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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솔직히 말하자면…… 보통은 SP를 가진 사람들을 발견하게 되면 그 즉시 그들에게 모임 가입을 권유한다네.”
“…….”
“남에게 비밀을 밝히거나 혼란을 겪거나, 사고를 치기 전에 모임에 가입시키는 게 좋으니까.”
“그런데 왜 저한테는…….”
“자네가 너무나도 잘 적응해서 그런 것이지.”
아저씨는 싱긋 미소를 지으면서 그렇게 대답했다. 나는 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무슨……?”
“우리는 되도록이면 한 사람의 인생을 억지로 바꾸려 하지 않아. 그건 [선지자]의 뜻이기도 하니까.”
“선지자……?”
“이 모임을 창설하신 분이야.”
“…….”
“SP를 가진 사람들 중에는, 자신이 SP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깨닫지 못하거나, 혹은 극히 소수지만 깨달은 뒤에도 아무렇지 않게 사회에 잘 적응하는 사람도 있어.”
“…….”
“그런 사람들까지 억지로 SP에 가입시켜야 할 이유는 없지. 그렇게 하면 오히려 더 해가 될 수 있고.”
“…….”
“그렇기에 문제가 발생할 소지를 가진 사람들을 선별해서 가입을 권유하는 거야. 뭐, 전 세계에서 SP를 가진 사람들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니까 이런 권유가 그리 자주 있지는 않지만.”
“저에게 지금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있다는 겁니까?”
“자네는 어렸을 때도 한 번 사고를 칠 뻔했었어, 그렇지 않은가?”
“…….”
“사실 그때 가입을 권유하려고 했었는데…… 우리들 자체 회의에서 좀 더 지켜보자는 의견이 나왔지. 그런데 놀랍게도 어느 순간부터 자네의 행동이 다시 밝아지는 게 아닌가. 그래서 여태껏 가만히 있었던 거라네.”
그건 예주 덕분이다. 이 아저씨라면 그 사실 또한 이미 알고 있을 거라 짐작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자네의 사생활을 침해할 생각도, 자네의 인생을 멋대로 바꿀 생각도 없어. 그저 자네에게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도움을 주고 싶을 뿐이지.”
“…….”
“특히 요즘 자네의 비밀을 주변 사람들에게 말할지 말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지 않나. 그러므로 지금에 와서야 자네와 접촉한 것일세.”
이미 내 사생활은 충분히 침해당한 것 같지만 그런 항의는 잠시 접어 두기로 했다.
“그거 참 고마운 이야기군요. 하지만 그것을 통해 이 모임에서 대가로 얻는 게 뭡니까?”
“모임이 대가로 얻는 것은 없어. 다만…… 자네가 도움을 받은 만큼, 자네도 남들을 도와주면 좋겠지.”
“……보험 판매를 하면서요?”
“하하하하하하, 그것도 좋겠군.”
그렇게 웃더니 아저씨는 순간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들은 모두 같은 문제를 겪고 같은 고민을 했던 사람들일세. 그러니 서로 돕고 싶어 하는 것 또한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아닌가.”
“…….”
“그럼, 이야기를 계속 진행하지. 이건 회원의 권리 및 의무인데…….”
그렇게 말하며 아저씨는 팸플릿의 다음 장을 펼쳤다. 거기에는 회원의 연간 봉급 및 권리와 의무 규정이…… 봉급?
“……회원이 봉급을 받나요?”
“당연하지. 우리도 먹고 살아야 할 것 아닌가.”
“하지만 교수님은 교수님이잖습니까.”
“그건 일단 표면의 직책이야. 뭐, 교수 쪽의 수입도 나름 괜찮긴 하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거기 적혀 있는 봉급 액수가 상당하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이 모임은 어떻게 돈을 벌기에 봉급을 이리 많이 줍니까?”
“음…… 그게 우리 SP의 또 다른 장점인데, 우리는 몇 가지 국제 사업을 하고 있다네.”
“국제 사업?”
“그래, 이 SP 한국 지부 사무실도 표면적으로는 국제 경비 시스템 회사의 사무실로 등록되어 있어. 아, 참고로 방위산업체니까 자네도 여기서 일하면 상당히 괜찮을 걸세.”
“…….”
“회원 수는 적지만 전 세계에 지부가 있는 모임이니만큼, 재정적으로는 그리 나쁘지 않지. 안 그러면 전 세계에 있는 SP를 가진 사람들을 찾으러 다닐 수가 없지 않나.”
“그럼 도대체 봉급을 받고 무슨 일을 해야 하는 겁니까? 설마 진짜로 보험 판매를 하는 건 아니겠죠?”
“평상시에는 방금 말한 국제 사업에 종사하지. 하지만 유사시에는…… 여기를 보게나.”
팸플릿 안에는 [의무 조항]란이 있었다. 맨 위에는 [SP와 SP 회원들에 대한 사실을 비밀로 지킬 것]이라는 항목이 적혀 있었고, 아저씨의 손가락은 쭉 밑으로 내려가 [SP(Singular People)가 자신의 SP(Singular Point)를 필요로 하는 경우, 거기에 전면적으로 협력할 것]이라는 항목을 가리키고 있었다.
“전면적으로 협력…….”
“그래, 이를테면 아까 자네에게 말했듯이 내가 요청하면 다른 나라에서 [인간의 기억을 지울 수 있는 회원]이 우리나라로 입국하지.”
“…….”
“그런 식으로 우리끼리 서로서로 도우는 것. 그게 우리의 일일세.”
“그럼 저도…….”
“물론 그렇지. 하지만 자네가 가입하게 될 경우, 당장은 신입이니 혼자 다니진 못하고 나나 다른 회원들과 같이 다녀야 하겠지만.”
“…….”
“신입 기간 동안에는 SP 활동에 필요한 교육을 받게 된다네. 일단 영어 교육부터.”
“…….”
영어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다행일까?
“이만하면 꽤 괜찮은 모임이자 직장 아닌가? 나라면 당연히 고민 않고 단번에…… 하하하하하.”
“…….”
당연히 나는 아직 그들이 의심스러웠다. 우리 아버지가 말씀하신 격언 중에는 [한 번 더 의심해라.]라는 것도 있었으니까.
“……간단히 말해서 가입하면 평생회원, 거부하면 기억 삭제……군요. 영화에서 비슷한 걸 본 거 같은데.”
“뭐…… 자네가 거부하고 싶다면 굳이 말릴 생각은 없다네. 다만 그럴 경우…… 만일을 위해서 여태껏 들은 SP에 대한 설명과 자네가 자네의 SP를 남들에게 밝히려고 했던 고민은 잊어 줘야 할 걸세.”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제가 사고를 칠 가능성이 아예 없어지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만약 자네가 그 정도로 문제아라면, 우리도 다른 방법을 쓰는 수밖에 없게 되겠지.”
나는 순간 깨닫는다. 그 [다른 방법]은 아마 아까 맨 처음 말한 [나를 어딘가에 완전히 가둬 버리는 것]이라는 것을. [나 하기 나름]이라는 말도 그런 의미였나 보다. 그런 생각이 들자 다시 섬뜩해졌다. 아저씨의 표정도 다시 무섭게 보였다.
“전 학생이라 모임 활동이나 취업보단 일단 공부를…….”
“원한다면 학업을 병행해도 괜찮다네. 어차피 신입 기간 동안에는 그렇게 바쁘지 않을 테니까.”
“……며칠 생각할 시간을 가져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 1, 2주 정도 여유를 줄 테니, 천천히 생각해 보고 마음을 결정하게나.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이 이야기를 남들에게 발설하지는 않길 바라네.”
발설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저씨는 아무 말도 안 했지만…… 역시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1막 - 특이한 사람들, 3장
그 후, 비록 머릿속은 복잡해서 미칠 지경이었지만 난 되도록 정상적으로 생활하려 애썼다.
하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티가 나는 건지, 예주는 가끔 나에게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냥 대답을 얼버무렸는데, 예주는 눈치껏 넘어가 주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뭔가 답답해하거나 화를 낼 만도 한데…….
하지만 예주가 화를 내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저씨의 권유를 받고 난 지 일주일째 되는 날의 일이었다.
* * *
그날도 나는 복잡한 마음을 억누른 채, 수업을 끝내고 집으로 가기 위해 캠퍼스 안을 걷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내 어깨를 살며시 두드렸다.
“윤현성 씨.”
“…….”
접근 방법은 그렇다 치고, 나를 부른 목소리는 아저씨의 목소리가 아니라 여성의 목소리였다. 뒤를 돌아보자…… 거기에는 SP 한국 지부 사무실에서 본, 단발머리에 안경을 쓴 여성이 서 있었다.
“아…….”
“SP 사무실에서 봤죠? 기억나세요?”
“예…….”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결국 나는 이 여성을 따라, 저번에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눴던 카페로 향했다.
저번엔 중년의 아저씨였지만 이번엔 미모의 여성과 함께 카페에 오다니…… 나쁘진 않다. 아무튼 이 카페의 좋은 점은 비밀스런 이야기를 나누기 좋을 만한 한적한 자리가 있다는 점이다.
“정식으로 인사를 해야겠네요. 전 이혜은이라고 해요. 아시다피시 SP 한국 지부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어요.”
그녀는 나에게 명함을 건네줬다. 저번에 아저씨가 준 것과 같은, SP 사무실 명함이었다. 왠지 항상 받기만 하고 주질 못하니, 나도 명함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성 씨를 찾아온 건 다름이 아니라, 이번 SP 가입 권유에 대해서예요.”
“…….”
“아직도 고민 중이신가요?”
“아직 좀 생각을 해 봐야겠네요.”
“……그래요.”
그렇게 말하는 순간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저번에 처음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왠지 호의적이지 않은 눈빛이었다.
“뭔가 SP에 대해 마음에 안 드는 것이라도 있나요?”
“…….”
“솔직하게 말씀해 보세요.”
정말 솔직히 말해도 되는 걸까, 하고 잠깐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당당하게 물어보면 대답을 얼버무리기 힘들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좀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부분이요?”
“교수님께서는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죠. SP에서는 한 사람의 인생을 억지로 바꾸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그렇지만…… 가입을 권하면서 거부하면 기억을 지우겠다니, 그게 억지가 아니고 뭡니까.”
“…….”
“게다가 기억의 일부분만 지우겠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정확히 어디서 어디까지 지울지 믿을 수도 없구요.”
“……아직 어린 나이인데도 용케 그런 생각을 하시네요.”
[어린 나이]라는 그녀의 말에 난 조금 화가 났지만, 되도록 내색은 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고 보니 이 여성은 몇 살일까? 풍기는 분위기로 봐선 나보다 대여섯 살 연상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