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9화


“당시 나는 아직 어렸던 혜은 양과 함께,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한 한국 지부를 운영하느라 바빴는데, SP 총본부에서 그 아이에 대한 연락이 오자마자 급히 뛰쳐나갔지.”
“…….”
“우리 SP도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은 없어. 때문에 그 아이를 버리려 한다는 사실만 알았을 뿐, 도대체가 어디에 버릴 건지를 몰랐다네.”
“그런…….”
“다행히…… 그 아이는 어느 수녀님이 운영하는 고아원 앞에 버려졌었지. 그리고 그 수녀님께서 잠깐 동안 그 아이를 맡아 주셨어.”
“…….”
“그 수녀님도 그 아이의 SP에 대해 깜짝 놀랐지만, 어떻게든 해 보려고 애쓰고 계셨던 모양이더군. 그리고 내가 뒤늦게나마 그 고아원에 도착하게 된 거야.”
“……그럼 그 수녀님은…….”
“수녀님에게 사정을 설명하느라 조금 진땀을 뺐지만, 어쨌든 결국 이해를 해 주셨어. 그리고…… 난 본부에서 사람을 불러서 며칠 후 수녀님과 그 아이 친부모의 기억을 지웠지.”
“…….”
“그 이후로 그 아이를 내 딸로 키우고 있는 것일세. 혜은 양은 그 아이에게 언니처럼 대해 주었고.”
“……그렇군요.”
“난 그 아이의 친부모를 비난할 생각은 없네. 갓 태어난 아기의 첫 울음소리를, 기쁘게 듣지도 못하고 괴로움을 겪었을 그들의 심정을 생각하면 말이야.”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나는 내 생각을 말했다.
“혹시…… 가면 같은 걸로는 안 되는 겁니까……? 표정을 가린다면…….”
“그런 방법도 시도해 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네. 가면을 쓰든 안 쓰든, 그 아이가 어떤 표정을 지을 때 그 아이의 얼굴 쪽을 바라보면…… 영향을 받는다네.”
“…….”
“추측이지만…… 그 아이가 표정을 지을 때, 아이의 얼굴에서 우리는 알 수 없는 전파가 발신되는 것 같아. 그 전파를 다른 사람들은 눈으로 봄으로써 수신하고 신체에 영향을 받는 게 아닐까 싶네.”
“…….”
“건물 벽 정도의 두꺼운 장애물이라면…… 그 미지의 전파를 막을 수 있는 모양이지만, 가면이나 헬멧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어. 그 이외에도 거울이나 표정이 드러나지 않는 화장 등, 여러 가지를 시도해 봤지만 전부 실패로 돌아갔다네.”
“…….”
“자네처럼 이지스가 있다면 또 모를까, 결국 그 아이의 얼굴 쪽을 아예 안 보는 것밖엔 방법이 없었지. 난 남자치곤 꽤 육아에 소질이 있었지만, 그래도 곤란했던 적이 많았어.”
“…….”
“그 아이는 자라나면서 가장 먼저 자신의 표정을 억제하는 법을 배웠다네. 그나마 정상적으로 생활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기도 했고.”
“…….”
“그래서 지금은…… 웬만해선 자신의 표정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게 되었어. 그러나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없는 건 변함이 없어서, 나나 혜은 양 이외의 사람들하고는 말도 하지 않아.”
“그런…….”
선혜의 일을 듣고 보니, 혜은 씨의 말대로 나는 정말로 운이 좋은 모양이다. 나는 적어도 평범하게 생활하는 게 가능하지 않은가.
“……자네에 대한 정보가 들어오고, 자네가 SP에 가입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돌자, 나는 조금 다른 의미로 기대를 했었어. 자네 앞에서는 선혜도 마음 편히 웃고 울을 수 있을 테니까.”
“그랬군요…….”
그리고 난 비로소 내 행동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그 아이에게는, 말하자면 나만이 해 줄 수 있는 게 있었던 것이다.
“혜은 양은 혹시라도 자네가 경솔하게 그 아이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까 걱정했던 모양이지만…… 자네가 그런 경솔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내가 잘 알고 있지.”
혜은 씨가 날 꺼려했던 이유도 이것으로 완전히 이해가 되었다. 혜은 씨는 [내가 자신들의 상처를 이해하지 못하고, 선혜에게 상처를 줄까 봐] 걱정했던 것이다.
“자네에게 이런 이야기를 미리 해 줄 수도 있었지만…… 그 아이는 자신의 표정만큼이나 남의 표정에 민감해서…… 남이 자신에게 가식적으로 대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슬퍼한다네. 그래서 되도록 자연스럽게 대해 달라고 부탁한 걸세.”
“…….”
“지금은…… 나나 선혜는 물론이고, 혜은 양도 자네에게 감사하고 있다네. 선혜에게 있어서는 오랫동안 쌓인 한을 푼 거나 마찬가지니까.”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고맙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왠지 죄송스러웠다. 선혜의 사정을 알게 되어 마음이 무거워진 탓도 있었지만.
“앞으로도, 선혜가 알게 모르게 자네를 의지할 걸세…… 지금까지 좀 무거운 이야기를 했지만, 아무쪼록 너무 의식하지 말고 그 아이를 자연스럽게 대해 주게나.”
“예.”
내 대답에 슬며시 미소를 짓더니, 아저씨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 한쪽에 놓인 커피포트로 걸어갔다.
“표정으로는 알기 힘들지만…… 그 아이는 본래 착하고 밝은 아이거든.”
역시 아저씨에게 있어서 선혜는 사랑스런 딸인 것이다. 커피를 타고 있는 아저씨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그것만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1막 - 특이한 사람들, 종장


“자, 그럼 다음으로 자네가 알아야 할 것은…….”
선혜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고 우리는 잠시 침묵 속에서 커피를 마셨다. 커피 향이 방 안에 가득 퍼질 때쯤, 아저씨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바로 혜은 양의 SP에 관한 이야기가 되겠군.”
“그렇군요.”
지금까지 본 것으론, 선혜와는 달리 혜은 씨는 지극히 정상적으로 생활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당연히 뭔가 특이한 점이 있겠지.
“혜은 양의 SP는 [혼자만의 방]이라고 부르지.”
“혼자만의 방…….”
“혜은 양은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자신의 [혼자만의 방]으로 이동할 수 있다네.”
“……예?”
“간단히 말해 순간이동이라는 뜻일세. 다만 어디까지나 [방]에만 이동할 수 있고, 혜은 양 스스로가 [자신의 방]이라고 인식한 장소여야만 하며, [다른 사람이 있는 방]은 안 돼.”
“…….”
순간이동이란 말인가. 이제 나도 어지간한 걸로는 놀라지 않겠다 싶었는데, 이것 역시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혜은 양은 현재 아무런 문제없이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있어. 그건 자네도 느꼈겠지?”
“예.”
정상적인 생활 정도가 아니라, 나보다 훨씬 똑 부러지게 생활하는 것 같지만.
“지금은 혜은 양이 자신의 SP를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어서 그런 것일세. 어렸을 때는…… SP의 제어가 되지 않아서, 무의식중에 순간이동을 하곤 했지.”
“…….”
“그래서 어린 나이에 우리 SP에 들어오긴 했지만, 지금은 나보다도 오히려 일에서나 선혜에 대해서나 잘해 주고 있어.”
“…….”
“내가 자네에게 기본적인 것들을 모두 설명해 주고 나면, 구체적인 일에 대해서는 혜은 양이 자네에게 가르쳐 줄 걸세. 혜은 양이 자네보다 연상이니까, 선배이자 누나라고 생각하고 잘 배워 보도록 하게나.”
“예.”
“그럼 잠시 쉬다가…… 식사라도 하고 나서 이야기를 계속하는 게 좋겠군.”
아저씨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난 그런 아저씨를 따라 2층으로 내려왔다.

2층으로 오자, 아저씨는 나를 두고 혼자 선혜의 방으로 들어갔다. 둘이서 뭔가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난 이제부터 내 자리가 될 책상에 앉아 얌전히 기다렸다.
잠시 그렇게 있다가 옆을 보니 혜은 씨는 서류나 컴퓨터 모니터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아저씨보다는 열심히 일을 하는 모양이다. 그러다가 내가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는 걸 느꼈는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나에게 말을 건다.
“선혜에 대해서, 이제 좀 알게 됐나요?”
“예.”
“그 아이에게 잘해 주세요. 현성 씨에게만 가능한 일이 있으니까.”
“예.”
“아무쪼록 그 아이에게 상처를 주는 짓은…….”
혜은 씨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갑자기 선혜 방의 문이 열리고 아저씨가 나왔다.
“모처럼 새 식구가 늘었는데, 오늘 점심은 내가 쏘지. 자 자, 다들 나갑시다.”
아저씨는 나와 혜은 씨를 향해 손짓을 했다. 나는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혜은 씨는 조금 얼굴을 찡그리더니 재빨리 자신의 일을 마무리 지은 후 일어난다.
아저씨는 가장 앞장서서 사무실을 나갔고 나는 그 뒤를, 그리고 혜은 씨가 선혜를 데리고 마지막으로 사무실을 나왔다.
“이것도 기념인데 조금 괜찮은 걸 먹어야지. 현성 군, 자네는 뭔가 좋아하는 게 있나?”
“아무거나 다 잘 먹습니다.”
“하하하. 그럼…… 내가 자주 가는 한식집이 있는데, 그것도 괜찮지?”
“예.”
우리 네 명은 아저씨의 차에 탔다. 내가 조수석에 앉고 혜은 씨와 선혜는 뒷좌석에 앉았다.
핸드폰을 보니 점심을 먹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다. 내가 예주에게 간단한 안부 문자를 보내는 사이, 아저씨는 차를 출발시켰다. 차 안에서 나는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눴으며, 혜은 씨와 선혜는 뭔가 조그마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30분 정도 달린 끝에 아저씨의 차가 멈춘 곳은 꽤 큰 규모의 한식집이었다. 아저씨는 이곳의 단골인 모양인지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적한 방으로 안내되었으며, 딱히 주문을 하지도 않았는데 간단한 전체 요리가 나왔다. 아마 한식 정식 코스인 것 같았다. 우리는 조금씩 요리의 맛을 보며 일상적인 대화를 나눴다. 대화는 주로 아저씨와 혜은 씨가 주도했고, 나는 가끔 대답하는 역할이었으며, 선혜는 별말이 없이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저씨와 혜은 씨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선혜는 아주 조금이지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걸 확실하게 볼 수 있는 건 나뿐이지만, 아저씨와 혜은 씨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과는 별개로, 웬일인지 선혜는 결코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아까 맨 처음 봤을 때 나를 뚫어져라 바라본 것과는 정반대되는 행동이었다.
“현성 씨는 선혜한테 반했나 보네요.”
“……네?”
“후후, 아까부터 선혜만 바라보고 있잖아요. 그거 좀 위험한 거 아니에요?”
혜은 씨의 갑작스런 말은 물론 농담이겠지만, 내 얼굴은 화끈 달아올랐다. 난 뭔가 농담을 해서 이 상황을 얼버무리려고 했지만, 별로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하하하하, 우리 선혜가 좀 예쁘긴 하지. 아니면 혹시 혜은 양이 질투하는 건가?”
“무슨 말씀을, 현성 씨는 애인하고 천생연분이던데요. 그리고 전 바람둥이는 싫어요.”
아저씨와 혜은 씨가 농담인지 가시가 박힌 말인지 알 수 없는 대화를 하는 동안, 나는 겨우 표정을 수습하고 정신을 차렸다.
“저는 바람둥이가 되고 싶어도 못 됩니다. 성격도 그렇고 능력도 그렇고…….”
“뭘 그런 소리를, 현성 군 정도면 충분하지. 나도 젊었을 때는 꽤 인기가 있었으니까. 하하하하.”
나의 졸렬한 자기 비하 농담을, 아저씨가 받아 줘서 간신히 상황이 수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