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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나와 예주는 대학생이 된 지 몇 개월 후 첫 관계를 가졌다. 그것은 서로가 이제 성인(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미숙하지만)이라는 인식과 함께, 좀 더 진지한 관계로 발전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물론 나는 다른 이유야 어쨌든 그런 관계를 간절히 바랬지만.
그날 밤 우리는 서로 적당히 술을 마신 채 모텔에 함께 누워 쉬었다. 예주가 놀라운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너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지?”
“……무슨 말이야?”
“시침 떼지 마. 난 너네 부모님만큼이나 널 잘 알아.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랐는데 그걸 모를 거 같아?”
같이 알몸으로 누워 있는 상황에서, 여자가 [나한테 숨기는 거 있지?]라고 물으면 대개의 남자들은 뭔가 뒤가 켕길 것이다. 물론 나도 뒤가 켕겼다.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내 성격 잘 알잖아. 내가 뭘 숨기는 게 있겠어.”
“지금 이 상황에서도 그렇게 시침이 뗄 거야? 넌 분명 나한테 숨기는 게 있어.”
“난 다른 여자 없어. 아님 야동 보는 거 말하는 거야?”
“바보 같은 말하지 마.”
예주의 표정을 보니 그렇게까지 기분 나쁘거나 헤어지자고 나올 기세는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분명 내가 뭔가 말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나를 가만히 올려다보는 예주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새삼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줄곧 [메주]라는 별명으로 불렀었지만, 그런 별명은 예주에게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하긴, 내가 적당히 술을 마신 탓도 있겠지만.
“……아무튼 나중에 꼭 이야기 해 줘.”
예주는 이 이상 추궁하는 건 좋지 않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물론 나는 그럴 리 없겠지만, 예주는 혹시라도 내가 화를 내거나 헤어지자고 할까 봐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 * *

다행히 그날 이후 그 대화에 대해 예주가 다시 언급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부터 그 [특이한 현상]에 대해 예주에게 고백해야 하는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번은 술이라도 한껏 마시고 고백하자고, 그렇게 마음을 먹고 술을 마셨는데, 술을 마시는 동안 생각이 바뀐 적도 있었다.
그렇게 고민 속에서 며칠을 보내고 나서야, 난 해결책 아닌 해결책을 만나게 되었다.


1막 - 특이한 사람들, 2장


무더운 여름도 지나가고, 바람이 시원해지는 가을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날 나는 적당히 수업을 끝내고 집에 돌아가기 위해 대학 캠퍼스 안을 걷고 있었다.
나는 애써 최근 재밌게 본 만화에 대해 생각하려고 했지만, 사실 머릿속에는 여전히 그 [특이한 현상]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뒤에서 내 어깨를 살며시 두드렸다.
“윤현성 군.”
“예?”
뒤를 돌아다보니, 꽤나 그럴듯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키 크고 턱수염을 기른 중년 아저씨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기에 나는 잠깐 당황했다. 무슨 전도사나 장사꾼일까?
“잠깐 할 이야기가 있는데, 괜찮겠나?”
“왜 그러시죠? 저는 바쁜데요.”
“하하하, 무슨 전도사나 장사꾼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게.”
그렇게 말하면서 중년 아저씨는 내게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에는 [A대학 물리학부 교수, 박상택]라고 간단히 적혀 있었다. A대학이라면, 우리나라에서는 지나가는 개나 소도 이름을 알고 있는 유명 대학이었다. 나는 당연히……더욱 의심스러워졌다.
“하긴 명함만 가지고는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할 건지 알 수 없겠지. 하지만 자네에게도 매우 중요한 일일세.”
“…….”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 버릴까, 아니면 여기서 간단히 용건만 말하라고 할까, 나는 순간 고민했다. 상대가 진짜 A대학 교수라면 우리 학교 교수들 중에도 지인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나를 고민하게 만든 것이다.
“아무래도 알기 쉽게 이야기해야겠군. 현성 군, 자네는 다치는 일이 없지 않은가?”
“…….”
내가 이번에 대답을 안 한 것은, 고민 때문이 아니라 반쯤 정신이 나갔기 때문이다.
“자네는 교통사고를 당해도 칼에 찔려도 심지어 총을 맞아도 다치는 일이 없어. 내가 하려는 말은 바로 그것에 관한 것일세.”
분명 나는 다치는 일이 없다. 총을 맞아 본 적은 없지만, 그러나 문제는 그게 아니라 이 아저씨가 어떻게 그 [특이한 현상]을 알고 있냐는 것이다.
결국 나는 아저씨를 따라 캠퍼스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

나와 수상쩍은 중년 아저씨는 카페 안에서 되도록 한적한 자리를 골라 앉았다.
“일단 내 신분에 대해 확실히 해 둬야겠군.”
그렇게 말하더니 아저씨는 지갑 속에서 A대학 도서관 출입 카드를 꺼내어 내게 보여 주었다. 물론 A대학 도서관 출입 카드가 어떻게 생겼는지 나는 알지 못했지만, 적어도 카드만은 진짜처럼 보였다. [박상택 물리학부 교수]라는 신분도 적혀 있었다.
“자, 어때. 믿을 수 있겠지?”
“…….”
나는 속으로 [대학교수라고 해서 사기 치지 말라는 법은 없지요.]라고 응수했지만, 예의를 생각해 그런 발언은 삼갔다.
“물론 대학교수라고 해서 사기 치지 말라는 법은 없네만. 하하하하하.”
“…….”
설마 이 아저씨는 남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던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저씨의 선량한 미소 때문인지 별다른 위협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긴 사기꾼이 악당의 얼굴을 하고 있을 리는 없지만.
“아마 자네는 자네의 비밀을 어떻게 내가 알았는지, 그게 제일 궁금할 테지.”
“…….”
“그럼 이야기의 진행을 위해 간단한 실험을 해 보도록 할까. 자, 지금 자네가 앉아 있는 의자를 한 번 들어 보게.”
“……왜죠?”
“그렇게 해야만 내 말이 이해가 될 거야. 자, 어서 해 보게.”
이 아저씨는 강의실 밖에서도 강의하는 말투를 쓰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내게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미심쩍어 주저하면서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들었다. 아니, 들려고 했었다.
“……!”
분명 나는 아까 카페에 들어와서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었다. 그런데 지금은…… 의자가 전혀 움직여지지 않았다. 들리기는커녕 밀리지도 않았다.
“이게 대체…….”
내가 조금 놀란 표정으로 아저씨를 다시 바라보자, 아저씨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럼 다시 한 번 시도해 보게.”
그 말에 따라 난 재차 의자를 들어 보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너무나도 간단히 의자가 들렸다. 도저히 믿기 힘들었다.
“알겠나? 그게 내가 가진 [SP], 즉 [특이점―Singular Point]일세. 나의 SP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이라고 부르지.”
“…….”
나는 놀란 표정을 숨기지도 못하고 다시 자리에 앉아 눈앞에 있는 아저씨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제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겠나?”
“……있는 거군요. 다른 사람들도…….”
“이해가 빨라서 좋구먼. 좋은 학생이야.”

중학교 이후로 내가 가지고 있던 의문들 중에 하나가 풀렸다. 나는 이런 [특이한 현상]을 가지고 있는 게 나 혼자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도 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래, 자네 말대로 이 [SP]를 가지고 있는 것은 자네 혼자만이 아닐세. 그렇다고 우리 둘만 있는 것도 아니고.”
“…….”
물어보고 싶은 것이 너무도 많아 오히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마 나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산처럼 많을 텐데, 차근차근 설명해 줄 테니 차분하게 듣게나.”
“……예.”
“자네나 내가 가지고 있는, 남들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 신비한 현상을 우린 [SP]라고 부른다네.”
“우리……?”
“그래, 우린 그 [SP를 가진 사람들의 모임]일세.”
그렇게 말하며 아저씨는 나에게 재차 명함을 건넸다. 아까의 명함과는 다른 명함이었다. 명함에는 영어로 [SP 한국 지부장, 상택 박]이라고 적혀 있었다.
“Singular People. 즉 [특이한 사람들]이란 뜻으로, [특이점]과 똑같이 축약해서 SP라고 부르지.”
“…….”
“회원 숫자는 그리 많지 않지만, 전 세계적으로 보면 그래도 꽤 있다네.”
“……모임도 있는 거군요.”
“당연해. 일단 우리는 다른 사람들하고는 공감할 수 없는 비밀을 가지고 있으니까.”
말이 조금 애매했지만 그 부분은 나도 이해할 수 있었다. 같은 비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끼리는, 딱히 비밀을 숨길 필요도 없이 마음 편히 지낼 수 있을 터이다.
“……그래서 이 모임에선 도대체 뭘 하는 겁니까.”
“간단히 말해서, SP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돕는 것이지.”
“서로 돕는다구요?”
“그래. 이를테면, 만약 자네가 자네의 비밀을 남에게 함부로 발설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 거라고 생각하나?”
“…….”
아마 내 이름을 딴 종교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그도 아니면 [믿거나 말거나] 같은 프로그램에 출현하게 되겠지.
“아마 사회적으로 대단한 혼란이 일어날 걸세. 뿐만 아니라 자네는 인간 취급 받기도 힘들지 않을까……?”
그런 잔인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점은 우리 아버지랑 비슷하다. 하지만 이 아저씨는 방금 그 발언에 자기 자신도 해당된다는 점을 생각하셔야 할 것 같다.
“우리 SP는 그런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서로 의지하며 고민을 들어 주고 또 도와주는…… 그런 모임이지.”
“……만약 정말 그렇다면, 절 어떻게 ‘도와주실’ 생각이십니까?”
“먼저, 자네를 우리 SP의 회원으로 받아들이려는 생각이야. 그리고 우리와 같이 활동하는 거지.”
먼저, 이 아저씨의 말을 전부 믿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나에게는 생각할 시간도 필요했다.
“지금 당장 결정하라고 하지는 않겠네. 일단 내일 하루 우리 사무실에 같이 가 보는 게 어떻겠나. 거기서 좀 더 이야기를 들어 보고 결정하도록 하게.”
“…….”
일단 나는 이 정신적인 충격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다. 결국 무슨 결정이 됐든 내일 하겠다고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