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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그렇다면 그 [레이디 엘자]라는 사람이 바로 [이 세상의 모든 정보를 알아낼 수 있는] 그 회원이라는 이야기다. 어째서인지 아저씨도 혜은 씨도 나한테는 정확한 이름을 알려 주지 않았지만.
“레이디 엘자의 말에 따르면, 이분이 바로 SP를 발현한 당사자예요.”
그렇게 말하며 료코 씨는 우리에게, 컴퓨터로 출력한 사진 한 장을 건넸다. 사진에는 머리를 샛노랗게 염색한 짙은 화장의 여성이 찍혀 있었다…… 뭐야, 야쿠자가 아니잖아.
“이 여성의 이름은 미카 사에지마. 도쿄 나카노 구에 살고 있는 대학생으로, 1991년생에 독신이죠.”
나랑은 동갑이라는 이야기다. 아무튼 화장은 진하지만 인상은 평범한데, 사람을 찌르고 다녔다니 무서운 여자로군.
“아마 이 미즈 사에지마가 악의를 가지고 사람을 찌른 건 아닐 거예요.”
“어떻게 그걸 알 수 있습니까?”
“피해자는 혼자 다니는 여성을 대상으로 강도짓을 한 전과가 있어요. 사건의 정황으로 보건데, 피해자가 미즈 사에지마를 노렸다가 오히려 당한 거겠죠.”
“그것에 대해 레이디 엘자는 뭐라고 말씀하셨죠?”
그렇게 물은 것은 혜은 씨였다.
“레이디 엘자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셨어요. 미즈 사에지마는 우발적인 사태에 몰려 SP를 발현한 듯싶어요.”
“정확히 무슨 SP인지 알 수 있었나요?”
“레이디 엘자의 표현으론, 갑자기 허공에서 날카로운 흉기를 꺼냈다는 것 같아요. 그리고 경찰 조사로는, 피해자의 어깨를 찌른 것은 날카롭고 긴…… 이를테면 창 같은 물건이에요.”
갑자기 흉기를 꺼내는 여자인가…… 만약 이 여자를 버린 남자 친구라도 있다면, 그 남자는 각오를 해 둬야 할 것이다.
“현재 이 여성은 어디 있나요?”
“나카노 구에 있는 자신의 원룸에서 나오지 않고 있어요. 지금 마코토가 그 원룸을 감시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대단히 패닉 상태인 듯싶어요.”
“그거 골치 아프게 됐네요.”
“함부로 접근하는 건 위험하다고, 총본부에서도 그렇게 판단했어요. 특히나…… 흉기를 꺼내는 것이 전부인지, 아니면 다른 것도 할 수 있는 SP인지, 그것조차 아직은 미지수이니까요.”
“…….”
“때문에 이번 일은 자칫 잘못하면 부상자가 생길 가능성이 높아요. 결국 의견을 모은 결과…… 소문의 불사신, 미스터 윤을 부르기로 했죠.”
혜은 씨와 료코 씨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왠지 기분이 복잡해졌다. 위험한데다 미지수의 능력을 가진, 패닉 상태의 여자를 내가 상대해야 한다는 말이 아닌가.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난 SP를 인정받아 일본에까지 스카우트된 셈이다. 두려워해야 하는 건지 기뻐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럼 결국 미즈 사에지마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인가요?”
“우리 SP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만, 일단은 대화부터 해 봐야겠죠. 물론 대화는 제가 대표로 해야 하겠지만, 만약 대화로 끝나지 않으면…….”
“…….”
“그때는 유감스럽지만 미즈 사에지마의 신변을 잠시 구속해야 합니다. 물론 미즈 사에지마를 다치게 하면 안 되지만요.”
쉽지 않은 이야기로 들렸다. 내가 안 다치는 거야 문제없지만, 패닉에 빠진 여자가 날뛰면 다른 사람들이나 그 여자 스스로 다칠 가능성은 충분하다.
“미즈 그로닝은 이미 부르신 모양이죠?”
“물론이에요. 그분의 SP가 필요할 가능성이 높으니까. 이미 비행기를 타셨고 내일 아침쯤에 도착하실 겁니다.”
“미즈 그로닝……?”
“아, 미스터 윤은 그분도 아직 모르시군요. 헬렌 그로닝이라는 분인데, 다른 사람의 기억을 조작할 수 있는 분이랍니다.”
과연, 아저씨가 나한테 위협했던 [내 이지스로는 막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군. 그나저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내가 너무 신입 티를 내는 것 같았다.
“미스터 윤은 아직 신입이다 보니, 아직 총본부의 회원들하고도 면식이 없어요.”
“하긴, 그럴 만도 하군요. 그럼 이번 기회에 면식을 넓혀 두는 것도 좋겠네요.”
“예, 알겠습니다.”
안타깝게도 난 아직 다른 회원들에게 건네 줄 명함조차 없지만 말이다.
“그럼 어쨌든 저희들은 미즈 사에지마의 신변을 구속할 방법을 의논해야겠군요.”
“그것에 대해서는…….”
혜은 씨의 말에 료코 씨가 대답하려는 순간, 료코 씨의 핸드폰이 울렸다. 료코 씨는 양해를 구한 뒤 전화를 받고 일본어로 몇 마디 대화를 나누더니, 곧 우리에게 살며시 웃으며 이야기했다.
“마코토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미즈 사에지마가 방금 자신의 원룸에서 술을 마시고 잠들었다고 하네요.”
“그렇다면……?”
“미즈 사에지마가 정신을 차려야 대화할 수 있을 테니까, 저희들도 여유가 좀 생긴 셈이죠. 미스터 윤과 혜은에게는 다행이네요. 오늘은 좀 쉬셔도 될 테니.”
그 말을 듣곤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작전 회의고 뭐고, 솔직히 적지 않게 피곤하던 참이었다. 난생 처음으로 외국에 나온 것도 그렇지만, 일이 쉽지 않을 것 같다는 불안감이 나를 더더욱 피곤하게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급하게 오시느라 아무런 준비도 못하셨을 텐데…….”
“전 괜찮아요. 하지만 미스터 윤은 갈아입을 옷 같은 게 필요할 것 같네요.”
“그럼 일단 숙소를 정하고 나서, 마코토에게 미스터 윤을 도와주라고 일러 두겠어요.”
나와 혜은 씨는 료코 씨의 안내에 따라, SP 사무실 근처 호텔에 방을 잡았다. 물론 나와 혜은 씨는 각각 다른 방이었다.
방은 그렇게 크진 않지만, 혼자 묵기에는 조금 사치스러워 보였다. 호텔 창문에서 도쿄의 야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예주 생각이 났다.
“조금 있으면 마코토가 와서 미스터 윤을 도와줄 거예요. 마코토 시나가와.”
료코 씨는 그렇게 말하고는 정중히 인사를 하고 떠났다. 나에게는 어머니뻘에 가까운 분이 너무나 정중히 행동하자 왠지 미안해졌다.
난 호텔 침대에 잠시 누워 있다가, 다시 일어나 부모님과 예주에게 전화를 시도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내 핸드폰은 로밍이 지원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핸드폰을 들고 깨작대는 사이에, 누군가가 내 방문의 벨을 눌렀다. 예의 마코토라는 사람인 듯싶었다.
“미스터 시나가와입니까?”
“예, 마코토 시나가와입니다. 미스터 윤.”
문을 열자, 격투가 같은 인상의 덩치가 무척 좋은 남자가 서 있었다. 얼핏 무섭게 보일 수도 있는 사람이었지만 표정만은 무척 선량했다.
“이야기는 지부장님에게서 들었습니다. 미스터 윤을 저희 쪽에서 너무 급하게 불러서, 이것저것 필요하시다구요.”
“아…… 그렇습니다만…….”
“그럼, 저랑 같이 나가셔서 이것저것 사 오도록 하죠.”
“그게…….”
“하하하, 돈 문제라면 걱정 마세요. 지부장님이 모처럼 일부러 부른 손님인데 불편함이 없게 대접하라고 하셨거든요.”
“그렇지만 그건…….”
“정 껄끄러우시면, 첫 출장의 기념품이라고 생각해 두세요.”
“……감사합니다.”
……옷값은 출장비가 아니라 현지 조달이었단 말인가.
그 후 나는 이 사람 좋은 마코토 씨와 함께, 도쿄의 밤거리를 돌아다녔다. 피곤한 건 여전했으나, 왠지 이렇게 다니니 관광하러 온 것 같아 기분이 좀 나아졌다.
“그러고 보니 쇼핑을 할 거였으면 차라리 저보다도 마야를 부를 걸 그랬군요.”
“마야라면…… 그 카페의 여성 말인가요?”
“예, 마야 하나다라고 하는데, 저처럼 일본 SP 회원입니다. 그 카페 자체가 원래 SP 회원들끼리 운영하는 거니까요.”
나는 아까 본 평범하지만 깔끔한 인상의 카페 여직원을 떠올렸다. 그리고 문득 그 마야 씨와 마코토 씨의 관계가 궁금해졌다. 나이는 얼추 비슷해 보이는데……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지금 만약 내 옆에 있는 게 마코토 씨가 아니라 마야 씨라면 좀 곤란할 듯싶었다. 갈아입을 속옷을 다른 여자가 사 주는 건 왠지 예주에게도 미안하고.
“미스터 윤은 요즘 SP 회원들 사이에서 화제입니다.”
“아…….”
“원래 우리 SP 회원들끼리는, 서로의 SP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떠들지는 않지만…… 미스터 윤은 뭐니 뭐니 해도 불사신이니까요. 지로도 아주 좋아하던데요.”
지로라면 아마 아까 그 사무실에서 있던 남자아이를 말하는 것이리라. 그나저나 나도 모르는 새에 유명해졌다는 건 역시 쑥스러웠다.
“아…… 이 정도면 충분한데…….”
“괜찮습니까? 좀 더 사셔도 되는데…….”
“아뇨, 이거 너무 신세를 지는 거 같아서…….”
이미 내 손에는, 마코토 씨가 사 준 윗옷 2벌, 바지 2벌, 양말 및 속옷 여러 벌, 점퍼에다가 반코트까지 들려 있었다. 되도록 비싼 건 피했지만, 그래도 너무 신세를 진 것 같았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거듭 마코토 씨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마코토 씨는 나를 호텔까지 데려다 준 후, 정중한 태도로 인사를 하고 떠났다.
* * *
관광하는 기분에서 벗어나, 대충 샤워를 끝마치고 호텔 침대에 누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다시 앞으로의 일이 불안해졌다.
아까 들은 이야기를 대충 요약하자면, 갑자기 흉기를 꺼내는 위험한 여자, 그것도 패닉에 빠진 여자를 내가 막아야 한다. 물론 [이지스]를 가지고 있는 내가 다칠 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혹시라도 그 여자가 스스로 다치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이 휘말릴지도 모르지 않은가.
나는 내일에 대한 불안함에 시달리다가, 새벽 무렵에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