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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문 1권 22화
8장. 음한지체(陰寒之體)와 양강지체(陽剛之體) (2)
“예. 제가 못 고치는 병은 없으니깐요.”
그러나 그 말은 다시 말해 고칠 수만 있다면 어떤 대가를 치룰 수 있다는 무언의 승낙이기도 했다.
“이번에는 후불이에요.”
만유정은 그 무언의 대가로 드디어 금액을 정하고는 잠깐 동안에 있었던 마차의 소란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이랴.”
때마침 마부의 목소리와 함께 마차가 다시 출발하고 만유정은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대로 손을 뻗어 구자영의 맥을 짚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이전과 달랐다. 이미 만유정에게 기세 상으로 제압당한 고두모가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불긋.
아니 오히려 만유정의 손에 잡힌 구자영이 살짝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그리고는 잠시 만유정을 향해 시선을 돌리는 그녀였다.
그러나 정말 아무런 사심 없이 진맥에 집중하는 듯 만유정은 그저 아무런 말없이 그녀의 진맥을 살필 뿐이었다.
패기가 넘쳐 보이다가 또 어떨 때는 건방져 보이다가 또다시 겸손해 보이다가 탐욕스러워 보이다가 그러나 지금 만유정의 모습은 정말 환자의 생명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신의(神醫)의 모습 그 자체였다.
‘이상한 사람이야.’
그 알 수 없는 모습에 구자영은 그대로 고개를 젓고 말았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녀의 뇌리에는 거역할 수 없는 금기처럼 만유정의 모습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내 차례는.”
그리고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자홍이 오른팔에서 오는 고통에 신음을 흘렸지만 마치 그대로 시간이 멈춰 버린 양 마차는 마도맹을 향해 서서히 질주하고 있었다.
* * *
검마가.
“으아아아아아아아.”
“좀 참아요.”
만유정은 불사침을 이용해 이리저리 실타래처럼 꼬인 자홍의 혈도를 하나씩 뚫어 갔다.
만유정이 자홍에게 오른팔에 기를 주입하지 말라는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아직 몸에 익숙하지 않은 오른팔에 기를 주입했다가는 혈도가 꼬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혈도가 꼬여 더 이상 기의 순환이 어렵다면 절단하는 것이 상식이지만 만유정 앞에서는 그런 것도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흔들리는 마차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혈맥을 타동하는 만유정의 모습에 구자영도 처음 자홍의 신음 소리에 인상을 찡그린 것과는 다르게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 다 됐어요.”
마지막으로 막힌 혈도에 불사침을 빼냄으로 재수술도 끝이 나고 말았다.
“고맙소이다.”
지옥과도 같은 고통이 끝나자 자홍은 만유정에게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말을 건넸다.
“그래도 제법 시간이 지나서 이번에는 한 달 정도만 오른팔을 쓰지 않으면 될 거 같네요. 대충 해드릴 것은 다 해드렸으니.”
만유정은 자홍에게 손을 내밀었다.
“흠. 정말 신의께 뭐라 감사의 말을 전해야 될지 모르겠구려.”
그 손이 의미하는 것을 모를 리 없기에 자홍은 금자 열 덩어리를 만유정의 손으로 건넸다. 평생 못 쓰던 팔 하나 얻고 설령 금자 백 냥이라도 결코 비싸다고는 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그래서인지 금자를 건네는 자홍의 손에서는 돈에 대한 아쉬움은 살필 수 없었다.
그렇게 자홍이 건네준 금자를 다 챙겼을 때 만유정이 가만히 있는 자홍을 바라보며 말했다.
“치료는 다 끝났어요. 대가도 다 받았고.”
자홍이 그러한 만유정의 시선과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 치료가 끝났으니 어서 가 보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험. 아무래도 이 오른팔이 낫기까지는 신의 곁을 따라다녀야 될 것 같소.”
하지만 자홍은 그러한 무언의 압박을 정면적으로 거절했다.
만유정을 따라다니면 왠지 재밌는 일이 더 생길 것 같은 본능적인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것보다 더욱 묘한 기분이 지금 자홍의 발걸음을 이곳에 멈추게 하고 있었다.
“살수는요?”
그런 대답이 의외였는지 만유정은 잠시 자홍을 바라보면서 다시 물었다.
사람을 죽이는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에게 왜 다시 죽이러 안 가냐는 말이 얼핏 듣기에는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이미 협객과 거리가 먼 길을 떠난 만유정이기에 전혀 거리낌 없는 말투였다.
“허. 오른팔에 내기를 주입하지 말라는 말은 다시 말해 무공을 펼칠 수 없다는 말이나 다르지 않겠소.”
그리고 그러한 물음에 이상함을 느끼지 않는 것은 자홍도 마찬가지였다. 자홍은 그저 만유정의 말에 가볍게 대답했다.
“오른팔에 내기를 주입하지 않고 무공을 펼치긴 힘드신가 봐요.”
만유정은 그 말에 약간 놀랍다는 듯 응답했다. 무공이야 형편없지만 심법 하나 만큼은 고금제일인이라 할 수 있는 그였기에 그런 가벼운 내기의 운행조차 힘들어 하는 것이 의외였던 것이다.
“신의께서야 쉽게 하겠지만 이 자모에게는 나름 고행이라 할 수 있소. 그럴 바에 차라리 무공을 펼치지 않는 것이 낫지 않겠소.”
“하긴 그렇게 인내심도 없으신데 기대한 제가 잘못이겠죠.”
“험.”
한편 그렇게 자홍과 만유정이 저렇게 정담을 나눌 때 고두모와 구자영은 약간 멍한 표정으로 그 둘을 바라보았다.
마치 만유정을 대하는 자홍의 말투가 자신보다 더욱 고수에게 행하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고두모야 이미 기세(氣勢)상으로 제압당해 서먹서먹한 상태였고 결국 입을 연 것은 구자영이었다.
“신의께서는 무공도 익히셨나 봐요.”
만유정이 음한지체로 곧 죽어 간다는 얘기를 해서인지 더욱 싸늘해진 목소리였지만 그 이면에 호기심이 잔뜩 묻어난 물음이었다.
“…….”
“허허. 그럼 여태까지 신의께서 무공을 익히신 걸 모르셨단 말이오.”
그리고 만유정이 그 물음에 대답하려는 찰나 갑자기 자홍이 먼저 입을 열고 말았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범인이 고 선배의 기세를 감당한다는 얘기보다 신의께서 무공을 익혔다는 것이 더 현실성 있는 말이 아니겠소.”
그러더니 아예 대놓고 자세한 설명까지 해 주는 자홍이었다.
“아니 그럼 네놈은 저놈이 저 나이에 벌써 십사대 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말이냐!”
그러나 그때였다. 여태까지 가만히 있던 고두모가 때마침 표적이 만유정이 아닌 자홍으로 넘어가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자홍을 향해 소리치며 말했다.
“그, 그거야.”
이제 막 세대교체가 일어날 때이기는 하지만 십사대 고수는 강호에 공포로 군림해 온 자들이었다.
그래서인가 자홍도 다시 생각해 보니 뭔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만유정을 잠시 바라보았다. 당사자인 만유정에게 직접 대답하라는 무언의 시선이었다.
“전 그냥 의원이에요. 의술을 익힌 적은 있어도 무공을 익힌 적은 아직 없거든요.”
그리고 그러한 시선에 만유정은 자홍이 끼어들기 전 말하려고 했던 말을 그대로 건네고 말았다. 어찌 보면 동문서답인 듯한 대답.
그래서인가 마차 안에 있던 세 명은 비록 확신까지는 아니더라도 만유정이 고수일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 * *
마도맹의 위치는 청해성의 성도인 서녕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중심인 서녕을 토대로 동으로는 공동파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여 사실상 감숙을 마도의 영역하에 놓았고 남으로는 곤륜파를 제외한 대부분을 차지하여 사천과 섬서로 향할 교두보를 마련한 상태였다.
그래서인가 당장 마도맹과 인접한 정파 무림은 연일 그러한 마도 무림의 움직임에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고, 그럴수록 마도맹의 위상은 더욱더 강해지고 있는 중이었다.
무림 고수에게 성벽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 만은 당금 정파와도 겨룰 수 있다고 평가받는 마도맹은 커다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래서인가 사람들은 그러한 성벽을 빗대어 마도성이라는 말로 부르기도 했다.
성벽을 만들었다는 것은 그 성벽을 타고 넘으라고 만든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마도맹 역시 성벽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성문 세 곳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만유정이 탄 마차도 어느새 서녕에 도착한 지 제법 시간이 지나 있었다.
장우현에서 서녕까지의 거리가 결코 짧다고도 말할 수 없었지만 마차를 타니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비켜라.”
“저리 비켜라.”
검마가의 표식이 새겨 진 사두마차가 성문에 도착하자 마치 당연하다는 듯 마차는 속도를 멈추지 않고 그대로 질주했다. 그러한 질주에 맞추어 성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던 자들은 잠시 질주하던 마차를 쳐다보더니 검마가의 표식을 보고 그대로 길을 열었다.
“마도맹에서 지위가 제법 높나 보네요.”
만유정은 범상(凡常)한 신분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 정도인 줄 몰랐는지 감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마침 그동안 만유정의 기세에 눌러 있던 두 여인은 그 모습을 보며 그제야 자신이 원래 있던 지위가 생각났는지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비록 강호 천지에 모여 있는 마인들을 통합하기 위해 맹을 설립했지만, 그래도 아직 맹의 중추는 마교라고 할 수 있지. 당연 그러한 마교를 지탱하던 검마가의 위세가 이 정도도 되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우스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동안 마차 안에서 지내면서 고두모와 만유정 간에도 어느 정도 화해의 노선이 오간 상태였다. 그래서인가 물론 과거처럼 함부로 만유정을 대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불같은 성격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닌지 만유정의 감탄에 가장 먼저 대답하는 고두모였다.
“그렇군요.”
만유정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 밖을 조용히 살폈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신분의 차이. 그리고 그러한 차이에서 오는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
두근. 두근.
만유정의 심장이 알게 모르게 조금씩 뛰기 시작했다. 정작 그들이 고개를 숙이는 것은 검마가였지만, 마치 자신이 그 검마가라도 된 양 착각에 빠진 것이다.
물론 그 스스로도 착각이라는 것을 알고 또한 착각이 아니어도 평정심을 유지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에게도 좋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그러한 떨림이 온 것과 동시에 사라졌지만, 그래도 그 찰나의 순간은 묘한 기분으로 만유정을 강타할 수밖에 없었다.
“신의께서는 처음부터 앞으로 치료할 환자에 대해서는 전혀 물어보지 않으시는군요.”
그렇게 찰나의 몽환적 세계에 발을 디뎠다 나온 만유정에게 구자영이 입을 열며 물었다.
대개 모르는 사람을 만나 이렇게 마차로 실려 가고 있다면 그 자세한 의도가 궁금할 법도 한데, 만유정은 그동안 구자영의 여동생에 대해 전혀 궁금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만유정은 누구를 치료하러 가는지에 대해 물어본 적도 없었다.
자홍과의 대화를 하다가 구자영 스스로 여동생을 치료하러 간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물론 지금은 정작 그녀도 환자가 되었지만 말이다.
“뭐. 어차피 직접 보면 알 텐데요.”
“그런가요.”
말 그대로 신의 솜씨를 지닌 신의라면 확실히 미리 알 필요도 없이 바로 가서 진료하면 그만이기도 했다.
‘그래도 궁금하지 않을까.’
하지만 인간의 마음이 그렇게 딱딱 떨어지는 것인가. 결코 좋은 모습으로 이곳에 온 것도 아니건만 자신의 여동생에 대해 일말의 궁금증도 없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면서도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더군다나 항상 환자에 대한 비밀을 우선시 하거든요.”
“그렇군요.”
그러나 만유정은 정말 궁금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구자영은 내심 뭔가 아쉬웠지만 그의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녀의 아쉬움을 느꼈음인가 만유정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래도 이제 곧 치료할 텐데 그럼 잠시 그 치료받을 여동생이라는 분에 대해 알려 주실래요.”
그리고는 마치 그녀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는 듯 그녀에게 말했다.
“아니요. 괜찮아요. 별로 궁금하지도 않으시다는데요 뭐.”
마치 누가 보면 구자영이 가르쳐 주지 못해서 안달 난 듯한 인상을 줄 정도로 묘한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만유정의 말에 괜찮다면서 살짝 거절했다. 마치 그러한 인상을 피하기 위한 본능적인 여인의 행동이라 할 수 있었다.
당연 여기서 남자인 만유정이 ‘아 그런가요. 뭐 그러시다면.’과 같은 말을 한다면 정말 답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다행히 만유정은 그렇게 눈치없는 사람도 아니었다.
결국 만유정은 마음에도 없었지만 나름 생각하고는 그녀에게 말했다.
“사실. 엄청 궁금했어요. 단지 이런 일에 익숙해서 그런 거지 궁금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죠. 그러니 가르쳐 주실래요. 도대체 무슨 병으로 저를 부르셨는지.”
그리고 그 말과 함께 이제는 만유정이 오히려 궁금해하는 듯한 인상으로 상황이 변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