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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갈법사 1권(6화)
제4장 달면 삼키고 써도 일단 삼킨다(2)


그렇게 그들 중 가장 병세가 심하거나 주위 사람들의 동정을 받는 서른 명이 추려졌다. 틸러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씩 웃으며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내 의식을 치른 후 아래로 내려갈 것이니 기다리도록 하시오. 그리고 기다리면서 객점에서 음식이라도 먹는 것이 어떻소?”
“예, 예에! 알겠습니다.”
이내 객잔 안이 붐비기 시작했다. 객잔 주인이 틸러가 있는 방으로 올라왔다. 감사의 인사를 하기 위함인 듯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아침 장사는 물론 오후 장사까지 확실히 매상을 올릴 수 있을 듯합니다.”
약간 뚱뚱하고 웃는 듯한 실눈이 선한 인상을 주는 객점 주인은 연신 고맙다며 고개를 숙였다. 틸러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이 돌아가자 속으로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지만 겉으로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새벽부터 저 때문에 고생하셨을 테니 이 정도 배려는 당연한 것이지요. 아, 그보다 물 항아리를 가져다주시겠습니까? 이곳에서 일하는 하인도 두 명만 딸려 보내 주십시오.”
은혜를 입은 바가 있으니 부탁을 거절할 리 없었다. 주인은 곧 준비하겠다며 아래로 내려갔다.
“오라버니, 그런데 그 말씀 정말이신가요?”
“무엇 말이냐?”
연랑은 침대에 누워 틸러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애정 어린 눈빛으로 틸러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천기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 말이에요. 정말 사람들 모두를 구할 수는 없나요?”
틸러는 씩 웃으며 침대 한쪽 구석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그리고 연랑의 손을 부드럽게 잡으며 입을 열었다.
“랑아, 세상 만물에는 이치라는 것이 있고, 또 그 이치에는 법도와 균형이란 것이 있는 법이란다. 나는 한쪽으로 기울어진 그 균형을 맞출 뿐이다. 내가 모든 인간을 구한다면 하늘과 땅의 균형이 깨질 것이 분명하니, 내 마음이 아파도 어찌 그리하겠느냐.”
그런 말을 하는 틸러의 눈빛이 너무나도 깊었기에 연랑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여래불의 뜻에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 다짐했건만, 또다시 의문을 가진 자신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틸러를 바라보고 있으니 이상하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틸러는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돌리는 연랑의 모습에 속으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한번 잡은 먹잇감은 이리저리 굴리며 힘이 빠지게 해야 한다. 자신이 먼저 다가가다가는 자칫 실수할 수도 있다. 이런 경험 없는 아이는 스스로가 자신에게 올 때까지 끈덕지게 기다려 주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틸러는 연랑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일단 객잔 주인에게 도움을 받기로 한 이상, 자신이 먼저 준 도움이 확실해질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었다. 객잔 주인이 매상을 올릴 때까지 기다리려 하는 것이다. 그런 틸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랑은 얼굴이 붉어진 채 자신의 무릎을 베고 있는 틸러의 볼과 머리에 손을 올리고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잠시 후, 틸러는 연랑과 함께 객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시민들은 웅성웅성 잡담을 나누고 있다가, 틸러가 모습을 보이자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틸러는 멀리서 자신을 보고 있는 객잔 주인에게 슬쩍 눈짓을 했다. 객잔 주인은 알았다는 듯 손짓을 했고, 곧 건장한 체구의 사내 하나가 큰 물동이를 들고 틸러에게 다가왔다.
“그럼 가 봅시다. 허허…….”

성도에서 이토록 시민들을 따르게 한 무림인이나 군주는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금발의 진인과 그 뒤를 따르는 새침한 소녀가 수천 명의 시민들을 이끌고 도시를 활보하고 있었다. 진인의 기적은 놀랍게도 진짜였다. 도시에서 가장 가난한 왕가의 어머니가 울모졸사(鬱冒卒死)하여 쓰러진 후 어떤 용한 의원도 그녀를 깨어나게 하지 못했는데, 진인이 물동이에서 황금잔에 물을 한 잔 떠 그녀에게 먹이자 이내 잠에서 깨어나듯 눈에 떴다. 틸러는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를 껴안는 왕가를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며 다음 집으로 향했다. 시민들은 그런 모습을 보며 절을 하거나, 혹은 그를 경외감이 담긴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이 진인은 진짜다. 지금까지 이 도시를 거쳐 갔던 수많은 가짜들과는 차원이 다른 진짜 선인이다.
그 뒤로도 틸러는 폐경색으로 죽어 가던 김가의 아내와 시궐하여 쓰러진 염가의 딸 등을 차례차례 구해 냈다. 그렇게 서른 명의 시민들을 모두 구제한 틸러는 짐짓 땀을 닦는 척하며 빙긋 웃었다.
“끝났구려, 허허!”
틸러는 턱을 문지르며 시민들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시민들뿐 아니라 마을의 군졸들까지도 틸러에게 절을 했다.
“허허, 그렇게까지 할 것 없소. 몸을 일으키시오. 나는 그저 하늘의 뜻을 따른 것일 뿐. 어허, 어서 일어나시라니까요!”
틸러는 친히 시민들의 사이를 다니며 그들을 일으켜 세웠다. 시민들은 그런 틸러의 모습에 진정으로 감동을 받은 듯했다. 눈물을 흘리거나 그의 손을 꽉 부여잡고 연신 감사하다고 하는 시민들의 모습에서 틸러는 이대로라면 앞으로의 행보가 얼마든지 편해질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평생 이 도시에서 있을 수는 없다. 지위, 돈, 그리고 여자. 세 가지를 충족하기 위해선 자신의 명성을 더욱 떨치고, 더 많은 곳을 여행할 필요가 있었다.
“진인이시여,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어머니를 구한 왕가가 눈물을 흘리며 입을 열자 틸러는 손을 내리 저었다.
“아니오. 사례를 받으려 한 일이 아니니 개의치 마시구려. 그저 바람 따라 흐르다 이곳을 다시 거치게 되면 한 끼 밥이라도 대접해 주시구려.”
여기서 사라져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모습으로 비추어질 것이다! 틸러는 여전히 그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연랑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느긋한 발걸음으로 성도 밖으로 향했다.
시민들은 그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절을 하며 그를 경배하고 있었다.

성도 밖으로 나와 한참을 말없이 걷기만 하던 틸러가 문득 멈추어 서서 연랑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이제 우리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이냐?”
“네? 푸훗! 오라버니도 참……!”
어느 때는 아주 똑똑해 보이고, 또 어느 때는 올려다볼 수 없을 정도로 커 보이지만, 가끔 이렇게 조금 모자란 듯한 틸러의 모습에 연랑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작게 웃으며 틸러를 바라보다가 봇짐에서 지도를 꺼내 들었다.
“이쪽으로 가다 보면 덕양과 면양, 그리고 광원을 지나 섬서성으로 향하게 되는군요.”
“섬서? 그곳은 어떤 지역이냐?”
틸러는 이곳의 풍습이나 환경 등에 대해서는 책을 통해 확실히 통달했지만, 그 이외의 것은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연랑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저도 잘 모르겠네요. 으음, 그래도 섬서에는 정파의 한 축이라 할 수 있는 화산파와 종남파가 위치하고 있으니 그리 걱정하지는 않아도 될 것 같아요.”
화산파와 종남파는 틸러도 들어본 적이 있는 곳이다. 화산파는 협을 중시하는 곳으로 무공도 뛰어나지만 그 개인의 협심이 아주 뛰어나다 했다. 잘하면 여기서도 자신의 이름을 알릴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화산파는 무림맹이란 곳에서의 활동도 아주 활발하다 하지 않던가.
“그럼 섬서로 가 보도록 하자꾸나. 그곳에도 고통 받는 중생들은 얼마든지 있을 터이니.”
“예, 오라버니.”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섬서로 향하는 그들의 뒤로 검은 인영 하나가 천천히 뒤따르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섬서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멀었다. 말을 타고 이동할 수도 없는 데다 틸러의 마법서에는 텔레포트나 블링크 같은 고위급 마법이 전혀 적혀 있지 않았다. 언어 통역, 라이트, 저주 해제, 잠금 해제, 화염구 같은 간단한 것들뿐이다. 게다가 객잔 주인이 싸 준 식량도 벌써 반이나 먹어 가고 있었다.
“아직도 먼 게냐?”
“흐음, 이제 이틀만 더 가면 되네요. 왜요? 오라버니, 힘드신가 봐요?”
연랑은 그녀답지 않은 짓궂은 웃음을 지으며 틸러를 올려다보았다. 틸러는 짐짓 쑥스러운 척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연랑은 그런 그가 귀엽다는 듯 깔깔대며 웃다가 한쪽에 돗자리를 폈다.
“그럼 오늘은 여기서 쉬도록 하자구요. 이 적화림(赤花林)은 제가 어려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은 곳이에요.”
연랑은 틸러가 자리에 앉기를 기다렸다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주려는 듯 입을 열었다. 틸러는 궁금한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적화림에는 화룡이 살고 있었다 해요. 원래 이 적화림의 예전 이름은 귀림(鬼林). 요괴와 원혼들이 너무 자주 출몰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하는데, 화룡이 출몰한 이후로 요괴와 원혼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더라구요. 그리고 화룡은 숲의 어딘가 깊숙한 곳에서 잠에 빠져 들었는데, 지금도 가끔 자신을 깨워 줄 사람을 부르고 있다더군요. 호호! 어렸을 때 소불 스님께서 자주 해 주시던 이야기예요. 조금 시시했나요?”
“아니, 아주 재미있었어. 후후! 네가 하는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라도 다 재미있지.”
“어머, 오라버니도……. 호호.”
틸러의 능구렁이 같은 말에 연랑은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이내 연랑의 얼굴이 차갑게 변했다. 그녀는 방금 전까지 웃고 있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차가운 눈빛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느냐?”
“누군가가 이 근처에 있어요. 살기가 느껴지네요.”
‘산적인가?’
틸러는 조금 난감한 듯 주위를 돌아보았다. 이런 깊은 숲 속이라면 산적이 있어도 이상할 것은 없다. 하지만 산적이라면 숨어 있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힘도 없어 보이는 사내 하나와 어린 여자아이 하나뿐인데. 이내 저만치의 풀숲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연랑은 벌떡 일어나 권식을 취했다. 하지만 나타난 거대한 인영에 연랑의 표정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아, 당신은……?”
풀숲에서 나온 사람은 놀랍게도 객잔에서 보았던 그 살인자였다. 살인자는 담담한 표정으로 그들에게 다가왔다.
“계속 따라온 겐가? 하하! 그래, 무슨 볼일인가?”
틸러는 떨리는 손을 억누르며 짐짓 여유롭게 말했다. 만일 사내가 좋지 않은 마음을 먹고 자신들을 미행한 것이라면 여기서 죽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지만 살인자는 쑥스럽다는 듯 입을 열었다.
“나는…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오.”
“에? 그래서 혹시 우리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계속 따라오고 있었던 거예요?”
의외의 대답에 연랑이 놀란 듯 반문했다. 살인자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틸러는 그제야 온몸의 긴장이 싹 풀리는 기분이었다. 살인자의 마음은 고맙지만, 이런 녀석과 함께 다녔다간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다. 그때는 틸러가 일으킨 기적 때문에 모두의 이목이 틸러에게 집중되어 있어서 그곳을 빠져나갈 수 있었지만, 그것으로 청성파의 도사들이 포기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던 것이다. 어디까지나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마음은 고맙네만 우리는 자네의 도움이 필요 없네. 자네도 자네 갈 길을 가게나. 우리같이 재미없는 사람들과 함께 있어 봐야 무엇 하겠나. 랑아, 이만 가자꾸나.”
“예? 하, 하지만 이 아저씨는……. 오라버니!”
틸러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숲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연랑은 살인자와 틸러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다가 이내 틸러의 뒤를 쫓아 달려갔다. 살인자는 그런 둘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결심한 듯 다시 그들의 뒤를 따랐다.
“아직도 따라오고 있느냐?”
“예? 아, 네. 느껴질 듯 말 듯 멀리에 있지만 분명히 따라오고 있네요.”
틸러는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상당히 짜증이 났다. 간만에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받았을 뿐 아니라 귀찮은 짐이 하나 더 들러붙으려 하고 있지 않은가. 그저 이럴 때는 상대가 포기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편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저 사내를 떼어 놓는 것보다 더 큰 문제가 생겨 버린 듯했다. 왠지 아까부터 같은 곳을 빙빙 돌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오라버니, 이거 아무래도…….”
“으음, 길을 잃은 게냐?”
연랑은 우물쭈물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희뿌연 안개가 끼고 나서부터는 이상하게 방향 감각이 마비된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같은 방향을 이리 반복해서 돌 수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길을 잃어버린 것은 그들뿐 아니라 자신들의 뒤를 계속 따라오고 있는 살인자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이제 어쩌죠?”
연랑은 난처한 표정으로 틸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틸러라고 해서 딱히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틸러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일단은 지금까지 왔던 곳과 조금 다른 방향으로 가 보자꾸나.”
틸러는 방향을 바꾸어 풀숲이 우거진 쪽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미덥지는 않지만 계속 이대로 같은 곳만 빙빙 돌 수는 없는 일이니……. 연랑은 불안했는지 그의 옷자락을 꽉 쥐고 뒤를 따랐다.
다행히도 조금씩 다른 풍경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대신 안개는 더욱 심해져서 한 치 앞도 살피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게다가 살인자의 인기척이 더 짙어졌다. 그도 시야가 흐려지니 틸러와 연랑의 기척만으로 따라오고 있는 듯했다. 틸러는 말없이 계속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다른 생각이 있어서는 아니다. 연랑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을뿐더러 아까처럼 같은 곳을 돌고 있지도 않으니 앞으로 무작정 가다 보면 무엇인가 나오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연랑아.”
“네?”
연랑은 틸러의 옷자락을 여전히 꽉 부여잡은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틸러는 조금 난감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이 숲에 산이 있더냐?”
“산이요? 아뇨, 산은 찾아볼 수 없는 곳인데요?”
“그럼… 이 동굴은 무엇이냐?”
연랑은 그제야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희미한 가운데 높이 솟아 있는 돌산과 그들의 앞에 뚫려 있는 거대한 동굴.
“이, 이런 곳이 적화림에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틸러는 잠시 망설였다. 동굴 안에 뭐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들어가는 것은 조금 무모해 보이지 않는가. 하지만 이대로 안개 속을 계속 헤매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 안에서 안개가 조금 가라앉을 때까지만 있어 보자꾸나.”
“그래요. 그런데… 이런 곳이 있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는데, 신기하네요.”
틸러와 연랑은 조심스럽게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동굴 안은 마치 불이 붙은 것처럼 붉었다. 온통 붉은 돌들. 틸러는 난생처음 보는 붉은 돌들이 조금 음산한 듯 몸을 떨었다.
“상당히 으스스한 곳이로구나.”
“그런 곳이네요, 어머?”
주위를 둘러보던 연랑이 동굴 깊은 곳을 가리켰다. 틸러는 침을 꿀꺽 삼키며 어두운 동굴 안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면 이 동굴은 정말 이상하다. 밖은 선선해지고 있는 늦여름 날씨인데, 이 안은 마치 찌는 듯 덥지 않은가. 연랑은 조금씩 동굴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난생처음 느껴 본 기운에 대해 호기심을 느낀 듯했다. 틸러도 하는 수 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동굴의 안은 깊이 들어갈수록 더욱 짙은 붉은빛으로 변해 갔다. 게다가 얼마나 깊은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거의 다 왔어요, 엄청나요. 느껴지지 않으세요?”
연랑은 느껴지는 기운에 호흡하기마저 힘든 듯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틸러도 그런 느낌이 오고 있었다. 진기의 흐름을 느끼는 데에는 영 젬병인 그도 아까부터 이유 없이 불쾌하고 압박감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