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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하지만 현성 씨는 아직 한 가지 중요한 것을 모르고 있어요.”
“……그게 뭐죠?”
“어차피 우리들에겐 달리 갈 곳이 없었다는 걸 말이죠.”
“…….”
이번에도 그녀의 눈빛이 별로 호의적이질 않다. 아무래도 뭔가 나한테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는 모양이다.
“한국에 SP 회원이 몇 명인 줄 아시나요?”
“……교수님께서 매우 적다는 식으로 말씀하셨지만, 정확히 몇 명이라고는…….”
“단 3명이에요.”
“3명…….”
한국 전체에 고작 3명이란 말인가. 하긴 전 세계에 150명뿐이니 그럴 만도 하지만…….
“저랑 지부장님, 그리고 다른 한 명. 이렇게 단 3명이에요.”
“……그런데도 용케 한국 지부까지 생겼군요.”
“SP는 국제적인 사업도 활발히 진행 중이니까요. 그리고 한 국가에 3명이라면 적은 숫자가 아니에요.”
“그럼 3명이서 한국의 사업을 다 맡아 한단 말입니까?”
“후후, 물론 그러지는 않죠. SP 산하 회사는 평범한 회사원들로 채워져 있어요. 그들은 우리에 대해선 전혀 알지도 못하죠. SP 회원 3명은 평소엔 그 산하 회사들의 관리 및 SP 총본부와의 연락을 담당하고 있어요.”
그녀의 이야기는 대충 이해가 가긴 했지만, 그렇다면 그 도심의 3층 건물을 고작 3명이서 쓴다는 말이 된다.
“한국의 SP 회원 3명과…… 현성 씨의 차이점이 뭔지 아시나요?”
“…….”
“현성 씨는 우리 3명에 비하면 정말 매우 잘 적응한 거예요. 그게 결정적인 차이죠.”
그러고 보니 아저씨도 나한테 잘 적응한다는 이야기를 몇 번인가 했었다. 나 스스로는 별로 실감이 나질 않지만.
“현성 씨의 SP는, 웬만해선 그렇게까지 눈에 띄지 않아요.”
“…….”
“일부러 자신의 몸에 상처가 날 짓을 하지 않고서야, 본인 스스로도 깨닫기 힘들 정도니까.”
그건 그렇다. 내 몸은 어떤 수를 써도 상처가 나지 않지만, 어쩐 일인지 주사는 맞을 수 있다. 그러므로 칼에 찔리거나 심하게 싸움박질을 하거나 사고를 당하지 않고서야 깨닫기 힘들다. 나도 그냥 내가 몸이 좀 튼튼한 줄로만 알았으니까.
“즉…… 다시 말해 현성 씨는 다른 사람들과 아무렇지 않게 어울릴 수 있죠. 실제로 지금 대학생이 될 때까지 그렇게 생활했고.”
“…….”
“그래서 여태껏 굳이 권유를 하지 않았던 거예요. 만약 현성 씨가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비밀을 밝히려고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영영 권유하지 않았을 거구요.”
“…….”
“……이제 알겠나요? 현성 씨가 얼마나 운이 좋은 건지.”
“……?”
그녀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자세를 조금 고쳐 앉았다. 예쁜 얼굴 위의 표정도 조금 굳어졌다.
“……전 말이죠. 어렸을 때 저의 SP 때문에 항상 이상한 아이 취급을 받았어요.”
“…….”
“어렸을 때, 저도 모르게 SP의 힘을 썼거든요. 그걸 스스로 제어할 방법도 몰랐죠.”
“…….”
“지부장님과 다른 한 명도 마찬가지예요. 모두 자신의 SP 때문에 안 좋은 일을 겪고, 백안시당하거나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었어요.”
“…….”
“즉 우리 3명은…… 달리 갈 곳이 없었어요. 아무리 정체 모를 모임이라 할지라도, 우리들의 비밀을 이해해 주는 곳은 SP밖에 없었다구요.”
“……저는 정말 운이 좋은 거군요.”
그녀는 [이제 깨달았나 보군]이라는 의미인지, 살짝 미소를 지었다.
“SP는 그런 식으로, 같은 아픔을 공유한 사람들끼리 모인 거예요. 그렇기에 우리는 현성 씨에게 어떤 식으로든 상처 줄 생각은 없어요.”
“…….”
“기억을 지우니 어쩌니 하는 게 무섭게 들려도, 아주 자연스럽게 해결되니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는 사후 처리도 완벽하니까.”
“그럼…… 안심하고 가입에 거부해라……라는 말씀이십니까?”
“그건 현성 씨 마음이죠.”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다.
“왠지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 눈치인데.”
“솔직히 말하면…… 그래요. 난 현성 씨가 마음에 들지 않아요.”
“제가 운이 좋아서…… 인가요?”
“그렇겠군요. 같은 아픔을 공유한 동질감…… 그것이 현성 씨에겐 없으니까.”
“…….”
하긴 난 결국 이들이 겪은 아픔이나 슬픔이 뭔지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당연히 동질감을 느낄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하긴…….”
“……?”
“저 말고 다른 두 사람은 현성 씨가 들어오길 바라는 모양이에요.”
“……어째서죠?”
“글쎄요…… 아마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모임 친구]가 생기는 것이 좋아서 그런 거 같네요.”
“그럼 혜은…… 씨가 절 찾아오신 이유는 결국……?”
“제가 현성 씨를 찾아온 이유는, 지부장님께서 SP에 대한 현성 씨의 오해를 풀어 주라고 하셔서 그래요. 그 이외의 발언은 전부 저의 독단이죠.”
“…….”
그러니까 말하자면, 아저씨는 나에게 가입을 권유하라고 혜은 씨를 보낸 건데, 혜은 씨는 오히려 편안히 가입을 거부하라고 나에게 말하고 있는 셈이 된다.
어찌 됐든 SP에 대한 나쁜 이미지는 조금 줄어들긴 했지만.
“제가…….”
“……?”
잠깐 망설인 끝에 나는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나 자신도 정확히 깨닫지 못하고 있던 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사고를 치지 않고 여태까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사실 따로 있습니다.”
“…….”
“제 SP가 눈에 띄지 않기 때문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예주가 있어 준 덕분입니다.”
“……현성 씨 애인 말이군요. 듣기로는 고등학생 때부터 사귀었다던가.”
“……당시 전 바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난 다칠 일이 없으니까, 학교에서 마음에 안 드는 녀석들을 실컷 때려 주자고…….”
“…….”
“기왕 이런 힘을 가지고 있는 거, 나 좋을 대로 날 위해서 쓰면 되지 않겠냐고……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 식으로 생각한 사람들도 많았죠.”
“하지만 그때 예주가 전화를 걸어 줘서요…… 그래서 그런 생각을 떨쳐 냈습니다.”
“…….”
“전 혜은 씨 같은 아픔은 모르지만…… 만약 가능하다면…… 저도 다른 누군가에게 예주처럼 해 주고 싶네요. 잠깐의 실수로 일탈하는 일이 없도록…….”
“……훗.”
“……?”
“후후…… 그 말은 다른 누군가에게 애인이 되어 주고 싶다는 뜻인가요? 지금 애인은 어떡하고?”
“아, 아니…… 제 말은 그런 게 아니라…….”
“물론 농담이에요. 그리고…… 알았어요.”
뭘 알았다는 뜻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녀의 눈빛이 이전과는 달리 약간 호의적으로 변했다.

집으로 돌아와 내 방에 누워서, 아까 혜은 씨와의 대화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저씨도 그렇고 혜은씨도 그렇고, 나쁜 사람들은 아닌 듯싶었다. 아니면 대단한 사기꾼들일지도. 하지만 이게 만약 사기라면 도대체 뭘 위해서……? 내 [SP]를 이용하려는 것일까……? 그런 의심도 들긴 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아까 내가 혜은 씨에게 했던 말은 거짓이 아니다. 너무 폼 잡은 건 아닌지 조금 쑥스럽긴 하지만…….
어쨌든 아무래도 SP에 가입하게 될 것 같았다. 봉급도 후하니 결코 손해는 아닐 듯싶었고. 그런 결론을 내리고 있는데, 갑자기 내 핸드폰이 울렸다. 예주였다.
“응, 예주야.”
―응, 오늘 어떻게 지냈어?
심각한 고민을 하다가 예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왠지 안심이 된다. 그렇게 우리는 잠시 잡담을 나눴다.
―그런데 현성아…….
“응?”
―……그 여자는 누구야?
“……무슨 말이야?”
―시침 떼지 마. 아까 내 친구가 너랑 어떤 여자랑 같이 카페에 있는 거 봤다고 했으니까.
순간 식은땀이 났다. 예주는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물론 난 이런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혜은 씨랑 같이 카페에 갈 때 혹시라도 예주가 우리 캠퍼스 근처에 있는지 문자로 확인했었다. 하지만 예주의 친구가 어디 있는지, 그것까지는 알 수 없는 노릇 아닌가.
―빨리 말해 봐. 그 여자 누구야?
“…….”
생각해 보니 나는 예주의 친구들 중에도 몇 명인가 아는 사람들이 있다. 예주가 여고를 다니던 시절, 예주의 친구들하고도 가끔 만났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우리 학교로 입학한 사람도 있다는 소식을 듣긴 했었다. 별로 관심은 없었지만…….
―……왜 대답이 없어……?
“…….”
내가 대답을 망설인 이유는, 예주의 말에 허를 찔려 당황한데다, 진실을 말할 수도 없고 거짓말에도 능숙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있었잖아…… 그게 그 여자 일이야?
“…….”
―아까 내가 어디 있는지 물었던 것도 그 여자 만나려고 그런 거였지?
이건 더더욱 곤란하다. 예주는 오해에 오해를 겹쳐서 뭔가 새로운 스토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게다가 예주의 머리가 나쁜 편이 아닌 만큼, 그 스토리는 나름대로의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그게…… 실은 어떻게 된 거냐면…….”
―어.
“내가…… 저기…… 어느 모임에 가입하려고 하는데…….”
―무슨 모임?
“아니 모임이라기보단…… 회사…… 같은 곳인데…… 거기 취직하려고…….”
―…….
내가 겨우 어물어물 늘어놓은 변명은, 왠지 거짓말처럼 들렸다. 나 스스로에게도.
결국 예주는 나에게 한바탕 퍼붓고 전화를 끊었다. 재차 내 쪽에서 급히 전화를 걸었지만, 예주의 핸드폰은 꺼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