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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아저씨가 혜은 씨의 연락을 받고 급히 사무실로 돌아온 것은 저녁 시간이 다 되어서였다.
“현성 군, 아무래도 오늘 저녁 식사는 사무실에서 시켜 먹어야겠네.”
“예, 그럼 다들 뭘로…….”
나는 아저씨와 혜은 씨, 그리고 선혜에게서 주문을 받았다.
“아니, 선혜는 혼자 먼저 버스 타고 집에 가는 게 어떻겠니? 밥 먹고 뭐하고 그러면 늦어질 텐데.”
“……나도 같이 있을래요.”
“그래, 그럼 현성 군하고 잠깐 같이 있으렴. 그리고 혜은 양은 잠시 나랑 이야기 좀 하지.”
아저씨는 혜은 씨와 함께 3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난 음식점에 전화를 걸어 저녁 식사를 주문 한 후, 선혜와 함께 얌전히 아저씨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아저씨가 혜은 씨와 함께 다시 2층으로 내려온 것은, 30분 정도 지나 저녁 식사가 배달된 직후였다. 우리는 2층 사무실 가운데 놓인 테이블에 둘러 앉아 말없이 식사를 했다.
우리의 조용한 식사가 끝난 직후, 이번에는 내가 아저씨와 함께 3층으로 올라갔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현성 군, 자네…… 여권은 만들어 뒀었지?”
“예? 아…… 예.”
“아무래도 현성 군이 일본에 가 줘야겠어.”
“……예?”
아저씨는 뭔가 골치가 아픈 듯 얼굴을 찡그렸다.
“방금 일본 지부하고 연락을 했는데, 일본에서 SP에 의한 상해 사건이 일어난 모양이야.”
“…….”
“피해자가 중태라고 하니까, 대단히 위험한 SP를 발현한 사람이 있는 게 틀림없어.”
“……그럼.”
“아아, 총본부 및 일본 지부에서 자네의 [이지스]가 필요하다고 요청을 해 온 것일세.”
“…….”
“자네는 아직 신입이라 혼자 움직일 수 없고, 외국 회원들하고 면식도 없으니 혜은 양하고 같이 움직이도록 하게.”
물론 SP에서 활동하다 보면 외국으로 출장 가는 일도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갑자기 결정될 줄은 몰랐다.
“지금 즉시 혜은 양하고 함께 공항으로 출발하게나. 자네의 부모님에게는, 오늘 급히 출장을 가게 됐다고 전화해 두고.”
“……지금 당장 말입니까?”
“사람 목숨과 SP 보안이 걸린 문제야. 비행기 티켓은 취소된 좌석을 맡아 뒀으니까, 자네랑 혜은 양은 그냥 여권만 챙겨 가도 문제없어.”
“…….”
“개인적으로는 자네에게 이런 식으로 강요하기 싫지만, 알다시피 우리 SP 회원들은 총본부의 요청에 전면 협력할 의무가 있다네, 물론 자네에게도 항의할 권리가 있긴 한데…… 중요하고 급한 일인 모양이니 부디 참고 움직여 주게. 부탁하네.”
“……알겠습니다.”
결국 나는 5분도 지나지 않아 혜은 씨가 운전하는 아저씨의 차를 타고 인천 공항으로 향했다.
차 안에서, 나는 부모님은 물론이고 예주에게도 변명을 늘어놓느라 진땀을 뺐다.
“미안해, 대신 돌아오면 월차라도 내 볼게.”
―……알았어.
다행히 이륙 시간에는 여유 있게 맞춰서 도착했다. 혜은 씨와 나는 일단 비행기 티켓을 다시 확인했다.
“……아, 그러고 보니 저희들 갈아입을 옷 같은 건 어떻게 합니까?”
“현성 씨는 좀 그렇겠네요. 하지만 어차피 그리 오래 머물지는 않을 거예요. 여차하면 거기서 사서 입어도 되고, 아니면 일본 지부 회원들에게 빌려 입어도 문제없어요.”
평소 깐깐한데다 옷차림에 신경을 쓰는 혜은 씨의 발언치고는 꽤나 터프하다. 설마 아무리 그래도 옷값까지 출장비로 내줄 리는 없는데 말이다.
“혹시 무슨 사건인지 자세히 아십니까? 상해 사건이라고 들었는데…….”
“이야기를 들어 보니 긴급한 일인 건 확실해요. 자세한 내용은 일본에 도착하면 거기 회원이 설명해 주겠죠.”
자세한 정황도 모른 채 이렇게 움직여야 하는 것이 아무래도 좀 불안했다. 거기다 난 평소 [이지스]를 믿고 조금 대담하게 행동하는 편이긴 하지만, 비행기를 타는 것은 처음이 아닌가. 심지어 바다 건너 나가는 것조차 처음이다. 그런 사실들을 떠올리자 점점 더 불안해졌지만 혜은 씨 앞에서 그걸 티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나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일본행 비행기를 탈 수밖에 없었다. 늦은 시간에다 피곤했지만 비행기 안에선 잠이 오지 않았다.
* * *
“아, 여기예요. 혜은, 오랜만이네요.”
“정말 오랜만에 뵙네요, 미즈 아마노.”
“이쪽이 바로 그……?”
“예, 미스터 윤이에요.”
2시간의 비행 끝에 나와 혜은 씨는 도쿄 하네다 공항에 도착했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를 맞아 준 것은, 아저씨 세대 정도로 보이는 여성이었다.
“현성 윤이라고 합니다.”
“료코 아마노예요. SP 일본 지부장이죠.”
나는 료코 씨가 건넨 명함을 받아 들었다. 거기에는 [SP 일본 지부장, 료코 아마노]라고 적혀 있었다.
료코 씨는 마른 체구에, 그 세대 여성치고는 키가 큰 편이었다. 그녀의 차분하고 친절한 태도 덕분에 난 불안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럼 혜은, 미스터 윤, 이쪽으로.”
우리는 료코 씨의 차를 타고 공항을 빠져나가 시내를 달렸다. 그렇게 잠시 도쿄의 밤거리를 달리는 도중, 료코 씨는 뒷좌석에 앉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미스터 윤은 요즘 SP 회원들 사이에서 꽤 유명해요. 모르고 있었죠?”
“……그렇습니까?”
“그럼요. 알게 모르게 [불사신(Invincible Boy)]이라는 별명까지 붙었어요.”
“…….”
내가 별명까지 붙을 만큼 유명했단 말인가. 아니, 그보다 나도 밥 안 먹으면 죽는 건 마찬가진데 불사신이라니 조금 이상하다.
“새로운 회원이 들어오는 게 그리 자주 있는 일이 아닌데다, 미스터 윤의 SP가 워낙 대단해서 그래요.”
“그렇게 대단한 건가요?”
“물론이죠. 우리 SP 회원들이라 해도, 외부의 위협에 대해선 대개 보통 사람들하고 똑같아요. 하지만 미스터 윤은 다르니까요.”
“…….”
“이번 일도 그래서 미스터 윤에게 협조를 요청하게 됐네요.”
굳이 날 한국에서 부를 정도라면, 도대체 누가 어떤 SP를 발현한 것일까. 애써 떨쳐 버리려고 했던 불안감이 다시 밀려왔다.
비록 나는 [이지스] 덕분에 다치지 않는 몸이지만, SP를 써서 남을 해치는 사람은 아직 겪어 본 적이 없으니…… 설마 야쿠자나 뭐 그런 건 아니겠지.
료코 씨의 차가 도착한 곳은, 도쿄의 도심에 세워진 고풍스런 카페였다. 규모는 작은 편이지만 고급스런 느낌의 카페다.
“아, 오셨어요. 오랜만이네요, 혜은.”
“오랜만이에요, 마야.”
혼자서 카운터를 보고 있던 카페 여직원이 혜은 씨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넨다. 설마 이 사람도 SP 회원일까……? 잘 알 수 없었다.
료코 씨는 예의 여직원과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는 곧 나와 혜은 씨를 카페 2층으로 안내했다. 순간 나는 왜 이런 카페로 들어왔는지 어리둥절했다. 사무실로 가는 거 아니었나?
“아…… 우리 사무실은 이 카페의 2층에 있어요. 정확히 말하자면, 1층은 우리가 운영하는 카페고 2층이 일본 지부 사무실이죠.”
이렇게 내 의문은 금방 풀리고 말았다. 아무튼 그렇다면, 아까의 여직원도 SP 회원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2층은 사무실이라기보다는 응접실처럼 꾸며진 곳이었다. 방 한쪽의 텔레비전과 소파가 놓인 곳에는,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어린 남자아이가 앉아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지로, 마코토 군에게서 연락은 없었니?”
“응, 없었어요.”
료코 씨가 예의 남자아이와 일본어로 대화를 나눴다. 난 영어는 그렇다 치고 일본어는 전혀 못하기에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료코 씨는 자신의 핸드폰을 들고 잠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남자아이는 게임을 잠시 멈추더니, 일어서서 우리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안녕, 지로.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남자아이는 아무래도 아직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걸 알고 있었는지, 혜은 씨는 다음 순간 아이에게 일본어로 말을 걸었다.
“영어 공부는 많이 했어? 누나가 공부 열심히 하라고 했을 텐데.”
“아직 많이 하진 못했어요. 그래도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는데요.”
혜은 씨는 일본어도 할 줄 알았나 보다. 나는 서로 무슨 말을 나누는지 알 수 없어 그냥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런 나를 그 남자아이(아마도 이름이 지로인 듯싶었다.)는 잠깐 쏘아봤다.
“자, 여기 앉아요. 미스터 윤.”
어느샌가 료코 씨는 따뜻한 차를 가져와 방 한가운데 테이블에 올려놓더니, 예의 남자아이를 안쪽 방으로 들여보냈다.
나와 혜은 씨, 그리고 료코 씨는 테이블에 앉아 추웠던 몸을 차로 녹이면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늦은 시간에다 갑작스럽게 오시느라 두 분 다 피곤하실 텐데…… 아무래도 급한 일이다보니 이야기를 진행해야겠네요.”
“괜찮습니다. 저희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고마워요, 혜은. 자…… 그럼 먼저 이것을 좀 보세요.”
료코 씨가 우리에게 건넨 것은, 일본어로 된 어제 날짜 신문이었다. 난 무슨 내용인지 잘 알 수 없었지만, 신문에 실린 사진으로 보건데 심상치 않은 사건 같았다.
“어제 새벽에 도쿄에서 살인미수 사건이 있었어요.”
“살인미수인가요?”
“예, 피해자는 날카로운 흉기로 어깨를 찔렸어요. 대단히 위험했는데, 간신히 목숨만 건진 모양이에요. 경찰 쪽에서는 범인이 누군지 전혀 짐작도 못하고 있어요.”
일본어를 모르는 날 위해서, 료코 씨가 신문의 내용을 영어로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총본부에서 레이디 엘자가 이것이 SP로 인한 사건임을 통보해 줬죠.”
“레이디 엘자……?”
“아, 미스터 윤은 아직 모르시군요? 총본부에서도 가장 오랫동안 활동한 선배 회원 중 한명인데, SP를 가진 사람들을 찾아낼 수 있는 분이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