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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미카는 문득 하이힐을 신은 발을 멈췄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뒤를 돌아보았다. 혹시라도 치한이나 강도는 아니길 바라면서.
“……!”
그러나 그녀의 기대는 무참히 배반당했다. 예의 [등 뒤의 누군가]는,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를 착용한 채 검은 점퍼를 입고 있었다. 누가 봐도 치한 혹은 강도로 생각될 만한 차림새였다.
미카가 자신의 존재를 확실하게 인식하자, [치한 혹은 강도]는 더 이상 시간을 끄는 건 좋지 않다고 판단했다. 결국 그는 약 10미터 정도의 거리를 단숨에 좁혀, 미카에게 곧장 달려들었다.
‘스, 스턴 건…… 빨리……!!’
사실 미카가 뒤를 돌아다봤을 때, 그녀의 손은 이미 핸드백 속의 스턴 건을 찾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친구 중 한 명이 치한을 만난 이후로, 그녀가 친구들과 함께 공동 구매한 물건이었다. 그리고 달려드는 치한 혹은 강도를 보며, 그녀의 손은 더욱 더 다급히 스턴 건을 찾았다. 그렇지만 치한 혹은 강도가 눈앞에까지 다가왔을 때야 그녀는 깨달았다. 스턴 건은 원룸의 책상 위에 고이 모셔져 있다는 사실을.
“꺄아아아악!!”
결국 미카에게는 소리를 지르며 두 손을 올려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어쩌면 아침 신문에 피해자로서 이름이 실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결국 그녀는 아침 신문에 피해자로서 이름이 실리지 않았다. 피해자로서 이름이 실린 것은, 예의 치한 혹은 강도였다.

* * *

내가 SP에서 일하게 된 것도 3개월째가 되었다.
그 동안 나는, 사무 일에 익숙해지기 시작했으며, 영어 실력이 조금 늘었고, 태권도의 기초를 배웠고, 선혜를 가르치는 한편, 혜은 씨에게 핀잔을 듣기도 하고 아저씨에게서는 칭찬을 들었다.
“혜은 양도 이제 서른이 되었군. 슬슬 좋은 사람을 찾아야 할 텐데 말이지, 하하하하하.”
“지부장님.”
“응?”
“자꾸 나이 언급하시면 저 진짜로 화냅니다.”
그렇게 SP 한국 회원들끼리 조촐한 신년회를 가졌던 게 엊그제 같은데, 1월도 이미 중순인 것이다.
“현성 씨하고 그 귀여운 애인분하고, 올해로 사귄지 몇 년째가 된다고 했죠?”
“4년째가 됩니다.”
“흐응…… 대단하네요. 그런데도 아직 깨소금이 쏟아지네.”
정말로 깨소금이 쏟아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예주와 내가 사귄 지도 벌써 4년이나 되었다.
“아무튼 올해는 현성 군도 있으니까, 작년보다는 좀 더 재밌는 한 해가 될 거야. 선혜도 요즘 들어 공부에 재미를 붙인 거 같고. 역시 젊은 청년이 가르쳐 주니까…….”
“…….”
“아야야야!”
아저씨의 시덥지 않은 농담은 선혜가 아저씨의 옆구리를 말없이 꼬집음으로써 중단되었다. 어쨌든 신년회 자리에서, 선혜 또한 그리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표정으로는 여전히 잘 알 수 없었지만.

* * *

나에게 주어진 일 중 하나는 선혜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것이다. 선혜는 SP, [엔젤 페이스] 덕분에 일반적인 학교에 다니는 것이 대단히 곤란하므로, 어렸을 때부터 아저씨와 혜은 씨가 공부를 가르쳤었다. 그러던 것이 내가 SP 회원이 된 이후에는, 내가 일주일에 두 번씩 선혜의 공부를 봐 주게 되었다. 다행히도 선혜는 공부를 꽤 괜찮게 하는 편이라, 그리 힘든 일은 아니었다.
선혜는 내가 가르치는 동안 나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써 가며 공손하게 대했다. 또한 다른 사람들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내게도 거의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사실, 나에게는 SP [이지스]가 있었으므로, 선혜는 나에게만큼은 표정을 드러내도 괜찮다. 충격적인 첫 만남 때 그랬던 것처럼. 그렇지만 그 첫 만남 이후로는, 선혜는 나에게도 그다지 표정을 보여 주지 않았다. 뭐 그렇다고 억지로 웃거나 울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므로, 난 그냥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 * *

“품세에 힘이 안 들어갔잖아요. 좀 더 박력 있게 해 보세요.”
“예…….”
사무실에서 일할 때와는 별개로, 태권도 도장에서도 난 혜은 씨에게 핀잔을 자주 듣는다. 알고 보니 혜은 씨는 올해 무려 서른 살, 나보다는 아홉 살이나 연상이다.
분명 어른이라는 느낌이 팍팍 풍기는 혜은 씨이긴 했으나, 아홉 살이나 연상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원래부터도 그랬지만, 나이를 듣고 나서는 더더욱 혜은 씨에게 거역할 수 없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혜은 누나]라고 부르거나 [올해로 서른이 되셨네요] 같은 말을 했다가는 난리가 나겠지만.

“교수님은 오늘도 늦게까지 일하십니까?”
“아, 먼저 퇴근하게. 난 아무래도 좀 더 있어야 할 것 같군. 선혜는 혜은 양이 바래다주기로 했어.”
아저씨는 (본인의 말에 따르면 ‘성격에 맞지 않게’) 자주 야근을 한다. 혜은 씨에게 듣자 하니, 교수직의 업무도 함께하느라 그런 모양이었다. 하긴, 생각해 보면 A대학의 교수직을 유지하려면 상당한 노력이 필요할 듯싶었다. 그와 동시에 지부장 일도 겸하고 있으니, 어떤 의미에선 정말 대단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솔직히 평소에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아저씨는 가끔 SP 한국 회원들끼리 술자리를 가졌으면 좋겠다는 식의 발언을 했는데, 선혜는 미성년자고 혜은 씨는 술을 싫어하다 보니, 결국 나와 일대일 대작을 하는 일이 잦았다.
“현성 군, 선혜에게 잘해 주게. 그 아이는 참 좋은 아이야.”
술이 들어간 아저씨의 레퍼토리는 언제나 선혜 걱정이었다. 그렇지만 아저씨는 자기 자신에 대한 걱정, 이를테면 결혼할 생각 같은 건 전혀 없는 모양이다. 도대체 어째서일까…? 궁금하긴 하지만, 내가 나서서 이러쿵저러쿵할 문제는 아닐 듯싶었다.

* * *

“일 하는 건 좋은데, 만날 시간이 줄은 건 좀 그렇다.”
“그래도 크리스마스에는 계속 같이 있었잖아.”
깨소금이 쏟아지는지 각설탕이 쏟아지는지, 그거야 어쨌든 예주와 나는 사귄 지 4년째인 지금에도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다.
학교는 방학을 했지만 나는 SP 사무실에 나가느라 그다지 놀 시간이 없었다. 예주는 그것이 불만인 듯싶었는데, 결국 자신도 근처 도서관에서 알바를 시작했다. 그리고 난 저번에 예주가 오해했던 것과 같은 사태를 피하기 위해서, 주말을 이용해 아예 혜은 씨를 정식으로 예주한테 소개했다.
“난 근데 그 사람 좀 그래.”
“왜?”
“그냥.”
정식으로 소개받은 뒤에도, 예주는 혜은 씨를 경계하는 눈치였다. 그래서 난 아주 현명하게도, 선혜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현성이 너 또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아니지?”
“……그럴 리가 있냐.”
그리고 나는 이제 예주에게 내 비밀, 즉 SP에 대해 말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는다.
비록 예주에게 뭔가를 감춘다는 것은 그다지 기분 좋은 일이 아니지만, 그 예주를 위해서라도 비밀로 묻어 두어야 한다고, 나는 나 자신을 납득시켰다.

* * *

부모님은 내가 SP에 취업하는 것에 대해 그다지 왈가왈부하지 않으셨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버지는 내심 탐탁지 않게 여기시는 것 같았고 어머니는 내심 기뻐하시는 것 같았지만, 두 분 다 나의 선택에 대해 잔소리를 늘어놓으실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공부할 수 있을 때 많이 공부해 두는 게 좋은데 말이다.”
아버지가 그렇게 한마디 하신 것이 전부였다. 아버지의 말씀에는 어느 정도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정을 돌이킬 수도 없는 노릇이다.

* * *

어쨌든 1월 중순까지, 나는 별일 없이 살고 있었다. SP라는 아주 특이한 모임에 가입했다는 사실조차도 그다지 느껴지지 않을 만큼, 그것은 그저 평범한 일상의 연속이었다. 퇴근 시간이 되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는 혜은 씨, 가끔 남의 커피 잔을 무겁게 만들어서 장난치는 아저씨, 예쁘기는 하지만 너무나 무표정한 선혜는 분명 특이한 사람들이었지만, 그것도 익숙해지면 아무렇지 않다.
결국 SP라는 모임은, 평범한 일상을 살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평범한 일상을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가장 큰 존재 의의일 것이다. 만난 적도 없고 얼굴도 모르지만, [선지자]라는 분의 생각이 나에게는 그렇게 해석되었다.

그렇게 계속되던 나의 평범한 일상은, 마침내 한 통의 전화로 인해 깨지게 되었다. 그 전화는 퇴근 시간이 거의 다 되어 가던 저녁 무렵 우리에게 걸려왔는데, 마침 아저씨는 대학에 가 있었고, 혜은 씨는 잠깐 자리를 비운 터라 결국 그 전화는 내가 받게 되었다.
“예, SP 국제 경비 사무실입니다.”
―Hello?
영어로 말하는 이 목소리는 이미 나에겐 익숙한 사람의 목소리였다. 미국 뉴욕의 SP 총본부에서 각국 지부와의 연락을 담당하고 있는, 재클린 브래포드라는 여성의 목소리다.
“아, 미즈 브래포드?”
―안녕하세요, 미스터 윤. 박 교수님이 안 받으시기에 이쪽으로 전화드렸어요.
SP 회원들끼리는, 여성에 대한 경칭으로 미즈(Ms:기혼 혹은 미혼에 관계없이 여성에게 쓰는 경칭)를 주로 쓴다. 아마 최대한 성차별적인 요소를 줄이느라 그런 듯싶다.
“그렇군요. 무슨 급한 용무신가 보죠?”
―예, 무척 급한 일인데…….
“메시지를 남겨 주시면 제가 교수님에게 연락해 보겠습니다.”
―아…… 그러면 이렇게 전해 주시겠어요? 사건이 일어났으니 한시라도 빨리 일본 지부에 연락해 달라고.
“알겠습니다.”
내가 전화를 받고 있는 동안 혜은 씨는 자리에 돌아와 있었다. 나는 재클린 씨와의 전화를 끝내고, 일단 혜은 씨에게 그 메시지를 전달했다.
“……사건이란 말이죠.”
혜은 씨는 조금 표정이 굳어지더니, 일단 아저씨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거는 듯했다. 하지만 아저씨가 좀처럼 받지 않는 모양이다.
“현성 씨, SP 일본 지부장님 전화번호 좀 찾아 주시겠어요?”
혜은 씨는 전화기를 붙잡은 채 나에게 그렇게 부탁했다. 나는 재빨리 컴퓨터 안에 있는 SP 각국 지부 전화번호부를 열었다.
[SP 일본 지부장 ― 료코 아마노]
나는 금새 일본 지부장의 전화번호를 찾아 혜은 씨에게 적어 주었다. 혜은 씨는 일단 아저씨에게 건 전화를 끊고, 그 전화번호로 전화를 거는 듯했다.
“미즈 아마노? 안녕하세요. 한국의 혜은이에요. 예, 지부장님은…….”
혜은 씨는 나에게서 조금 떨어져 목소리를 낮춰 통화를 했다. 뭔가 중요한 이야기임에는 틀림없나 보다. 무슨 이야기인지 난 알 수 없었지만…….
그렇지만 통화 중간에 내 이름이 언급되었고, 그때 순간적으로 혜은 씨가 나를 쳐다봤다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