그런 둘의 기세를 그대로 느끼고는 자홍을 향해 말하며 마차를 내려갈 준비를 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잠깐.”
고두모의 음성이 만유정을 향해 날아왔다. 하지만 만유정은 그 말에도 조금의 움찔함도 없이 움직이는 걸음에 대한 행보를 멈추지 않았다.
“내. 사, 과하겠네.”
영영 멈추지 않을 것 같던 만유정의 걸음이 멈춘 것은 드디어 고두모의 입에서 만유정이 원하던 말이 나왔을 때였다. 만유정은 그 말이 들리자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몸을 되돌렸다.
“비싸요 이번 꺼는. 이전까지 치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힘든 치료거든요.”
물론 그냥 돌아선 것은 아니었다. 역시나 이번에도 돈을 요구하는 만유정이었다.
“믿어도 되겠죠. 분명 고치실 수 있다고 하셨죠.”
이미 구자영은 자신의 저주받은 신체를 고칠 수 있다는 희망에 들떠 있는 상태였다. 그렇기에 돈을 얘기하는 만유정에게 돌아온 대답은 돈을 낼 수 있다는 말이 아닌 오히려 고칠 수 있냐 없냐는 확신에 대한 물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