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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문 1권 23화
8장. 음한지체(陰寒之體)와 양강지체(陽剛之體) (3)


그렇게 상황이 변하자 그제야 구자영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번지는 것을 만유정은 느낄 수 있었다. 음한지기로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는 그녀였지만 영심안은 그 미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여동생이라고 말했지만 그냥 여동생이 아니에요.”
미소가 번졌다는 것은 그녀가 말하기 편한 상황이 됐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제야 그녀의 입이 열리면서 만유정을 향해 냉기가 펄펄 서린 옥음을 내밀었다.
“그냥 여동생이 아니라니.”
“제 동생하고 저는 쌍둥이에요.”
쌍둥이라는 말에 만유정은 살짝 놀랍다는 듯 그녀를 향해 더욱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는 잠시 머릿속으로 상상했다. 그녀와 똑같이 생긴 또 하나의 여성을, 그리고 그 순간 만유정은 하나의 가정을 세울 수 있었다.
‘그렇군.’
아니 단순히 가정이 아니라 거의 맞을 확률이 매우 높은 그러한 가정이었다. 그러나 만유정은 굳이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의 여동생에 대해 물어보지 않는다고 만유정에게 말을 건넨 것은 자기가 그러한 여동생에 대해 설명하고 싶다는 우회적인 표현이었다.
그렇기에 미리 결과를 맞춘다는 것은 그러한 그녀의 대화를 단숨에 종식시키는 좋지 않은 행동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어려서부터 몸이 차갑게 태어났어요. 그리고 반대로 동생은 어려서부터 몸에 열이 가득한 것이 반대로 엄청난 양기를 가지고 태어났죠. 그걸 안 아버지께서는 잠시 고민하다 저에게는 음기를 다스릴 수 있는 한음진결을 그리고 동생에게는 양기를 다스릴 수 있는 태양심법(太陽心法)을 수련하게 하셨어요. 하지만 다행히 여인으로 태어난 저는 비록 지금이야 실수라는 걸 깨달았지만 어쨌든 한음진결을 통해 음기를 다스릴 수 있었어요. 그러나 반대로 동생은 여인의 몸에 어울리지 않는 양강지력을 익히다가.”
‘역시나.’
만유정은 이어지는 구자영의 말에 자신의 가정이 맞았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나는 과정에서 태극의 균형이 무너지고 한쪽에는 지나친 음기가 한쪽에는 지나친 양기가 흘러가면서 태어난 것이었다.
물론 대개 이렇게 태어나면 태어나자마자 죽는 것이 정상이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무공을 익힌 고수라면 그러한 불균형을 일시적으로 잡아 주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렇게 억지로 잡은 것을 각자의 운명에 맞게 심법을 익히면서 억제해 왔을 것이다. 그러나 여인인 구자영은 제법 버틸 수 있을지 몰라도 양강지력을 익힌 그녀의 동생은 드디어 결국 만유정이 어리석다고 말한 그러한 부작용이 나타났다는 얘기였다.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음한지체에 음공을 익힌 것은 정말 어리석은 행동이에요. 양강지체에 양공을 익히는 것 역시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내용이지요.”
“예. 사실 그래서 신의께서 제 손목을 잡고 단숨에 제 병을 아셨을 때 묘한 기분이 들었어요. 그리고 고칠 수 있다는 말에 제 동생도 나을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당연히 제 동생도 고칠 수 있겠죠?”
“죽거나 수명이 다한 자만 아니라면야 뭐. 제가 못 고치는 일은 아예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죠.”
기세라는 것은 참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아마 다른 의원이 이런 소리를 했다면 돌팔이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자홍의 팔 융합술을 직접 보면서 이미 신의라는 위명을 몸소 눈으로 확인한 것도 있지만, 그 이전에 만유정의 말은 묘하게 신뢰가 가는 면이 있었다.
“그나저나 묘한 기분이라니 그래서 진맥하려는 제 손을 피하지 않은 거였나요.”
그렇게 구자영이 만유정의 확신에 가득 찬 말을 들었을 때, 문득 만유정으로부터 짓궂은 말이 그녀에게 향했다.
“예?”
순간 구자영은 무슨 소리냐는 듯 물었다가 이내 어떤 생각이 떠올랐는지 살짝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만유정이 그녀의 손을 잡아 진맥하려고 했을 때 언제든지 그녀의 무공으론 피할 수 있는 빠르기였다. 그러나 그 당시 그녀는 만유정의 손을 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 그게. 어쩌다 보니.”
한빙화라는 별호에 맞게 얼굴을 붉혔다고 정말 붉어지는 일은 없었지만, 만유정은 그녀가 자신의 생각한 것 이상으로 당황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만유정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알 수 없는 감정이 자신을 휩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성문을 통과할 때 마차를 보며 길을 비키던 수많은 사람을 보며 마치 자신도 그들을 짓밟고 위에 서고 싶다고 느꼈던 그때처럼 비록 이번에도 아주 찰나의 순간과 함께 사라졌지만, 묘한 감정이 그를 휩쓸었다.
신(神)을 논할 때 감정을 제외한 이성적인 세속의 욕망에 초월한 존재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한 세속의 욕망을 초월한 존재를 순리라고 한다면 만유정은 그 반대의 개념인 역천(逆天) 그리고 역천의 꽃인 영생불사의 존재였다. 그 말은 이미 만유정 그 자체가 욕망의 덩어리 그 자체라는 말이었다.
그나마 신과 만유정이 비슷한 점이라면 신은 아예 그러한 욕망을 가지지 않았고 만유정은 그러한 욕망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랄까.
이제 막 세상에 나온 만유정이기에 서서히 내면에 숨겨졌던 그러한 욕망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특히나 그중 강력하다고 할 수 있는 지배욕과 정욕과 같은 것들이 유난히 만유정의 내심을 거슬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재물욕과 같은 것이야 그냥 닥치는 대로 금자를 모으는 것으로 행동하고 있었지만, 정욕과 지배욕 같은 것들은 당장 실천하기에는 그 스스로 조절해야 할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주 찰나의 순간 사라진 감정이었지만 그 순간을 겪은 뒤로 만유정은 문득 구자영의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다.
“혹시. 동생이 건강할 때 무공을 겨루어 본 적이 있었나요.”
그러나 당황해 있는 그녀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줘야 했기에 만유정은 다른 질문을 건넸다.
“예.”
그제야 그녀도 당황함에서 벗어나고는 만유정의 물음에 대답했다.
“혹시 누가 더 무공이 강했나요.”
“거의 비슷했어요. 쌍둥이라서 그런지 어쩔 때는 제가 이기고 어쩔 때는 동생이 이기다가 마지막으로 붙었을 때는 서로 승부를 내지 못했어요.”
그리고 그러한 말을 듣던 만유정은 잠시 심각한 표정으로 변하고 말았다.
“혹시 여동생의 몸에 남성처럼 털이 나기 시작하지 않았나요.”
그러더니 구자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예. 비록 양강지력을 익혔지만 그동안 그런 일은 없었는데 최근에 털이 무섭게 자라기 시작했어요.”
만유정을 찾아왔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아무나 고칠 수 없는 위급한 환자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지만, 또한 그 환자가 그렇게 위급하지도 않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만약 정말 위급하다면 당장 옆에 있는 의원을 찾지 저 멀리 신의를 찾아가는 일은 없을 것이니 말이다.
“하. 제 예상이 맞는다면 이거 잘못하면 위험할 수도 있겠네요.”
구자영의 여동생도 그런 경우였다. 그러나 문제는 정작 위급하면서도 위급해 보이지 않는 그 모습이 실제로는 굉장히 위급한 상황일 수 있다는 게 문제였다.
그리고 만유정이 생각하기에 남성처럼 털이 자라나기 시작했다는 것과 그리고 구자영의 맥을 통해 가늠한 내공의 수위를 생각했을 때, 그녀들이 자신을 데리러 왔을 때와는 다르게 지금 상당히 위급할 수 있었다. 아니, 신의인 만유정의 예측이니 지금 매우 위급할 것이다.
“간단하게 설명할 것이니 잘 들으세요.”
만유정은 결국 구자영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리고 그러한 말이 길어질수록 파랗게 질려 갔다.
이윽고 만유정의 말이 끝났을 때.
“내성에 도착했습니다.”
그동안 마차를 이끌던 마부가 소리쳤다. 아무리 검마가의 인물이라도 그것도 어디까지나 외성에서의 위엄이지 내성까지 사두마차를 끄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성은 말 그대로 마도맹의 중추 중에 중추, 마차가 허용될 리 없는 공간이었다.



9장. 검마가 (1)


마도맹은 크게 외성과 내성으로 나누어진다. 지금이야 연합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엄연히 마도맹은 마교가 주축이 되는 단체였고, 그렇기 때문에 힘의 논리에 따른 상하 관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경계를 크게 나누는 것이 바로 이 외성과 내성이었다.
외성에는 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포섭한 문파들이나 기타 강호에서 나름 명성을 날리고 있는 마인들로 구성된 곳으로 마도맹의 외형을 담당하는 곳이었다.
인원도 인원이거니와 실질적으로 행하는 마도맹의 행사들이 대체로 외성에 있는 전투 집단들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사실상 피부로 느끼는 마도맹이라는 존재는 이 외성을 느끼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흔히 강호에서 얘기하기를 고수일수록 엉덩이가 무겁다는 말이 있다. 그것은 이 마도맹이라고 다를 바 없었다.
어느 세력이 더 강한지에 대해 연일 얘기하기 바쁜 호사가들은 내성이 마도맹에서 차지하는 힘이 거의 칠 할에 가까울 것이라고 예상할 정도로 내성은 고요하지만 사실상 마도맹을 이루는 그 자체라 할 수 있었다.
“멈추시오.”
휘우웅.
마부가 마차를 세운 것과 내성을 지키는 문지기가 소리치는 것은 거의 동시였다. 마차가 허용되지 않는 공간이라는 것은 이제 곧 마차에서 내려야 된다는 말, 문지기의 소리에 마부는 마차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부터는 마차가 못 가요.”
그 소리를 듣자 구자영은 급했는지 간단한 말과 함께 재빨리 마차에서 내렸다. 이어서 고두모도 그런 구자영을 따랐고 만유정과 자홍도 잇따라 마차에서 내렸다.
“검마전(劍魔戰)의 구자영 공녀님이시다. 얼마 전 신의를 모시러 갔다가 지금 귀환하는 길이다.”
고두모는 마차에서 내리자 문지기를 바라보며 작지만 또박히 들릴 정도로 소리쳤다. 그러자 그 말에 사납던 문지기의 기세도 잠시 수그러들더니 고두모와 구자영 그리고 만유정과 자홍을 바라보았다.
외성과 질적으로 다른 내성의 문지기라고 해도 구자영과 고두모가 주는 존재감은 그 이상인 모양이었다.
그렇게 문지기가 고두모의 말에 기세가 주눅 들었을 때였다.
“누가 신의라는 사람이냐?”
갑자기 문지기 옆으로 뾰족한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매서운 눈매의 중년인이 나타났다.
방금 전 문을 지키던 문지기와는 다르게 고두모와 구자영이라는 말에 주눅 들지 않는 것이 결코 범상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래서인가 얼핏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만유정과 자홍을 놓치지 않고 물어보는 중년인이었다.
“이분이 모셔 오려는 신의세요.”
마도맹의 인원이라면 그 중년인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없기에 구자영은 중년인의 반말에도 공손하면서도 재빨리 만유정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염라전객(閻羅前客) 수우강.
마맹주가 직접 지휘한다는 천마수호대(天魔守護隊), 수라마전(修羅魔戰), 내성순찰대(內城巡察隊) 이 세 단체 중 하나인 내성순찰대의 대주로 임명된 자, 내성의 성문을 지키는 수문장답게 염라전객이라는 별호로 마도맹의 창설과 그동안 문을 지키던 전 수문장이 물러나고 새롭게 수문장을 지켜 오고 있는 자였다.
세간에서는 마제 천우강에게 단 일 초식 만에 패배하여 그의 심복을 자처했다는 말이 있지만 그것이야 워낙 마제가 강해서지 수우강이 약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때의 수우강은 제법 혈기 왕성했던 시기이기도 했기에 지금 수우강이 얼마나 강한 무공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분명한 것은 수우강이 새롭게 수문장이 된 근 삼 년 동안 그의 입에서 통과가 나오지 않는 이상 결코 내성에 통과한 자는 없었다는 것만이 그가 어느 정도의 무공을 가졌는지 간접적으로 추측하게 할 뿐이었다.
“그럼 저자는 누구냐?”
그래서인가 그 위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구자영의 신분도 수우강에는 소용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자홍을 바라보는 수우강의 입가에는 싸늘한 미소가 감돌았다. 자홍의 몸에서 풍기는 피의 냄새와 위험한 살기를 수우강이 느꼈던 것이다.
“생사섬 자홍 선배세요. 본전의 필요한 일이 생겨서 급히 같이 모시게 되었어요.”
구자영은 자홍을 잠시 바라보더니 만유정의 눈치가 보였는지 급하게 자홍에 대해 설명했다.
물론 그렇다고 자홍의 신분을 숨기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그것은 염라전객 수우강을 무시하는 위험한 도박수였다.
“흠.”
수우강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만유정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내성의 수문장을 결코 무공만으로 뽑지는 않는다.
무공도 무공이거니와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고 위험을 감지할 수 있는 동물적인 감각도 역시나 수문장의 중요한 요건이었다.
그리고 그런 수우강에게 만유정은 왠지 모를 위화감을 들게 만들었다. 허리에 메어져 있는 불사검의 예기를 느꼈기 때문도 아니었다.
만유정의 가슴 쪽 약간 볼록하게 튀어나온, 파천뢰를 감춘 부분에서 마치 뭔가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무공의 경지가 높을수록 자신의 본능을 누구보다 믿는 경향이 큰 법. 또한 그러한 본능을 재빠르게 실천하기도 했다. 수우강은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만유정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