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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식사를 끝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와, 혜은 씨와 선혜는 2층으로, 나와 아저씨는 3층의 아저씨의 방으로 다시 돌아왔다. 우리는 재차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맨 처음에는 자네 앞에서 감정을 그대로 드러냈지만, 역시 선혜도 아직은 자네가 낯선 모양이군.”
“그렇군요.”
“그래도 이제부터 우리는 한 식구니까. 아까도 말했지만 자네 쪽에서 선혜를 부담 없이 대해 주게.”
“……예.”
대답은 했지만 왠지 자신이 없었다. 잘해 줘야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손아래 여자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잘 알 수 없었다.
“그럼 이제 우리 SP 회원들 모두가 반드시 명심해야 할 기본 의무 항목들을 설명해 주지.”
“네.”
아저씨는 자신의 책상 서랍을 열쇠로 열고, 그 안에서 내가 언젠가 보았던 영어 팸플릿을 꺼냈다. 그러고는 의무 조항 및 권리 조항이 있는 페이지로 넘어가 그것들을 짚어 가며 설명을 시작했다.
“가장 먼저, 우리 SP 및 SP 회원들에 대한 사실은 최우선 기밀로 지켜야 하네.”
“예.”
“우리 SP는 독자적으로 정보망과 보안망을 구축했고, 또 그것은 외부에서 침입하기 극히 힘든 것이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
“…….”
“예를 들어 이 SP 개요서조차도 함부로 다루지 못하게 되어 있어. 물론 이 개요서만 봐서는 SP가 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조심해야 하지.”
“…….”
“만약 우리에 대한 정보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나?”
“위험에…… 빠지는 겁니까?”
“생각해 보게. 우리는 고작 150명일세. 만약 우리가 어느 정도 숫자가 된다면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길이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고작 150명 정도로는 지극히 곤란해. 자칫 잘못하면 우리는 말살될 수도 있어.”
“말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SP가 완전히 자리를 잡기 전에는 대단히 위험한 일들이 많았다네. SP를 가진 사람들 중에는 인체 실험을 당하거나, 혹은 악마로 몰린 사람들도 있었으니까.”
“…….”
“자네에게 SP 가입을 권유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도, 자네가 주변 사람들에게 자네의 SP를 밝히려고 했기 때문이야. 그런 행동은 자칫 자네의 주변 사람들마저 위험에 빠뜨릴 수 있어.”
“…….”
“자네 스스로를 위해서도 자네 주변 사람들을 위해서도, SP에 대한 모든 비밀은 엄수해야 하네. 알겠나?”
“예.”
“두 번째로, 자신의 SP를 악용하지 말 것. 일상생활에서 평범하게 쓰는 일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을 이용해서 부당한 이득을 취하거나 남에게 해를 끼치면 안 되는 것이지.”
“…….”
이로써 나는, 이종격투기에 출진한다는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방금 생각해 낸 꿈이지만.
“만약 우리가 SP를 이용해 사회에 영향을 끼친다면, 정말로 큰 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으니까. 게다가 그렇게 되면 우리 스스로의 비밀을 유지하기도 지극히 어려워지기 때문에, 결국 파멸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네.”
“혹시…… 좋은 목적을 위해 SP를 쓰는 경우도 안 되는 겁니까?”
“음…… 이를테면 사고에서 사람들을 구하는…… 그런 걸 말하는 건가?”
“예.”
아저씨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드물지만 제한적인 경우에는 가능하지. 바로 눈앞에서 사람들의 목숨이 위험하다든가…… 하지만 첫 번째 항목에서 설명했듯이, 먼저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비밀을 지켜야 할 필요가 있어. 남을 구하는 것만큼이나 우리 자신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니까.”
“…….”
“섣불리 행동하다가 우리의 비밀이 공개되기라도 하면, 우리 모임의 회원 150명은 물론이고 그들의 주변 사람들마저 위험해질 수 있어. 그것에 대해선 첫 번째 항목에서 설명했었지.”
“예.”
“또한…… 세 번째 항목에서도 설명하겠지만, 결코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해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야. 우리에게도 불가능한 일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마치 영웅처럼 과신하는 것은 위험하다네.”
“…….”
“더욱이…… 우리 SP는 기본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데, 우리가 남다른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마음대로 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안 되지 않겠나.”
“예…….”
아저씨는 잠시 한 템포 쉬었다가 이야기를 재개했다.
“그리고 세 번째이자 마지막 기본 항목으로…… 우리는 우리가 인간임을 명심해야 한다네.”
“……네?”
아저씨는 자세를 조금 고쳐 앉으며 말을 이었다.
“자네도 고민해 봤을 텐데. 왜 자네가 SP를 가지고 있는 건지 말이야.”
“……물론 해 봤습니다.”
“그렇겠지. 물론 나도 해 봤어…… 별의별 생각을 다해 봤지.”
“…….”
“어째서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SP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한때 우리 모임의 가장 큰 연구 주제는 그것이었어. 하지만 알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원인은 불명이며 우리는 인간일 뿐이라는 것이었지.”
“…….”
“우리는 인간일세. SP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결국 평범한 인간이야. 남들과는 조금 다른 것일 뿐인 인간.”
“…….”
“우리는 인종, 국적, 성별, 종교, 연령, 직업, 계급, 사상…… 그 어떤 것으로도 공통될 수 없어. 유일한 공통점은 오직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 뿐이야.”
“…….”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단지 [특이한 사람들]이라고 지칭하는 거라네. 결코 남들보다 우월하지도, 남들보다 열등하지도 않은…… 그저 특이한 사람들.”
“……예.”
“자네는 사회에 매우 잘 적응한 케이스라 이런 충고는 그다지 필요 없겠지만, 다른 회원들 중에는 심각하게 방황한 사람도 많았으니까.”
나도 예주가 없었다면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자신의 SP는 우월한 능력이므로 그걸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줘도 괜찮다고 여기거나, 혹은 자신을 악마나 괴물로 여기고 자살하려는 경우도 많았지.”
“…….”
“반대로 앞서 자네의 의견처럼, 자신의 SP로 세상을 좋게 바꿔 보겠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대개 좋게 끝나진 못했어.”
“…….”
“그러니 우리는 항상 스스로가 [조금 특이하지만 결국 평범한 인간]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네.”
“알겠습니다.”
“일단 이렇게 세 가지가…… [선지자]가 최초로 만든, SP 회원들 모두가 명심해야 가장 중요한 기본 항목일세. 나머지는 우리 SP 활동에 필요한 부차적인 항목들이지.”
“……전에도 한 번 듣긴 했었는데…… 그 [선지자]라는 분은 대체 어떤 분입니까?”
“그분은 1975년에 처음으로 SP를 결성한 분이야. 미국인인데, 자신의 본명은 그다지 말하지 않으셔서 우리 회원들끼리는 [선지자]라는 호칭으로 그분을 지칭했지.”
“그분은 아직…… 살아 계신가요?”
“살아 계신다네. 다만 일선에선 손을 떼셔서, 현재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조용히 살고 계신다던가.”
“그럼 현재 SP는 누가 이끌고 있는 겁니까?”
“활동한 지가 오래된 선배 회원들이 회의를 통해 대략적인 방침을 정하고 있긴 한데…….”
“…….”
“하지만 기본적으로 우리 SP 회원들은 누구나 동등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네. 자네도 신입 기간이 끝나면 다른 회원들과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가지게 되지.”
그렇게 말하면서 아저씨는 팸플릿의 권리 항목을 손으로 가리켰다. 거기에는 [모든 SP 회원들은 동등한 발언권을 갖는다.]라고 적혀 있었다.
“사업도 하고 여러 가지 활동도 벌이고 있지만, SP는 결코 수직적인 조직이나 회사가 아니야. 모임이지. SP의 궁극적인 목표는 결국 우리 회원들끼리 서로서로 도우며 사는 것이니까.”
“예.”
“내가 비록 지부장이란 지위를 통해 SP 한국 회원들의 대표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네나 혜은 양에게 일방적으로 명령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라네.”
“…….”
“그렇기에 만약 큰일이 있으면 우리도 모여서 회의를 하거나 투표를 해야 하지. 자네를 가입시키는 문제에 대해서도 그러했고.”
“…….”
아마 혜은 씨는 반대표를 던졌을 거라고 짐작해 본다.
“우리가 이런 식의 자유로운 구조로도 여태껏 모임을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은, 첫째로는 전체 회원이 그렇게 많은 숫자가 아니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회원들이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야.”
“…….”
“선혜나 혜은 양의 경우도 그렇지만, 자네도 한때 방황했던 적이 있으니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겠지?”
“예.”
저번에 혜은 씨하고 했던 대화가 떠오른다. 비록 나는 선혜처럼 그렇게 큰 고통을 직접적으로 겪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충분히 이해는 간다.
“그렇기에 우리는 누군가를 회원으로 받아들이는 일에 대해 매우 신중해. 특히…… 혜은 양이 자네에 대해서 조금 경계를 하기도 하지만, 자네도 그런 점은 이해해 줬으면 좋겠네.”
“알겠습니다.”
“그래, 자네라면 앞으로도 별문제 없을 거야.”
잠시 동안 나는 1층 응접실에서 혼자 휴식 시간을 가졌다. 내게는 고마운 일이었는데, 오늘 하루 알게 된 사실이 너무 많은 탓인지 조금 피곤하고 혼란했기 때문이다. 아저씨의 배려였다.
난 혼자 소파에 앉아 쉬다가, 머리가 좀 맑아지자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실 창밖을 내다보았다. 응접실 창을 통해 보이는 바깥세상은 여느 때와 다를 것이 전혀 없다. 도로에서는 차들이 분주하게 다니고, 그 위로는 네모난 건물들이 끝없이 즐비해 있었다.
난 응접실에 놓여 있던 과도를 집어 든다. 그러다가 문득 칼날 부분을 손으로 꽉 잡아 보았다. 역시나 조금도 다치지 않는다. 이것이 현실이다. 평온한 바깥세상도, 다치지 않는 내 몸도, 선혜의 표정도 다 현실이다. 난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려 애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