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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내가 아무 말 없이 아저씨의 말대로 순순히 방 안에 들어간 것은, 결코 호의로 그런 게 아니었다. [아빠]라는 단어가 가져온 충격 때문에, 미처 뭔가 물어보거나 항의할 생각을 못했기 때문이다.
아저씨는 방문을 살며시 닫으며 나에게 눈짓과 함께 고개를 끄덕여 신호를 보냈다. 그 신호가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아까 말한 [침착하고 자연스럽게 상대해 주라]는 의미라고 추측되었다.

* * *

“…….”
“…….”
선혜는 나와 단 둘이서 방 안에 있게 된 이후로도,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나 역시 애초에 무뚝뚝한 편인데다가, 손아래 여자아이를 상대하는 건 익숙하지 않기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
“…….”
하지만 이대로 서로 노려보며 시간을 보낸다는 건 심히 이상한 일이었다. 아니, 이상한 일을 넘어서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저기…… 말이야…….”
“…….”
고민 끝에 [무뚝뚝 결승전]에서 항복한 것은 내 쪽이었다. 하지만 내가 겨우 내뱉은 한마디에도 선혜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
“…….”
그렇게 우리 사이에는 다시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그런데 잠시 후…… 선혜가 조금 표정을 풀더니 살짝 미소를 짓는 것이 아닌가. 미소를 지으니 선혜는 더 예뻐 보이긴 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나는 그녀가 왜 웃었는지 알 수 없었다. 애써 내가 바보 같아 보여서 웃은 것은 아닐 거라 믿어 보았다.
선혜는 살짝 미소를 지은 후,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가더니 내 눈치를 살핀다. 그러더니 잠시 뒤 이번에는 약간 크게 미소를 지었다.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어 당황했다.
“아무렇지…… 않으시나요?”
“……응?”
“절 보고…… 아무렇지 ……않으시나요?”
“응…… 잘 모르겠지만…… 난 아무렇지 않은데?”
설마 [절 보고도 반하지 않으신 건가요?]라는 의미로 물은 것은…… 물론 아닐 터였다. 선혜가 예쁘긴 하지만 애초에 나한테는 예주가 있지 않은가.
“…….”
“……?”
“……흑, 흐흑…….”
“……!”
선혜는 내 말을 듣더니, 갑자기 표정을 무너뜨리고 울기 시작한다. 설마 [절 보고도 반하지 않다니 실망했어요.]라는 의미로 우는 것은…… 물론 아닐 터였다.
“흑, 흑…….”
“저, 저기…….”
“흐흑…… 으아아아앙……!!”
내가 뭔가 말을 꺼내려 하자, 선혜는 갑자기 내 품에 달려들어(!) 크게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이제 난 당황스러움을 넘어서서 패닉에 빠졌다.
“으아아아앙……!!”
“…….”
패닉에 빠진 내 가슴팍은 선혜의 눈물로 젖어 들고 있었다. 순간 나의 뇌리에 번뜩인 광경은, 방문을 박차고 [누가 내 딸을 울린 거냐!]라며 소리치는 아저씨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아니, 난 오히려 아저씨가 들어와서 뭔가 수습 혹은 설명을 해 줬으면 싶었지만 불행히도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으아아아아앙……!!!”
“…….”
결국 나는 패닉에 빠진 정신을 수습하며 한동안 인간 손수건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선혜는…… 십여 분이나 울고 나서야 겨우 울음을 멈추더니, 나에게서 떨어져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응?”
뭐가 고맙다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설마 [절 보고도 반하지 않아서 실망했는데 그래도 옆에 있어 줘서 고마워요.]라는 의미로 말한 것은…… 물론 아닐 터였다.
선혜는 방 안에 있던 휴지로 눈물을 닦더니, 나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방 밖으로 나갔다. 나는 아직도 어떻게 행동해야 좋을지 몰라 방 안에 멍하니 서 있다가, 선혜가 나가고 조금 지나서야 정신을 차린 나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여기는 사무실이라기보다는 마치 1층의 응접실처럼 꾸며져 있었다. 한쪽에는 텔레비전과 책들이 놓여 있다.
그리하여 가슴팍에 묻은 선혜의 눈물을 휴지로 닦아 내려는 참이었는데, 그제서야 문이 열리고 아저씨가 들어왔다.
“미안하네, 현성 군. 많이 당황했지?”
“교수님, 아니 지부장님…… 이게 대체…….”
“지부장님보다는 교수님이라고 부르게, 그쪽이 더 폼 나기도 하고.”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이게 대체…….”
“따라오게나. 내 방으로 가서 설명해 주지.”
결국 나는 아저씨를 따라 3층에 있는 아저씨 방으로 향했다. 방문을 열고 나오자, 혜은 씨와 선혜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자네에게 참으로 고맙네.”
3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면서, 아저씨는 다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그래서 도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3층의 아저씨 방은, 사무실이라기보단 서재처럼 꾸며져 있는 꽤나 아늑한 방이었다. 나와 아저씨는 큰 책상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았다.
“자, 내가 차근차근 설명해 줄 테니 자네도 차근차근 이해하면서 듣게나. 일단 가장 먼저…… 자네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군.”
“…….”
“자네의 SP…… 우리들은 편의상 그것을 [이지스]라고 부른다네. 이지스라는 것은 신화에 나오는 여신의 방패를 의미하는데, 말 그대로 자네의 SP는 자네의 신체를 그 어떤 위협에서도 지켜 내는 것이 특징이지.”
“……이지스.”
“그리고 자네를 계속 지켜본 결과, 이지스의 메커니즘은 마치 필터링과 같다는 것을 알아냈다네.”
“필터링…… 입니까……?”
“그래, 우리의 추측으로는……이지스는 자체적인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아. 그리고 그 의지가 외부의 요소들을 스스로 판단하지.”
“…….”
“이를테면, 만약 자네가 차에 치였을 경우…… 차에 치이는 충격을 이지스가 위협으로 판단하여, 충격을 자네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수준으로 낮춰 버린다네.”
“…….”
“그래서 트럭에 치이고도 자네는 고작해야 몸이 살짝 흔들리는 정도의 충격밖에 입지 않았던 것일세.”
“그렇군요.”
“같은 원리로, 자네가 주사를 아무렇지 않게 맞을 수 있는 것도…… 이지스의 의지가 주사를 위협으로 판단하지 않기 때문이야.”
“…….”
“또 이지스는 물리적인 위협뿐만이 아니라 생리적인 위협, 이를테면 몸에 해로운 물질들도 필터링하고 있어. 말하자면 자네의 신체는 그 어떤 위협에서도 완벽하게 보호되는 셈이지.”
다름 아닌 나 자신의 이야기인 만큼, 나는 숨을 죽이고 이야기에 집중했다.
“하지만…… 이지스는 어디까지나 자네의 신체에 가해지는 위협을 필터링할 뿐, 자네의 정신에 가해지는 위협은 필터링하지 않는다네. 무슨 의미인지 알겠나?”
“글쎄요, 그게…….”
“예를 들어, 자네가 어떤 정치적인 뉴스를 본다고 가정해 보세. 자네는 그 뉴스의 내용을 인식하고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뉴스의 영상 자체가 원래부터 신체에 위협을 주는 존재는 아니므로, 이지스가 필터링하지는 않아.”
“음…….”
“뭐,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이지만…… 만약 뉴스 같은 것까지 필터링한다면, 자네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을 테니까.”
만약 뉴스 같은 [정신에 가해지는 위협]까지도 필터링한다면, 과연 난 어떻게 살게 될까.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것들은 눈에 보이지도, 인식하지도 않게 될까?
“언젠가 한 번 언급했었지만…… 우리 모임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정보를 알아낼 수 있는], 그런 SP를 가진 분이 계신다네. 그분은 항상 SP를 소유한 사람들을 찾고 있지.”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는 그 어떤 사람도 자신의 비밀을 유지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조금 무서운 이야기였다.
“알겠나……? 자네의 정신은 이지스의 필터링으로 보호되지 않기에, 그분께서 자네의 고민이나 생각을 읽고 자네를 발견, 확인할 수 있었다는 말일세.”
“그렇……군요.”
“그리고 이제 그 아이…… 선혜의 일 말인데…….”
“네.”
“그 아이의 SP는 [엔젤 페이스]라고 부른다네.”
“엔젤 페이스…….”
“그 아이는 자신의 표정을 통해 주변 사람들의 신체에 영향을 끼치지. 이를테면…… 그 아이의 미소나 밝은 표정을 본 사람들은 신체의 긴장이 극도로 이완되어 잠들듯 쓰러진다네.”
“…….”
“반대로…… 그 아이의 화난 표정이나 슬픈 표정을 본 사람들은…… 신체가 극도로 긴장하게 돼서 호흡곤란에 빠지지.”
“…….”
“……알겠나? 그 아이의 미소나 눈물을 보고도 멀쩡히 버틸 수 있는 건 자네가 유일하다는 말일세.”
“그런…….”
“자네의 신체는 [이지스]로 완벽하게 보호되기 때문에, [엔젤 페이스]에도 아무런 영향이 없는 것이지. 그렇기 때문에…… 그 아이가 철든 이후 그렇게 마음 놓고 남의 눈 앞에서 웃거나 울은 건…… 사실상 오늘이 처음이라네.”
“…….”
“그리고 이제부터 하는 이야기는…… 그 아이의 과거에 관한 것인데…… 조금 안 좋은 이야기네만…… 아무쪼록 자네가 이해를 해 줬으면 좋겠네.”
“…….”
“자네도 아까 들었겠지만, 그 아이는 내 딸일세.”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아저씨는 표정을 바꾸고 재차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친딸은 아니야. 그 아이도 자신이 친딸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지. 그래도 날 잘 따라 줘서 참으로 고맙지만.”
“…….”
“지금으로부터 16년 전…… 갓 태어난 그 아이를 찾아서 SP로 데려오는 일은 정말 긴급을 요했다네. 그 아이의 부모님이…… 갓 태어난 그 아이의 SP를 이해하지도 견디지도 못하고…… 그 아이를 버리려 했거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