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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카페에서 나온 후 교수 아저씨가 친절히 집까지 차로 바래다주었다. 너무 친절한 것이 조금 의심스러웠지만, 어차피 나는 [다칠 일이 없는 몸] 아닌가.
집에 돌아온 후, 나는 저녁도 먹지 않고 내 방에 틀어박혔다. 문 밖에서는 아마도 어머니가 잔소리를 늘어놓고 계시겠지만, 내 귀에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SP…….’
나는 교수 아저씨가 준 [SP 한국 지부장]이라고 쓰인 명함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SP]에 관해 검색도 해 보았다. 관련된 것은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예주에게 전화를 했다. 왠지 그녀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뭐하고 있었어?”
―응…… 미안, 조금 피곤해서. 리포트 때문에…….
“아니, 미안해할 건 없지만…….”
예주의 목소리는 확실히 피곤하게 들렸다. 결국 난 별다른 이야기도 하지 못하고 전화를 끊을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날은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 * *

이른 아침…… 약속한 시간에 맞춰 역 앞으로 나가자, 먼저 나와 있던 키 큰 교수 아저씨가 웃으면서 나를 맞아 주었다.
“현성 군, 잠은 잘 잤나?”
“아뇨.”
“하하하하하, 그렇겠지. 자, 그럼 갈까.”
아저씨의 차를 타고 우리는 시내를 달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아저씨의 차는 원양어선으로 향하지는 않았다. 이것으로 오늘 하루 수업들은 전부 땡땡이를 치겠지만, 운 좋게도 지루하기 짝이 없는 과목들뿐이었다.
“자네가 혼란스러워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세. 오히려 자네는 잘 버티고 있는 편이지.”
“……그런가요?”
“아아, 이런 말을 하는 건 좀 그렇지만 제정신을 잃어버린 사람들도 한둘이 아니거든.”
“…….”
나도 지금 내가 제정신인지는 조금 의심스러웠지만 굳이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아무튼 그 짧은 대화를 끝으로 아저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운전을 했다.
“다 왔네.”
아저씨가 그렇게 말하며 차를 멈춘 곳은, 도심에 세워진 3층짜리 건물 앞에서였다. 크기는 별로 크지 않지만 제법 그럴듯하게 디자인 된 사무실 같아 보였다.
“1층은 응접실, 2층은 회원들 사무실, 3층은 내 사무실이지.”
“……이 건물에 회원은 몇 명이나 있나요?”
“하하하, 그렇게 물으니 조금 부끄럽구먼. 사실 굉장히 적거든.”
아저씨가 키 카드로 건물 출입구를 열자, 우리는 현관을 지나 척 보기에도 손님들을 맞이하는 응접실로 들어섰다. 아저씨는 응접실 한가운데 놓인 소파에 앉아, 앞에 놓인 전화를 들고 누군가를 불렀고 그 모습을 보며 난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잠시 후 정장을 차려입은, 단발머리에 안경을 쓴 여성이 말없이 다가와 우리에게 커피를 건넸다. 제법 미인이었기에 나는 가슴이 두근거림과 동시에 예주에게 미안했다. 그런데, 나의 죄책감과는 별개로 그 여성이 나를 쳐다보는 눈빛은 왠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여성은 우리에게 커피를 건네자마자 말없이 응접실에서 나갔다.
“우리 회원 중 한 명이야. 좋은 아가씨지.”
“……예.”
뭐가 좋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외모는 괜찮은 것 같았다.
“아무튼…… 와 보니 이상한 곳은 아니라서 안심이 되지 않나?”
“적어도 인상 쓴 사람들이 몰려오진 않아서 다행이네요.”
“하하하하하, 하지만 자네는 그런 사람들이 몰려와도 전혀 겁내지 않겠지.”
그 말은 사실이다. 조금 대담하게도 내가 무작정 이 아저씨를 따라나선 것은, 내 [특이한 현상(아저씨의 말에 따르면 SP)]을 믿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내 생각은 이 아저씨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자네가 그런 SP를 가지고 있으니 대담하게 행동하는 것도 이해가 가네. 하지만 한 가지 조심해야 할 게 있을 것 같군.”
“……그게 뭐죠?”
“자네의 신체는 도저히 위협하는 게 불가능해. 그건 자네나 나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만약 자네가 들어왔을 때 내가 밖으로 나가 이 방의 출입구를 완전히 막아 버렸다면 어떻게 되었겠나.”
그 말을 듣자 순간 나는 섬뜩했다. 여러 가지 실험을 통해 나 자신에게 가해지는 위협은 대부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지만, 만약 나를 이 방 안에 가둬 놓고 굶기기라도 한다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 나는 나의 짧은 생각을 후회했다.
“이해가 빠른 학생이니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고 있겠지? 물론 우리는 전혀 그럴 의도가 없지만, 아무튼 그건 자네의 약점일세.”
“…….”
“그렇다고 너무 경계할 필요는 없어.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우리는 전혀 그럴 의도가 없다는 뜻에서 하는 거니까. 다만 그렇다고 너무 방심하는 것도 문제라는 걸세.”
“……그럼 혹시 그런 짓을 할 사람들이라도 있나요?”
“그건 자네 하기 나름이지.”
그런 애매한 대답을 늘어놓고는, 아저씨는 품 안에서 영어로 된 팸플릿과도 같은 것을 꺼내 놨다. 마치 관광 안내서처럼 보였지만, 그 안에는 전혀 다른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럼 이야기를 시작할까…… 이게 바로 우리 모임 [SP]의 개요일세.”
이름 SP…… 결성 년도 1975년…… 회원 수 약 150명…….
“……150명?”
“왜, 너무 적다고 생각되나?”
“…….”
“전 세계에서 150명일세. 무슨 말이냐 하면…… 전 세계 인구 65억 중에 단 150명이라는 거지.”
“…….”
많은지 적은지 알 수 없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특이한 현상]을 가진 사람들이 150명이라면 많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전 세계 인구 65억 중에 고작 150명이니 적다고 해야 할지.
“믿기 힘들군요.”
“하지만 그게 현실이야. 자네가 믿든 안 믿든 간에.”
그렇게 말하며 아저씨는 응접실 벽에 걸린 액자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사람들이 믿든 안 믿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실재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이다.]라는 말이 쓰여 있었다.
“……사이비 종교 같네요.”
“하하하하하하, 역시 그런가?”
만약 이게 사이비 종교라면 이 아저씨는 행동 대장쯤 될 것이다. 행동 대장치고는 인상이 묘하게 선하다는 게 걸리지만.
“종교는 아니지만 사이비도 아니야.”
그렇게 말하면서 아저씨는 자신이 들고 있던 컵을 응접실 바닥에 내려놓았다.
“해 보게, 절대로 움직일 수 없을 걸.”
“…….”
나는 손을 뻗어 컵을 들어 올리려고 했지만, 아무리 용을 써도 컵은 단 1mm도 들려지지 않았다.
“이게 도대체…….”
“어제 말했듯이 나의 SP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이야. 원하는 물체를 극한으로 무겁게 만들 수 있지.”
“…….”
“참고로 자석 같은 건 아니니까 그런 의심하지 말게. 원한다면 자네가 가진 물건으로도 해 보일 수 있어.”
의심이고 자시고, 어제 카페에서도 그랬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평범한 컵 하나조차 들 수 없다는 사실은 내 눈 앞에서 보고 있는데도 믿기 힘들었다.

그러나…… 나는 결국 믿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나 자신에게도 믿을 수 없는 비밀이 있으므로.
“SP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전 세계에서 고작 150명. 그렇기에 이들은 사회에서 제대로 적응하기 힘들어.”
“…….”
“자네는 놀랍게도 매우 잘 적응하고 있는 편이지만, 개중에는 자신의 SP 때문에 제정신을 잃거나, 혹은 자신의 SP를 남에게 함부로 밝히거나…… 심지어는 자신의 SP를 악용하는 사람들도 있었지.”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됐나요?”
“좋은 결말을 맞진 못했다네.”
설마 모조리 죽인 것은 아니겠지,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다시 섬뜩해졌다.
“다행히 우리 SP가 결성된 이후로는 그런 일이 상당수 사라졌어. 그게 우리 모임이 필요한 이유지.”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찾아냈나요?”
“응?”
“저나 교수님처럼 그런 비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도대체 어떻게 찾아냈던 겁니까?”
“아…… 하긴 자네는 그게 가장 궁금하겠지. 그래, 간단히 말해 우리들 중엔 그런 것이 가능한 SP를 가진 회원도 있는 거라네.”
“…….”
“정확히 말하자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정보를 알아낼 수 있는 분이지.”
“…….”
“믿기 힘든가? 하지만 믿을 수밖에 없을 걸.”
“……그런 사실을 왜 저에게 다 말해 주는 겁니까? 혹시 제가 모임에 가입하는 것을 거부한다면…….”
“우리 SP에는 인간의 기억을 지울 수 있는 회원도 있거든.”
“…….”
“만약 자네가 모임에 가입하는 것을 거부한다면…… 그 회원이 조만간 자네를 방문할 걸세. 그리고…… 그 회원의 SP는 자네의 SP로 막을 수 없다네. 그건 장담할 수 있어.”
이건 다시 말해 협박이었다.
“이런 안 좋은 이야기는 그만하지. 대신 우리 모임에 가입하면 무슨 좋은 점이 있는지, 그걸 들어 보게나.”
“……무슨 보험 판매 같군요.”
“하하하하하, 동감이야.”
아저씨의 표정이 다시 밝아지자, 본래의 선한 인상으로 되돌아왔다. 솔직히 아까는 좀 무서웠지만…….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 모임에 들어오면 자신의 비밀을 혼자서 짊어지고 있을 필요가 없어. 그것이 가장 우선이자 가장 중요한 점일세.”
“…….”
“그런 비밀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회에 잘 적응하기 힘든 법이거든. 게다가 사고를 칠 위험도 있고.”
“하긴 저도 어렸을 때…….”
거기까지 말하자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분명 내 [SP]를 가지고 사고를 칠 뻔했다. 그런데 그런 과거를 이 사람들이 모르고 있었을까? 어쩌면…….
“혹시 제가 어렸을 때부터…… 저를 감시하셨습니까?”
“아아, 그건 자네의 양해를 구해야겠군. 그래…… 우리는 세상에 있는 모든 SP를 가진 사람들을 찾아내고 있으니, 당연히 자네의 일도, 자네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있었지.”
“…….”
“그렇다고 사생활을 심하게 침해하거나 그런 일은 없어. 그 점은 안심해도 좋네.”
“……안심이 안 되는데요.”
“이렇게 말하는 나 자신도 같은 식으로 감시를 받았으니, 이 말은 믿어도 좋을 걸세.”
대단히 찜찜하고 불안했지만 꾹 눌러 참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