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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혜은 씨와의 이야기를 마무리 지을 즈음에는, 이미 저녁 시간이 가까웠다. 타이밍 좋게 아저씨가 다시 나타나, 모두 함께 저녁 식사를 하자고 제안했다. 결국 우리는 다시 아저씨의 차를 타고 근처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점심시간과 크게 다를 것 없이, 그럭저럭 즐겁게 식사를 끝마쳤다.
“이것도 기념인데 술이라도 한 잔 하고 싶지만, 미성년자가 있으니까 오늘은 이쯤 해야겠군.”
아저씨는 선혜와 함께 차로 귀가하는 모양이다. 아저씨는 나에게 태워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보아하니 아저씨의 집하고는 반대 방향인 듯하여 정중히 거절했다. 선혜는 헤어지는 순간 나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아저씨와 함께 차를 타고 가 버렸다.
“그럼 현성 씨, 내일은 쉬고 월요일 봐요.”
“알겠습니다.”
혜은 씨는 큰 길이 아닌 한적한 골목으로 들어가는 듯싶더니만, 내가 잠깐 시선을 딴 데 돌린 사이 이미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순간이동이라더니, 그거 아주 편리하군.
결국 나는 추운 밤거리에 홀로 남겨져, 버스를 기다리며 예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회사 끝났어? 어땠어?
“응…… 그럭저럭.”
―내일은 만나는 거지?
“그래, 아침에 같이 나가자.”
앞으로 내 삶이 어디로 어떻게 변해 갈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내가 느끼고 있는 불안과 두려움을 예주의 목소리가 지워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1막 끝-


막간1 - 혼자만의 방


일찍이 여성 인권 운동가인 버지니아 울프는 이런 말을 남겼다.
“여성이 자신의 권리를 확립하기 위해선, 안정된 수입과 자신만의 공간(혼자만의 방)이 필요하다.”
이제 곧 서른이 되는 이혜은은 그런 의미에선 자신의 권리를 제대로 확립했다고 볼 수 있다. 거기에 더불어 서른으로는 안 보이는 젊고 예쁜 외모와 지적이고 당당한 태도는 그녀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후우…….”
날씨가 조금씩 추워지는 가을 밤. 그녀는 일을 마치고 퇴근하여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와, 먼저 옷을 벗고 샤워를 했다.
그녀가 정확히 언제 집에 돌아온 건지, 그것을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은, 그녀가 아파트 현관이 아니라 침실을 통해 퇴근했기 때문이다.
“…….”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뒤 그녀는 자신의 침실로 다시 되돌아갔다. 여성의 침실이라기엔 조금 삭막한 느낌의 방이다.
하지만 이 조금 삭막한 방이야말로, 그녀가 유일하게 안식을 느끼는 곳이었다. 무엇보다 이곳에는 그녀의 동반자도 함께 살고 있었다.

동반자는 다름 아닌 조그맣고 낡은 곰 인형이었다. 이미 그녀와는 이십 년 지기, 아니 그 이상의 기간을 함께했다. 지금은 비록 옛날처럼 곰 인형을 껴안고 잠들진 않지만, 그래도 언제나 그녀의 머리맡에 놓여 있다. 심지어 외국으로 출장을 나갈 때조차 이 곰 인형만큼은 꼭 들고 다녔다. 그것은 아무한테도 밝히지 않은 그녀만의 또 다른 비밀이었다.
그녀는 문득 침대 위로 몸을 내던지고 고개를 돌려 자신의 동반자를 바라보았다. 30년간 살아오면서 몇 명인가 애인도 사귀었지만, 그녀의 침실까지 들어온 것은 이 곰 인형이 유일하다.
아니, 애초에 그 누구도 이 침실로는 들어온 적이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 누구도 들여보내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곳이 그녀의 [혼자만의 방]이기 때문이다.

* * *

정확히 무슨 이유에서 다툼이 시작됐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흐릿한 기억 속에 맨 처음 떠오르는 장면은, 항상 다투고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아버지가 먼저 잘못했는지, 아니면 어머니가 먼저 잘못했는지, 아직 너무나 어렸던 그녀에게는 아무래도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그녀는 그런 다툼이 너무나 무서웠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투는 동안 자신의 작은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아 버렸다. 그리고 그 작은 방 안에서 그녀의 곁을 지켜 준 것은 언제나 작은 곰 인형이었다. 곰 인형과 함께 방 안에서 버티고 있으면, 어느샌가 다투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방 밖으로는 나가고 싶어 하지 않게 되었다. 그나마 꼭 나가야 할 때에는, 언제나 곰 인형과 함께 다녔다. 유치원에서도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그녀는 항상 곰 인형을 가지고 다녔다. 행여 같은 반 아이들이 그 곰 인형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그녀는 놀림감이 되곤 했다.
그리하여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외출할 때 언제나처럼 곰 인형을 가지고 가려는 그녀를, 보다 못한 아버지와 어머니가 야단을 치게 되었다. 이렇게 그녀는 곰 인형 없이 첫 외출을 했는데, 그것은 결국 최악의 외출이 되고 말았다. 길 한복판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늘 집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투기 시작했던 것이다. 끝내 어린 그녀는 울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다툼을 그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녀의 울음이 다툼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자신의 작은 방과 곰 인형이었다. 그녀는 너무나 간절히, 방으로 돌아가서 곰 인형을 품에 안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한창 다투고 있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문득 그녀의 울음소리가 그쳤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그녀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크게 당황했다.
하지만 그녀는 큰 안도감과 행복감을 느꼈다. 어느샌가 그녀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곰 인형을 품에 안고 있었으므로.

* * *

그날 이후로 그녀는 가끔씩 집 밖에서 행방불명이 되곤 했다. 그리고 당황한 사람들이 찾으러 다니거나 신고를 하려 하면, 그녀는 어느샌가 자신의 방에 돌아와 있었다.
그런 일이 몇 번인가 반복되자, 그녀는 자연히 조금 이상한 아이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책임은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전가됐다.
그것이 결정적인 원인이었을까. 결국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갈라서게 되었다. 그녀의 양육권을 두고 또다시 한바탕 다툼이 일어났는데, 덕분에 그녀는 아버지와 어머니 집을 번갈아 전전하는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그 어느 집에 가든, 그녀는 항상 자신의 방을 마련했다. 그 누구도 들어오지 않았으면 싶은 자신의 방을.
언젠가는 자신의 집을 사서, 진짜로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방을 마련할 것이다. 그것이 그녀가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던 꿈 아닌 꿈이었다.
결국 이후에도 그녀의 행방불명은 멈추지 않았고, 보다 못한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녀에게 정신과 상담을 받게 할 무렵, 그녀는 A대학에서 조교수로 일하고 있던 청년을 만나게 된다.

* * *

밤이라고는 하나 아직 잠들만 한 시간은 아니건만, 그녀는 침대 위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거의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남들에게는 혼자 외롭게 사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어릴 적 꿈을 이룬 것이다. 이 [혼자만의 방]을.
문득 그녀는 눈을 뜨고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언젠가는 이 방에 들여보내도 괜찮을, 그런 사람이 생길까? 하고. 그러나 곧 스스로 자신답지 않은 시시한 생각을 한다 여기고, 다시 눈을 감는다.
사실 그것은 명석한 그녀에게도 도저히 알 수 없는 문제였다.


-막간 1끝-


2막 - 창을 가진 여자, 방패를 가진 남자, 1장


1월 중순, 그것도 자정을 넘긴 늦은 밤의 도쿄 거리는, 결코 얇은 옷차림으로 술을 마시고 걸어도 될 만큼 녹록한 기온이 아니다. 그것을 사에지마 미카는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조그마한 원룸은 나카노 구(區)에 있었다. 생각대로라면 벌써 그곳에서 추위에 얼어붙은 몸을 녹이고 있어야 했으나, 그녀는 새벽이 다 되어 가도 아직 자신의 원룸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간단히 말해서 그녀가 시간도 없고 돈도 없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함께, 얼마 전에 헤어진 남자 친구를 저주하며 술을 마신 것까진 좋았으나, 친구와 헤어지고 나서 시간을 보니 이미 지하철이 끊긴 시간이었다. 거기다 지갑 속에는 택시비도 호텔비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한순간 핸드폰으로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하려 했으나, 곧 미카는 마음을 돌려 ‘까짓것 걸어가 주지’하고 호기롭게 생각했다. 그녀가 그렇게 생각한 것은, 마신 알코올의 양이 꽤 된다는 것에도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의 호기로운 생각과는 달리, 나카노 구는 멀었다. 이미 그녀는 추위에 떨며 30분이 넘도록 걷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얼마 전에 남자 친구하고 헤어진 이후부터 어째서인지 미카는 추운 날씨임에도 몸매가 드러나는 옷차림을 하고 다녔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이렇게 그녀 자신의 뒤통수를 때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게 다 그 자식 때문이야…….”
귀가 떨어져나갈 것 같은 추위 속에서도, 얼마 전에 헤어진 남자 친구를 저주하는 한마디는 잊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그건 참으로 그녀다운 행동이긴 하다.
그러나 추위 탓에 노숙자조차도 보이지 않는 골목에서, 누군가가 자신에게 접근하는 것을 느끼자 미카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분명히 누군가가 그녀의 뒤로 접근하고 있었다. 희미한 발자국 소리가 얼핏 들렸을 뿐이었지만, 분명히 누군가가 있었다.
‘이 추운 날씨에…… 치한은 아니겠지…… 설마…….’
미카는 뒤돌아보는 대신, 걸음을 빨리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그녀의 걸음 속도와 비례하여, 등 뒤의 누군가도 확실히 걸음이 빨라지는 것 같았다.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