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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당황한 나는 당장 예주의 집(바로 옆집)에 달려가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후 문을 열어 준 사람은 예주의 어머니였다.
“아, 안녕하세요…….”
“응, 현성아. 예주가 지금 집에 있긴 한데…….”
“…….”
“예주랑 싸웠니?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나중에 이야기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아주머니의 표정을 보아하니 아마 예주는 화를 내고 방 안에 틀어박힌 게 틀림없었다. 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억지로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결국 아주머니에게 사죄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만큼 내 생활 속에서 예주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되고 말다니. 예주와 이렇게 싸운 적이 없었던 만큼, 나는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생각 끝에 나는 예주의 핸드폰으로 해명하는 문자를 보냈다. 예주가 언제 확인할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문자의 내용은 대충, 내가 어떤 회사에 취직하게 됐는데 혜은 씨는 그곳의 선배라는 이야기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내용은 어느 정도 진실이다.
내가 예주의 답변을 기다리다 잠이 든 것은 새벽 무렵이었다. 자명종 소리에 깨어 보니 대략 4시간쯤 잔 모양이다. 난 어제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으며, 이불은 아마 어머니가 덮어 주신 것 같았다. 대충 씻고 아침 밥상에 앉아 보니,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미 나와 예주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계신 눈치였다. 하지만 두 분 다 딱히 별다른 말은 하지 않으셨다.
아침에도 예주의 핸드폰은 쭉 계속 불통이었으며, 결국 나는 포기하고 등교할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강의는 전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분명 필기를 하긴 했는데 무슨 내용인지 스스로 노트를 들여다봐도 알 수 없었다.
애써 정신을 수습하여, 나는 [어느 모임에 가입(취직?)한다는 것이 진짜임을 예주에게 증명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하여 나는 아저씨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인가, 현성 군. 벌써 마음의 결정을 내린 건가?
“아니…… 그보다 교수님, 죄송하지만 한 가지 물어봐도 괜찮겠습니까?”
―마음 편히 말해보게.
“만약 제가 SP에 가입한다면…… 그 사실에 대해…… 제 주변 사람들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지 몰라서요.”
―음?
“예를 들어…… 부모님에게는 도대체 무슨 일을 하려 한다고 설명해야 할는지…….”
―아, 그거 말인가. 그거라면 걱정 말게. 우리는 표면적으로 국제 사업을 하고 있으니까. 자네 집에 고용 계약 서류 및 우리 회사의 개요 서류를 보낼 걸세.
“그렇군요…… 그럼 그 서류…… 지금 당장 받을 수 있을까요……?”
―필요하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지만…… 근데 그렇게 되면…… 자네는 SP에 가입하는 것이 되는데?
“……가입하겠습니다.”
―……하하하하하하, 알았네. 그럼 내가 그리로 갈 테니 조금만 기다리게나.
어제 혜은 씨와 대화했을 때부터, 물론 아직도 의심스러운 점이 많긴 하지만, 난 SP에 대해 그럭저럭 좋은 인상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내심 가입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긴 했었는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결정을 내리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조금 허탈감을 느끼며 캠퍼스에서 아저씨의 도착을 기다렸다.
* * *
“나하고 이야기를 할 때는 망설이더니, 혜은 양하고 이야기를 하고 나니까 시원하게 결정하는군. 역시 예쁘고 볼 일이라니까. 하하하하하.”
아저씨의 말은 물론 농담이겠지만, 예주와 다툰 나에게는 별로 좋게 들리지 않았다. 그런 내 감정이 얼굴에도 조금 드러난 모양이었다.
“아, 농담이 지나쳤나. 아무튼 잘 결정했네…… 그리고 내일은 토요일이라 자네도 수업이 없을 테니, 오전에 우리 사무실에 들러 정식으로 인사를 하는 게 어떤가.”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아저씨는 내게 무슨 사정이 있다는 걸 눈치챈 것인지,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는 대신 미소를 남기고 곧 떠나갔다. 내겐 고마운 일이었다.
아저씨가 떠나가자마자, 난 곧장 아저씨가 준 서류를 바라보며 예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예주의 핸드폰은 켜 있었다. 하지만 예주는 내 전화를 받지 않고 무시하더니, 잠시 후 [무슨 일이야]라는 문자를 보내왔다.
[오해를 풀려고.]
[무슨 오해.]
[말했잖아 나 어디 취직한다고.]
[그 여자는?]
[거기 회사 선배야.]
거기까지 문자를 주고받자 예주는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나는 재차 예주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다행히 이번에는 받았다. 나는 서둘러 해명했고, 예주는 침묵했다.
―…….
“정말이야. 회사 계약 서류도 보여 줄 수 있어. 내가 지금 너네 학교로 찾아갈게.”
―…….
“그럼 기다려…… 알았지?”
예주의 반응으로 보건데 [혹시라도 진짜 오해였으면 어쩌지?]라고 망설이고 있는 것 같았다.
즉시, 나는 그리 멀지 않은 예주의 대학 캠퍼스로 향했다.
“봐봐, 이게 계약 서류야. 이제 곧 신입 교육도 받는다니까.”
“…….”
“내 말 맞지? 무슨 회사인지는 여기 나와 있어.”
“…….”
예주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잠시 후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본다.
“그럼 그 여자는…….”
“내가 말했잖아. 나보다 먼저 일하고 있는 선배인데, 나한테 이것저것 가르쳐 주느라…… 잠깐 시간을 내서…….”
“……언제부터 일하는데? 너 학교는?”
“신입 교육 기간 중에는 학업을 병행해도 괜찮다고 들었어. 본격적으로 하게 되면…… 취업계를 내야지.”
아까 미리 생각해 놓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다행히 아슬아슬하게 앞뒤가 들어맞는 이야기였다. 완전히 거짓말도 아니고…….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어…… 그게…….”
분명 오해를 한 쪽은 예주인데 왠지 내가 잘못한 것 같았다. 하긴 비밀을 털어놓지 않은(못한) 것은 내 잘못이긴 하다.
“그게…… 여기는 국제 사업을 해서…… 가끔 외국에 나갈 일이 생길지도 몰라서…….”
“…….”
“너한테 말하면 싫어할까 봐…….”
“……그런 건 괜찮아.”
예주는 겨우 오해를 푼 모양인지,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그 순간, 내색은 안 했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미안해했다.
“……밥 먹으러 가자. 나 아직 점심 안 먹었어, 배고파.”
“응.”
다칠 일이 없는 몸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나도 역시 사랑싸움만은 힘들다.
1막 - 특이한 사람들, 4장
토요일 오전, 난 [정식 인사]를 하기 위해 아저씨의 차를 타고 SP 사무실로 향했다.
“자네가 정식으로 가입하게 돼서 우리 모두 정말 기쁘다네. 하긴 젊고 건장한 남자가 들어오면 힘든 일도 시켜먹을 수 있으니까. 하하하하하.”
아저씨는 들뜬 모양인지 조금 시덥지 않은 말을 했다.
“아, 그리고…… 자네가 아직 못 만난 마지막 한 명 말인데…….”
“…….”
“좋은 아이이긴 한데 사정상 사람들 앞에 잘 나서질 못하네. 혹시 무슨 일이 있어도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상대해 주게나.”
“……네?”
“가 보면 알게 될 걸세.”
그렇게 말하는 아저씨의 표정은 진지했다.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나는 굳이 더 이상 묻지 않았다.
SP 사무실 건물에 도착한 나와 아저씨는,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갔다. 분명 2층은 회원들이 쓰는 사무실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계단을 올라가 보니, 역시나 2층은 평범한 회사 사무실처럼 꾸며져 있다. 다만 인원이 인원인지라 공간은 제법 널찍하게 쓰고 있었다. 우리가 들어서자, 사무실 안쪽 책상에 앉아 있던 여성이 일어나 다가왔다. 혜은 씨였다.
“안녕하세요.”
“축하해요, 현성 씨. 이제 정식으로 같이 일하게 됐군요.”
“예…….”
축하할 일인지 아닌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특히 혜은 씨 본인이 나를 마음에 들어 하는지부터 아직 미지수이지 않은가.
“현성 씨 자리는 저쪽이에요.”
“예.”
혜은 씨의 옆자리다. 옆자리라고는 해도 공간이 넓어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이 자리에 앉아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어쨌든 컴퓨터와 각종 사무용품은 제대로 준비되어 있었다. 그런데 예의 마지막 한 명의 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혜은 씨와 내 자리 뒤편의 저 문 너머가 그 사람의 자리인 것일까……?
“그럼 혜은 양, 선혜를 불러와 주게.”
“네.”
혜은 씨는 자리 뒤편 문을 열고 들어가 버렸다. 이야기의 흐름상 [선혜]가 내가 아직 못 만난 회원이고, 역시나 저 문 너머가 그녀의 자리일 터이다.
“현성 군,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냥 침착하고 자연스럽게 상대하면 된다네. 자네보다 몇 살 어리니, 친한 오빠처럼 대해 주게.”
“예…….”
잠시 뒤 혜은 씨가 문 안쪽에서 긴 머리의 소녀를 데리고 나왔다. 나는 이 [선혜]가 나보다 몇 살 어리다는 사실조차도 방금 들은 터라 조금 당황했다.
그 소녀는 별다른 인사도 없이, 방에서 나온 이후로 계속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소녀의 얼굴은 옆에 있는 혜은 씨가 무색해질 정도로 예뻤지만, 표정의 흔적조차도 찾을 수 없는 완벽한 무표정이었다.
“자…… 이 아이는 박선혜라고 한다네. 선혜야, 이쪽은 윤현성 오빠란다. 알겠지만 이제부터 우리 회원이야.”
“아, 안녕…….”
“이 오빠가 바로…….”
[바로……]라니 무슨 의미일까. 하지만 그 말을 끝으로 선혜는 입을 다물고 다시 내 얼굴만 뚫어져라 바라본다. 나도 무뚝뚝한 편이긴 하지만, 이 아이도 만만치 않다.
“……아빠, 이 오빠하고 잠시 둘이서만 있어도 될까요?”
“그렇게 하렴. 그럼 현성 군, 잠시 저 방에서 이 아이와 같이 있어 주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